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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이 되면 지구가 망한다 했던 90년대 말이었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돈이 모이면 도쿄에 가곤 했다. 어디에서든 거의 매일 거리 연주자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젊은이들에게 방향 없이 얹어지는 사회의 무게에 대한 감정의 표출이랄까, 그 진정성이 좋아 보였다.
말을 통한 진정성의 표현, 말로 하는 버스킹, <말하는 대로>가 JTBC에서 방송 중이다. 샤이니의 키가 출연한 에피소드로- 백조들 사이에서 닭답게 사는 법- 많은 주목을 받았던 프로그램이다. 유희열과 하하의 2MC가 그날의 버스커들을 데리고 대로(大路)로 나선다. 그리고 이들을 순서대로 풀어놓는다. 방송인 타일러는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선작가(김동영)는 자신의 학벌 콤플렉스와 공황장애에 대해 말한다. 얼떨결에 모이게 된 청자는 자신의 감정이 가는 대로 반응한다. 버스킹의 장점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순간이다. 덧붙여 빨간 상자에 카드를 태깅하면 1천원이 기부되는 시스템까지 꼼꼼하게 갖춰놓았다. 스튜디
[김호상의 TVIEW]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大路)에 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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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율 브리너를 굉장히 좋아했다. TV를 보다가도 율 브리너가 나오면 오 율 브리너, 하면서 채널을 고정했다. 어렸을 때는 저 눈 큰 대머리의 어디가 좋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 덕분에 나는 명절만 되면 <왕과 나>와 <아나스타샤>를 되풀이해서 보게 되었다. 율 브리너를 정말 좋아하게 된 건 좀더 자란 이후에 우연히 <황야의 7인>을 보면서부터였다. <황야의 7인>을 보고난 이후 나는 율 브리너 대머리에 솟은 힘줄마저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훨씬 더 어렸을 때 이야기다.
새벽에 미군방송을 돌려보는 건 내 중요한 취미생활 가운데 하나였다. 일전에 이 지면에서 소개했다시피 이 시간을 통해 나는 <록키 호러 픽쳐쇼> 같은 인생 영화도 발견한 바 있기 때문이다. 채널 2번을 틀어서 뉴스가 나오면 그냥 자고 영화가 나오면 끝까지 봤다. 그 새벽 나와 미군방송 사이에는 한·미 혈맹을 압도할 만한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영화 <이색지대>, 그리고 <HBO> 드라마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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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되며 넷팩상과 올해의 여자배우상을 수상한 이승원 감독의 <소통과 거짓말>,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를 만든 오멸 감독의 신작이자 CGV아트하우스상과 한국영화감독조합상을 수상한 <눈꺼풀>, 시민평론가상과 올해의 남자배우상을 수상한 박홍민 감독의 <혼자>, <폭풍전야>의 조창호 감독의 신작 <다른 길이 있다>, <이방인들>의 최용석 감독의 신작 <다른 밤 다른 목소리> 등은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영화제 이후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개봉되지 못하고 있다.”(원승환, 지난 1076호 ‘한국영화 블랙박스’ 원고에서 발췌)
그렇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글이 아니라 지난해 이야기다. 영화제에서 상영된 독립영화 중 박석영 감독의 <스틸플라워>, 김진황 감독의 <양치기들> 정도만이 영화제 이후 관객과 만날 수 있었고, 앞서 언급한 영화들은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당신의 다음 영화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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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상을 타면 기분이 어떨까? 유명인이 되어 할리우드 셀러브리티들이 아는 척하고 팬들의 인증숏 공세가 시작된다면? 보통 사람이라면 조금 피곤하긴 해도 내심 기뻤을지 모른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인 저스틴 버넌은 그렇지 않았다. 생애 처음 맛본 유명인의 위치가 좋기는커녕 괴로웠다.
5년 만의 신보 《22, A Million》은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일까, 흔히 메인스트림 진입 뒤에 발표되는 앨범들과 달리 대중성의 강화나(전통적인 의미의) 음악적 성숙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수수께끼로 남길 원했다. 곡 제목부터가 알쏭달쏭하다. <22 (Over S∞∞N)> <10 d E A T h b R E a s T> <33 “GOD”>처럼 명료한 의미보다 모호한 이미지가 되길 원했다. 팩트 매거진은 이렇게 평했다. “지금까지 본 이베어가 숲속에 홀로 있는 우울한 남자의 이미지였다면, 《22,
[마감인간의 music] 이토록 큰 변화 - 본 이베어, 《22, A Mi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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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아무리 길어올릴지라도 ‘나(너)’는 결코 고통받는 ‘너(나)’가 될 수 없다. 네 고통의 곁에 내가 아프게 선다는 건 서로가 다른 좌표에 있음을 깨닫는 일과도 같다. 하지만 묻자. 그러면 그것은 괴로움이 아닌가, 고통이 아닌가. 치사하게도 사람은 자신이 아플 때 가장 아프다. 당사자의 고통과 공감자의 고통을 비교 측량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을 것이고, 야비하게도 사람은 자신이 아플 때 가장 아프다. 아픔은 이기적인 구석이 있다.
