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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만에 막내린 결혼생활, 무너진 먼로먼로가 남긴 짧은 말들은 대부분 슬픔에 차 있다. 먼로는 “만일 내가 만인의 스타라면 그건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나는 어느 곳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외로움에 시달렸다.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는 그런 먼로를 찾아온 기적 같은 연인이었다.디마지오는 54년 1월 흰 면사포 아래 동그랗게 뜬 눈동자로 웃고 있던 먼로와 결혼했지만 같은해 10월 공식적으로 이혼을 청구했다. 두 사람이 왜 그토록 빨리 헤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디마지오가 원피스 자락이 올라가며 먼로의 허벅지가 드러나는 때문에 분노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많은 언론이 디마지오가 먼로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요구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끈질기게 나돌던 먼로의 불감증 소문도 불거져나왔다.결혼 아홉달 만에 디마지오와 헤어진 먼로는 빠른 속도로 무너져갔다. <돌아오지 않는 강>을 본 <뉴욕타임스>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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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29일 밤, 미국 뉴욕 소호의 유명한 드랙퀸 클럽 ‘스퀴즈박스’는 일순 조용해졌다. 스스로를 야시시한 여성 모습으로 치장한 남성, 즉 드랙퀸들이 록음악을 고래고래 불러댔던 이 클럽 무대에 자신을 미군 병사와 결혼한 독일인 여성인 헤드윅이라고 소개하는 한 드랙퀸이 등장했던 것.
그저 목청이 터져라 꽥꽥거리며 좌중의 흥을 돋웠던 다른 드랙퀸들과 달리,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자신에 관한 이런저런 농담을 던졌고,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이야기를 노래로 불렀다. 그리곤 다시 격렬한 노래를 열창하며, 가발을 벗어던지고 옷을 북북 찢었으며, 브래지어도 벗어 찢어버렸다.
하지만 이 새로운 형식의 드랙퀸 쇼에 관객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던 그날 밤이 록뮤지컬, 그리고 >록뮤지컬영화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이라는 제목의 록뮤지컬
소란스런 B급 드랙퀸 쇼가 `영화 <헤드윅>`으로 태어나기까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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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텍사스에서 태어난 존 카메론 미첼은 군 장성인 아버지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 아래서 유년기를 보냈다. 군인 집안의 아들답게 그는 오클라호마, 캔자스, 콜로라도, 펜실베이니아, 스코틀랜드 등지를 20차례도 넘게 옮겨 다니며 어린 나날을 보냈다. 당연하게도 그는 언제나 친구 하나 없는 아웃사이더였다. 10살 무렵 스코틀랜드의 가톨릭계 기숙학교 생활을 하면서 접한 글램록만이 그의 삶에 빛을 던져줬다. 스위트, 데이비드 보위, 록시 뮤직, 이기 팝, 루 리드 등은 그의 우상이었다. <헤드윅>에 보위, 팝, 리드, 이 글램의 세 ‘성자’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찍은 흑백사진이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첼이 훗날 헤드윅의 모델이 된 여성을 만난 것은, 영화에서 토미가 헤드윅을 만났을 때와 똑같이 캔자스주의 정션 시티에서였다. 미첼이 ‘음탕하고 작은 마을’(Wicked Little Town)이라고 부른 이곳에는 포트 라일리라는 커다란 미군 기지가
소란스런 B급 드랙퀸 쇼가 `영화 <헤드윅>`으로 태어나기까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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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댄스를 미치게 하다
각종 신문과 잡지의 리뷰난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이 뮤지컬을 영화계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뉴라인시네마, 저지필름스, 그리고 온갖 영화사의 직원들은 객석 또는 백스테이지에서 공연을 지켜봤다. 뉴라인시네마의 회장 로버트 셰인도 오리지널 캐스팅 공연을 관람했다. 그는 <오리진 오브 러브>가 흘러나오는 도중 옆자리에 앉은 관계자를 팔꿈치로 찌르며 “놀랍다”고 찬탄했고, 공연이 끝난 다음에는 “최고의 시나리오다. <록키 호러 픽처쇼>가 갔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뮤지컬의 영화화 판권이 뉴라인으로 간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영화제작은 전설적인 뉴욕의 인디영화 프로듀서 크리스틴 바숑의 킬러필름스가 맡았다. 제작사는 이 작품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알고 있는 미첼이 주연과 감독을 모두 맡길 원했지만, 영화연출엔 까막눈이었던 미첼은 부담 때문에 공동연출자 정도에 머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99년 6월 선댄스재단에
