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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국영화 결산 좌담 [1]

다시, 잃은 것과 얻은 것에 대해, 좌표와 징후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때다. <씨네21>은 지난 한 해 ‘전영객잔’의 의리를 지켜온 세 편집위원에게 2005년 한국영화를 한자리에서 회고해주기를 청했다.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정성일 영화평론가, 허문영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가 공히 2005년의 한국영화로 지명한 작품은 37년 만에 돌아온 이만희 감독의 <휴일>이다. 그런가 하면 올해의 대중영화라 할 만한 <웰컴 투 동막골>과 <말아톤>에서, 세 평자는 ‘차이’에 눈감은 화해와 영원히 유예된 성장에 매료된 대중의 무의식을 보았다. 홍상수와 김기덕의 ‘고립’에 대한 근심, 박찬욱의 위상과 <친절한 금자씨>가 다다른 지점에 대한 토의, 고대했던 이명세의 <형사 duelist>를 향한 비판 등이 이어졌다.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진행으로 4시간 동안 이뤄진 대화를 간추려 여기 싣는다. 세 편집위원은 2005년 국내외 영화를 통틀어 사적인 비망록에 적어두고 싶은 10편의 작품 목록도 보내왔다.

정성일 : 일단 무엇을 기준으로 지도를 그리는가가 중요할 것 같은데, 나는 올해의 영화가 유령처럼 떠돌다가 마침내 찾아온 이만희의 <휴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세 가지가 궁금하다. 첫 번째는 <휴일>과 이만희라는 이름을 통해 읽을 수 있는 한국영화의 모더니티에 대해서다. 두 번째, <휴일>은 공식적으로 1968년 영화인데 한국영화의 영화언어는 이 영화로부터 얼마나 진화했는가의 문제. 세 번째는 동시대 한국영화가 한국 영화사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 하는 질문이다. 우선 올해 10년을 맞은 부산이 불쑥 이만희 회고전이란 카드를 내놓은 데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을 듯한데 허문영 프로그래머가 말씀해달라.

올해의 영화, 이만희의 <휴일>

<휴일>

허문영 : 이만희 회고전을 결정한 것은 사실은 3년 전이다. 10회라는 무게에 걸맞은 회고전이 무엇인가 고민한 결과이고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실은 얼마나 애매한 판단 속에서 이뤄졌는지는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한국영화 평자들이 이만희라는 감독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연구서가 없고, 반드시 조명되고 분석돼야 할 것들이 안 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만추>가 그의 정점에서 만들어졌고, 소재나 이야기, 당대의 평가도 그렇고 최고작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는데 못 찾았다. 그러다 갑자기 기적처럼 37년 만에 <휴일>이 나타났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래 손꼽힐 만큼 떨리는 시간을 맞았다. 회고전에서 많이 나온 말들이지만 <휴일>을 보고 나면 이만희 영화가 다시 씌어져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다시 토론해야 한다. 김소영 선생이 탈식민지 담론에서 시작해 이만희를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지만 그의 영화들은 당대의 어떤 주류 이데올로기와도 타협하지 않고 실존적 고민 그 자체에 몰두한 희귀한 작품이다. 이야기에 있어서도 당대 문예영화의 촉각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휴일>이 37년 만에 발견됐기 때문이 아니라 당대의 어떤 영화에도 뒤지지 않는 강렬한 동시대성을 지금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올해의 영화가 될 법하다.