가끔 거울을 본다. 세월호 참사가 몹시도 힘들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나, 단원고 학부모들이 나와 엇비슷한 연배라는 사실을 빼놓기 어렵다. 우리집에는 고등학생이 산다. 그들의 집에도 고등학생이 살았다. 그 또래의 아이를 키운다는 것과 그 또래의 아이를 잃는다는 것이 대체 무엇일지, 답 없는 물음이 여전히 머리를 맴돈다.
약품을 얼마나 처넣었는지 알 수 없는 하얗고 매운 물줄기가 레이저광선처럼 직사되던
[노순택의 사진의 털] 미래를 잃자 과거를 살해당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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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백남기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마치 죽기만을 기다리는 듯 서울대병원 주위로 까마귀떼처럼 새까맣게 내려앉은 경찰들을 보는 순간, 머릿속을 불안하게 맴도는 단어가 있었다. 안티고네. 강제 부검을 위해 시신을 탈취하려는 공권력의 저 일사불란함, 세월이 무색하게 여전히 우리는 그렇게 안티고네의 시대에 붙박여 있었나 보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 그녀의 오빠 폴리네이케스는 독재자 크레온에 의해 짐승들의 밥으로 광야에 내던져진다. 죄인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지엄한 국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안티고네는 오빠의 주검이 짐승들에게 헤쳐지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몰래 장례를 치르고, 극형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렇게 안티고네의 세계에서 애도는 금기다. 가족을 애도할 권리, 같은 인간을 사랑하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가장 인간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국가의 법’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여기 한국에서도 수많은 안티고네들이 통한의 노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야만에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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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미친 사람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미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은 베르너 헤어초크다. 그의 영화에는 자신의 딸과 혼인해서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려는 일개 군인, 고무나무를 경작해서 돈을 벌기 위해 증기선을 산등성이로 끌어올리는 남자, 화산이 터진다고 모두가 대피한 섬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할아버지가 나온다. 그리고 내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다큐멘터리영화 <그리즐리 맨>에서는 13년 동안 여름마다 알래스카의 국립공원에 체류하며 곰과 함께 생활한 남자가 나온다. 그 남자의 이름은 티모시 트레드웰이고, 그는 결국 곰에게 잡아먹힌다. 헤어초크는 트레드웰이 틈틈이 촬영한 100시간가량의 필름을 편집하고, 그의 주변 인물을 인터뷰해서 영화를 만든다.
헤어초크가 미친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 세상에 미친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의외의 순간, 예상할 수 없는 것들,
[내 인생의 영화] 김승일의 <그리즐리 맨> 미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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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를 사랑하는 일은 가끔, 실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달리 줄 곳 없는 마음을 일생에서 겨우 찾아낸 한 대상을 향해 애써 쏟아붓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경외하는 영화에 대한 누군가의 비웃음을 들을 때. 나는 그 영화가 굉장했고 마음에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혹평하며 심지어 업신여길 때. 나만의 굉장한 발견을 남이 몰라주는 억울함이 아니라 내 감각이 타인과 공명하지 않는 것에 대한 슬픔. 대다수가 그다지 칭송하지 않는 영화를 개인의 성전(聖殿)에 올려두는 일은 마이너한 자신의 취향을 재발견하는 것이며 혼자서만 하는 사랑이다. 모든 외사랑은 쓸쓸하고 편협하다. 편협함은 결코 자랑스러워할 것이 못 된다. 하지만 바로 이 외사랑이 가능한 점 때문에 영화를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아닐까? 모두가 좋아/싫어한다는 말보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말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지금 영화를 보고 있다’는 감각
1997년, 고교 1학년이었던 나는 이미 완벽한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아수라>를 보고 나서 떠올린 <악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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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소리를 지르면 갈라지고 마는, 아직 불안정한 청년의 목소리가 “멈추어라” 만큼은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위엄과 의지를 뿜는다.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세자 이영(박보검)이 청량한 목소리로 “멈추어라”라고 말할 때마다 ‘이것이 옥음인가?’ 하고 잠깐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은 근엄한 체하던 목소리의 각을 “닭다리?” 따위의 장난스런 대사로 풀어버릴 때다. 그리고 이 속성은 드라마의 구석구석에 묻어난다.
궁궐을 로맨스의 무대로 삼는 이른바 퓨전 사극이 ‘국법이 지엄하거늘’로 반복되는 구시대의 규칙과 현재는 통용되지 않는 가치관에 기대어 금기의 쾌락을 끌어낼 때면 당연히 퇴행을 지적하게 된다. 역적의 딸 홍라온 (김유정)이 내시로 입궁해 왕세자와 사랑하는 <구르미 그린 달빛>은 남장 여인, 아버지와 불화하는 왕세자 등 잘 팔리는 설정을 다 끌어모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고 이전 드라마들과 겹치는 배역과 사건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유선주의 TVIEW] <구르미 그린 달빛> 금기와 규칙을 뛰어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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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은 고양이의 본능이다. 하지만 본능이라고 해서 그걸 반드시 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본능이 곧 재능이었다면 나는 맛있는 걸 먹고자 하는 본능으로 타고난 곰손이라는 유전적 한계를 극복하고 매끼 <한식대첩> 파이널에 필적하는 밥상을 차려 먹었겠지, 안 되면 <삼시세끼>라도. 하지만 장조림을 만들겠다고 간을 보다가 간장물만 한 사발을 마시고는 배가 불러 널브러지는 것이야말로 재능이 본능을 따라잡지 못하는 자의 슬픈 운명이다.
