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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버거슨(J. Scott Burgeson)그는 대한민국에 잠입한 비밀요원이다. 어떤 국가나 단체에서 혹은 먼 행성에서 그를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주어진 임무가 어떤 것인지조차 아직 명확히 밝혀져 있진 않다. 다만 1967년 미국 네브래스카주의 링컨에서 처음 출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버클리대 영문과를 졸업한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그저 이 글에서는 ‘MIB(Man in Bucheon) 비밀요원’이라고 해두자. 처음 전화로(놀랍게도 그는 휴대폰을 소지하고 있었다!) 접선해 부천영화제의 이면을 찾아 글로 써달라고 하자, “이러쿵저러쿵 긴말 할 것 없어, 그냥 이메일로 몇 단어를 써야 하는지만 알려줘!”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시죠, 라고 하자, ‘secretagentbug.**.com’이란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설마 했던 그는 정말 ‘비밀요원’(secretagent)이었던 것이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머리카락까지 빡빡 밀고 부
‘국제문화건달’ 스콧 버거슨의 9박10일 부천방랑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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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1일 목요일 밤스크린은 구경도 못하고…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상상과 판타지의 세계로 본격적으로 뛰어 들기 전에 나는 우선 몇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나의 경우 이번달 말로 예정된 러시아 여행을 위한 ‘간단한’ 여행 비자 발급 때문에 목요일 오후 전체를 진절머리나게 긴 대기열 속에서 기다려야 했다. 덕분에 나는 영화제 개막식과 개막작 <슈팅 라이크 베컴>의 상영을 모두 놓쳐버렸다(이 러시아의 현실은 나의 또 다른 영화 계획을 망쳐놓았는데, 나의 첫 한국영화 출연작이 될 예정이었던 <미소>에 출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생활의 발견>의 추상미가 출연하고 임순례 감독이 제작하는 이 영화의 촬영이 다소 지연되었는데, 때문에 러시아에서의 내 스케줄과 겹치게 되었지만 여행 일정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송내역 부근의 ‘째즈’라는 카페에서 있었던 개막 파티에도 불참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건 그다지 애석할 것이 없었다. 내가
‘국제문화건달’ 스콧 버거슨의 9박10일 부천방랑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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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3일부터 주말하루 평균 4편, 뭐가 현실이고 뭐가 판타지냐내 여자친구 뮤즈와 그녀의 러시아인 친구 스베타,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하루에 평균 네 작품씩 보며 주말 내내 함께 영화 속에 파묻혀 지냈다. 이제 현실은 거의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하다. 물론 상영된 영화들 모두가 엄격한 의미에서 ‘판타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물론 현실의 상상적인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영화는 일정 정도 판타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그렇다, 그래서 나는 다큐멘터리에도 이러한 등식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좀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견지에서 보면 영화제 동안 상영된 작품들 중 상당수가 사실 보통 ‘판타지’라고 불리는 범주의 바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거린다 차다의 <슈팅 라이크 베컴>이나 미친 듯이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한쌍의 만담꾼을 다룬 훌륭한 오사카 코미디극 후지타 요시야스의 <삐-삐-형제> 같은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사실 아마도 올해 부천판타스틱영화
