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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는 누구였나. “내 말에 토…토…토다는 새끼… 배신이야 배신… 배반…” 흥분해 더듬거리는 말투로 ‘불사파’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삼류건달이었나, “학생은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나”같은 진지한 질문에 “저 학생 아닌데요”하던 엉뚱한 삼촌이었나.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광화문 네거리를 질주하던 슬픈 소시민이었나. 아니면 쵸코파이를 한입 가득 물고 “우리 북조선에서는 언제 이렇게 맛난 과자를 만드나”며 감격해 하던 사랑스런 전우였던가. 송강호는 어떤 배우였나. 아니 어떤 사람이었나.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실 하나. 송강호는 예민하고 치밀한 사람이다. 본인 말대로 하면 “상당히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다. 영화나 자신과 관련된 작은 기사하나까지 꼼꼼히 읽는것도 유명하고, 인터뷰 중엔 작은 멘트하나까지, 해도 되는 말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빛이 역력하다. 물론 대중적으로 소비되었던 송강호의 이미지는 “그래도 니가 쏴라!”며 호탕하게 웃는 ‘희극성 90%’ 스타
그 파괴적 변신의 쾌락,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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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전선 이상있다?’ 최근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의 초반 성적을 두고 충무로의 혹자는 제작사인 좋은영화, 그것도 김미희(38) 대표의 ‘선구안’이 예전 같지 않다고 수군댈지도 모르겠다. <주유소 습격사건>(1999)을 시작으로 지난해 <선물>과 <신라의 달밤>까지, 연달아 내놓은 영화 세편의 평균 서울관객 수가 100만명. 매번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호타준족’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에 비해, 이번 작품의 초반 기세가 대단한 돌풍을 예고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김 대표는 조급해하는 기색도 아니었고, 당황스런 눈치도 아니었다. 늦잠을 자고 나왔다는 그는 이번 영화가 앞으로 자신의 관심이 가닿는 지점을 분명히 보여준 것에 대해서 오히려 만족스럽다고 했다. 또 ‘흥행제조기’라는 패찰을 고수하는 것보다는 이제껏 미뤄둔 새로운 영화들을 만들어간다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장규성
<피도 눈물도 없이> 개봉한 좋은영화 대표 김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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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순넷이 돼도, 여전히 날 필요로 할 건가요?” 세월이 흘러도 연인의, 혹은 팬들의 감정이 변치 않길 바라는 마음을 노래한 비틀스의 의 가사를 빌려 얘기하자면, 주디 덴치는 이미 확실한 예스의 대답을 들은 배우다. 예순넷에서도 4년이 지난 예순여덟. 그녀는 여전히 영화가, 무대가, 관객이 원하는 배우니 말이다. 아니, 환갑의 나이를 넘기면서 오히려 영화계의 구애는 더욱 열렬해진 듯하다. 매년 꼬박 2∼3편씩 찍을 만큼 손짓하는 영화가 많아진 것도, 오스카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각종 시상식에서나 매스컴에서 앞다퉈 그녀의 연기에 갈채를 보내게 된 것도, 60대 중반에 접어든 9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최근에도 주디 덴치는 <아이리스>로 영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골든글로브와 오스카에 나란히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라 있다.
<아이리스>는 영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철학자인 아이리스 머독의 삶을 다룬 영화. 머독이 강단에서 갑자기 노래로 인사를 대신할 때의 당당
예순여덟, 스크린의 구애는 계속된다, 주디 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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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 아니 추상미가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커다란 눈동자만큼이나 시원한 목소리의 인삿말과 악수를 청하는 작은 손을 한꺼번에 내밀면서. 연극무대에서부터 몸에 밴 직선처럼 명쾌한 음색과 몸짓. 며칠 전 스크린 속에서 만났던 <생활의 발견>의 흐너적거리던 선영은 벌써 어디로 숨어버렸나. 몇 번 눈을 마주친 끝에 권태로운 유부녀의 일상을 깨뜨려준 ‘신선한 장난감’ 경수의 심장을 떨리게 했던 눈웃음. 그건 여전하다.