김소영 : 이만희의 <휴일>로 2005년을 정리하는 게 관객으로서 고맙다. 실은 김기영과 이만희 두 감독을 머릿속으로 비교하면서 이 자리에 왔다. 김기영은 조롱이나 아이러니로 근대를 비판하지 않고 근대를 과잉으로 페티시즘으로 보여줌으로써 비판했다. 반면 이만희는 반골이면서도 목가적 낭만에 가까운 것을 연기를 통해 끌어낸다. 모든 걸 빼앗기고 몸이 다 망가진 사람이 근대적 믿음이 오기 전에 행동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귀로>에서 문정숙이 인천 집을 떠나 서울에 와서 시내를 둘러보는 장면에는 실존적 불안 속에서 다른 어떤 미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담겨 있다. <휴일>에서 신성일과 전지연이 심한 먼지바람 속에 휘감겨 있고 겨울 나뭇가지를 그 프레임 안에 넣은 순간은 가슴을 저미는 명장면이다. 낭만적일 수 있고 여린 감성을 건드리는 것일 수 있는데 반면 그런 낭만을 날카롭게 끊어내는 계급적 인식도 있다. 이만희는 전후 세대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시약 같다. 허문영씨는 그를 밤의 시인이라고 했는데 <휴일>은 정감의 시학이면서 미완이다. 관객에게 정감의 여분을 주지만 텍스트 자체로는 덜 끝난다. 그래서 <만추>처럼 유실된 작품을 더 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정성일 : 고백하자면 이만희라는 이름을 의식했던 건 그의 마지막 영화 <삼포가는 길>을 봤던 고1 때다. 한국영화를 영화로서 비로소 의식하게 된 계기였다.

허문영 : 80년대 신촌 소극장에서 영화상영회를 가끔 했는데 <삼포가는 길>을 그때 처음 봤다. 개인적으로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왜냐하면 원작을 워낙 좋아했고 황석영이라는 70년대 문학에 매료돼 있었기 때문에 영화가 원작의 정서의 깊이를 좇아가지 못한다고 봤다. 그래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고 한국 영화사에 대해 그릇된 선입견을 갖게 된 측면도 있었다. 이만희를 다시 본 건 최근 3∼4년인데 제일 놀라면서 봤던 건 <쇠사슬을 끊어라>라는 장르영화였다. 오락영화, 상업영화의 외피 안에서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대륙활극의 쾌감을 느꼈다.

정성일 : 왜 <삼포가는 길>에 매혹됐을까 오랜 시간 고민을 했는데 영화에 대한 책들을 보다가 불현듯 그 매혹은 데드 타임(dead time: 서사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는 시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후반부에 백화가 남자를 찾아 시장통을 떠도는 장면이 그랬는데 이 데드 타임은 일종의 시네마 타임이 아닐까 싶었다. 이만희에게 가장 가까운 감독으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마스무라 야스조를 이야기하는데 둘은 유럽영화와 일본영화에 모더니즘을 가져온 이들이다. 이만희가 60년대에 데드 타임을 끌어안은 것은 이미 한국영화가 세계 영화사와 같은 지점에 도달했다는 의미인데 한 작가의 고군분투로 끝난 비통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휴일>의 마지막이 올해 만들어진 <극장전>의 마지막과 유사해 놀랐고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시간차를 뛰어넘어 마치 같은 해에 만들어진 쌍둥이 영화라는 느낌이었다. 이만희가 한국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온 모던한 시네마 타임을 갖고 지금 한국영화가 그로부터 얼마나 진화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만희 감독과 홍상수 감독

허문영 : 이만희의 중요한 파트너로 반드시 병기돼야 할 인물인 백결 선생이 전해준 <휴일>의 후일담이 있다. 당시의 검열관이 <휴일>을 보고 주인공이 너무 퇴페적이고 비윤리적이니까 통과 못 시키겠다며 주인공 머리를 깎고 입대시키면 통과시켜주겠다고 했는데 감독이 단 한마디로 거부했다고 한다. 만약 검열의 요구대로 머리 깎고 군에 들어가는 것으로 <휴일>이 마무리됐다면, 이야기 전체가 입대라는 결론을 위한 인과관계에 불과해지므로 영화가 쓰레기가 돼버렸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역시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이 <휴일>이 아닌가 싶었던 것도 정성일 선배가 말씀한 점 때문이다. 문예영화 전통이 지배하던 그 시절에 이야기를 멈추고 인물이 속한 공간의 공기 외 톤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영화적 성취가 있다고 보고, <휴일>이 그 점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휴일>과 반드시 얘기해야 할 영화 중 하나가 탄광매몰사건을 그린 60여분짜리 <생명>인데, 처음에 다큐멘터리라고 자막이 뜨지만 실은 극영화다. 60분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이다. 광부는 매몰돼 있고 밖에서는 소란스럽게 어떡할까 논의하지만 전혀 긴박하지 않다. 카메라는 매몰된 광부가 꾸는 꿈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고 총포 소리, 비명, 탄광 밖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누구도 영웅적이거나 인간적이지 않고, 막상 구출 장면 5분은 거의 무성의하다. 결국 감독이 <생명>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전부는 매몰된 광부가 누워 있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처럼 멈춰진 시간, 벗어날 수 없는 강박과 구속, 기억에 관한 영화을 만들려 했다는 점에서 이만희는 당대 세계의 위대한 모더니스트 거장들과 함께 논의될 자격이 있는 것 같다.

