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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때문에 불면이다. 졸음이 쏟아져야 마땅한 형편 속에서 시사회에 갔는데 감정을 온통 집중한 나머지 돌아오는 밤길에 무척 힘들었다. 하루를 지내고 난 지금, 또 고스란히 날이 밝았다. 소란스러운 능변 대신 이 영화에 대해서 차근차근 잘 말하고 싶다는 갈망이 무거운 걸음걸이로 덤벼드는 졸음보다 힘이 센 모양이다.난 <박하사탕>이 싫었다. 내 가슴 한복판을 뜨거운 것이 꿰뚫고 지나가긴 했지만, 유능하게 조합된 관념적인 역사의식의 차가움이 함께 흘렀기 때문이다. 불타올랐지만 얼어붙게 만들었고 유능하고 싶었지만 무능했던 것은 386세대인 내가 80년대에 대해 느끼는 통한이다. 하물며 <초록물고기>는 평범했다.이제 세편의 영화를 죽 돌이켜보니 이창동이 진화하고 있음을 알겠다. 지금 나는 진화라는 용어를 특별한 마음으로 쓴다. 진화는 전적으로 자신의 현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오아시스>는 이창동이 사회적으로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에 관해 진지
<오아시스> 4인4색-김소희가 본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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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가 우리 영화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으며, ‘이창동 감독은 한국의 에밀 쿠스투리차’라고 주장한 고종석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오아시스>에서 현실과 판타지는 변증법적 통합을 위한 대립물로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조금도 다치게 함이 없이 온전히 자신들의 특성을 유지하며 서로를 강화한다. 영화 속에 마르케스를 불러들이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 테지만, 빈곤하고 누추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빈곤하고 누추한 상상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마르케스의 단편 <사랑 저편의 변함없는 죽음>의 한 부분, “상원의원은 지껄이면서 석판화 캘린더를 한장 비틀어 뜯어서는 나비를 접었다. 슬쩍 선풍기 바람에 태우자 나비는 방 안을 훨훨 날아다니다가 절반쯤 열린 문으로 슬쩍 빠져나갔다.… 석판화의 거대한 나비는 두세번 방 안을 날아다닌 뒤, 벽에 부딪히더니 원래대로 한장의 종이로 돌아가서 그대로 붙어버
<오아시스> 4인4색-유운성이 본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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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모두가 겨울옷을 입고 있는 엄동설한에도 반팔 차림으로 콧물을 흘리고, 여자는 휠체어에 의지해 손바닥만한 하늘을 처음 대하는 사람처럼 바라본다. 오아시스의 홍종두와 한공주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었다. 감독은 수선스런 시장통에, 나사가 널브러진 카센터에, 김칫국물이 누렇게 밴 아파트 벽에 주인공들을 숨겨놓고 ‘젊은이의 양지’로 박제돼버린 대한민국의 멜로에 일침을 가한다. 홍종두와 한공주, 그렇게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게 사랑의 문제라면, 사랑이 ‘함께’ 자장면을 좋아하게 되고 콩밥을 싫어하게 되는 단순하고 연약한 것이라면, 그런데도 당신, 왜 아직 사랑다운 사랑을 해보지 못했는가.<오아시스>는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초록물고기> <박하사탕>처럼 <오아시스>의 사랑은 대한민국에서는 부재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거시적 이야기의 구조를 지녔던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이 산산이 부서진 가족과 근대화
<오아시스> 4인4색-심영섭이 본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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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成瀨巳喜男·1905∼69), 일본영화 수입개방이 된 지 이미 오래지만, 그는 한국에서 아직도 미지의 작가다. 그러나 그는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와 함께 일본영화 1세대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아니, 일본영화사에서조차 본격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진 건 1980년대부터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1920년, 열다섯 나이에 쇼치쿠 영화사에 입사하고 그 10년 뒤인 1930년에 <찬바라 부부>로 감독 데뷔를 한 나루세 미키오는, 1930년대와 1950년대에 <아내여 장미처럼>(1935), <츠루하치 츠루지로>(1938), <밥>(1951), <산의 소리>(1954), <부운>(1955) 등의 대표작을 발표했다. 