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우리 속담이 저주스럽습니다. 사이버펑크를 얘기하는 시대에 무슨 놈의 얼어죽을 색깔론입니까. 홧술깨나 마신 듯한 후배가 전화로 분통을 터뜨린다. 어느 문학잡지의 추천으로 시단에 나온 후배는 자기 본업이야말로 재야 영화평론가라고 떠들고 다닌다. 그 바닥 인간들 수준이 본래 그런 걸 어떡하냐는 내 말투가 못마땅했는지 녀석은 영화판을 겨냥한다. 한국영화와 조폭의 인연 한번 질깁디다. 욕을 못해 환장했습니까. 도대체 왜 그리 거칠고 시끄럽죠? 세상도 나도 물 속으로 가라앉았으면 좋겠어요. 침묵이 그립습니다.침묵이 그리운 녀석에게 침묵의 힘을 보여주기로 했다. 비를 맞으며 매표소 앞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는 감독보다 행복한 이가 또 있을까. 부럽고 흐뭇한 풍경이었다. 닭백숙을 뜯을까, 자장면을 말아올릴까. <집으로…> 를 보고 나온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하던 끝에 중국집에 들어갔다. 아무리 자장면이 맛있어도 옆에서 짬뽕 국물 들이키는 소리가 들리면
마침내 망막에 남은,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이여!
-
나에게 할당된 원고지가 10장 이내인 관계로, 필요한 몇몇 정보를 짧게 설명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정보 1) 난 외할머니가 계시다. 아직까지 건강하시다.(정보 2) 외할머니랑은 다섯살 때부터 여덟살 때까지 같이 살았었다.(정보 3) 외할머니랑 살던 시절, 옆집엔 인종이란 동갑 친구가 살았었고, 양 집안간엔 잦은 왕래가 있었다. 그래서 인종이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날 어떻게 키우셨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다.할머니가 나한테 뭘 해주셨더라?난 가끔씩 인종이 집엘 놀러 간다. 그때마다 인종이 어머니는 날 반갑게 맞이해주시고는, 인종이가 여자친구가 없다면서 걱정걱정을 하시다가, 5만원 상당의 팔뚝만한 굴비를 구워주신다. 그리고는 내 외할머니께서 건강하신지 안부를 물으신다. “너 니네 외할머니께 잘 해 드려야 된다. 너한테 정말 잘 해주셨다.”솔직히 난 외할머니께서 나한테 뭘 얼마나 잘 해주셨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기껏 기억하고 있는 건, 엄마한테 왜 등을 안 긁어주냐고
상우는 반드시 큰 돈을 벌어야 한다
-
김상진 감독과 장규성 감독. 두 사람은 ‘부적절한 관계’다. 그렇게 지낸 지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래서인지 요즘 두 사람은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필요할 때면 실컷 까발리고 다닌다. “이번에 <재밌는 영화> 만든 장규성이, 사실 내가 낳았다”라거나, “저, <신라의 달밤>의 김상진 감독 새끼거든요” 하고.그저 웃자고 하는 농담이 아니다. 두 감독의 나이 차이는 고작해야 세살. 하지만 장 감독에게 김 감독은 그것 ‘이상’이다. 적어도 “웃길 수만 있다면, 망가져도 좋다”며 당분간 코미디 장르만을 시추하겠다는 장 감독에게 김상진 감독은 지금까지 믿음직한 길잡이였다. <돈을 갖고 튀어라>부터 <투캅스3>까지 조감독을 맡아 자신을 믿고 따라준 장 감독에 대한 김 감독의 애정도 마찬가지.4월12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장 감독의 데뷔작 <재밌는 영화>의 첫 시사회가 있던 날. 낮술이라도 한잔 걸친 듯한 김 감독의 상
전반전 - <재밌는 영화> 재밌는 대담
-
김정은이 자리를 뜨자 그 사이를 틈타 두 감독은 각각 자기 일에 열심이다. 김 감독은 사진기자에게 “<광복절 특사> 아시죠. 제 작품도 좀 신경 좀 써주세요”라고 홍보전을 펼치고, 장 감독은 휴대폰을 들고서 “뭐, <할리데이> 원곡은 안 된다는 게 말이 돼”라고 다소 언성을 높인다. 막간 5분이 지나고, 두 사람 다 “이제 됐죠?”라고 한마디. 바쁜 모양이다. 그러나 사제간의 허물없고 뼈있는 대화가 궁금한 이들은 “아니, 이제 시작인데요”라고 응수했다. 후반전은 그렇게 재개됐다.김상진 >>> 지금이 비수기라 어떨지 모르지만 난 폭발적인 관객층을 모을 것 같아. 다시 보는 관객도 꽤 많을걸.장규성 >>> 전 신기한 게 감독님의 바로 그런 긍정적인 반응이거든요. 한없이 유치하고 황당하다고 하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아, 그런데 잘될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아요?김상진 >>> 그냥 감이지 뭐. 그걸 어떻게 따지냐. 다소 그런
