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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과 死의 외침과 속삭임<무간도> <8마일> <디 아워스>를 보는 세 가지 시선이 영화, 죽입니다, 라고 부르짖는 영화광고들 사이에서, 웅크린 채 조용히 읊조리는 영화들이 있다. 크기와 자극과 속도를 웅변하지 않고, 잠깐 멈춰 귀기울이면 당신과 속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수줍게 손 내미는 영화들이 아직 있다. 아마도 지난 주말은 그런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최상의 주말이었을 것이다. 늙음과 상실에 관한 비가 <디 아워스>, 비열한 거리의 음악과 지친 삶에서 길어올린 생의 찬가 , 사라진 시대, 사라진 영웅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만가 <무간도>가 함께 찾아온 까닭이다.여기 세 영화에 대한 세 사람의 에세이를 싣는다. 흥에 겨운 찬사가 아닌 이런 나지막한 독백이 이 영화들에 보내는 우리의 진심어린 박수를 대신하고도 남으리라고 믿는다. - 편집자생이여,김혜리 vermeer@hani.co.kr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버지니아,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디 아워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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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는 쓰고 로라는 읽고 클래리사는 책을 만든다. 처음 내가 쓴 글줄들은 일기였던가, 편지였던가. 그러나 어쩌면 회색노트를 나누어 썼을지도 모르는 첫 ‘독자’는 잊지 않는다. 때로 우리는 사랑의 시작을 날짜와 시간까지 공기와 냄새까지 기억한다. 안녕, 나야. 다가오며 인사하는 그애를 둘러싼 하얀 빛의 부챗살이 충충한 학교 복도를 사라지게 했다. 머릿속이 말갛게 비었을 때에도 멍하니 세수를 하고 창을 여는 나의 입술이 멋대로 그의 이름을 소리내어 나를 놀라게 했다. 희열, 고통, 뭐라 부르건 난생처음 의심을 허락지 않는 감정이 날카로운 칼처럼 명치를 뚫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 난 평생 너의 시선으로 내 삶을 검열하며 살게 되겠지. 시시때때로 네 비웃음의 환청에 소스라치면서. 그러나 흐른 시간이 세월이라 할 만한 두께가 되었을 때, 다시 만난 친구는 우리가 원한 것들이 아직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얼굴을 풀어헤치고 웃고 있었다. 덩달아 미소지으며 나는 겁이 났다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디 아워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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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루 중 저녁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디 아워스>의 하루해가 저물 무렵 댈러웨이 부인과 로라는 살기로 한다. 버지니아와 리처드는 죽기로 한다(“사제이자 예언자인 시인은 나머지 우리가 삶을 더 귀중하게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죽어야 한다”고 버지니아는 스스로 예언한다). 현대에 와서 죽음은 어느 시대보다 석연치 않고 불길한 것이 되었다. 죽은 자들은 패배하여 도주한 것일까. 하지만 버지니아는 “삶에서 도망침으로써 평안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를 채워넣고 호수로 걸어들어갔다. 그러니까 자살은 삶의 회피일 수 없다. 샐리 포터 감독의 <올란도>에서 버지니아의 분신 올란도였던 틸다 스윈튼은 한 다큐멘터리에서 의구심을 털어놓았다. 현대사회는 진정한 열정은 용인하지 않으면서 지독히 센티멘털한 기묘한 곳이라고. 사랑은 그 안에 거하는 감정이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고 틸다 스윈튼은 말했다. 정말 사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디 아워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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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글에는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힙합 카우보이가 산다<8마일>, 어느 경계선의 이름 또는 세상의 법칙을 읊는 랩----------어디서 어떻게 깃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미넴의 형형한 푸른 눈에는 적의가 품어져 있다. 그 눈은 그가 8마일 저쪽의 다운타운 출신이 아니라 8마일 이쪽의 슬럼가 출신임을 말해준다. 그는 결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다.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한다. 