소란스런 B급 드랙퀸 쇼가 `영화 <헤드윅>`으로 태어나기까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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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으로 질문을 보내고 답을 기다리기 며칠. 아뿔싸, 존 카메론 미첼이 ‘떠나버렸다’는 전갈이 왔다. 인터뷰에 답을 쓰고서? 아니다.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부하고(좀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얼마나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그냥 그거 보고 쓰라고 그래!”라는 엄청난 말을 남기고) 얼마 동안이 될지 모를 여행을 떠났다는 거다.존 카메론 미첼은 2001년 <헤드윅>이 발표되었을 당시 실로 엄청난 양의 인터뷰에 응했다. 영화잡지, 일간지, 게이잡지, 온갖 온라인 매체, 음악잡지 등 <헤드윅>이 걸쳐져 있는 모든 영역- 영화, 음악, 성정체성, 팬덤, 일반 뉴스- 의 언론매체들에서 그에게 이야기를 걸어댔다. 그런 모든 시끌벅적한 일들을 끝내고 당분간 연기마저 쉬며 조용히 아동영화의 대본을 쓰고 있던 그는, 갑자기 어느 날 ‘광희’의 나라 한국에서 인터뷰가 날아들자 떠나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그의 바람대로, 2001년 영화 발표 당시 존 카메론 미첼이 응했던 수많은
원작자 · 각색자 · 감독 · 주연배우 존 카메론 미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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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처음 섹스한 게 언제죠?A:고등학교 졸업한 뒤 여자친구하고 했는데요. 사실 마스터베이션을 알게 된 것도 얼마 안 된 상태였어요. 주위 친구들에 비해 굉장히 발육이 늦었죠. 뒤늦게 눈떠서 그런지 욕심이 과하게 생기더라구요. 군대가기 전까지 정말 많이 했어요. 나이트클럽에서 통성명하고 나면 곧장 자러 가곤 했으니까. 그렇게 1년 정도 보냈더니, ‘만나서 하는’ 과정이 너무 지겹던데요. 그뒤로는 시들해졌죠Q:성이란 게 어차피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하죠. 어떨 때 섹스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요?A:비오는 날 있잖아요. 부슬비말고. 우박만한 굵기의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 그런 날은 창 밖을 보고 있으면 증상이 정말 심해요. 반대로 너무 밝은 날은 죽어도 하기 싫어요.봉만대(32) 감독은 엉뚱한 데가 있다. 오디션 보기 위해 찾아온 남자배우에게 ‘별걸’ 다 물어본다. 동석한 매니저가 여자인데도 거리낌없다. 심지어 중간에 자신의 경험까지도 친절하게 들려준다. 영문 모르는 이로선 “웬, 성상담 클리
에로영화계의 스타감독에서 데뷔작 준비하는 봉만대 감독 스토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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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규, 내겐 형님 같은 스승제대한 뒤 <휘파람 부는 여자> <용호의 권> 등의 영화에 조감독으로 복귀했고, 이듬해인 95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언더그라운드>는 제작사의 원안을 각색했고, <킬링게임> <킬러> 등의 시나리오를 썼다. 스스로 재주가 남달랐기보다는 현장이 자신에게 그걸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감독이 “다음 대사 뭐야?”라고 물었을 정도로 촬영현장에서 급하게 시나리오를 써낸 영화도 있다. “지금이야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만, 그땐 예를 들어 살수차 오기만을 기다려선 안 됐다. 시간이 지연되면 중간에 호스를 뚫어서라도 물을 뿌려봐야 했다. 시나리오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에서 습작한 셈이다.”그는 영화촬영이 없는 날이면 광고, 방송쪽 일을 맡아 촬영스탭으로도 활동했다. 혹시 경제적인 이유? 아니다. 조감독 때 곧잘 배우로 카메라 앞에 서곤 했는데, 매번 감독말 듣고 가서 서 있으면 촬영감독이 그
에로영화계의 스타감독에서 데뷔작 준비하는 봉만대 감독 스토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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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가 부른다면 돌아가리라이런 시도에는 AV를 둘러싼 열악한 환경에 대한 그의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디지털 비디오>에서 잠깐 설파했듯이, 유통이 판치는 상황에서 여전히 벗기기 경쟁만을 일삼는 제작관행은 유입되는 인력을 막아세우는 방벽이자 AV시장이 자멸하기 딱 좋은 지름길이다. 