‘국제문화건달’ 스콧 버거슨의 9박10일 부천방랑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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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시장 점유율이 40%를 넘어서고, 한 작품에 100억원에 가까운 제작비가 투여되며, 아시아를 시작으로 세계시장을 두드리고 있는 한국영화의 위세는, 그 내실이야 어떻건 외양만큼은 실로 당당하다. 하지만 80년이 넘는 역사를 통틀어 가장 호기를 누리고 있는 한국영화도 10여년 전만 해도 보잘것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60년대의 영화(榮華)를 뒤로 한 채, 돈이 되는 외화를 수입하기 위해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제작하면서 창의성과 역동성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85년과 86년 영화법이 개정되면서 한국영화 의무제작 조항이 삭제되고, 영화수입이 자유로와지자 그나마 한국영화를 만들던 영화사들은 수입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88년 UIP를 필두로 할리우드의 직배가 시작되자, 더욱 좁아진 외화 선택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한국영화 제작은 더더욱 뒷전으로 밀려났다.그렇게 고사의 위기를 겪고 있던 한국영화에 갑자기 강력한 돌풍이 몰아쳤다. 1992년 개봉한 <결혼 이야기>
기획영화10 년,충무로의 빅뱅을 돌아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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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이야기>가 빅뱅이었다92년 기획한 <결혼 이야기>는 가장 일상적인 부부관계의 내밀한 구석을 들춰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됐다. 그때까지 한국영화의 주소비층이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 도시 여성을 타깃으로 삼았던 이 작품은 동시대인 90년대형 부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트렌디코미디였지만, 당시 사회적 이슈가 됐던 성담론이나 여성문제 등 민감한 사안을 스쳐지나가 나름의 사회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때문에 신씨네는 10여쌍의 부부를 밀착 인터뷰해 그들의 상세한 삶을 알아냈고, 가전회사 등의 협찬을 받아 주관객층에 소구할 만한 스타일의 화면을 구성했다. 관객의 취향과 성향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탐구해, 관객의 눈높이에 맞도록 영화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에서 <결혼 이야기>는 본래 의미에서의 기획영화로서는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김혜준 정책연구실장은 “이전까지의 대부분의 상업영화들은 시대가 변화하고 표현의 자유도 확대된 환경을 이용하
기획영화10 년,충무로의 빅뱅을 돌아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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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 충무로로<결혼 이야기> 이후 1992년 신씨네는 <미스터 맘마>를 준비하면서 기획사에서 영화제작사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다. 1993년에는 신규 제작사가 대거 탄생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유인택 대표는 기획시대를 차렸고, <하얀전쟁>과 <그대 안의 블루>에서 프리랜서 기획자로 활동했던 안동규 대표는 영화세상을 만들었다. 유 대표와 안 대표는 영화세상에서 제작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공동기획했고,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공동제작하기도 했다. 강우석 감독은 시네마서비스의 전신인 강우석프로덕션을 꾸려 <투캅스>를 제작한 뒤 배급에서 극장까지 아우르는 충무로의 실세가 됐다. 또 이춘연 대표는 94년 성연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 <손톱>을 제작한 뒤, 잠시 영화계를 떠났다가 96년 복귀해 유인택 대표와 함께 씨네2000을 창립해 <지독한 사랑>을 발표한다. 심재
기획영화10 년,충무로의 빅뱅을 돌아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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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0년물론 90년대 중반 이후 이들 프로듀서가 주도한 작품을 ‘기획영화’라는 틀 안에 뭉뚱그려 바라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애초 이 용어는 제작사 외부의 기획전문사가 전담한 기획에 기반해 제작한 영화를 지칭하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치밀한 기획없이 진행되는 영화가 드문 요즘의 상황과 비교할 때, 기획영화라는 말이 통용되던 당시는 그만큼 기획이라는 과정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기도 하고, 마케팅을 포함한 기획이 독자적인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이 용어는 감독의 창작욕보다는 기획자의 상업적 의도를 출발점으로 삼는 영화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이같은 기준에서 본다면 기획영화는 90년대 초반의 특정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영화나, 지난해의 <조폭 마누라> 같은 짧은 호흡의 트렌드성 영화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그럼에도 이들 대다수가 대중과 호흡하고 접점을 넓혀나가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일궈냄과 동시
