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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밤에는 간식을 준비한다. 좋아하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찬장을 뒤적여 찾아낸 팝콘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TV 앞에 앉는다. 예능 프로그램을 ‘본방 사수’할 이유는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모처럼 예외가 생겼다. “브라자 풀고 같이 먹어요”라는 김숙의 명언과 함께 시작된, 올리브TV <밥블레스유> 때문이다.
<밥블레스유>는 시청자들의 사연을 받아 ‘이럴 땐 이런 음식’을 먹어보라고 추천해주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사연은 거들 뿐, 네명의 베테랑 예능인 최화정, 이영자, 송은이, 김숙의 우애 넘치는 식탁은 마치 내 친구들과의 식사처럼 두서없이 즐겁다. 서러웠던 신인 시절부터 망한 연애와 좌절의 경험까지, 인생의 굴곡마다 함께해온 ‘언니들’은 오래된 만큼 가깝지만 친밀함을 핑계 삼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코스만 짜와도 “네가 자랑스럽다”라며 칭찬하고, 사소한 농담에도 크게 웃어주며, 이렇게 좋은 곳에 데려와줘 고맙다고 말
[TVIEW] <밥블레스유> 다정이 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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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변영주 감독이 말했다. JTBC <#방구석1열> 8·15 특집 ‘아직 끝나지 않은 가슴 아픈 이야기’ 편에서, 과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시리즈를 만들었던 그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할머니들이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일본 욕이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 할머니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아닐까? 우리나라만큼 성폭력 피해자에게 예의 없는 나라가 어디 있나?”라고 말했다. 그와 함께 삽입된 영상은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2017)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옥분(나문희)이 뒤늦게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 엄마의 산소를 찾아 “엄마, 왜 그랬어? 왜 그렇게 망신스러워하고, 아들 앞길 막힐까봐 전전긍긍 쉬쉬하고…. 내 부모, 형제마저 날 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떳떳하
[주성철 편집장] 8월 14일, ‘위안부’ 기림일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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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정을 좋아한다. 특유의 중저음을 기반으로 하는 소리의 울림이 일단 좋고, 무엇보다 가사 전달력만큼은 국내 최고 수준이 아닐까 싶은 가수다. 그가 규현과 함께 2016년에 발표한 <두 남자>를 예로 들어볼까. 이 곡의 전개는 우리가 발라드에서 기대하는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두 남자가 각자 이별을 겪었음을 알아보고는 담담한 톤으로 헤어짐을 노래하더니, 종국에는 슬픔을 격정적으로 토해내는 식이다. 그러니까, 익숙한 형식의 곡임에 분명하지만 그 익숙함으로 일궈낸 성취가 탁월하기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노래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영화로 비유하자면 아주 잘 만들어진 장르(발라드)영화라고 할까. 박재정이 얼마 전 발표한 신곡 <가사> 역시 유사한 궤도를 맴도는 곡이다.
그렇다. 그는 여전히 자기 노래 안에서 자전하는 이별의 슬픔 속을 맴돈다. 모든 드라마가 끝난 뒤에야 찾아오는 슬픔을 노래한다. 바뀐 점이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이 곡은 그의 첫 자작곡이다.
[마감인간의 music] 박재정 <두 남자>, 꾸준한 발라더라는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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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인간들은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과거의 망령들로부터 의상과 전투구호, 언어를 빌려와 새로운 장면을 연출한다고 했다. 이 주장은 2016년 탄핵 때 한국군 엘리트들이 채택한 대응 방식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계엄 대비 계획에 따르면 일부 군 엘리트들은 과거 쿠데타를 참조하여 시민사회를 무력화하는 레퍼토리들을 구체화하고 현대화했다. 이를테면 통금에 인터넷 검열이 추가됐다.
마르크스는 세계사적 사건은 한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했지만 내게 이번 기무사 사태는 전혀 희극적이지 않다. 비밀문서는 과거의 망령들이 언제든 되살아나 “민주주의는 이제 그만”이라고 명령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에 또 다른 비밀문서가 공개됐다.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당시 사측이 작성한 비밀문서에는 경찰·검찰·노동부 등 정부 부처와 공조를 통해 파업을 강경진압하고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전략이
비밀문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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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좀비 채널 개국 기념으로 원테이크 원컷의 라이브영화가 기획된다. 높은 리스크를 고려해 애드리브가 금지되지만 방송 당일의 온갖 돌발 사건은, 이 좀비 호러를 희대의 임기응변 향연으로 만든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프레임에 보이는 것과 그것이 보이기까지 프레임 밖에서 이루어지는 고역에 관한 애잔한 코미디다. 중년 배우는 알코올 문제가 있고 아이돌 출신 배우는 이미지 유지에 급급하고 촬영감독은 허리가 아프다. 수전증과 설사도 엄습한다. 그러나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를 소동극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숏이 지속되도록 지탱하는 스탭과 배우들의 아슬아슬한 발버둥이다. 물론 최고의 곡예사는 두겹의 영화를 각본, 편집까지 겸해 연출한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이다. 정말이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07/26
가족은 사회의 기본 단위라고 우리는 배운다. 그러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하나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렇게 가족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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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켄 로치 / 출연 마틴 콤프스턴, 윌리엄 루앤 / 제작연도 2002년
처음 원고를 청탁받고 어떤 영화를 추천하고, 어떤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나, 라는 고민과 나의 버킷리스트 영화들을 생각해보았다. 이제야 첫 장편 <박화영>을 완성한 내가 과연 이런 글을 감히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켄 로치 감독의 <스위트 식스틴>이 떠올랐다, 그래서, 결정했다. 켄 로치 감독의 <스위트 식스틴>. 이 영화는 사실 내가 배우로 출연한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를 찍을 당시 감독님이 레퍼런스 영화로 보여줘서 처음 만났고, 제법 강렬한 인상과 기억이 꽂힌 영화다.