나는 꺾이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그 눈이 공격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을 남들로부터 오랫동안 지켜온 사람의 눈이다. 그의 눈은 그가 부끄러움 없는 시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는 결백하다. 적어도 그렇게 믿는다. 그가 부끄러움 없고 떳떳한 것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는 두눈 똑바로 뜨고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온 것이다.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한다.----------백인 힙합 스타에 대한 수많은 냉소와 소문에도 불구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8 마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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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조금 부족하다. 간과하고 있는 것들도 있고 구조도 조금 덜 힙합적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할리우드영화다.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 아마도 에미넴 자신은 이런 말을 싫어하겠지만, 영화 속의 그는 힙합 카우보이이다. 카우보이는 법도 질서도 없는 서부의 척박한 땅에서 자기 자신을 지킨다. 외롭게 투쟁하는 그는 결국 악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정의의 씨앗을 심는다. 에미넴 역시 아무도 그를 지켜주지 않는 게토의 정글에서 외롭게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살아간다. 여자친구는 힙합 제작자와 놀아나고 엄마는 아들의 동창놈과 놀아나며 여기저기 폭력이 난무하지만 주인공은 그 모든 손쉬운 유혹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우정을, 힙합의 기본 정신을 지킨다. 그래서 그는 역시 정의의 씨앗을 심는다. 이 영화는 힙합 서부영화다. 서부영화의 코드들이 힙합이라는 하위문화 코드의 옷을 입고 있다. 카우보이영화는 늘 정의의 사나이인 카우보이와 ‘악의 축’의 대표자와의 결투에서 끝난다.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8 마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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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은 사실상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8마일>은 배틀이 이처럼 힙합의 기원을 암시하도록 해주는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그 ‘대결적’ 요소만을 상업적으로 지나치게 견인해내고 있다.----------어쨌든 이 영화는 삶은 대결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맞다. 삶은 대결이다. 8마일 저쪽이든 이쪽이든 미국사회는 정글이다. 힙합은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다. 대신 이 정글에서의 삶의 법칙에 대해 발설한다. 하드코어 힙합신을 호령하는 수많은 하드코어 래퍼들의 혀가 수많은 자기 이야기들을 들려주지만, 그 기본적인 발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세상은 정글’이라는 개념이다. 힙합의 내용은 늘 ‘8마일’ 저쪽과 이쪽을 가르지만 정작 힙합의 주제는 ‘8마일 저쪽과 이쪽’에서 함께 통용되는 삶의 법칙들이다. 그것이 힙합의 재미난 점이다. 힙합에서는 사실상 주류와 비주류가 없다. 세상을 정글로 파악하는 순간 ‘여기/저기’는 구분되지 않는다. 서로 먹고 먹히는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8 마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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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시대,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비장한 위로<무간도>와 내 영혼의 홍콩누아르, 80년대에 바친다----------<무간도>의 시사가 있다는 말에 극장으로 향했다. 양조위와 유덕화가 나온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아, 홍콩에서 <영웅>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는 정도는 있었다. 자리에 앉아 <무간도> 예고편을 먼저 보여줄 때까지 사전 지식이란 그것뿐이었다. 별다른 기대나 호기심도 없었다. 홍콩영화에 대한 설렘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왕가위, 서극, 주성치 같은 이름이 결부되지 않는 한 별 관심도 없다. 익숙한 습관처럼 홍콩영화를 보기는 하지만, 볼 때마다 홍콩영화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든다. 씁쓸하다.----------담담하게 <무간도>를 봤다. 