<꽃잎> <접속> <퇴마록> <세이 예스>에 이어 다섯번째 영화 출연작인 <생활의 발견>은 추상미에게 ‘복잡미묘한 연기의 발견’이기도 했다. 무명배우 경수의 1주일간의 짧은 연애담인 <생활의 발견>에서 추상미는 춘천의 여인 명숙을 뒤로 하고 떠난 경수가 기차 안에서 만난 경주의 여인 선영. 묘한 눈웃음과 진위를 알 수 없는 말로 경수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다음, 막상 뒤따라온 경수를 보고는
<생활의 발견>의 선영, 추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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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나리오를 가슴에 안고 아파서, 가슴속 깊은 곳이 너무 아려와서 한동안은 그렇게 멍한 채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내가 해야겠다. 해보고 싶다. 소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정 - ‘컨셉북 <버스, 정류장> 중’
“어, 내가 왜 이러지? 어우∼ 야, 나 왜 이래요….” <버스, 정류장>의 첫 시사회. 이미연 감독과 김태우가 순서대로 인사를 한 뒤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첫 인사를 떼던 김민정이 갑자기 주저앉듯 무너진다. 주르르륵,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려내리는 통에 옆에 있던 김태우가 “신인여우상 받는 장면을 예행연습 하나봅니다”라고 재치있게 넘어가긴 했지만, 정작 당황한 건 본인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냥 무대 올라가기 전부터 기분이 너무너무 이상해서 누가 야!, 라고만 불러도 당장 울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글쎄 뭐였을까. 긴장, 기대, 두려움, 이런 것들이 다 섞였던 게
<버스, 정류장>의 소희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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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기가 뿌려대는 빗줄기 속에 놓여진 평창동의 버스 정류장에서, 늦가을 차가운 새벽 바람을 맞고 있는 성북동의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의 상처를 감당하기 버거워 훌쩍 사라져버리는 어린 소녀를 기다렸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재섭이 되어가고 있었다….”
김태우 - ‘컨셉북 <버스, 정류장> 중’
남자가 운다. 꺽꺽 소리내어 서럽게 운다. 열일곱 어린 소녀 앞에서 엄마품에 안긴 소년처럼 서럽게도 울어댄다. “어떻게 울어야지, 이런 느낌을 살려서 울어야지 하는 생각도 없었어요.” 어쩌면 꿍 하니 웅크리고 살아왔던 초라한 서른둘 인생을 위한 한 바탕, 어쩌면 찰 것도 빌 것도 없던 마음에 큰 구멍 하나를 내버린 소녀를 향한 한 바탕. 차곡차곡 쌓아왔던 감정들이 분출구를 찾은 순간, 재섭도 김태우도 아무런 계산없이 그렇게 울고 있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김태우를 알아왔다고 자부해도, 그의 연기를 드라마나 영화에서 수차례 봐왔다고 방심해도, <버스, 정류장>의 김태우
<버스, 정류장>의 재섭 김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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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복절도할 엽기적인 커플도 봤다.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운 커플도 봤다. 간혹 서먹서먹한 커플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커플도 봤다. 그러나 이렇게 따뜻하게 기분좋은 커플은 처음이다. “선생님은 진실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같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열일곱 소녀와 “세상을 띄엄띄엄 살 순 없을까?”며 자문하는 서른두살 남자. 그들의 만남과 소통을 그린 <버스, 정류장>의 김태우와 김민정은, 얌전하고 내성적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세상없이 유쾌한 청춘들이었다.