그는 무엇보다 일단 사회적인 시선이 좀더 관용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음성화가 고질적인 병폐를 키우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전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자신의 작품 <아파바>를 틀었던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반지하나 옥탑방이나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어차피 그렇다면 햇빛이라도 보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공개적인 상영기회가 좀더 늘어나야 한다고 본다.” 그는 충무로 진출 이후 미아가 될지 모른다. 여전히 1천만원 이하의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작비는 무조건 2500만원 이상이어야 한다고 못박는 삐딱한 그를 기용할지는 미지수다. 물론 그는 불러준다면
에로영화계의 스타감독에서 데뷔작 준비하는 봉만대 감독 스토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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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웃기는 일본영화 한편이 한국을 찾는다. 8월15일 개봉하는 <워터 보이즈>. 감독은 장진을연상케 하는 야구치 시노부. 만화스토리 작가, CF 감독 같은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인 야구치는 지금 일본에서 가장 촉망받는 코미디 감독이다.한국을 방문한 야구치 시노부를 만나 분방하고 경쾌하고 명민한 그의 영화세상을 들여다보았다.편집자교복차림의 남학생이 화면에 보인다.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는 바닥에 누워 있다. 옆에선 자전거 바퀴가 한없이 맴돌고 있다.카메라는 위에서 교복의 학생, 자전거 바퀴, 그리고 자동차의 불빛을 포착한다. 이상한 상황이다. 아이는 주섬주섬 주변에 떨어져 있던 책을 줍기시작한다. 가방에 쑤셔넣는다. 표지만 봐도 어떤 책인지 짐작이 간다. 포르노 잡지다. 자동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웅성거린다. “야, 이 학생은정말 머리좋기로 소문난 수재야”, “빨리 병원에 가야지”, “경찰을 부르자”, “정말 미안하게 됐네 그려” 웅성웅성. 그런데 교복
일본 대중영화의 UFO,야구치 시노부와 <워터 보이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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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 원천은 애니메이션“쓰카모토 신야 등의 일본 감독은 이른바 만화세대다. 그들은 만화를 보면서 성장했고 그것에서 영화적 영감을 얻곤 한다. 난 그들과는 많이 다르다. 일종의 애니메이션 세대랄까? 더 어린 세대다. 가장 감명깊게 본 작품으로는 유명한 <건담> 시리즈 등이 있다. 나의 영화적 원천은 애니메이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야구치 시노부 감독이 다른 일본 감독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원인 중 하나다. 움직이지 않으며 일종의 정지상태에 있는 만화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영상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성장했고 그것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다.야구치 시노부의 영화경력은, 코미디에서 시작해서 코미디로 일관된다. ‘돈’을 유일한 인생의 목표로 삼는 어느 여성의 이야기인 <비밀의 화원>(1997)은 야구치 시노부 감독이 어느 부분에 재능이 있는지 보여준다. 그는 돈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여성, 잃어버린 돈을 찾기 위해 지질학 공부를 하고 수영대회에 참가하며 암벽등반
일본 대중영화의 UFO,야구치 시노부와 <워터 보이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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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동안에 마른 몸. 야구치 시노부는 개구장이보다는 심약한 소년에 더 가까운 첫인상을 남겼다. 낯가림 심한 소년처럼 처음 몇몇 질문에는 단답형의 대답만이 돌아왔고 잠시, 시종일관 사람을 웃게 만들었던 그 영화의 감독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그의 영화가 그렇듯, 그는 세상만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이의 향내를 슬슬 풍기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재밌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내뱉으며 자신의 전공이 결코 슬랩스틱코미디가 아님을 얼굴로 증명해 보이더니 급기야 질문 중에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튀어나오자 카페 저쪽에 앉아 있는 프로듀서 요시노 사사키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사사키씨! 우리 영화 관객이 얼마나 들었죠? 안 들린다구요? 관! 객! 이! 얼마나! 들었냐구요!” 나른하게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소공동의 한 호텔 카페, 그 오후의 정적은 그렇게 깨졌다.한국은 자주 오는 편인가.