우리집 고양이 마요도 비슷하다. 사냥 본능이 매우 발달한 마요는 내가 쥐돌이를 던지면 초속 5m의 속도로 돌진하곤 한다. 그렇게 일직선을 그리며 달리고 달리고 달리다가 사냥감도 지나치고… 까먹는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 굵은 다리를 티코 바퀴처럼 돌리며 달려왔는지를. 그러고는 잠깐 어리둥절해하며 두리번거리다가 마치 원래 이런 볼일이 있어 현관까지 뛰어왔다는 듯이 그루밍을 두어번 하고는 머쓱해져서 돌아온다. 아아, 우리 마요, 5초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사냥꾼의 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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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1일의 전과 후, 나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과거도 포함해 그 의미가 크게 바뀌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의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에서 “영화가 감독의 인간관이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면, 나의 변화는 당연히 작품도 바꿀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지진도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리 없다”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동일본 대지진이 “지금까지 우리가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잊은 척하며 내달려온 문명을 근본부터 되묻는 사건”이라고도 덧붙였다. 몇주 전 <립반윙클의 신부> 홍보차 방한해 <씨네21>과 인터뷰를 가졌던(1074호) 이와이 슌지 감독도 “3·11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본에서 더이상 실사영화를 만들지 않고 해외 활동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진과 원전사고로 내가 태어난 나라가 큰 상처를 입게 됐다. 그렇게 상처입은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씨네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911 311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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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이 매서운 이 남자, 어쩐지 심상치 않다. 런던에서 태어나 10대 시절 프랑스로 건너간 이 남자는 거리에서 노숙하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바와 호텔 무대를 전전하며 식당 설거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겨우 꾸렸고, 돈을 조금 모아 들어가게 된 20유로짜리 호텔에서는 꼭 맨 밑의 침대를 고집했다고 한다. 행여 누가 자신의 짐을 훔쳐 달아날까봐서였다. 바로 이 남자, 벤자민 클레멘타인에게 영감의 수원지가 되어준 건 그를 프랑스로 이끈 시인들과 뮤지션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깨닫고는, 자신이 목격하고 겪었던 특별한 경험들을 시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 결과, 프랑스 언론들이 그에게 주목하면서 레코드 계약을 체결, 데뷔작 <At Least For Now>를 2015년 봄에 공개했다. 음반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우리 시대의 니나 시몬”이라는 찬사 속에 유럽 각지에서 차트 상위권에 올랐고, 마침내 뮤지션으로서 최고 영광이라
[마감인간의 music] 거리의 표정 - 벤자민 클레멘타인 《At Least For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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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 본가로 내려가며 나는 이번 명절은 꽤 쓸쓸하게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개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온갖 사랑을 다 받으며 살던 개가 8월에 갑자기 죽었고 나와 가족은, 특히 부모님은 일상을 지탱하던 든든한 기반 하나를 잃어버렸다. 나는 저녁 무렵 집에 도착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개도 없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쓰던 방에 들어가보니 개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개의 이름을 불렀지만 개는 오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쓸쓸했다.
다음날이 추석 당일이었다. 친가쪽이나 외가쪽이나 친척들이 없다시피 한 까닭에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나 그리고 동생하고만 명절을 지냈다. 그리고 차례상 주변에는 늘 개들이 있었다. 두세번인가 차례를 지내는 도중에 개들이 집을 나가는 바람에 차례고 뭐고 때려치우고 개들을 잡으러 뛰쳐나가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개가 없었다. 동생도 일이 바빠 오지 못한다고 했다. 차례상에 음식을 차리면서 아버지가 말
[한유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추석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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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관심 있는 작품은 언제나 최근에 본 것들이다. 예컨대 <인터스텔라>는 볼 당시에는 가슴 벅참을 느꼈지만 얼마 전 케이블TV에서 재방송을 보니 ‘저런 장면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잊은 상태였다.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가슴속에서 사라지는 영화를 과연 ‘인생의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래서 난 최근에 본 영화 중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영화 <서울역>을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의 영화’로 꼽으련다. <서울역>은 집에서 VOD로 봤다. 할 게 없어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극장과 달리 집에서 영화를 보는 건 산만해질 위험이 높다. 하지만 좋은 영화는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고, 난 거의 무아지경에 빠진 채 <서울역>을 봤다.
다들 알다시피 <서울역>은 연상호 감독의 작품이다. 그리고 연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다가 실사영화 <부산행>을 찍었다. <부산행>을 혼자 극장에 가서 봤다
[내 인생의 영화] 서민의 <서울역>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는 젊은 세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