경찰학교에 입학한 젊은 날의 유건명과 진영인이 등장한다. 양조위와 유덕화가 아니다. 이제 그들도, 젊은 날의 모습에 대역을 투입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무간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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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홍콩누아르의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한 <무간도>를 보면서, 추억에 빠져들었다. 엣날의 홍콩누아르 한편이 겹치고 있었다. 임영동의 <용호풍운>. 개봉 당시에는 <미스터 갱>이라는 희한한 제목이었다. 87년에 만들어진 <용호풍운>을 처음 만난 것은 불법 비디오를 통해서였다. <영웅본색>으로 홍콩영화가 한창 뜨고 있을 때, <용호풍운>을 만났다. 여기서도 주윤발과 이수현이 나온다. 그런데 <첩혈쌍웅>과 반대다. 이수현은 범죄자이고, 주윤발은 경찰 스파이다. 범죄조직에 침투한 주윤발은 이수현과 친구가 된다. 혹시 <용호풍운>을 본 적이 없다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을 떠올리면 된다. <저수지의 개들>의 인간관계와 기본적인 플롯은 <용호풍운>과 동일하다. 표절이라고? 물론이다. 타란티노는 <용호풍운>과 스탠리 큐브릭의 <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무간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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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홍콩누아르를 보러갔다----------<영웅본색>을 처음 본 것은, 동네 3류 극장이 아니라 불법 비디오였다. 아직 극장에서 개봉하기 전이었고, 습관처럼 빌린 비디오의 하나였다. 이소룡과 성룡, 미스터 부 등 홍콩영화가 나올 때마다 즐겨 봤지만 총으로 싸우는 액션영화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었다. 주윤발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고, 오우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오우삼의 <영웅본색>은 기존의 어떤 홍콩영화와도 달랐다. 그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한국의 ‘컬트영화’는 홍콩 누아르에서 시작했다는 평가대로, <영웅본색>은 3류 극장에서 재발견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주윤발의 검은 코트와 질겅질겅 성냥개비를 씹고 다니는 사람이 도처에서 목격되었다. 나 역시 기억한다. 대학 주변의 재개봉관에서 <영웅본색>을 다시 보던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조그만 소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은 누구나 소마에게 공감했다. 아니 여성이라면 장국영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무간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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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삼은 <영웅본색>에 이어 <첩혈가두>와 <첩혈쌍웅>을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첩혈가두>의 그 낭만성을 사랑한다. 평범하게 자라난 친구들이 베트남이라는, <디어 헌터>와 <지옥의 묵시록>의 공간으로 들어가 처참하게 뭉개지고 서로를 배신하게 된다. 양조위, 장학우, 이자웅이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그 멋진 장면. 타란티노가 <저수지의 개들>에서 반복한 바로 그 장면이다. 후일 머리 속의 총알 때문에 지옥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장학우는, 양조위에게 부탁한다. 마지막 총알을 날려달라고. 양조위의 총을 입에 물고, 절실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홍콩누아르의 영웅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이다. 그들이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길은 없다.홍콩누아르에는 오우삼의 영화만이 아니라 수많은 걸작이 있었다. 홍콩누아르가 발견되기 이전에 서극의 <제1유형위험>과 맥당웅의 <성항기병>이
