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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우드식 비온정주의
평론가 폴린 카엘은 돈 시겔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더티 하리> 시리즈를 두고, “파시스트적인, 비도덕적인 영화”라고 비난했는데, 그 말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비온정주의’적 도덕관에 관한 반대의견인 것처럼 들린다. 그 선고는 꽤 오랫동안 그를 뒤쫓아다녔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거기에 수긍할 생각이 여전히 없다. “그녀 생각에는 그것이 정말 비도덕적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더티 하리>가 파시스트영화는 아니다. 그건 단지 그녀가 동의하지 않는 다른 도덕일 뿐이다”라고 못 박는다. 그의 어떤 영화에도 온정주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되짚을 필요가 있다. 온정어린 행위로 사건이 해결되는 경우가 그의 영화에서는 거의 드물다. 해리 칼라한이 매그넘 44 권총으로 세상의 도덕을 바로잡는 원칙은 90년대 이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형식적 도약을 이뤘음에도 다른 방식으로 변함없이 다뤄지고 있다.
법적 도덕이 거리의 법보다 무력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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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스물다섯 번째 장편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감동의 펀치는 버티겠다고 마음먹은 정도를 뛰어넘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어려운 영화가 아닌데 철학이 있고, 대중영화인데 가볍지 않다. 영화에는 비유없이 한 세계가 들어 있다. ‘이스트우드주의’라는 조어를 만들어 그의 영화 세계를 정리해보고, 그것을 지표로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기를 권하고 있지만, 이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보던지 그건 상관없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세다.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데뷔작으로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를 연출하겠다고 말했을 때, 제작사 유니버설 영화사는 그렇다면 감독 급료를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아놀드 슈워제네거나 실베스터 스탤론이, 즉 코만도나 람보가 연출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반색할 제작사는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기회를 얻었으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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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로폼 뭉치가 전투기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리라 예상되었던 부분은 세트였다. <결전의 날…>은 대부분이 전투기 속과 지휘선에서 진행된다. 그린 스크린 앞에서 실사로 찍어 CG로 합성한다지만 전투기 내부를 위한 세트는 꼭 필요했다. 어설프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역시나) 그만한 돈도 없었다. 대신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특수효과 전문회사인 ‘데몰리션’ 소속으로 <화산고>를 작업했던 문봉섭씨를 만났고, “SF 장르를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었다”는 그는 ‘데몰리션’의 김광수 팀장을 소개해주었다. 김광수 팀장은 “세트 만드는 공간과 인력과 노하우를 얻으려면 AI쪽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다시 ‘AI’의 오선교 대표에게 연락을 취했다. 한 다리 건너서 또 한 다리, 박선욱 감독은 지인과 지인을 통해서 해답을 얻었다. 그러나 ‘AI’팀이 박선욱 감독의 일을 도맡아서 한다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갈 것은 명백했고, 오선교 대표는 “미사리에 있는 ‘AI’
SF단편 <결전의 날이 왔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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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C대학의 영화과 학생 조지 루카스가 15분짜리 SF단편 <THX1138: 4EB>를 만든 것은 1970년이었다. 예브게니 자마친의 <우리들>을 연상케 하는 이 자그마한 소품에서 <스타워즈>의 미래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다만 루카스의 선배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달랐다. 그는 고독하게 작업하는 괴짜 대학생에게 거금의 제작비를 덜컥 지원했고, 루카스의 장편 데뷔작 <THX1138>은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2005년,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하나 벌어지고 있다. 충무로 스탭들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작은 독립 SF영화 <결전의 날이 왔다>가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60%에 달하는 분량에 상업영화 수준의 CG와 3D애니메이션, 제법 비용이 들어갈 세트가 필요했던 이 작품은 가능성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프로젝트였다. 박선욱(35) 감독은 이에 아랑곳
SF단편 <결전의 날이 왔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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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는 얼굴의 영정
학창 시절에 이은주는 바이킹을 타면 안전벨트도 풀고 서서 소리를 지를 만큼 겁없는 성격에 복도를 시끄럽게 뛰어다니며 반마다 불을 끄고 다닐 만큼 장난기 많고 밝은 아이였다고 한다. 물론 남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익숙하고, 사진이든 대본이든 지나간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는 정 많고 내성적인 면도 있었지만, 궁금했던 그의 영정 사진 속 모습은 그렇게 밝기만 했다. 한껏 웃는 맑은 옆모습을 담은 사진은 발인 전 영결예배와 함께 공개됐다. 정교하고 능숙하게 포착된 그 찰나의 사진은, 여배우라는 공인된 사람에 대한 상실감보다 우연히 내뱉은 한숨으로도 시든 꽃을 세워일으킬 수 있는 향기로운 나이를 먼저 실감하게 했다. 전성기에 은퇴를 선언하는 여배우보다 더 어쩔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을 꽃다운 시절에 가둔 사람. 그는 인터뷰 때마다 “세월이 흘러도 신비롭게 여겨지는,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종종 말하곤 했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은주 추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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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이은주가 세상을 떠났다. 2005년 2월22일 오후, 드레스룸 안에서 숨이 끊어진 채로 있는 것을 그의 친오빠가 발견했다 한다. 1980년 12월22일생, 올해 스물다섯. 웃기만 해도 주위가 봄날 같아질 화사한 나이로, 데뷔 초 보여준 영민한 재능을 다 펼치지도 않은 채 세상과 작별한 배우 이은주를 추모한다.