후반전 - <재밌는 영화> 재밌는 대담
-
-
<생활의 발견>엔 비밀이 있다. 홍상수 감독은 훨씬 부드럽고 평이한 듯 보이는 <생활의 발견>에 그 비밀을 전작들에서보다 더욱 깊이 묻어놓았다. 정성일씨는 홍상수 감독이 면밀한 계산으로 혹은 직관과 무의식으로 묻어놓은 비밀을 찾아나섰다. 이 비밀 찾기 여행은 간단하지 않다. 꽤 길고 난코스도 있지만, 무사히 완수한다면 보답이 있다. 영화를 읽는다는 것의 진정한 기쁨. <생활의 발견>은 정말 비밀투성이었다! 편집자나는 그 작품을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읽고 나서 나의 생각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허구적 작품 속에서 독자는 매번 여러 가지 가능성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나머지들은 버리게 됩니다. (중략) 이렇게 해서 그는 다양한 미래들, 다양한 시간들을 선택하게 되고, 그것들은 무한히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증식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 ‘이야기’가 가진 모순들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호르헤 보르헤스, <끝없이 두 갈
성일, 상수의 영화를 보고 회전문을 떠올리다
-
2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그러니까 이 산술법과 달리 영화 안에서 벌어진 사실들로 다시 말할 수도 있다. 우선 이 영화를 나누는 방법은 날짜로 계산하는 방법이 있다. 여기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이 영화의 홍보 카피는 ‘그의 본色과 그녀들의 본心이 함께하는 6박7일 트루(?) 로맨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5박6일의 여행이다. 더더구나 ‘그녀들과 함께하는’ 로맨스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여기서 다시 하루를 빼야 한다. 만일 6박7일이 맞으려면 선배 성우의 전화를 받고 집에 가는 길에 ‘트루 로맨스’가 한번 있어야 한다. 여기서 ‘그녀들’도 모호하긴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춘천에 가서 옷 벗는 술집에서 파트너와 ‘트루 로맨스’가 하나 더 있어야 이 셈이 맞기 때문이다(만일 술집 파트너들과 옷벗기 내기 한 것도 ‘트루 로맨스’라고 해도 5박6일이 맞다). 그러나 경수는 (추정하건대) 서울에서 선배 상우의 전화를 받고 그냥 집에 가서 잤으며, 춘천의 첫날밤에
제2장 자막
-
3그러니까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중략) 그런데 우리는 회전문을 보지 못했다.3-1그것을 보지 못한 것은 이유가 있다. 선배 성우가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 발길을 막은 것은 가방 공장 사장이다 (그러나 가방 공장 사장과 그의 일행이 청평사에 우연히 산책하는 길에 왜 성우가 동행하기 싫어하는 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여기에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을 방해하는 두번째 이유. 성우의 회전문에 관한 설명은 두 가지가 틀렸다. 하나는 역사적 모순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과 다르다(그러나 설화이기 때문에 사실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성우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저기 회전문이 왜 회전문이냐면, 중국 당 태종 알지? 당 태종한테 평양공주라는 딸이 있었거든, 근데 한 총각이 그 평양공주를 너무 사모해서 상사병에 걸린 거야, 왕이 기분 나쁘니까 죽여버렸어, 근데 저기 뭐 죽은 뒤에 그 총각이 뱀으로 환생을 했는데, 뱀으로 환생한 뒤에, 저,
제3장 회전문
-