보잘것없는 이들의 삶에 똬리튼 그의 영화세계는 오즈 야스지로와 종종 비교되지만, 오즈와는 또 다른 매력과 세계관으로 규정될 수 있다.8월24일부터 30일까지 7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8월24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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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나루세 미키오의 초창기 걸작 <아내여 장미처럼>(1935)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토키영화로는 뉴욕에서 최초로 상영된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버라이어티>에 실린 이 영화의 리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예술을 애호한다고 떠드는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나 적당히 인기를 끌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실패할 것이고.” 일본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끈 나루세의 영화에 대한 이런 식의 인색한 반응은, 황금기 일본영화의 대표적인 감독들 가운데 하나인 나루세가 이후 오랫동안 국제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게 될 것임에 대한 예견이었던 것일까?나루세는 <아내여 장미처럼>이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지도 거의 반세기가 지난 다음 유럽과 미국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리면서 비로소 국제적인 재평가의 대상이 된 영화감독이다. 죽은 지 1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뒤늦게 그의 영화들을 보고 놀란 서구의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8월24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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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의 인물들 - ˝살겠다!˝우리가 만약 나루세적인 세계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그 세계의 거주자로서 우선 편입될 만한 인물들은 가족과 자기 자신의 삶을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이다. 나루세의 영화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문제를 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림으로써 해결하려 한다(아니, 그들의 처지상 그럴 수밖에 없다). 예컨대, 오빠로부터 소아마비로 고생하는 아들을 수술시켜야 하니 수술비를 마련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는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의 게이코가 그런 인물이다. 어떤 인물이 누군가에게 돈을 빌린다는 것은 나루세의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장면들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돈을 빌리는 나루세의 주인공들을 종종 무능력한 기식자와 거만한 빚쟁이 사이에 끼여 어쩔 줄 모르는 인물로 만들곤 한다. “영화역사상 가장 (섬세하게) 물질주의적인(materialist) 영화감독”- 저명한 영화평론가 필립 로페이트의 말을 빌리면- 인 나루세는 이런 식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8월24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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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하치 쓰루지로 鶴八鶴次郞, 1938년, 흑백, 89분메이지 시대 말기를 배경으로 여성 사미센 연주자 쓰루하치와 남자 가수 쓰루지로의 사랑과 갈등을 담은 ‘예도물’(藝道物) 장르의 영화. 젊은 나이의 두 사람은 인기가 높아서 극장 흥행주들에게 많은 돈을 벌게 해준다. 그러나 매번 공연이 끝날 때마다 싸우기 일쑤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둘 사이의 다툼이 계속 과열되면서 결국에는 헤어지게 된다. 조지 래프트, 캐롤 롬바드 주연의 미국영화 <볼레로>(웨슬리 러글스 감독, 1934)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원작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훨씬 ‘모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밥 めし, 1951년, 흑백, 96분나루세 미키오는 일본의 근대 여류 작가 하야시 후미코(1904∼51)의 소설을 좋아해 그녀의 소설 여섯편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밥>은 그 여섯편 가운데 첫 번째 영화에 해당한다. 다른 한편으로 플롯은 최소화하고 인