배우 이은주의 사망 소식이 보도된 날 밤,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기자 출입을 통제한다는 사전 정보에 주눅 들어 큰맘먹고 올라갔건만, 빈소가 마련된 3층 10호실 근처는 이미 취재진들로 오래전부터 메워져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딩동 소리를 내고 문이 열리면, 기다렸다는 듯 겹겹의 셔터 소리와 발자국 소리들이 소란스럽게 울렸다. “상주들이 앉을 자리가 없다”면서 자기네들과는 상관없는 일로 몰아닥친 기자 떼를 원망하던 다른 빈소의 사람들도 코앞에서 지나가는 연예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빈소를 나오는 누군가의 오열 소리가 모든 이들의 신음을 한꺼번에
이은주 추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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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2일 화요일 오전
촬영장인 온정리 마을로
아침 7시 20분에 호텔방을 나서자 냉기가 목구멍을 넘어 위장까지 서늘하게 만든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는 날이다. 기자단을 합쳐서 180여명에 이르는 스탭, 배우, 제작진이 동시에 버스에 올라 온정리 마을로 향했다. 온정리 마을에는 <간큰가족>의 주요 북한 로케이션 장소인 온정각이 있다. 온정각은 남한의 여느 관광지 복합시설과도 비슷한 곳으로 식당, 공연장, 편의점, 쇼핑센터 등이 깔끔하게 들어서 있다. 여기서 지난 몇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건너편에는 늘어나는 관광객에 대응할 제2 온정각이 건설 중이고, 작은 스키장과 눈썰매장,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새로운 건물 터가 시원하게 개간되어 있다. 멀찍이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이 보일 듯 말 듯 그 모습을 쉽게 내어 주지 않고 있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려는 참에 제작진이 황급히 달려와서 파란 ‘PRESS’완장과 ‘제11차 이산가족 상봉. 특파
<간큰 가족> 북한 촬영 동행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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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영화, 휴전선을 넘다
영화 <간큰 가족>의 제작사인 두사부필름으로부터 북한 촬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겨우 한달 전이었다. <간큰 가족>은 간암 말기의 실향민 김 노인(신구)을 위해 ‘통일 자작극’을 벌이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큰아들 부부(감우성, 이칸희)와 삼류 에로영화 감독인 둘째아들(김수로), 북에 두고 온 전처를 그리워하는 남편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김 노인의 부인(김수미)이 선의를 위한 거짓말을 거듭하며 달려가는 <간큰가족>은 소박한 이상주의자들의 소동극이라 할 만하다. 생각해보면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했다. 간이 큰 가족의 간 큰 이야기 아닌가. 한국영화 최초로 북한 로케이션을 감행한 사건의 이면에는 간 큰 제작사의 배포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훌쩍 180여명의 스탭, 배우, 기자단들과 섞여서 떠난 2박3일간의 여정. 그것을 담은 이 짧은 기행문은 철책선을 넘나들며 기록한 작은 삽화들의 모음이다.
2월21일
<간큰 가족> 북한 촬영 동행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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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다룬 <몰락>부터 히로히토 일본 천황 다룬 <태양>까지
제55회를 맞는 베를린영화제의 경쟁부문은 그 어떤 해보다도 화제작이 적었다. 베를린에서 화려하게 첫선을 보이리라던 <에비에이터>는 이미 개봉되어버렸고, 또 다른 할리우드영화 <하이츠>(Heights)는 경쟁부문에서 취소되기도 했다. 함께 영화제에 참석했던 남편과 나는 베를린에서 본 최고의 작품은 아파트에서 16인치 텔레비전으로 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볼 정도였다.
권력자를 인간으로 조명한 최초의 영화들
그러나 어떤 영화제든 적어도 한번은 참으로 기이한 영화가 숨어 있다 튀어나오는 마법상자 같은 면이 있게 마련이다. 올해에도 그랬다. 공교롭게도 나는 한달 동안 자그마치 네편이나 권력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하는 아주 유사한 영화들을 한국과 베를린에서 연이어 보게 되었다. 그것들은 환영처럼 최면처럼 역사의 순간들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총결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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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판 <쉰들러 리스트>
테리 조지 감독의 <호텔 르완다>
똑같은 르완다 인종청소를 다루고 있는 <4월 언젠가>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후투가 좋은 놈인가, 투치가 좋은 놈인가.” <호텔 르완다>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아직까지 미국인 기자가 백악관 대변인에게 물어보는 질문의 수준에 멈춰 서 있었을 것이다. 르완다 인종청소는 불과 11년 전에, 단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100일 동안에 100만명이 몰살당한 비극이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투치족과 투치족을 도와준 후투족이 차디찬 길바닥 위에 시체로 쌓여갈 때 세계가 귀막고 눈감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큰 비극이 되었다. 테리 조지 감독은 아프리카의 쉰들러라 할 만한 호텔 매니저 폴 루세사바기나(돈 치들)의 실화를 장전해 세계인의 무관심을 겨냥해 쏘았고, 그것은 명중했다.