4사고는 뜻을 가진 명제이다. 메시지, 또는 메모. “사람들 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해놓고, 놔두고 보면, 서로들 서로를 흉내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에릭 호퍼) 또는 “우리들 행동의 부조리함은 거의가 우리가 흉내내서는 안 될 것(그게 사람이든 뭐든)을 흉내내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새뮤얼 존슨)라는 말을 2000년 8월 <생활의 발견> 트리트먼트 서문에 홍상수가 (홍보자료에 따르면) 붙여놓았다고 한다. 두 문장의 공통된 단어는 흉내이다.4-1흉내를 내는 것은 여기서 세 가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등장인물이 다른 등장인물을 따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사건이 다른 사건 안에서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같거나 유사한 사물이 아무 상관없는 서로 다른 숏에 등장해서 그 사이의 무관함 속에서 연관성을 유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흉내는 단지 이미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로 알지 못하는 상
제4장 구조
-
5-1-3우리는 한 명제의 참이 다른 명제들의 참으로부터 따라 나온다는 것을 그 명제들의 구조로부터 알아본다.5-2이 영화에는 두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영화 바깥에 놓여진) 이 영화의 제목인 임어당(林語堂)의 <생활의 발견>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안에서 사용되는) 춘천에서 선배 성우의 집에서 들고 나온 <스콧 니어링 자서전>이다(영화에서 사용한 판본은 표지로 미루어 짐작건대 김라함씨가 번역한 실천문학사 출판본이다). 아마도 성우는 지난해 또는 지지난해에 샀을 것이다(이 책은 2000년 5월에 출판되었다). 또는 홍상수가 <생활의 발견> 트리트먼트를 쓰기 석달 전에 나왔다. 임어당은 ‘자유주의’를 내세운 반공주의자였으며, 스콧 니어링은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다. 경수는 스콧 니어링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선영에게 설명한다), 선영은 “그 책이 아마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 인생을 바꾼 책일 거예요”라고 대답한다(분명치는 않지만 아마 그 ‘어떤 분’
제5장 착각
-
6-1논리학의 명제들은 동어 반복들이다. 앞에서도 한 말이지만 홍상수는 이렇게도 말한다. 경수는 세존보살의 점괘에 의하면 “저 사주는 스님 사주가 돼가지고, 산천을 벗삼아 가지고, 산으로 산으로 다녀야 되는 사주기 때문에, 속세에 인연이 없습니다. 인간의 인덕도 없고(중략)”라고 한다. 세존보살의 점괘가 맞다면 결국 경수는 부산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더 떠돌아다녀야 하며, 심지어 “구월 시월에는 몸에 칼댈 일도 있”다. 만일 그가 홍상수 영화의 페르소나라면 그의 주인공은 끝내, 또는 적어도 앞으로 “올래 또 삼재가 들어오기 때문에” 삼년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경수의 생각은 다르다. (61신 경주 삼겹살집에서 선영에게 한) 경수의 말에 따르면 “언젠가 운전사 아저씨가 그러더라고요. 야! 인덕이 있다” 홍상수가 누구의 말을 믿을지는 알 수 없다.6-2그런데 궁금한 것은 경수가 부산에 내려간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부산에는 (선영에게 한 말에 의
제6장 아버지
-
7
경수가 회전문의 뱀을 떠올리다, 또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n-1, ou Che Vuoi?_ 이 글은 먼저 홀수를 쓴 다음 짝수를 채워나간 글이다. 그러나 배열은 앞의 숫자에 뒤의 숫자를 더한 것이 하나의 숫자이다. 그러므로 합산을 한 다음 짝수를 빼면 원래의 글이 된다. 동일한 수는 앞의 수가 앞선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짝수의 글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짝수는 설명과 반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짝수의 글을 다시 배열한 다음 순서대로 놓고 거기서 그 순서에 따라 5의 배수는 의도적으로 더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읽지 않아도 된다. ▶ 성일, 상수의 영화를 보고 회전문을 떠올리다