<쓰루하치 쓰루지로>등 상영작 10편 미리보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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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 晩菊, 1954년, 흑백, 101분하야시 후미코가 쓴 세편의 단편소설을 한편의 영화로 옮겼다. 과거에 게이샤였던 세명의 중년 여성들을 담담하게 관찰하면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 사랑, 고독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예리하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쿄의 한 안락한 집에서 살고 있는 긴은 인근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채업자. 그녀의 채무자들 가운데에는 과거 그녀와 함께 게이샤 생활을 했던 토미와 타마에가 있다. 이 두 여인은 돈이 없는 것도 걱정이지만 자신들을 떠나려 하는 자식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영화평론가 데이브 커는 <만국>을 두고 “나루세의 특징적인 무드가 여기서 그 형식적 정점에 올랐다”고 평했다. ----부운 浮雲, 1955년, 흑백, 123분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을 각색한 <부운>은 나루세 미키오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영화다. 영화는 전쟁 동안 동남아시아에서 함께 근무했다가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전쟁 뒤 일
<쓰루하치 쓰루지로>등 상영작 10편 미리보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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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세네프영화제가 8월23일부터 29일까지 일주일 동안 문화일보홀과 정동A&C에서 열린다. 세네프영화제는 디지털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디지털영화제로서 부산, 부천, 전주 등 국내 3대 국제영화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디지털영화라는 좀더 집중된 테마를 가지고 형식적 새로움과 실험성을 전시하는 개성있는 영화제다. 세네프영화제는 1999년 시작된 이래 올해로 3회째를 맞으면서 점차 세계 디지털영화의 현주소를 모색하는 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올해의 주제는 ‘형식의 충격’. ‘상상, 공감, 변화’라는 세네프의 기본 캐치프레이즈하에서, 올해는 좀더 새로운 형식적 실험을 감행한 작품들에 주목한다.올해 세네프영화제는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경쟁부문인 디지털익스프레스 부문에 터키, 헝가리, 포르투갈, 일본 등에서 온 8작품, 유명 작가들의 디지털영화를 모은 퍼스펙티브 디 부문에 에릭 로메르, 야구치 시노부의 작품을 비롯한 8작품 등을 선보인다. 이 밖에 ‘프로듀서의 영화’
디지털전문영화제 제3회 세네프영화제 8월23일부터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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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헝가리/졸탄 카몬디/2002년/98분/35mm&DV35mm 흑백필름과 DV컬러를 혼용해 필름과 디지털의 ‘맛’의 차이를 한눈에 알게 하는 흥미로운 실험작. 원경에서는 주로 흑백필름을, 클로즈업에서는 주로 컬러디지털을 써서, 필름의 클래식한 안정감과 디지털의 다큐멘터리적 거친 느낌을 강하게 대비시키고 내러티브를 낯설게 하는 효과를 낸다. 이야기는 홀어머니와 사는 19살 젊은이 마치를 중심으로 그가 어머니 안나, 애인 엘비라, 10살짜리 집시소녀 줄리,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와 맺는 여러 가지 관계를 따라간다. 아버지의 회사에 정체를 숨기고 취직해 양파깎기, 짚더미 쌓기 등 험한 일을 하며 아버지에 접근해가고 금발 미녀 엘비라와 또래다운 사랑을 나누고 은행을 해킹해 불법으로 돈을 빼내다가 감옥신세까지 지는 마치, 그런 마치에게 과잉된 집착을 보이는 어머니 안나, 자신을 보살펴주는 마치를 남편으로 여기고 엘비라를 질투하는 집시소녀 줄리 등이 유머와 광기의 경계를
