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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대신 쾌락을 느끼다 죽게 하는 독약이 있다. 광둥오페라 <옥의 사형집행인>은 이 독약을 발명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월극이라고도 불리는 광둥오페라는 경극과 오페라를 결합한 무대극이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로 결정했다면 감독은 이야기의 어떤 점에 가장 이끌렸을까. <옥의 사형집행인>을 원작으로 한 <레드나잇>을 보면 감독은 망상에 빠진 채 살인에 심취한 여성 캐릭터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캐리(오가려)는 자신이 전생에 ‘옥의 사형집행인’이라 믿는 여자 살인마다. 비닐로 입을 막은 뒤 칼로 배를 찌르는 등 수많은 여성들을 밀실로 유혹해 제법 잔인하게 죽인 그다. 어느 날 그는 독약이 담긴 골동품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갖는다. 그 골동품은 프랑스 여자 캐서린(프레데릭 벨)이 자신의 애인을 죽인 뒤 훔친 것이다. 캐서린은 골동품을 비싼 값에 팔아 달아나려고 하고, 캐리는 대리인인 산드린(캐롤 브라나)을 통해 골동품을 챙긴
독약이 담긴 골동품 <레드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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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하라다 도모요)의 첫사랑은 초등학생 때 동네 도서관에서 읽은 그림책 <달과 마니>의 주인공 마니였다. 마니는 태양 때문에 마르고 쇠약해진 달을 위로하며 “네가 빛을 받아서 또다시 누군가를 비춘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설명해주는 속깊은 소년이다.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마니를 찾다 지친 리에는 마니는 없다고 결론내린다. 그런 그녀에게 미즈시마(오이즈미 요)가 손을 내밀고, 홋카이도 쓰키우라에 정착한 두 사람은 ‘카페 마니’를 연다. 미즈시마는 빵을 굽고 리에는 커피를 내리는 카페 마니 2층에는 여행객을 위한 아늑한 침대도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동네 사람들이 아침마다 들러 서로 인사를 나누고 커피 한잔을 마시는 마을 회관 역할을 한다. 넓은 호숫가에 자리한 카페 마니는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외진 곳이라 낯선 손님은 거의 없다. <해피 해피 브레드>는 카페를 거쳐가는 낯설고 특별한 손님들이 들려주는 세 가지 사연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손님 가오리는
유별나지않아 특별한 인생의 답 <해피 해피 브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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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인 피터 파커(앤드루 가필드)는 어느 날 실험실의 돌연변이 거미에게 물린 뒤, 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과 같은 거미의 초능력을 갖게 된다. 새로 생긴 능력에 도취되어 오만방자해 있던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그를 키워준 삼촌 벤의 죽음. “거대한 힘에는 거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삼촌의 유언을 따르고 삼촌을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피터는 가면과 유니폼을 입고 뉴욕의 자경단원이 되는데, 그의 새 이름은 바로 스파이더맨…. 이미 그런 내용의 영화를 최근에 한편 보았다고? 하긴 그렇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이 2002년작이니,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딱 10년 만의 리부트다. 2005년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가 나왔을 때, 이렇게 빨리 리부트가 나와도 되느냐고 다들 걱정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팀 버튼의 <배트맨>은 88년작,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과 로빈>은 97년작이었다.
10년만의 리부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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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내 모습이 낯설어 보일 때가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곧 여느 때와 같은 자신의 얼굴이란 것을 인지하며 우리는 안도감을 느낀다. <페이스 블라인드>는 자신의 모습을 비롯해 가족, 친구, 애인의 얼굴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데서 오는 공포를 다루고 있다. 친구들과 즐거운 술자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밤, 애나(밀라 요보비치)는 우연히 연쇄살인마의 범죄현장을 목격한다. 자신을 쫓는 범인을 피해 도망가던 그녀는 다리 밑으로 추락하면서 난간에 머리를 부딪히고 그 충격으로 ‘안면인식장애’를 앓게 된다. 살인마는 애나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와 그녀의 애인, 친구들까지 위협하고 애나는 떠오르지 않는, 아니 바로 옆에 서 있어도 얼굴을 구별할 수 없는 살인마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그런 애나는 형사 케레스트(줄리언 맥마혼)와 범인을 기억하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자신이 처한 현실에 좌절감만 느낄 뿐이다.
