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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물을 모두 걸러내고 엑기스만 남긴 맛, tvN <스트리트 푸드파이터>는 요즘 보기 드물게 정갈한 프로그램이다. 떠들썩하게 멘트를 주고받는 무리도 없고,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자막도 없고,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한 무례도, 낯선 음식에 대한 엄살도 없다. 호스트에 대한 신뢰와 컨셉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줄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예능의 관성에서 이리저리 비껴나 남은 것은 단 하나, 백종원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큰 거 시킬걸.” “두개 살걸.” “여기에 밥이 있으면 딱인데.” 외식사업가이기 전에 미식가이자 대식가인 백종원은 무엇이든 기꺼이 즐겁게 먹는다. 낯선 식재료, 식감, 향미를 두려워해서는 새로운 맛을 즐길 수 없다. 기름이 치이이익 달구어지고, 국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갖가지 색의 재료들이 팬에서 섞이는 과정은 황홀하다. 홍유, 고추냉이, 코나 커피 등이 밭에서 생산돼 식탁에 오르기까지를 리와인드 편집한 영상은 감각적인 음악,
[TVIEW] <스트리트 푸드파이터> 용감한 미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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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육이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해 종종 깨닫고는 한다. 여러분도 그럴 거다. 내 경우는 공포영화, 특정하자면 오컬트 영화를 볼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오컬트 영화는 공포영화 중에서도 이단이나 사탄 숭배, 구마 의식, 기독교 신비주의 현상을 다루는 장르다. <오멘> <엑소시스트> <로즈메리의 아기> <쳐다보지 마라> <위커맨> 같은 영화들을 떠올리면 맞다. 넓은 범주에선 <곡성>도 포함된다.
오컬트 영화와 가정교육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설명하려면 잠시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난 무신론자다. 사안에 따라 불가지론과 유물론 사이를 어지럽게 왔다 갔다 하는, 다소 일관성 없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는 달랐다. 내 유년 시절은 종교를 제외하고 나면 별 할 이야기가 없다. 성서 읽는 걸 정말 좋아해서 숨겨두고 읽을 정도였다. 사울이 바울이 되는 이야기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유전>은 놀랍도록 빼어난 오컬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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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김기덕 감독이 <PD수첩>을 고소했다. 자신을 강제추행치상 등의 혐의로 지난해 고소했던 여배우 A에 대해 무고 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하고, 지난 3월 김기덕 감독 관련 의혹을 보도한 MBC <PD수첩> 1145회 ‘영화감독 김기덕, 거장의 민낯’제작진 및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한 다른 여배우 2명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당시 방송에서 여배우 A를 비롯해 다른 여배우 B, C가 김 감독의 성관계 요구 및 성폭행에 대해 폭로했다. <PD수첩> 제작진에 따르면, 당시 김감독은 이와 관련해 취재에 응하지 않았으며 반론권을 전혀 행사하지 않았다.
당시 방송을 보면서도, 지금 김기덕 감독의 고소 사실을 접하면서도 만감이 교차한다. 당시 <씨네21>도 이와 관련한 취재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그 반론권 보장과 팩트 체크에 매진하는 가운데 <PD수첩>에서 먼저 보도가 됐다. 그리고 취재원이 일부
[주성철 편집장] 김기덕 감독님, 법 뒤에 숨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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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전시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고 장벽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에서 음악만큼 부드러운 문화는 없다. 우연히 발견한 멜로디와 가사가 마음에 들면 종종 한없이 반복해 듣기도 한다. 싱어송라이터 개럿 세일이 선보인 싱글 《Wound Up》이 그랬다. 갓 26살을 넘긴 그는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에서 나고 자랐다.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후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미국 특유의 공동체 문화에 익숙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일은 지역의 한 노숙인 별명을 빌려 ‘윌리엄 와일드’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냈다.