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무간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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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만에 <바람난 가족>으로 스크린 복귀하는 그녀가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이유고 김기영 감독의 미개봉 유작인 <죽어도 좋을 경험>(1988)을 마지막으로 영화계를 떠났던 윤여정이 16년 만에 돌아왔다.남은 인생을 육체와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기로 작정한 <바람난 가족>의 속시원한 시어머니가 되어.허스키하면서 높은 음성,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독설, 알맞게 계량된 감정의 부피와 무게. 긴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무뎌지지 않은 채 더욱 날카롭고 깔깔한 표면을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는 그는, 또래 배우들 앞에 놓여진 모성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어머니’란 대명사에 묶여지지 않은 채, 윤·여·정·이라는 이름 석자를 대중의 머리 깊숙이 박아넣었다.<화녀> <충녀>의 팜므파탈로 시작해 진정한 팜므파탈로 돌아온 이 배우의, 이 여인의, 아니 이 인간의 인생유전 위에, 자신의 드라마 속에 그를 불러오는 영광을 누렸던 노희경, 인
세상에 하나뿐인 저 목소리! 윤여정 스토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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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윤, 청승맞아서 캐스팅했지”아랫입술을 윗니로 지그시 깨어물며 “까르르르” 천진한 웃음을 보이던 명자. 그 시골처녀가어느 작곡가집의 가정부로 들어가 임신을 하고 낙태를 당하며 점점 미쳐 집안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가정비극, 김기영 감독의 71년작 <화녀>는 윤여정의 심장에 배우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홍글씨를 새겨넣었다.“당시에 한 드라마에서 오빠로 나왔던 최무룡 선생의 권유로 고영남 감독의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김기영 감독이 그 제작비를 다 물어주시고 <화녀> 촬영장으로 나를 끌어오셨다니까. 마의 손길이야. 마의 손길. (웃음)” 고약하고 무서운 인상에 말도 별로 없는 이 이상한 감독이 계약서에 쓴 계약조건도 얼마나 변태 같았는지. ‘촬영 들어가기 2달 동안 하루에 한 시간 이상 감독과 만날 것!’ “얼마나 만나기 싫었겠수. 감독님 만나는 시간이면 친구들을 불러냈어요. 우연히 온 것처럼 방해놓으라고. 그런데 나중에 보니 다 아셨더라고. (웃음) 그 몇달
세상에 하나뿐인 저 목소리! 윤여정 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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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 쟤는 목소리 때문에 안 돼, 그랬대요.”잠자리에 누운 성우에게 영희가 말한다.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 길가다 교통사고처럼 아무랑 부딪칠 수 있는 게 사랑이야. 사고나는 데 유부남이, 할아버지가, 홀아비가 무슨 상관이 돼. 나면 나인 거지.”(<거짓말>)경에게 유순이 울먹이며 말한다. “우리 복수 울렸다간… 너 절단 나. 나한테… 나 땜에… 울 만큼 운 애야… 나는 걔 울렸지만 남이 울리는 건 못 봐….” (<네 멋대로 해라>)윤여정은 드라마 작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배우다. <내가 사는 이유>로 만난 노희경 작가를 비롯해 <네 멋대로 해라>의 인정옥 작가까지 조용하던 그들이 윤여정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 할라치면 갑자기 말이 늘어난다. 그러나 누구보다 윤여정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름 석자는 바로 작가 김수현이다. 데뷔 초 <무지개>를 시작으로 성공적인 복귀작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세상에 하나뿐인 저 목소리! 윤여정 스토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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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은‥ 사람 죽이는 여자인정옥 / <네 멋대로 해라> 작가그 여자가 이상하다.난 그 여자가 신들린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무릇 중견배우의 연기는 신들린이란 표현이 자주 언급되는데도 말이다.그 여자의 목소리엔 쇳소리가 갈린다. 그런데 입엔 장미냄새를 흘린다.그 여자의 긴 목덜미엔 히스테리가 있다. 그런데 그 목 끝 치켜든 턱 위엔 앙증맞은 귀여움이 서린다.그 여자의 찌푸린 미간은 세상에 욕설을 퍼부어대는데, 눈동자는 한 가득 겁을 집어먹으며 세상을 받아들인다.그 여자는 상대의 등짝에 들러붙어 징글맞게 떨어지지 않는 가늘고 억센 팔이 있다.그런데 그 팔을 풀어젖히고 거칠게 내동댕이라도 치면, 너무나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내리는 가늘고 가녀린 어깨가 있다.이 모습이 연기로 사람 죽이는 윤여정이다.이 여자는 연기자가 아니다.인간도 아니다.윤여정은 여자다. 윤여정은 여자로 사람 죽인다.여자 냄새가 이렇게 진한 배우를 난 본 적이 없다.윤여정은‥ 눈빛 하나로 삶을 보듬는
세상에 하나뿐인 저 목소리! 윤여정 스토리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