디지털 익스프레스 부문 - 신인감독 작품 8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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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션>영국/톰 클레이/2001년/65분/DV음악과 영화를 넘나드는 1979년생 호기심 많은 영국 아티스트 톰 클레이가 슈퍼마켓에서 일한 돈을 모아 만든 저예산 디지털영화. 어느 노숙자에 관한 이야기로, 사실적인 현실묘사에서 환상적인 공간으로 이동하여 눈길을 끈다. 대상과 카메라의 관계를 전혀 고민하지 않는 듯 휘두르는 카메라가 생경하고 거친 이미지들을 담아낸다. ---------<심야>포르투갈/클라우디아 토마즈/2000년/73분/DV 리스본의 두 마약중독자의 삶에 관한 다큐멘터리적 드라마. 감독 자신이 여주인공을 맡았다. 토마즈의 감독 데뷔작으로, 2000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거꾸로 뛰어라>미국/해리 도지·실라스 하워드/2001년/98분/DV연출과 시나리오집필을 함께한 두 여자 해리 도지와 실라스 하워드의 ‘버치(남자 역을 하는 여자동성애자)영화’. 해리 도지와 실라스 하워드가직접 두
디지털 익스프레스 부문 - 신인감독 작품 8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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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코 픽션>일본/야구치 시노부·스즈키 다구치/2002년/65분/HG720P<워터 보이즈>의 야구치 시노부가 <원피스 프로젝트>를 함께 만든 친구 스즈키 다구치와 함께 일본 파르코 백화점의 지원을 받아 다섯개의 경쾌한 에피소드를 엮었다. ‘파르코’라는 이름의 근원을 밝히는, 서로 머리와 꼬리를 맞대는 사건이 절묘하게 이어지는 첫 번째 에피소드 <파르코 탄생>부터 각기 신비하거나 어처구니없거나 따뜻한 사연들이 펼쳐진다.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은 두 번째 에피소드 <입사시험>. 파르코 백화점에 들어간 신입사원이 이상한 임무를 수행하는 이 에피소드의 끝은 세 번째 <하루코>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고, 각각의 에피소드는 그런 식으로 또 다른 에피소드에 끼어든다. 친한 친구 둘이 농담하며 낄낄대듯 만든 <파르코 픽션>의 재기는 파나소닉 HG720P 카메라의 자유로운 움직임에 힘입은 것. 딸깍대는 소음으로 한편의 공연
퍼스펙티브디 부문 - 유명 작가들의 디지털 영화 8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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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지아>미국/빌 모리슨/2002년/70분/35mm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해온 빌 모리슨이 낡은 필름 조각을 모아 만든 첫 번째 장편실험영화. 안개 속에서 싸우는 복서, 자신의 몸에서 나온 지방을 태우는 여성, 환각에 빠진 중동지역 남자의 이미지들이 최면을 걸 듯한 오케스트라 음악에 실려 세월과 함께 퇴락해온 흔적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모리슨은 다섯 작품을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목록에 올린 서른일곱살의 감독. 모든 사람이 테크놀로지를 신봉하면서 필름에 불멸의 생명을 부여하려는 지금, 모리슨은 시간이 할퀴고 간 필름을 수정없이 사용함으로써 그 헛된 노력을 탐구하는 정반대의 방법을 택했다.독일/미리암 데네 등 12인/2002년/60분/DV열두명의 독일 감독이 각각 십만원에 가까운 99유로로 제작한 5분짜리 단편 옴니버스영화. 다큐멘터리와 연기, 광고연출, 영화잡지제작 등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이 감독들은 동유럽 한구석에서 벌어진 코믹하고 씁쓸한 일화나 어느 퍼포먼스 아티스트의
퍼스펙티브디 부문 - 유명 작가들의 디지털 영화 8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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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쿠데타로 망명길에 오른 칠레 감독 라울 루이즈에게 새로운 영화적 고향을 마련해준 이는 파올로 브랑코였다. 그는 또 포르투갈의 괴짜 노장감독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프랑스의 알랭 타네 그리고 빔 벤더스의 심지깊고, 동력있는 동반자였다. 세네프가 “산업적으로 격심한 변화를 겪고 있는 한국영화가 미래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 유용한 모델케이스가 되기 바란다”면서 올 신설한 섹션 ‘프로듀서의 영화’의 첫 주자로 그를 택한 건 꽤나 적절해 보인다. 포루투갈 태생의 브랑코는 1974년부터 유럽예술영화의 옹호자로 활약하며 150편에 육박하는 작품을 제작해왔다. 자신이 만든 파리의 제미니 필름스, 리스본의 마드라고아 필름스 등이 그의 근거지들. 이번에는 브랑코가 프로듀싱한 영화 4편이 상영된다.<범죄의 계보>프랑스/라울 루이즈/1999년/107분/35mm카트린 드뇌브 주연의 이색 미스터리영화. 여변호사 솔롱주는 어느 날 아들이 죽었다는 사고 소식을 듣는다. 바로 그날, 그녀에게
프로듀서의 영화 부문 - 파올로 브랑코 회고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