얼핏 <페이스 블라인드>는 보이지 않는 살인마에
보이지 않는 살인마 <페이스 블라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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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얏타맨은 추억의 이름이다. 물론 얏타맨이라는 이름으로는 아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얏타맨>은 지난 1977년, 지금은 사라진 방송국 <TBC>를 통해 <이겨라 승리호>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어 큰 인기를 모았다. 오랫동안 한·일 양국에서 추억의 상품으로만 남아 있던 <이겨라 승리호>는 지난 2009년 <이치 더 킬러>의 미이케 다케시가 실사영화로 만들어 애니메이션 원작영화로는 드물게 비평과 흥행에서 성공을 거둔 바 있다. 미이케 다케시의 영화와 달리 <뉴타입 히어로 얏타맨>은 완벽하게 유년 관객을 타깃으로 해 완성한 애니메이션이다.
토이토이 왕국은 장난감을 사랑하는 아이들의 나라다. 그런데 왕국의 실력자인 퍼즐 장군은 지구를 퍼즐처럼 파괴할 수 있는 비밀병기를 극비리에 제작 중이고, 심지어 얏타맨 1호의 아버지가 인질로 잡혀서 비밀병기 개발을 돕고 있다. 토이토이 왕국의 초대장을 받고
70년대를 추억하고 싶은 이들에게 <뉴타입 히어로 얏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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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한 음악이 깔리고 능숙하게 전범을 체포하는 최정예 외인부대가 등장한다. 탈레반에 납치된 종군기자 엘자(다이앤 크루거)를 구출하는 일도 그들에겐 아주 손쉬울 것으로 예상된다. 기대대로 엘자를 구출하는 일은 신속하게 끝난다. 그러나 영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본부와 교신이 끊기는 바람에 팀원들과 엘자는 예상치 못했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엘자를 노리는 탈레반의 추격이 점차 거세지는 가운데, 팀원들과 엘자는 국경을 향해 험난한 도피를 시작한다.
탈레반과 엘자 사이의 집요한 추격과 도망은 신념 싸움이 된다. 팀원들에게 엘자는 구해내야 하는 인질인 동시에 인권과 정의의 상징이다. 엘자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진 것임에도 팀원들과 엘자는 서로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저 이 모든 상황이 당연한 길이기 때문이다. 정작 팀원들과 엘자를 두렵게 하는 것은 탈레반보다도 자연이다. 온갖 전투기술로 단련된 그들에게 탈레반의 허술한 공격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 문제는 적의 수
자연과의 투쟁 그리고 인권 <스페셜 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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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성정체성을 고민하던(<소년, 소년을 만나다>(2008)) 사춘기 소년은 대학에 진학해 남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하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눈치챈 어머니에게 커밍아웃한다(<친구사이?>(2010)). 김조광수 감독이 단편을 만든 시기순대로 나열하면 ‘동성애에 눈뜬 한 소년의 성장담’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소년이 30대가 되면 동성애자로서 어떤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그것을 또 어떻게 극복하려 할까.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영화는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의사 커플(?)의 행복한 결혼식에서 시작한다. 남자 민수(김동윤)는 게이이고, 여자 효진(류현경)은 레즈비언이다. 민수는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고, 효진은 진짜 연인인 서영(정애연)과 함께 키울 아기를 입양하길 원한다. 그러니까 이 결혼식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두 사람의 위장결혼이다. 그러나 무지갯빛 미래도 잠시뿐. 우
30대 게이의 사랑과 우정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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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비가스 루나라는 이름으로부터 절로 떠올리는 영화가 하나 있다. 하비에르 바르뎀과 페넬로페 크루즈를 전세계에 소개한 1994년작 <하몽 하몽>이다. 비가스 루나는 이후에도 <골든볼> <달과 꼭지> <밤볼라> 등 가히 스페인적으로 섹시한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어떤 면에서 비가스 루나의 대표작들은 순결무구한 에로스의 동화라고 부를 만하다. 조금 덜 고상하고 조금 더 상업적인 페드로 알모도바르라고나 할까.
