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갱어를 소재로 미국 사회의 문제를 꼬집어 낸 호러 영화 <어스>. 2017년 데뷔작인 <겟 아웃>으로 평단과 대중 모두의 호평을 받았던 조던 필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조던 필 감독이 영화감독 이전에 유명 코미디언이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 대학 중퇴 후 코미디언이 된 조던 필은 <매드 tv>, <키 앤 필> 등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큰 인기를 구사했다. 이후 점점 각본, 연출,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여주며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영화감독 중 하나가 됐다. 빵빵 터지는 코미디와 간담이 서늘해지는 호러. 조던 필 감독이 구사하는 두 장르의 온도차가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처럼 코미디언에서 영화감독으로 변모한 이들에는 누가 있을까. 코미디언 출신 감독들을 소개한다. 장기인 코미디를 작품에 활용한 경우도, 혹은 전혀 다른 톤을 선보인 작품도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 <키 앤 필> 속 조던 필(왼쪽), 키건 마이클 키
심형래
국내에도 영화감독으로 변모한 코미디언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이는 1980년대를 주름잡던 코미디언 심형래. 김청기 감독의 <우뢰매> 시리즈, 남기남 감독의 극장판 <영구> 시리즈 등의 영화에 출연한 심형래는 1992년 <영구와 공룡 쮸쮸>를 연출하며 감독 데뷔를 했다. 이후 <티라노의 발톱>, <영구와 우주괴물 불괴리> 등의 괴수 영화를 꾸준히 제작했다. 1999년에는 거대 자본이 투입, CG를 사용한 <용가리>를 공개했다. 완성도 면에서는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구색을 갖춘 첫 번째 국내 괴수 영화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는 작품이다.
혹평 세례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화 연출을 이어갔다. 2007년에는 약 800억 원의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디 워>를, 2010년에는 하비 케이틀이 주연을 맡은 <라스트 갓파더>를 제작했다. 그러나 두 영화도 엉성한 스토리와 억지스러운 애국심 코드 등으로 혹평을 면치 못했다. 현재 <디 워>의 속편 <디워: 미스테리즈 오브 드래곤>도 중국 기업의 투자 하에 준비 중이라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영화의 완성도와 스탭들에 대한 임금체불, 태도 논란 등으로 많은 질타를 받았지만 국내 코미디언 출신 감독 중 가장 꾸준히 영화를 연출, 제작한 이다.
이외에도 영화감독에 도전한 코미디언으로는 홍콩 무협 영화의 영향을 받아 <복수혈전>을 연출, 직접 주연까지 겸한 이경규가 있다. 영화 속 이경규의 진지한 모습이 당시 코미디언으로서의 이미지에 묻혀 오히려 역효과를 냈으며, 작위적인 대사 등으로 흥행에 실패했다. 이후 이경규는 코미디언 활동과 함께 <복면달호>, <전국노래자랑>의 투자, 각본 등에 참여하며 영화를 이어가고 있다. 유사한 이로는 <납자루떼>, <도마 안중근> 등을 연출하고 <조폭마누라>의 제작으로 참여한 서세원이 있다. 아직 국내에서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코미디언 출신 영화감독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기타노 다케시
반면 일본에는 거장으로 자리 잡은 이가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 기타노 다케시다. 앞서 말한 국내 코미디언 출신 감독들을 논할 때 자주 비교선상에 오르는 인물. 그는 1972년 비트 다케시라는 예명으로 선배였던 비트 기요시와 '투 비트'라는 코미디 콤비를 결성했다.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TV에 출연하기 시작했으며, 비트 기요시의 은퇴 후 단독 활동을 하며 <올 나잇 재팬>, <우리들은 익살족> 등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엄청난 인기를 구사했다. 코믹한 분장과 콩트를 주로 선보였으며 거침없는 독설과 뜬금없는 장난이 그의 개그 스타일. 이후 일명 '다케시 군단'이라고 불리는 후배 코미디언들을 양성하며 일본 코미디계의 대부로 자리매김했다. 처음 영화에 참여한 것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에서 악역 군인으로 출연하면서다. 당시 액션 사인이 떨여졌음에도 "대사를 까먹었다"고 말하는 등 매우 미숙했다고.