2016년 발표한 EP 《Steady Now》는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지은 네곡을 포함한 여섯곡으로 완성했다. 이 앨범에 수록한 <When I’ve Been Gone>은 실제 노숙자이자 중독자의 삶을 산 아버지의 시선으로 불렀다. 지난해부터 차례로 발매한 싱글 《Who Do You Love》 《On an Island》 그리고 2018년의
[마감인간의 music] 윌리엄 와일드 《Wound Up》, 삶을 노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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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작가는 노트북 PC에 지원서 양식을 띄워놓고 한숨을 쉬었다. 상반기 예술인 창작준비금 지원 사업. 운영주체인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정한 예술활동증명 기준을 충족하며, 소득과 재산이 일정 기준 이하인 저소득 예술인에게 조건에 부합하는 순서대로 일시금을 지급하는 복지 사업이다. 김 작가처럼 가난한 문화예술인을 위한 좋은 제도다. 하지만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충분히 가난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번거로운 서류 준비 절차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김 작가의 한숨의 이유. 그는 잠시 노트북 덮개를 닫고 TV를 켰다. “<언러키 인 라이프>, 마지막 회를 시작합니다!” 사회자가 외치자 TV 화면에 그야말로 불운했던 출연자들의 사연이 빠르게 편집돼 소개됐다. 온갖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이 난립한 가운데 모 방송사는 급기야 가장 운 나쁜 사람을 뽑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사회 속 불운한 이를 구제하고 위로한다는 제법 그럴싸한 방송 예고편이 나가자 각지에서 속칭 운발 안 좋은 이들이
언러키 인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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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직장 동료들은 앙투안(드니 메노세)이 성실하고 괜찮은 남자라고 평한다. 그러나 전처 미리암(레아 드루케)과 두 자녀의 의견은 다르다. 가정법원에 “그 사람을 만나기 싫다”는 11살 막내 줄리앙(토마 지오리아)의 편지가 제출되자, 앙투안과 변호인은 아내가 세뇌한 탓이라 주장한다. 아직 관객은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소년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순간 답은 자명해진다. 아빠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엿듣는 줄리앙의 얼굴은 굳다 못해 바스라질 지경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긴장은, 소년이 아빠를 겁낼 뿐 아니라 그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더 치솟는다. 아빠와 둘만 있는 차 안은 세상 어디보다 줄리앙에게 위험한 장소다. 안전벨트 경보음의 반복이 그 사실을 불길하게 환기시킨다.
05/20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내게 숨이 턱턱 차오르는 여름이다. 극중 배경이 전부 여름이란 의미는 아니다. <초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전망 없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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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장이머우 / 출연 웨이민치, 장휘거 / 제작연도 1999년
어렸을 적 즐겨보던 영화는 주성치 영화, 영화감독을 꿈꾸게 만든 감독은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와 로버트 로드리게즈. 그런데 정작 가장 만나고 싶은 감독은 장이머우다. 사실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를 그닥 좋아하진 않는다. 그런데도 이분을 만나고 싶은 이유는 단 한가지, 바로 이 영화 한편 <책상 서랍 속의 동화>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영화는 전문적인 배우를 쓰지 않고도 인상깊은 감동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 카메라를 쳐다보는 눈빛이 포착될 때, 조금 어설프지만 제 몫은 해내는 이들의 인간미가 느껴졌다. <책상 서랍 속의 동화>를 보면서 느꼈던 궁금증은 총 3가지다.
배우 섭외 당시 오디션을 진행했는가?