기획영화10 년,충무로의 빅뱅을 돌아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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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청년필름 대표)1. <공동경비구역 JSA>(제작 명필름, 감독 박찬욱)반북, 반통일을 넘었다는 점을 높이 산다. 내가 만들어 보고 싶은 영화 1순위.2. <집으로…>(제작 튜브픽처스, 감독 이정향)감독은 기획영화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철저한 기획영화. 문화 전반에 걸친 복고주의를 잘 활용했다는 점과 제작비를 훌쩍 넘긴 마케팅비 등. 가족영화의 부활 또한….3. <쉬리>(제작 강제규필름, 감독 강제규)완성도 있는 오락영화를 만들었다는 점, 블록버스터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 산업화에 기여했다. 그렇지만 반북, 반통일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감점요인.4. <엽기적인 그녀>(제작 신씨네, 감독 곽재용)작품의 완성도는 높은 편은 아니지만 국내, 해외에서의 높은 흥행을 이뤄냈다.5. <화산고>(제작 싸이더스, 감독 김태균)국내 흥행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일본 등 해외 배급이 잘된
3세대 프로듀서들이 꼽는 최고의 기획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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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하지? 기획영화야 요즘에는 워낙 일반적인 게 돼나서. 전에는 딱히 부를 만한 용어가 없다보니까 그렇게 부른 건데.이춘연 시작하기 전에 내가 야부리를 좀 풀지. 60년대에만 하더라도 이른바 일본영화가 기획되던 시대였지. 그래서 정보가 있는 어른들이 일본영화를 가져와서 조금 바꿔서 만들고 그랬다고. 그 이후 80년대 중반까지는 소설 원작을 주로 각색하던 시절이야. 영화사에선 터질 만한 소설이 나오면 남들보다 빨리 물어오는 게 일이었어. 기획실이 생겨나긴 했지만, 주로 홍보 선전일을 맡았고.차승재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영화를 만드는 게 간접적으로 관객의 트렌드를 읽어내는 방법 중 하나였을 거예요.이춘연 내가 처음 영화판에 와서 기획실장 할 때 소설가들을 잘 몰랐거든. 신문에 광고나는 소설 빨리 보고 제목 괜찮으면 재빨리 잡는 사람들 보면서 굉장히 부러웠지. 아직 쓰지도 않았는데 포장마차로 끌고가서 소주 마시면서 내년에 나올 걸 잡는 경우도 있었어.차승재 철이 형과
프로듀서 4인, 기획영화 10년을 말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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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침대>에서 <접속>으로심재명 신씨네의 <은행나무 침대>도 중요해요. 금융권의 자본이 처음으로 들어왔던 영화거든요. <결혼 이야기>가 대기업 자본을 유인했다면, <은행나무 침대>가 금융자본을 유도한 거죠.차승재 그러고보니까 철이 형이 대부분 문을 열고 들어간 거네. 93년부터 제작에 들어간 <구미호>도 아마 컴퓨터그래픽을 처음 쓴 영화 아닌가. 내가 그때 신씨네에 근무했는데, 어느 날 철이 형이 150ℓ짜리 냉장고를 하나 들고 오는 거야. 저게 무지 비싼 거라고만 들었지, 스캐너인 줄은 몰랐다고.(웃음) 그때까지 한국영화에 그래픽을 한컷이라도 쓴 영화가 있었나 싶어.이춘연 생각이 있어도 팍 내지르고 실천하기가 힘들잖아. 그런 면에서 신철은 정말 대단히 미친 놈이었다니까.신철 전에 컴퓨터 공부를 한 게 좀 있어서 그랬죠. 매킨토시는 내가 거의 최초 사용자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서 그래픽쪽의 가능성을 봤고. 막상
프로듀서 4인, 기획영화 10년을 말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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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사는 영화공장이어야지신철 새로운 시도라면 우노가 만만치 않지.차승재 맨땅에 헤딩하기가 우리 회사 모토니까. 저는 조금 다른 게 기획실 아닌 제작부에서 출발했거든요. 세경영화사에서 <걸어서 하늘까지> 제작부장을 하고 나서 철이 형네 회사로 가서도 현장 인력 책임지는 일을 맡았으니까. 그때만 해도 난 제작자가 되는 꿈 같은 거 없었어. 다만 영화사 상무나 극장 전무가 잘하면 이룰 수 있는 내 영화일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지. 2년 동안 신씨가 하는 걸 보고, 철이 형이 제작자로서 가는 걸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해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시원찮은 아이템 하나를 들고 철이 형한테 반공갈을 때려가지고 프로듀서라는 타이틀로 신씨네로 들어간 거지.신철 그게 뭐였지?차승재 <백한번째 프로포즈>. 지금 보면 턱도 없어. 내 직원들 중에서 그런 기획 가져오면 안 시켰을 거야. 우노를 만들어 <돈을 갖고 튀어라> <깡패수업> 할 때만