정성일 : 한국 영화사를 연구하고 계신 김소영씨는 이만희로부터 한국영화가 뭘 배웠다고 생각하나.

김소영: 두분 말씀을 듣고 연결점을 생각해보니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이 떠오른다. <별들의 고향>의 전반부는 무척 래디컬하게 시각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이 분리돼 있다. “한 소녀가 울고 있네”라고 이장희가 노래하는 동안 경아는 누워 낙태수술을 받는다.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음악이 들어가 마땅한 신파적인 장면인데 아주 다른 음악이 흐른 것이다. 누벨바그에서 고다르가 강조했던 시각과 청각의 분리를 상기시킨다는 면에서, 모던 시네마에 관한 열망이 이어지는 것 같다. 또, 연세대 국문과 신형기 교수가 지적한 점인데, 영화의 마지막은 문호가 사관생도처럼 경아의 죽음을 딛고 일을 나가는 장면이 차지한다. 어찌 보면 이만희 감독이 군사문화가 요구하는 남성 주체를 거부하며 끝낸 지점에서 이장호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시대적 압력도 있었겠지만, 1970년대 이장호 영화부터는 베스트셀러라는 점이 중요했던 것이다. 즉, 대중문화가 팽창하며 장 자체가 커지고 ‘데드 타임’, 노동시장 진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 자본주의 대중문화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라졌던 이 전통이 홍상수 감독에 이르러 다시 귀환한 것 같다.

정성일 : 그렇다면 일종의 유실된 전통인 셈인가.

올해의 흥행 영화, <웰컴 투 동막골>과 <말아톤>

정성일 : 유령처럼 돌아온 올해의 영화가 <휴일>이라면 흥행이라는 객관적 좌표에 의한 대중영화로서 올해의 영화는 <말아톤>과 <웰컴 투 동막골>이 아닐까.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까지 세편이 한국영화 올 타임 박스오피스 10을 바꾼 영화가 아닌가 싶다. 매년 역대 흥행 톱 10을 경신하는 영화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한국영화 시장이 정말 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마치 1980년대 할리우드 박스오피스나 1990년대 홍콩 박스오피스를 보는 것 같다. <말아톤>과 <웰컴 투 동막골>을 묶어서 얘기하면 어떨까.

<웰컴 투 동막골>

<말아톤>

김소영 :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같이 묶일 점은 많지 않은 듯하다.

정성일 : <말아톤>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웰컴 투 동막골>은 픽션이며 시대적 배경도 다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은 봤다. 두편 모두 지적으로 보통보다 ‘미숙한’ 인물- 초원과 여일- 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두 인물은 “나는 누구인가”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며 영화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배제한다. 이는 자아에 대해 묻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 던져진 상황을 질문하지 않기 위해서 설정됐다. 대중에게 호소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대중이 그런 순진함이 존재한다고 믿은 것은 집단적 퇴행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둘째, 두편 다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인 공동체주의가 있다. “이것이 유토피아인가?”라는 질문과도 전혀 다르고, 화합에 대한 무조건적 요구처럼 보였다. 사이비 화해는 더 큰 성공을 거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명백했다. 상이한 수준의 총체적 모순에 눈감는 전체적인 화해라는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불현듯 허문영 프로그래머의 ‘소년성’ 논의도 다시 떠올랐다. 한편 올해 한국영화의 두명의 스타는 조승우와 문근영이다. <말아톤>의 조승우는 나이들어도 소년으로 멈출 수밖에 없고 <댄서의 순정>의 문근영은 정지된 소녀성이란 호소력으로 스타성을 발휘했다. 말하자면 대중에게 ‘거기 제발 머물러달라’는 호소가 있는 것 같다.

