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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선 감독의 <비밀과 거짓말> 이상한 인물과 슬픈 유머
김인선(영화감독) 2018-09-04

감독 마이크 리 / 출연 브렌다 블리신, 티모시 스폴 / 제작연도 1996년

호본역 앞, 토요일 7시30분.

젊은 여성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역사 앞을 서성인다. 그런 그녀의 뒤로 초조하게 담배를 태우며 벽에 기대 서 있는 중년 여성이 있다. 젊은 여성은 중년 여성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말을 건다. “혹시 신시아씨세요?” 모녀가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말끝마다 “스위트허트, 달링~”을 붙이는 신시아 로즈 펄리(브렌다 블리신)와 단정하고 침착해 보이는 호텐스 컴버배치(마리안 장 밥티스트)는 이렇게 서로를 처음 마주한다. 10대 시절 입양 보냈던 딸의 인종이 자신과 다르리라곤 생각도 못한 채 부정하던 신시아는 어느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려낸다.

내가 마이크 리 감독을 접한 건 2011년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을 통해서였다. 레슬리 맨빌의 이상하고 외로운 연기와 영화를 관통하는 행복과 불행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좋았다. 이미 거장인 감독을 뒤늦게 알게 됐을 때,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것들로 마음은 두둑해진다. 그렇게 만난 <비밀과 거짓말>은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의 핵심을 일깨웠다. 그것은 인물과 유머다. 브렌다 블리신이 연기한 신시아라는 인물은 볼 때마다 놀랍다. 이런 연기가, 이런 연출이 가능하구나! 아주 이상하면서도 깊이 공감되는 인물과 웃기면서 슬픈 그런 상황들.

신시아와 호텐스는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가까워지고, 세상 누구보다 불행해 보이던 신시아의 얼굴과 몸짓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신시아는 동생의 집에서 열린 딸 록산느(클레어 러시브룩)의 생일파티에 호텐스를 직장 동료로 속여서 데려간다. 비밀을 숨긴 채 거짓말로 만들어지는 이 신은 모든 배우의 연기가 훌륭하다. 그 상황이 호텐스라는 사려 깊은 여성에게 너무 가혹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가도, 악의는 없는데 상처를 주는 신시아라는 인물을 미워하기도 힘들어서 차라리 웃게 되었다. 그날 신시아는 참지 못하고 자신이 지닌 비밀을 털어놓고, 그것은 다른 가족들 사이에 쌓인 감정들을 폭발시키면서 그간 말하지 못했던 비밀과 거짓말의 봉인을 해제한다.

오랜만에 다시 본 <비밀과 거짓말>은 여전히 좋고 여전히 큰 산과 같았다. 나의 첫 장편영화 <어른도감>에 나오는 경언(이재인)과 점희(서정연)의 진실게임 장면은 <비밀과 거짓말>을 본받고 싶었던 것 같다. 비밀과 거짓말과 진실게임? 언젠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조금 더 가지게 되는 날이 오면 신시아에 비견될 그런 인물을 그려보고 싶다. 행복은 외로움과 환희의 교차편집이라 하던가. 끝도 없이 외로워하던 신시아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낯선 인물의 등장은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변화의 촉매는 사람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시아와 두딸이 정원에 앉아 오후의 홍차를 마시며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말한다. “이게 사는 거지.”

김인선 영화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아빠의 맛>(2014), <알레르기>(2014), <수요기도회>(2016) 등의 단편영화를 통해 꾸준히 이름을 알렸다. 8월 29일 개봉한 이재인, 엄태구 주연의 성장영화 <어른도감>은 김인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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