본격적으로 영화감독으로 변모하기 전, 기타노 다케시는 여러 차례 구설수에도 올랐다. 가장 유명한 것은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 기타노 다케시의 불륜을 취재하던 일본 매체 '프라이데이'가 스토킹, 협박 등 도에 넘은 행동을 하자 기타노 다케시와 그의 후배들이 프라이데이 사무실을 무단 점검하고 기자들을 폭행한 사건이다. 이외 야쿠자 연루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렇게 쇠퇴기를 맞이한 기타노 다케시가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계기가 영화 연출이다. <그 남자 흉폭하다>에서 제작사와 마찰로 원래 감독이었던 후카사쿠 긴지 감독이 하차, 출연 배우였던 기타노 다케시가 대신 메가폰을 잡았다. 결과는 대성공. 덤덤한 분위기와 이에 대조되는 사실적인 폭력 묘사 등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기타노 다케시의 연출법은 평단의 호평을 받았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후 <소나티네>, <키즈 리턴> 등 직접 주연과 연출을 맡은 여러 영화들이 줄줄이 호평을 받았으며 1997년에 제작한 <하나비>는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기타노 다케시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줬다. 현재까지도 그는 <아웃레이지> 시리즈 등으로 감독과 배우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활동 중인 코미디언 출신 감독 중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이룩한 사례.
이런 기타노 다케시의 뒤를 이어 탄탄한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일본의 코미디언 출신 감독으로는 마츠모토 히토시도 있다.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그는 2007년 <대 일본인>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 두 번째 연출작인 <심벌>이 브뤼셀판타스틱영화제에서 은까마귀상을 수상하며 실력을 입증했다. 기타노 다케시는 코미디언으로서의 이미지와 반대되는 분위기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마츠모토 히토시는 오히려 유머 감각을 백방 활용한 코미디 영화를 제작했다. 거기에 화려한 세트, CG 등을 활용해 묘한 판타지성을 부여했다. 최근 연출작인 <R100>도 장기를 살려 여러 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됐으며, 2017년에는 <사랑과 거짓말>의 제작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찰리 채플린
현역에서 활동 중인 코미디언 출신 감독 중에서는 기타노 다케시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넘사벽'급 감독이 존재한다. 영화팬이 아니라도 모르는 이가 없는 시대의 아이콘 격 인물 찰리 채플린이다. 영국 빈민가에서 태어난 찰리 채플린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10살의 나이에 아동 극단에 입단, 무대에 섰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로 3년 만에 퇴단했다. 이후 형의 도움을 통해 근근이 연기를 이어가다 1908년 유명 희극단 프레드 카노에 입단하며 본격적인 희극 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살려 빈민가의 건달, 주정뱅이 등을 실감나고 코믹하게 묘사하며 인기를 얻었다.
미국으로 건너온 찰리 채플린은 무대가 아닌 필름 속으로 들어갔다. 데뷔작은 1914년 제작된 헨리 레만의 <생활비 벌기>. 두 번째 작품인 <베니스에서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부터는 '떠돌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본격적인 코미디 연기를 펼쳤다. 찰리 채플린의 상징과도 같은 콧수염, 지팡이, 의상도 이 캐릭터를 대표하는 특징들이다. 그는 엉성한 제작 환경에 불만을 가져 1914년 <사랑의 20분>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았고, 이후 수많은 영화들을 직접 제작했다. 코미디 요소를 배제한 정극에도 도전했으며, <모던 타임즈>(1936)처럼 사회문제를 코믹하게 꼬집어낸 작품들도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