<디디 할리우드>는 2002년작 <마르니타> 이후 10년 만에 복귀한 비가스 루나의 신작이고, 무대는 스페인이 아니라 할리우드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바텐더 일을 하는 다이아나 디아즈(엘사 파타키)는 스타가 되기 위해 미국 마이애미로 무작정 떠난다. 마이애미에서 입에 풀칠도 못하며 고생하던 다이아나는 조감독으로 일하는 로버트(루이스 하차)와 사랑에 빠져 할리우드로 향하고, 거기서 공격적인 에이전트 마이클(피터 코요
할리우드 드림 <디디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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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럴리가 없어>는 영화사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가 만든 두 번째 영화다. 만약 그의 데뷔작 <맛있는 인생>을 본 적이 있는 관객이라면 조성규 대표, 아니 조성규 감독이 자신의 취향을 담은 개인적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맛있는 인생>이 미식가로서의 자신을 반영한 연애영화였다면, <설마 그럴리가 없어>는 음악 감식가로서의 감독 자신을 반영한 연애영화다. 그렇다. 이것 역시 연애에 대한 이야기다.
여배우 윤소(최윤소)는 개그맨 황현희와 사귀다 차인 것 때문에 엄청난 조롱거리가 된 뒤 소속사로부터는 연애 금지령을 당한다. 돈도 없고 성격도 소심한 서른다섯 뮤지션 능룡(이능룡)은 누나의 강압에 의해 결혼정보업체를 찾았다가 가입 불가라는 말을 듣고 또 한번 좌절한다. 그러던 어느 날 능룡은 일종의 소셜 데이트 서비스인 ‘이음’에 가입하고 거기서 윤소를 만난다. 재미있게도 능룡은 윤소가 주연인 영화의 음악을 작업하고
인디 음악계의 <노팅힐> <설마 그럴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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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용산의 철거민들이 농성을 시작했고, 이를 경찰이 진압했다.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죽었다. 사람들은 경찰의 과잉진압이 가져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잉진압이 진실이든 그렇지 않든 결과적으로는 농성에 참가했던 철거민들이 이 사건의 책임자로 규정돼 지금까지 감옥에 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단 두 부류다. 철거민과 경찰. 철거민의 입은 봉쇄됐고 이제는 경찰에 물을 수밖에 없다. 경찰과 그들의 수뇌부는 그때 어디서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두 개의 문>은 감춰진 동시에 파헤쳐지지 않았던 질문을 통해 “추웠고, 따뜻했고, 나중에는 뜨거웠던” 그날의 온도를 재구성한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로서 <두 개의 문>이 지닌 힘은 역시 기록과 구성에 있다. 연출을 맡은 이들이 직접 촬영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용산에 있었던 카메라(칼라TV, 사자후TV, 채증동영상, CCTV)에 담긴 영상들은, 농성 시작부터 진압까지의 25시간
그날의 온도 <두 개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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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금이라고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행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적당한 맞장구나 마음에도 없는 ‘샤바샤바’가 때로는 필요할 때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온몸이 그걸 거부하는 성격의 소유자라면 매 순간 두드러기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아부의 왕>의 동식(송새벽)은 아부를 못하거나 아부가 몸에 맞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부의 개념이 뭔지 모르는 눈치없는 직장인일 뿐이다(그 말을 달리 해석할 수 있다. ‘포텐’만 터지면 그는 아부계의 기린아가 될 수 있다!). 홈쇼핑 사업권을 따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오로지 최선을 다하라”는 ‘갑’의 형식적인 한마디를 듣고 산행에서 갑을 가볍게 앞지르질 않나, 분위기가 좋지 않은 팀회의가 끝나자마자 “먼저 들어가봐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서질 않나. 혀 하나로 살아남아야 하는 영업팀에 동식이 버려지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동식은 엄마가