김소영 : 다른 말로 바꾸면 관객이 소년이나 소년, 아니 그보다 어린 유아의 자리에 놓인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 강혜정이 처음 인민군에 얘기를 거는 장면부터, 거기 맞춰서 영화를 봐야 가장 재미있게 진행될 거라고 약속을 하는 거다. <댄서의 순정>이나 <웰컴 투 동막골>은 정 선배의 분석에 적극 동의한다. 그런데 <말아톤>은 좀 다르게 본다. 초원이 모방을 통해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방을 통해 성장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초원이 “백만불짜리 다리”라는 엄마의 언어를 정확히 가져가면서, <댄서의 순정>이나 <웰컴 투 동막골>의 가짜 눈물과 가짜 성장과는 다른 지점으로 도약한다. 터무니없는 인간승리가 아니라 엄마의 언어를 가져가며 손을 놓는 모방 과정을 통해 성장을 그리는 것이 좋았다. 또, 놀란 것은 초원이 어머니의 설정이다. 아마 한국에서 아이 키우는 사람들은 다 그 엄마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이를 위해 희생하지만 아이없이 자기 삶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 말이다. 그런데 <말아톤>에서 코치와 아버지가 등장해 어머니가 아이를 망치는 것처럼 지적하면서 이야기는 관객 입장에서 훨씬 신빙성이 있는 사회적 상식의 이야기가 된다. 그들의 입장이 자폐아와 어머니의 삶과 등가적 긴장을 만들어내고 거의 스릴러처럼 흥미로운, 반목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만들었다.

허문영 : <말아톤>은 다른 요소들이 많이 개입해 있고 더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웰컴 투 동막골>은 기본적으로 정 선배에게 동의한다. <웰컴 투 동막골>은 대중영화로서 장점이 많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부한 대사나 진부한 장면의 연쇄에 비하면 <웰컴 투 동막골>은 훨씬 다양한 캐릭터, 귀여운 에피소드, 생동감 있는 연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감동적 대목으로 알려진 영화의 결말에서 미군 공격을 딴 방향으로 유도해놓고 남북한 병사들이 원하는 건 결국 성장을 멈추고 영원히 청년의 몸으로 유폐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왜 포탄을 유도한 뒤 도망가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만큼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것도 아니고 동막골이라는 살기좋은 마을도 있는데, 왜 거기서 죽음을 맞는지 의아했다. 그들은 팝콘을 연상시키는 폭탄을 행복한 표정으로 맞이하는데 그 장면은 역사적 시간성에 대한 정면 거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이 이야기 밖으로 나가지 않겠으며 아름다운 청년의 죽음을 맞이하고 이전, 이후의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할 이야기가 없다는 고백 같았다. 이러한 거의 자살에 가까운 극단적 마조히즘이야말로 최근 몇년간 한국영화가 가진 소년성의 또 다른 정체가 아닌가 싶다.

김소영의 2005 베스트 10

<흔들리는 구름> 차이밍량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질문은 역의 영화(Liminal cinema) <하류> 를 보고 난 뒤에 던진 질문이나 그는 또 다른 역의 공간을 찾았다.

<휴일> 1960년대 한 무위의 시간에 관한 부스러질 것 같은 보고서.

<과거가 없는 남자> 기억상실이라는 모더니즘적 모티브에 한니발이라는 이름의 개가 은근슬쩍 끼어드는 포스트 자아성찰 영화.

<스파이더>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한 두사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랄프 파인즈의 강도 높은 영화.

<카페 루미에르> 역사의 흔적 찾기와 모호한 미래

<외출> 올해 가장 많은 오해를 받은 영화 중 하나. 상가를 찾아가는 길에 펼쳐진 빈 들녘에 아직도 마음이 간다.

<여자, 정혜> 김지수의 정혜, 잊기 어렵다.

<사랑니> 흥미로운 구조다. 김정은의 연기는 대단히 유려하다.

<쿵푸허슬> 한동안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질투했다. 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재미를 세상에 남겨둔 사람들이니까.

<칠검> 중국의 변방, 홍콩에서 출생한 대륙 판타지 무협극. 마이너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메이저 프로덕션이라는 리들리 스콧류의 패러독스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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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명헌·장소협찬 삼청동 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