쉰들러는 유대인도 아니었고 약자도 아니었지만, 폴은 아내와 처가가 모두 투치족이라는 점에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총결산 [2] - 화제작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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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과 눈발 그리고 우박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리는 베를린의 먹먹한 날씨만큼이나 베를린영화제의 장래는 어두웠다. 베를린의 좌파 신문 <타게스슈피겔>은 평론가 얀 슐츠 오얄라의 입을 빌려 “규모만 늘려가는 영화제, 장래가 불안하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이런 먹구름은 일찍이 예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기성품 블록버스터를 만들던 롤랜드 에머리히 심사위원장, 할리우드 배우가 오지 않는다고 상영작을 뒤바꾸는 집행위원장 등이 맞물리며 어이없는 수상 결과를 낳았다. 코슬릭 위원장이 그토록 애원했던 할리우드 배우들조차 왕림을 거절하면서 베를린영화제의 깃발은 속절없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러나 숨어 있는 보석들마저 외면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수상 결과를 정리하고 베를린영화제 가운데 우뚝 빛나는 작품들을 꼽아봤다. 차이밍량의 <떠다니는 구름>을 비롯한 다섯 작품과 감독의 인터뷰를 곁들였다. 그리고 평론가 심영섭은 권력자의 최후에 주목한 영화들에 관해, 그리고 주목할 만한 젊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총결산 [1] - 수상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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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표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많이 놀았다. 이렇게 놀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영화인이 됐다는 것에 너무 기분이 좋아서.”
2002년 여름,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으며 시작된 <죽어도 좋아>의 ‘심의 전쟁’은 겨울에야 일단락됐다. 그 사이 세 차례나 심의를 집어넣으면서 혹독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삭제가 아닌 색보정으로 개봉을 했으니 감독으로선 의도를 관철시킨 셈이다. 그래서 푹 놀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불쑥 나타난 그를 영화계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행히 사람들이 영화감독으로, 영화인으로 인정해줘서 좋았다. 꿈을 이룬 거다.” 더욱 ‘다행’인 건 “그 뒤에 좋은 영화를 만드는 많은 제작자들이 (차기작을 함께 해보자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고민은 많았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던 상황에서 저예산으로 만든 <죽어도 좋아>처럼 다음 작품을 하긴 곤란했다. “어떻게, 어떤 형식으로 영화를 만드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과 공감을 나누느냐가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6] - 박진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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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욱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갑자기 남자가 좋아졌다.”
오해하지 마시라. 커밍아웃 선언이 아니다. <나비>를 끝내고 규모가 큰 첩보영화를 준비하던 문승욱 감독은 자료조사만 마치고 멈춰섰다. “머리로 쓰는 이야기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내 피부에 와닿는 걸 쓰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나이 마흔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을 돌아본 것도 그때였다. “전엔 수다떠는 상대가 대개 여자들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남자들로 바뀌어 있더라. 우정은 뭔가, 의리는 뭔가 하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이 무렵, 그는 후배들과 함께 술을 진탕 마시고 귀가하던 중 택시에서 흘러나온 신파조의 노래에 끌리기도 했다. “그래, 남자 이야길 해보자. 세상과 어울리지 못해 외로운 남자, 나잇값도 못하는 철부지 남자를 다뤄보자.” 결심은 그렇게 굳어졌다. 외로운 남자 이야기가 뜬금없는 건 아니었다. “언젠가 다시 만들고 싶은” 데뷔작 <이방인>도 세상과 격리되어 배회하는 남자에서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5] - 문승욱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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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이 영화가 원래는 데뷔작으로 하고 싶었던 영화다.”
박흥식 감독은 지난해 6월 말 <인어공주>를 개봉하고 딱 석달 쉬었다. 본래 “더 빨리 시작하려고 했다”는 그의 신작 <엄마 얼굴 예쁘네요> 시나리오는 감독이 <하루>의 조연출을 끝낸 뒤 쓰여졌다. 1979년 10월26일부터 1981년 한국 프로야구 개막까지, 유신정권의 끝에서 전두환 정권으로 넘어가는 약 3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중학교 1학년짜리 소년 광호의 짧은 성장기였다. 원고를 들고 싸이더스를 찾아갔다. 스타 캐스팅이 되는 연령도 아니요 보송한 아이를 써먹을 연령도 못 되는, 사춘기라는 애매한 나이의 주인공을 들어 제작사는 “캐스팅 각도가 안 보인다”는 표현을 썼다. 마음을 접고 싸이더스의 다른 프로젝트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데뷔하게 된 박흥식 감독은 <엄마 얼굴…>의 한 장면을 <나도 아내가…> 속에 슬쩍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4] - 박흥식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