“감성 영업”의 진수 <아부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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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안 해본 걸 해보도록 하세요.”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1976년 용띠생의 만화가 천수로(고현정)에게 의사가 내린 처방이다. <미쓰GO>는 그녀가 살인현장을 목격하고, 사람들에게 쫓기고, 사랑까지 하게 되면서 정말 겪어본 적도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는 이야기다. 대인기피증 때문에 중국집 배달 주문도 손수 못하는 그녀는 어느 날 한 수녀의 도움을 받고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수녀가 사랑한 남자에게 노란 장미 한 다발과 케이크를 대신 전해주는 게 그녀의 부탁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기로 한 남자는 칼에 맞은 상태고, 수녀로 변장했던 ‘미쓰 고’는 차에 치여 죽는다. 천수로는 사건 현장에 있었던 여자라는 이유로 미쓰 고로 오인된다. 마약과 돈 500억원의 행방 또한 미쓰 고로 오인된 천수로만이 알고 있다는 오해가 생긴다. 범죄조직에 잠입한 언더커버인 빨간 구두(유해진)가 천수로의 주변을 맴도는 가운데, 경찰인 성 반장(성동일)과 마약조직의 보스 사영
배우 고현정의 변신 <미쓰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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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포스터가 붙은 스웨덴계 대기업의 파리 지부, 그곳에 젊고 아름다운 프랑스 여인 나탈리(오드리 토투)가 채용된다. 회사의 사장마저 매력적인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지만 그녀에겐 오직 남편, 첫눈에 반해 결혼에 골인한 프랑수아뿐이다. 하지만 급작스런 교통사고로 남편이 세상을 떠난다. 홀로 남게 된 나탈리, 그녀는 일에만 전념하며 3년이란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그녀의 앞에 새로운 사랑이 불쑥 나타난다. 상대는 같은 회사의 부하직원인 마르쿠스(프랑수아 다미앙). 운명과도 같은 키스를 통해 그들은 급작스레 친해지지만 이들 ‘미녀와 야수, 직장상사와 부하의 관계’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순탄치 않은 연애, 하지만 이 남자의 매력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영화 속 이케아 가구처럼 북유럽 특유의 엄격함과 무뚝뚝함을 무기로 마르쿠스는 나탈리를 사로잡는데, 이에 반기를 들 여성 관객은 아마 없을 것이다.
20여개 국어로 번역되고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다비드
그녀를 향한 사랑의 충직함 <시작은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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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어미로 보이냐?” 한때 유행했던 이 썰렁한 농담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공포영화로 펼쳐보면 어떨까. 그 한 가지 보기가 매티스 반 헤이닌겐 주니어의 <더 씽>일 수 있겠다. 노르웨이 탐사대는 남극 대륙에서 빙하 시대 이전의 것으로 짐작되는 구조물과 빙하에 갇힌 외계 생명체를 발견하고 연구를 진행한다. 하지만 조직 샘플을 채취하던 중 괴물이 깨어나고, 기지는 공포의 도가니가 된다. 진짜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케이트 로이드(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박사가 괴물이 대상복제술을 통해 목숨을 부지한다는 사실을 알아내면서다. 그러니까 A라는 사람을 잡아먹은 괴물은 A로 둔갑해 돌아다니다가 위험에 처하면 B를 포획해 B의 몸을 하고 다시 나타난다. 그때부터 흡사 ‘마피아 게임’과 유사한 범인잡기 놀이가 시작된다. 단, 눈으로는 복제품과 진품을 구분할 수 없을 테니 고도의 작전이 필요할 것이다.
듣고 보니 어디서 본 영화 같아 고개를 갸우뚱했다면, 맞다. <더 씽>
괴물과의 ‘마피아 게임’ <더 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