▶ 제2장 자막
▶ 제3장 회전문
▶ 제4장 구조
▶ 제5장 착각
▶ 제6장 아버지
▶ 제7장 …그리고 침묵
제7장 …그리고 침묵
-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여기, 두 건달이 있다. 특정한 직업 없이 거리를 떠돈다는 점에선 보통 건달과 같다. 이들은 그러나 주먹과 어깨 대신 음악과 영화와 그림으로 세상을 누빈다. 경계에 서서, 낯설다는 듯 멀뚱하게 세상을 쳐다보다, 재미있는 판이 보이면 뛰어들어 한판 놀더니, 금방 다른 판을 기웃거리는, 천생 유목민들. 백현진과 고구마, 그들을 우리는 신종문화건달이라 부른다. 편집자그를 한마디로 소개하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저자’, ‘마부’, ‘없었을텐데 그러므로 나는’이라는 엉뚱한 호칭까지. 신발 바꿔 신듯 태연자약하게 이름을 갈아치우는 데다, 음악, 미술, 영화에까지 이리저리 발을 걸쳐 복잡무쌍한 크레디트를 가진 이 서른한살 청년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가장 짧고 간단한 알림말을 붙여보자면 이렇다. 어어부프로젝트에서 노래하는 사람, 백현진.황신혜 밴드의 김형태가 이들의 2집 ‘개, 럭키스타’에 부친 말을 보면 어어부를 설명하는 단어들은 온통 ‘불(不)’ 투성이다.
<뽀삐> <꽃섬> 출연한 어어부프로젝트 보컬 백현진
-
뽕짝부터 아방가르드까지를 가로지르는 어어부밴드는 듣기 좋은 멜로디뿐 아니라 아름다운 이야기에도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불안한 음률 속에 담긴 노랫말은 사회의 시스템 이면을 들추고 바깥으로 밀려난 인물들을 등장시켜, 사람들이 적당히 덮어두고 외면하려 하는 세상의 균열난 틈을 슬그머니 까발리고 희망에 대한 의심을 품게 한다. 백현진이 모든 노랫말을 쓰는 어어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야기가 흐르거나 그림이 그려진다. “원고지만 갖고 시작한 게 아니라 시각적인 관심사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글을 쓸 때 의도하지 않아도 녹아나는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자평. 그 노랫말에서 모두 뒤집어 엎자며 혁명을 외치는 뜨거운 전복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지만, 견고해보이는 삶을 툭 건드려 기우뚱대게 만든다.“여기 이 마을엔 주민 모두가 서로를 등쳐먹기 제법 바쁘네. 난쟁이를 감금시켜 외투단추를 달게 하고 자전걸 훔쳐 팔아먹는 삶”(멀고 춥고 무섭다) “퀭한 눈에 지저분한 두 소녀 탬버
백현진이 쓴 노랫말들
-
국경의 끝을 떠도는 여행자“만나봐, 재밌어.” “뭐랄까, 백현진이 괴로워하는 건달이라면, 권병준은 꿈꾸는 건달이라고 할 수 있지.” 주위의 풍문을 듣고 고구마를 만나러 가는 동안, 오래 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가 아직 대학에 다니면서 밴드 ‘토마토’를 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그와 한 택시를 탔다. “아, 고구마 아니세요?” 하고 알아보는 척을 하자 그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네”라고 했었다. 그때, 고구마는 이미 특별했다. 강의실과 집, 기껏해야 술집과 학원을 오가는 평범한 학생들 속에서 그는 무엇인가에 매료되어 자기만의 세상 속을 유영하는 이로 보였다. 말하자면 그때 이미 고구마는 “뭘 하고 살지 필이” 온 사람 같았다. <죽이는 이야기>에서의 그의 잊지 못할 대사처럼.강남구청 사거리 대로변 빌딩의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고구마는 하얀 식탁 옆에 연두색 티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천천히 하죠. 저도 지금 방금 왔는데” 하며 차를 끓여 주었고, 작업실 구경을 권했
<죽이는 이야기> <우렁각시>, 삐삐롱스타킹의 고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