장이머우 감독은 이 영화 속 배우들을 모두 현지에서 섭외했다. 내 경험에 비춰보았을 때 현지 섭외는 두 가지 조건에서 괜찮다. 대학교 영화 동아리 혹
고봉수의 <책상 서랍 속의 동화> 감독님, 질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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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미쳤어? 왜 내가 남의 집 개새끼 사정까지 들어야 되는데!” “그러게요. 그런데 저는 왜 아주머니네 애새끼 사정을 들어야 되죠.” JTBC <미스 함무라비>의 초임판사 박차오름(고아라)이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통화하는 중년 여성의 행동을 흉내내어 되받아친다. 조용히 해달라는 말 대신 이목을 끌어 망신을 주는 저 장면은 이후 차오름이 불의나 관행에 저항하는 패턴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성공적이라고 하진 못하겠다. 드라마는 모두가 중년 여성을 마음껏 경멸하도록 “우리 딸내미 도피유학을 보낸 보람이 있다”라는 대사까지 끼워 넣었고, 차오름의 행동도 공공장소의 예절을 지키지 않는 승객을 제지한 건지, 통화 내용이 고까워서 망신을 준 건지도 애매해졌다.
MBC <검법남녀>에서 10년차 검시관 백범(정재영)이 화를 내며 법의학 지식을 읊는 상황을 위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건 초임검사 은솔(정유미)이다. 수사물을 좋아하고 미국 드라마도 많이 봐서 검
[TVIEW] <검법남녀> <미스 함무라비> 미묘한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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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화 감독의 <걷기왕>(2016)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한 학생의 엉망진창 <타이타닉> 리코더 연주 장면이다. 만복(심은경)이 경보를 포기하던 날, 만복은 자신에게 경보를 추천했던 담임 선생(김새벽)이 또 다른 학생에게 “그래, 너는 음악이야!”라고 음악을 추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 학생의 리코더 연주는 엉망이었다. 알고 보니 담임 선생은 아무에게나 막무가내로 꿈을 주입시키는 사람이었다. 만복의 재능을 제대로 파악하고 추천한 게 아니었다. 그 학생의 연주로 셀린디옹의 <My Heart Will Go On>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만복은 “다들 뭔가 될 거 같은데, 나만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 나 혼자만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며 서럽게 엉엉 운다.
지난주 개봉한 백승화 감독의 신작 <오목소녀>에서 주인공 이바둑(박세완)의 동거인인 로커 동거인(맞다, 사람 이름이다. 장햇살 배우가 연기한다)도 꿈을 이루는 게 쉽
[주성철 편집장] <오목소녀>와 <걷기왕> 소확행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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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America>의 빌보드 1위는 삽시간에 타임라인을 장악한 뮤직비디오 바이럴에 힘입었다. 공개 하루 만에 조회 수 1300만건이란 기염을 토했다. 유튜브를 통해 듣는 것도 집계에 포함시키는 빌보드 정책에 따라 첫주에 1위로 데뷔했다. 잘 만든 뮤직비디오 하나가 노래의 운명을 바꾸는지 증명한 또 하나의 사례가 됐다.
왜 그렇게 조회 수가 높았는지에 대해 여러 추측이 가능하다. 총기 난사 같은, 현재 미국에서 첨예한 이슈를 다뤄서란 분석도 가능하고, 기관총 난사 장면을 여과 없이 내보낸 충격요법이 먹혔을 거란 분석도 가능하다. 올해 그래미에 올라 수상의 유력 후보였던 차일디시 감비노의 인지도 상승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요인은 해석의 여지가 열린 애매모호함 아니었을까. 바로 이해하기 힘든 장면과 상징들이 역으로 각자의 해석을 공유하도록 자극한 것이다. 단적인 예로 유튜브에 이번 뮤직비디오를 검색하면 해석 영상들이 잔뜩 올라와 있다. 시사
[마감인간의 music] 차일디시 감비노 <This Is America>, 애매모호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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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풋풋한 고등학생 무리가 나누는 대화에 절로 눈이 떠졌다. 같은 반 여학생 누구누구가 똑똑하고 생각도 깊은 줄 알았더니 요즘 페미니즘에 너무 물들어 안타깝다는 이야기였다. “걔도 페미니스트였어?”라며 놀라 되묻는 학생을 슬쩍 훔쳐보니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절망과 낙담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문득 한 친구가 내 인터뷰에 달린 댓글을 캡처해 보내준 일이 떠올랐다. 여성감독으로서의 개인적 고민과 짧은 소회를 담은 인터뷰에 “얘도 페미니스트들한테 넘어갔네”, “이 감독도 페미니즘에 물들어 큰일이다” 하는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 대체 언제 그런 불온한 사상에 물들었냐, 그래서 좋은 작품 만들겠냐며 장난스레 다그치던 친구와 한바탕 웃고 만 일이었는데, 어쩌면 그 댓글들도 누군가의 진심어린 걱정과 불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무겁고 복잡해졌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여러 형태의 사회·정치적 운동과 이론들을