프로듀서 4인, 기획영화 10년을 말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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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식,성지루,유해진<라이터를 켜라> 조연배우 3인방 꼼꼼히 뜯어보기유해진이 출연한 한 패스트푸드점 광고. 초코 아이스크림을 까만 벽돌이며 갈색 종이 등에 한참 동안 숨겨보지만 결국 들통이 난다. 이문식, 성지루, 유해진. 여기 모은 3명의 배우들은 마치 그 초코 아이스크림 같다. 맛깔나는 개성연기로 여러 영화를 살려놓지만 정작 자신은 그 속에 숨고 앞에 나서지 않는 배우들. 한참을 그래온 그들이, 이제는 서서히 예리한 관객 눈앞에 들통이 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영화 하나를 보고 나오는 극장 문 앞에서, 주연배우들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떤어떤 장면에서 기막힌 대사를 했던 그 배우.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한다. 들통이 나버린 3명의 배우, 조연이라고만 부르기엔 섭섭한 기막힌 배우 3명을 한명씩 찬찬히 뜯어본다.편집자 ·디자인 이윤진 yjklim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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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터를 켜라> 조연배우 3인방 꼼꼼히 뜯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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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생긴 게 이래서인지 몰라도, 6개월 전쯤 됐을 거예요. <공공의 적>에서 산수 역을 맡아 오만 가지 불쌍한 표정을 지어 세간에 얼굴을 좀 알렸잖아요. 모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갔는데. 먼저 사진부터 찍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죠. 근데 뒤늦게 올라온 사진기자가 글쎄 나말고 내 옆에 서 있던 매니저를 끌고 가는 거예요. 별 수 있나요. 그냥 웃고만 있었죠.”
이문식(36)에게선 사람 냄새가 난다고들 한다. 스스로도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라고 말한다. 웃으면 생기는 세줄 눈주름이며, 입가에 고인 동안의 미소는 처음 만나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킨다. 여기에 만나는 사람을 붙잡고서 구수한 사투리를 곁들여 재미난 이야기를 보너스로 대접하는 것도 그의 특기다. “나한테 가장 큰 형벌은 아마도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상대만이 그에게 녹아나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몸이 달아 캐릭터를 쫓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알아서 그를
<간첩 리철진> <공공의 적> <라이터를 켜라>의 이문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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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결 3 계산하지 마라
“이창동 감독님한테 욕많이 먹었어요. 카메라가 어딨는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기만 했으니까.” 대학로에서 소문난 재주꾼도 카메라 앞에서는 잠시 당황했다. <초록물고기>에서 깡패 역을 맡았던 그는 “아무리 깡패라지만, 한석규 같이 비싼 배우를 진짜로 때리기엔 부담스러웠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가 비로소 ‘감’을 잡은 건 <간첩 리철진>에서 임원희, 정재영, 정규수 등과 만나 인상깊은 4인조 택시강도 역을 맡고 나서부터다. “흥행만 됐어도 좀 일찍 뜰 수 있었는데. 하하. 그때 <매트릭스>랑 붙어서 정신 못차릴 정도로 밟혔죠.” 그뒤 <행복한 장의사> <봄날은 간다> <선물> <달마야 놀자> 등 1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조연의 서러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특히 공연 도중이라 고사했던 모 영화의 경우, 제작사쪽에서 사정사정해서 밤낮으로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공연과 촬영을 번갈아 하긴
<간첩 리철진> <공공의 적> <라이터를 켜라>의 이문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