“내 얼굴이 어려 보여서 그런 거야.”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해서 그런 거라니까요.” 71년생, 82년생. 한살 빠진 띠동갑인 이들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놀리다가 여고생처럼 맞장구치며 속닥거리는 모습은, 누구에게 실례인지는 모르겠지만, 동갑의 연인 혹은 익숙한 친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막역함도 “백이면 백, 모든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나리오”를 들고 “가장 근접한 느낌”을 찾기 위해 감독
<버스, 정류장>의 김민정, 김태우의 행복한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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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가는 길> 등 일련의 경마장 시리즈와 <새> <진술> 등을 통해 새로운 소설을 해온 작가 하일지씨가 또 한번의 실험을 감행했다. 지난 2월에 <마노 카비나의 추억>(민음사 펴냄)이라는 시네로망을 내놓은 것이다. ‘시네로망’이란 영화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읽히기 위해 쓴 시나리오. <마노 카비나…>는 50살의 시인 서인하가 자신에 관한 문학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는 현장에서 만난 23살의 여자 강수미를 보면서 느끼는 심리적 변화와 그로 인한 내면 파괴를 그리고 있다. <경마장 가는 길>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 등의 소설이 영화화되고, <경마장 가는 길>을 직접 각색하는 등 하일지씨와 영화계의 인연은 꽤 가까운 편. 처남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갑자기 체포된 철학교수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소설 <진술>도 배우 박광정이 감독 데뷔작으로 영화화하고 있다.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
시네로망 <마노 카비나의 추억> 출간한 소설가 하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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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그를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었건, 2002년 현재 스티븐 소더버그는 주류 할리우드 제1급의 재능을 지닌 감독이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인디와 메인스트림 양쪽 진영을 향해 영구 중립을 선언하고, 포커 테이블에 앉은 ‘꾼’처럼 조용히 이분법을 무너뜨려가는 전략으로 지금의 의자를 차지했다. 3월1일 개봉하는 그의 신작 <오션스 일레븐>은 범죄영화를 매만지는 그의 숙련된 솜씨와 스타의 육체에 신선한 피를 돌게 하는 재주를 마음껏 자랑한 영화다. 8500만달러짜리 오락영화를 만들면서도 특유의 근면함과 기동력을 잃지 않았다. 일요일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트래픽> 촬영을 마친 이튿날 캘리포니아 버뱅크로 날아와 점심을 먹으며 <오션스 일레븐>의 시나리오를 수정했던 그는 지난해 3월 오스카 시상식 이튿날 새벽 6시부터 라스베이거스 현장에서 ‘액션!’을 외쳐 소더버그의 감독상 수상을 핑계로 밤새 축배를 들며 여유를 부렸던 <오션스 일레븐> 팀을 아연실색하
<오션스 일레븐> 만든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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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여길 봐 주세요, 러셀!” 여기저기서 포토콜 요구가 이어졌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황급히 걸어 들어간다. 짧은 턱수염과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자란 고수머리, <글래디에이터> 때보다 족히 5, 6kg은 불어난 듯한 육중한 몸집. 그는 기자회견장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드럼치듯 신경질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함께 자리한 감독 론 하워드와 제니퍼 코넬리가 민망할 만큼 질문은 러셀 크로에게만 집중되고, 당일 후보작 발표를 한 오스카 관련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염문설을 뿌렸던 니콜 키드먼에 대해 “그녀는 지금 라스 폰 트리에와 함께 스웨덴에 있소. 나쁜 날들을 보내고 있을 게 분명하지, 하하”라며 특유의 괴상한 조크를 선사하던 그는, “머리(brain)와 근육(brawn) 중 어떤 걸 쓰는 걸 좋아하느냐”는 황당한 질문이 튀어나는 순간, 마치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듯 과장된 정중함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부탁드리는 바이지만 그런 쓸데없는 질문은 제