나는 언제 어떻게 물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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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난 것은 방송 사흘 뒤였다. 5월 5일 MBC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어묵을 먹던 이영자가 한 맛집 셰프에 대해 호감을 표했을 때 재미를 위해 삽입된 ‘속보’ 화면 중 하나가 세월호 참사 당시 뉴스 특보 자료였다.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어묵’이라 비하해온 것과 맞물려 논란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영자가 충격으로 녹화 불참을 선언하고, 한창 인기 있던 프로그램의 폐지설까지 도는 사이 시간이 계속 흘렀다. 16일에야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을 종결한 MBC는 해당 부분을 편집한 조연출은 일베 회원이 아니며, 이 사건은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다고 발표했다.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이라는 것만으로 징계를 내릴 수는 없다(물론 많은 여성들은 더 황당한 이유로 일자리를 잃고 있다). 하지만 초동 대처가 늦으면서 점점 악화된 사태를 일단락짓는 데 11일이나 걸렸다는 건 위기 관리의 완전한 실패다. 어떤 이유에서든, 방송에 웃
[TVIEW] <전지적 참견 시점> 일베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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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역사상 이토록 극심한 진통 끝에 탄생한 영화는 없었다. 이건 거의 스캔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촬영 종료 3주 전에 감독이 교체되었다. <엑소시스트: 더 비기닝>의 감독 교체 이후로 가장 큰 소동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납득할 만한 이유가 따라붙더라도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필 로드와 크리스토퍼 밀러가 개봉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DC의 플래시 영화를 떠나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이하 <한 솔로>)를 지휘하게 되었을 때 모두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레고 무비> 때문이었다. 이 두 젊은 감독은 <레고 무비>에서 이미 한 솔로와 랜도 칼리지안 캐릭터를 다룬 바 있었다.
한 솔로는 스타워즈 팬덤에 거의 절대적인 존재다. 당신은 루크 스카이워커가 지질하다고 놀릴 수 있다. 당신은 레아 공주가 공주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놀릴 수 있다. 당신은 요다가 꼰대고 랜도가 우주에서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이 모든 소동에도 불구하고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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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오즈 야스지로 / 출연 류 지슈, 하라 세쓰코 / 제작연도 1953년
영화를 전공하던 한 대학생은 끊임없이 자신의 소질을 의심했고, 불안했다. 시네마테크에 가는 일은 그에게 몇 안 되는 위안거리 중 하나였다. 돼지 비린내가 들러붙은 국밥 골목을 지나 극장 옥상에 오르면 상영관에 아직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그 영화를 이미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를 만났다. 영화는 ‘죽음’마저도 일상으로 만들고는 초월한 듯한 태도로 삶의 깊이를 전달한다.
당시 나는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영화인가에 대한 물음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오즈의 영화가 그 물음에 대한 힌트를 던져주었다. 그의 영화는 누군가가 밥을 먹는 모습, 길을 걸어가는 모습, 공간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전달했다. 영화에 잘 포착된 어떤 디테일한 순간은 인물이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인물의 일상과 인생이 어떠할지 예측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나는
임태규의 <동경 이야기> 극장에서 만난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