야구치 시노부 인터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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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즐겨보는 편인가보다.→보통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인데 실제로 만화를 별로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잘 보지도 않는다.조금 의외다.→일본은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거의 중독 수준으로 만화를 보는 편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 만화와 영화는 같은 부분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히 다른 것이다. 영화에는 음악이 나오고 살아 있는 인간이 움직이며 그들의 대사가 음성처리가 된다. 그건 상당한 차이다. 또한 만화는 보는 이가 다음 장으로 넘기지 않으면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리는 데 비해 영화는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작업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오히려 애니메이션 세대라고 생각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컷들이 만화적이라는 느낌이 크다. 뭔가 기가 막힌 상황이 펼쳐졌을 때 아이들이 동시에 입을 쩍 벌리고 멈춰 있는 동작이라든지…. 그렇다면 당신의 상상력과 표현력의 원천은 어디라고 보나.→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이렇게 휙 둘러보기만 해도 재미있는 부분이 들어올 정도다.예
야구치 시노부 인터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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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90년대의 말에, 이창동 감독은 그들 광주의 전사 또는 광주의 피해자라는 대세에몸을 의탁하지 않고 가해자인 진압군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건 좀 뜻밖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대부분은 침묵하는 다수가 됨으로써광범한 가해자 그룹에 속해 있었던 게 아닐까.영호가 진압군으로 광주에 갔을 때 나는 학교가 문을 닫았으므로 친구집에 이따금씩 모여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지금은 국회의원인 한 대학선배가 보자고 해서 동대문 부근의 허름한 다방에서 만났는데, 그는 광주의 상황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 건데 나한테 배포조에 들라고 했다. 아마 집으로 돌아와서 며칠을 고민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카프카의 소설들과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책들을 한보따리 싸들고 낙향해서는 강릉 부근에 있는 삼덕사라는 절로 들어가버렸다. 그런 내가 <박하사탕>을 보았을 때, 내 안에 있는 영호가 기어나오는 기분이 들었다.여하튼 막동이는 죽었고 영호도 정황으로 보건
<오아시스>를 보고 새로 쓴 조선희의 이창동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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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아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7월29일 첫 시사회를 가진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단번에 격정의 폭우를 쏟아붇는 법없이, 조금씩 젖어들어 마침내 깊은 슬픔과 아련한 희망에 이르는 희귀한 멜로다. 그리고 <초록물고기>와<박하사탕>과 혈연을 확인케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창동의 자식이다. 8월15일 관객과의 해후를 앞두고 조선희 전 편집장이 그를 만나 나눈긴 이야기와 새로 쓴 이창동론을 싣는다.편집자조선희 / 소설가, 전 <씨네21> 편집장1, 세헤라자데의 운명작가란 뭘까. 이야기꾼의 운명이란 어떤 것일까. 그건 세헤라자데의 운명과 같은 것은 아닐까.세헤라자데는 밤마다 흥미진진한 얘기를 꾸며내고 그러는 동안 하루씩 사형집행이 늦춰진다. 원래 왕은 아름다운 여자와 하룻밤씩 자고는목 매달곤 하는데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서 관례를 깬다. 세헤라자데의 입담은 대단하다. 무려 1천일 동안 이야기가마르지 않았고 왕의
<오아시스>를 보고 새로 쓴 조선희의 이창동론(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