이야기와 플롯은 심플하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두 소년이 가게 안 손님들을 상대로 싸구려 담배를 암거래하는 모습을 비춘다. 이 이미지에서 개인적으로 지금은 사라져 버린, 왠지 모르게 내 중·고등학교 시절인 90년대… 길거리 가판대에서 가치담배를 팔았던 이미지와 지금은 사라져버린
이환 감독의 <스위트 식스틴> 아이들에게 세상은 잔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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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국대학병원에 새로 온 총괄사장 구승효(조승우)는 병원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항암제를 엇갈리게 투여해 환자가 사망한 사건을 알아낸다. “죽였죠”라고 묻는 구승효의 추궁에 암센터 과장은 답한다. “의료상 착오입니다.” 병원 조직이 허용하지 않는 ‘실수’의 다른 말이다. 폐쇄적인 조직이 개발한 자기기만의 언어는 직설적인 질문 앞에서 더없이 구차해진다.
재난이 시스템을 검증하듯, 이익추구를 목적으로 들이닥친 구승효는 대학병원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JTBC <라이프>의 이수연 작가는 그를 병원에 침입한 항원으로, 병원 영리화에 맞서는 응급의료센터 전문의 예진우(이동욱)를 항체로 두었다. 가치관 대립으로 의료인의 윤리와 병원의 현실을 짚어가는 드라마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충돌과 대립을 개개인이 쓰는 언어를 통해 인정사정없이 드러내는 기술은 독보적이다. 장사꾼의 언어로 공공의료의 명분을 세워 의사 집단을 제압하는가 하면, 각자의 파트에서 전문가로 달변을 뽐
[TVIEW] <라이프> 이수연 작가의 신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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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시걸 영화 중에 <복수무정>(Hard to Kill, 1990)을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어느 고위 정치인의 부패와 살인 음모를 알아낸 LA 형사 메이슨 스톰(스티븐 시걸)이 갑작스런 습격을 받아, 외부에는 죽었다고 알려진 채 무의식 상태로 7년을 보낸 뒤 깨어나 복수에 나선다는 내용이다. 돌이켜보면, 영화 포스터나 비디오 재킷에 “범죄는 질병이지, 이제 치료제를 만날 때다”라고 했던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코브라>(1986)나 “네놈을 살려두긴 쌀이 아까워” 라고 했던 척 노리스 주연의 <스트롱맨>(The Hitman, 1991), 그리고 처음에는 “건드리면 끝장이다”라고 했다가 흥행이 잘되니까 포스터 문구를 “건드려서 끝장냈다”로 바꿨던 돌프 룬드그렌의 <다크 엔젤>(1989) 등 아날로그 ‘하드 보디’ 액션히어로들의 화려한 시대가 있었다.
왜 느닷없이 철지난 B급 액션영화의 추억에 빠져들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학창
[주성철 편집장] 황현산 선생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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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직은 ‘평화, 사랑, 긍정’을 상징하는 래퍼다. 대표곡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800-273-8255>는 미국자살방지협회의 전화번호를 제목으로 내걸었다. 이 노래는 많은 지지와 찬사를 얻어내며 2017년 최고의 화제곡이 되었다. <Black Spiderman> 역시 마찬가지다. 이 노래에서 로직은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며, 모두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고 외친다.