젠장, 할리우드보다 소와 대화하는 게 더 좋다니까, 러셀 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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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TV에서 예지원을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가요 청백전 스타일의 오락 프로그램이었는데, 거기서 예지원의 활약은 대단했다. 머리를 틀어올리고 차이니스 드레스를 입은 채 조신하게 <홍콩 아가씨>를 부르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머리를 산발하고 겉옷을 거칠게 벗어 내던지더니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무대를 활보하며 <배반의 장미>를 불러젖혔다. 대본도 강요도 없었다. 그냥 예지원의 ‘설정’이었다. 예기치 않은 반전, 아니 배반에, 녹화장도 안방도 뒤집어졌다. 예지원이 자신을 희화화해서가 아니라, 그 가무가 장기자랑이라는 무대에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고 열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불면 날아갈 듯 작고 가녀린 몸매, 오목조목 참한 이목구비의 이 아가씨가 준비한 진짜 ‘반전’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예지원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언제부턴가 <여고시절>의 왈패가 됐지만, 그 전엔 정반대였다. <꼭지>나 <줄리엣의
왈패본색, <생활의 발견>의 예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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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시장점유율을 높여가는 동안 직배사들도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지난해 <번지점프를 하다> <소름> <나비> 등을 배급했던 브에나비스타 코리아가 올해 <폰>이라는 한국영화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것도 직배사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려는 의도일 것이다. 과연 지난 10년간 메이저로 자리잡아온 직배사 대표가 바라보는 2002년 영화계는 어떤 모습일까?브에나비스타 코리아 대표 김상일씨는 비교적 일찍 이런 시장흐름을 감지한 인물이다. 97년 <남자의 향기>를 배급하면서 한국영화 배급을 시작한 그는 99년 <댄스 댄스> 투자, 배급을 통해 얼마간 수업료를 내기도 했다. 지난해 <씨네21>이 집계한 ‘한국영화 파워 50위’ 안에 직배사 대표로 유일하게 꼽힌 것도 2000년 직배사 가운데 매출 1위를 차지한 것 이상으로 <시월애> <오! 수정> 등 한국영화 배급에 적극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역회사인
한국영화 <폰>에 투자하는 브에나비스타 코리아 대표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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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5일 로스앤젤레스 포시즌 호텔에서 <콜래트럴 데미지>의 홍보를 위해 인터뷰에 참석한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만났다. 엄청난 거구가 들어설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아놀드는 보통 사람보다 약간 큰 키에 환한 미소를 띈 사람이었다. 본인도 스스로 흉내내며 웃음거리를 만드는 오스트리아 액센트가 섞인 영어 발음과 약간은 둔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놀드 슈워제네겁니다. 이번엔 무슨 영화냐고요? 에이 잘 아시면서…. 네, 또 액션영화입니다. 이번엔 로스앤젤레스에서 소방관이 되어 마천루 테러사태로 억울하게 죽은 가족의 복수를 위해 콜롬비아까지 날아가 테러리스트들을 혼내주는 역할이죠. 많이 들어보셨잖아요. 9월11일 뉴욕테러 사태가 나자마자 개봉이 연기된 그 영화 말입니다. 네, <콜래트럴 데미지>요. 에, Collateral은 사전을 찾아보시면 ‘부차적인’ 뭐 그런 뜻이고, Damage는 ‘손상, 피해’ 이런 뜻인 거는 잘 아실 테고요. 그러니까
돌아온 영웅, <콜래트럴 데미지>의 아놀드 슈워제네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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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을 기다렸다. 단 하루 촬영한 <초록물고기>부터 인터넷 영화 <극단적 하루>까지 꼽으면 출연작은 줄잡아 10편. 눈 까뒤집고 찾지 않아도 정재영이 발견되는 영화는 <킬러들의 수다> 정도일까.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하고 대학로에 뛰어든 스물여섯부터 약 6년. 연극무대와 조·단역 생활을 거쳐온 많은 배우들의 길을 따라 걸으며 정재영은 묵묵히 기다렸다. <킬러들의 수다>의 냉철하고도 엉뚱한 킬러로 멋지게 한방 날렸던 그는, 마침내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펄펄 난다. 전직 복서 출신의 투견꾼 독불이로 물고 물리는 개싸움 같은 인생의 진창을 뒹굴며, 살기 위해 한없이 비굴해지는, 그러나 원시적 폭력성이 터져나오는 순간 마침내 모든 곤경을 휴지통에 처박아버리는, 거세당한 마초의 속살을 드러내면서.
삐쭉삐쭉하게 내린 앞머리도 독불이의 컨셉 때문이라지만, 예쁘장하기까지 한 눈에 사람좋은 웃음만 봐서는 그에게서 좀체 험악한 구석을 찾아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이, 정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