저마다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를 고대하면서 금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꿈을 꾸며 잠드는 시기가 다시 돌아왔다. 잊혀진 칸 수상자의 간략한 연대기를 보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즉, 한순간의 영예인 종려상은 후대 역사의 문을 여는 것도 아니고, 수상을 하지 못한 것도 망각을 강요하진 않는다.
1956년 루이 말 감독과 자크 쿠스토 선장은 그들의 해양기록영화 <침묵의 세계>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사티야지트 레이 감독은 그의 걸작 <길의 노래>로 ‘인간의 삶의 기록상’을 거머쥐었다. 반면 히치콕 감독의 <나는 비밀을 안다>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다. 칸영화제가 축제와 파티로 알려졌지만, 단순한 영화적 행복이나 두려움, 웃음은 그곳에서 종종 무시됐다. 1952년 <파리의 미국인>은 빈손으로 돌아갔고, 일년 뒤에는 <윌로씨의 휴가>가, 1957년에는 <화니 페이스>가 똑같은 신세였다.
심사위원단은 우선 한 시대를 반영한다. 정치적 투쟁의 시대였던 1975년에는 심사위원들이 디노 리시 감독의 <여인의 향기>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여행자>나 호금전 감독의 <협녀>보다는 알제리 감독 모하메드 라크다르 하니나의 <불타는 시대의 연대기>를 선호했다. 2004년 마이클 무어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도 이런 유의 이데올로기적 맹목성 덕이 아니었는지 자문해볼 만하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종려상들도 가끔은 심사위원단이 다른 상들에 관여할 때 판단을 흐리게도 했다. 1991년 <바톤 핑크>는 칸을 얼마나 열광시켰는지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차지했다.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베르니카의 이중생활>은 여우주연상에 만족해야 했다. 1967년, 매혹적인 작품 <욕망>(Blow Up)은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무셰트>를 압도했다. 게다가 브레송 감독은 여러 차례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황금종려상을 한번도 받지 못했다. 1962년 그는 <잔 다르크의 재판>으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태양은 외로워>(원제는 <일식>)와 공동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황금종려상은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워싱턴 정가>나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추방당한 천사>,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5시에서 7시까지의 끌레오>를 제치고 얀젤모 두아르테 감독의 <약속>에게 돌아갔다.
황금종려상은 대체로 혁신을 두려워한다. 종려상은 프랑스 누벨바그영화를 한번도 호의적으로 대한 적이 없다. 1959년에는 마르셀 카뮈 감독의 유쾌한 작품 <흑인 오르페>을 떠받들었는데, 당시 <400번의 구타>는 감독상을 받았고 알랭 레네 감독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무시되었다. 1986년, 관학적인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이 짐 자무시 감독의 <다운 바이 로>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되었다. 2001년에는 난니 모레티 감독의 <아들의 방>이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코언 형제의 <거기 없던 남자>와 감독상을 공동수상)를 눌렀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런 선택들 이외에, 몇몇 이해할 수 없는 실수를 보자. 1952년, 심사위원들은 오슨 웰스 감독의 <오델로>와 레나토 카스텔라니 감독의 <작은 희망>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황금종려상 공동수상!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플레이어>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하워즈 엔드>보다 빌리 어거스트 감독의 무기력한 작품 <최선의 의도>를 선호했던 1992년의 수상자 명단이 자주 거론되곤 한다. 하지만 1955년, 델버트 만 감독의 <마티>가 엘리야 카잔 감독의 <에덴의 동쪽>과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치카마츠 이야기>를 누르고 황금종려상을 가져간 건 잊고 있다. 간단히 말해, 올해 제60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누가 받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60년 뒤에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라도 할까는 더더욱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