로직의 이런 면모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Flexicution>은 당황스러운 노래일지도 모르겠다. <Flexicution>은 ‘Flex’(뽐내기)와 ‘Execution’(집행)의 합성어다. 로직은 이 노래에서 이렇게 랩한다. “내가 이 게임을 이끌지, 너흰 옆에서 구경이나 해/ 사람들은 말해 ‘로직, 넌 너무 겸손해’/ 엿 먹어, 내가 죽여놓겠어.” 다음은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 전 로직이 뱉은 멘트다. “겸손한 삶을 사는 것
[마감인간의 music] 로직 , 어떤 솔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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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주변 지인의 제보로 자신의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된 A씨는 삭제해도 계속 다시 생성되는 자신의 동영상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해 생을 마감한다. A씨의 친구는 죽고 난 다음에도 계속 친구의 동영상이 유작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는 것에 분개, 업체와 경찰 등에 항의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다 탐사보도프로그램에 제보한다. 피해자와 피해자의 친구를 대신해 불법 동영상 문제를 추적하던 PD와 작가는 여기에 거대한 카르텔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알고 싶다> 1131회에 담긴 내용이다. 이 프로그램이 방영된 직후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사실과 많은 부분이 방송되었더군요. 이걸 그대로 두면 안 됩니다.” 읽을수록 이상한 비문(非文)이다. 방송에 보도된 것이 사실과 달랐다면 정정보도를 요청하면 될 터이다. 작성자는 정정보도 요청은 고사하고 이 방송으로 인해 생길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말해주지 않는다
피해자만 존재하는 범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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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삼력 / 출연 김상석, 심재원, 서보익, 강찬양 / 제작연도 2007년
“영화 잘 봤어.” 10년 전, <쌍화점>에서 함께 연기했던 배우 조성윤이 자신의 동기 김상석이 주연을 한 영화가 개봉한다고 알려왔다. 나도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복수전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동기’와는 복도에서 마주치면 어색한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 한창 독립영화, 예술영화를 보러 다니던 때였고, 눈에 잘 띄지 않던 사람이 영화의 주인공을 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곧장 극장을 찾았다. 마침 무대 인사가 있었고, 영화를 보고 나와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영화 잘 봤다고.
대형 연예기획사에 속해 상업영화와 TV드라마에 조·단역으로 출연하던 신인배우 백재호는 평소 즐겨보던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마음에 연예기획사에서 나와, 독립영화를 제작·배급·상영하는 회사에 들어갔다. 기대와 달리 예전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길어졌고, 이대로 아무것도
백재호 감독의 <아스라이> 영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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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Good girls go to heaven, bad girls go everywhere.) 1930년대 할리우드 배우이자 작가였던 메이 웨스트는 정말로 멋진 말을 남겼다. 넷플릭스 <굿 걸스>의 베스(크리스티나 헨드릭스), 루비(레타), 애니(메이 휘트먼) 역시 천국의 문에서는 일찌감치 멀어진 것 같다. 무장강도인 척 위장하고 마트 금고를 털었기 때문이다. 나름의 사정은 있다. 남편의 투자 실패, 딸의 신장이식, 전남편과의 양육권 분쟁 등으로 급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볍게 한탕한 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던 이들의 범죄 행각은, 늘 그렇듯 꼬이고 꼬인 끝에 창대해진다.
<굿 걸스>는 세 여성의 모성애나 가족을 위한 헌신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경찰에 검거될지 모르는 순간에도 침착하게 아이들을 챙기고, 온갖 무례와 희롱에 시달리며 저임금 노동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어른’이 진 책임의 무게
[TVIEW] <굿 걸스> ‘어른’이 진 책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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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윤발과 유덕화를 영화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난민이었다. <호월적고사>(1981)에 베트남 화교 난민으로 출연한 주윤발은 일본인으로 위장해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다 실패하고, 결국 필리핀 차이나타운 암흑가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영어 제명부터가 <보트피플>인 <투분노해>(1982)에서 유덕화는 한 일본인 사진작가의 도움으로 어린 남동생과 함께 베트남을 탈출하려다가 안타깝게도 죽고 만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실질적인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두편의 영화에서 고향 잃은 베트남 난민들이었다. 허안화 감독이 연출한 두 영화 모두 주윤발과 유덕화가 자신의 ‘인생 캐릭터’를 묻는 질문에 반드시 언급하곤 했던 영화인데, 그즈음 내가 좋아했던 수많은 홍콩영화들이 사실은 난민을 그린 영화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1997년 홍콩의 본토 반환을 과거 베트남의 현실과 치환하는, 홍콩 사람들이 실제 난민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홍콩영화를 (얼마간 ‘과잉’으로)
[주성철 편집장] 난민 영화 특집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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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what2do》 싱글로 딘을 알게 되었다. 알려졌다시피 그는 10대 시절부터 음악을 만들었다. 이후 작곡가 신혁의 줌바스에서 프로듀서와 작곡가를 겸하며 2015년에 데뷔 싱글을 냈다. 힙합 음악이 대세가 되고 R&B를 ‘2010년대식’으로 재해석한 음악가들이 쏟아지던 시절이다. ‘이런’ 노래를 한국어로 세련되게 부르는 음악가가 있었으면, 하는 갈증을 딘이 해소해주었다. 미사여구가 아니라, 그야말로 혜성 같은 등장이었다. 데뷔한 게 2015년이니 이제 3년 남짓 지났다. 《instagram》은 2017년 말 발매되었다. 소셜 미디어라는 단어가 생겨나기 전, (거의) 모두 인스타그램만큼 몰두한 싸이월드 시절에도 사람들은 밤과 새벽이면 ‘남들의 삶’과 비교한 자신을 평가절하 하곤 했다. 어쩐지 나를 제외한 모두가 멋지게 사는 착각에 우울하기도 했다. 딘의 가사는 그래서 와닿는다. ‘나의 밤 속엔 생각이 너무 많네/ 그렇게 시간 낭비를 하네/ 저 인스타그램 속에서.’ 이
[마감인간의 music] 딘 《instagram》, 시대를 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