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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궁녀실록, 군주 중심 궁중 사극이 지운 절반의 역사를 복원한 작품.”(김선영) “이성애 로맨스, 사극, 왕과 후궁이란 소재로 이 정도의 페미니즘 관점의 드라마가 가능할 거라곤 생각을 못했다.”(조혜영) 올해 초 종영한 <옷소매 붉은 끝동>은 “사극이라는 테두리를 잘 지키면서도 그 경계를 향해 계속해서 질문하는 모범생 같은 작품”(복길)으로 “역사적 스토리를 현대적 가치에 맞춰 재해석”(이자연)해 “사극도 충분히 동시대적일 수 있다는 걸 입증”(오수경)했다. 그 중심에는 “자신의 의지를 알고 실천하는 주체적 인간인 동시에 직업적 자부심이 강한 일하는 여성이자 우정을 소중하게 여기며 연대를 이어가는 사회적 인간”(오수경) 성덕임 캐릭터가 있었다.
그 결과 <옷소매 붉은 끝동>은 “왕과 후궁의 로맨스라는 가장 가부장적이고 진부한 서사에서 ‘후궁이 왕을 사랑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궁녀들의 직업 세계와 우정을 그려내며 사극을 현대화”(조혜영)하는 데 성공했
[기획] 2022년 시리즈 BEST 4위, ‘옷소매 붉은 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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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않는 여자 주인공,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의 애환, 부모 세대와의 갈등과 순응,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과 다르지 않다는 암담함”(김송희) 등이 묘사된 <나의 해방일지>는 “드라마에서 흔히 쓰이지 않는 소재, 서울 근교라는 배경,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흔치 않은 내향적 인물을 가지고 작품을 풀어냈으며 마니아층을 양산”(박현주)해냈다. 또한 “플롯을 구성하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생각과 감정들, 사건 사이의 틈을 비집고 와르르 쏟아지는 말과 사고의 흐름을 펼치고 내면의 풍경을 옮겨온 드라마”(유선주)였다. “박해영 작가의 전작들이 대중 취향에 최적화된 주문형 생산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작가적 주관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오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렬한 지지자들을 얻은 것은 “일상이 곧 전시가 되는 시대, 누추한 밑바닥의 감정을 때로는 누군가에게 가감 없이 드러내고 위로받고픈 시대의 욕망을 적확하게 짚어냈기”(장영엽)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기획] 2022년 시리즈 BEST 3위, ‘나의 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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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돈을 생각하고 말하는 시대의 초상을 동화로 풀어낸 자유로운 작법”(김혜리)을 보여주며 “올바름보다는 정념으로 설득하고, 옹호보다는 애호를 낳을”(김소미) <작은 아씨들>은 가히 “정서경 버전의 <기생충>”(장영엽)이라 할 만하다.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가장 높고 밝은 곳을 바라보는 여자들의 욕망을, 막장이라는 장르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현실적으로 그려낼”(장영엽) 수 있었던 근간은 “‘가난’을 그저 개인의 운명과 능력 문제로 협소화하지 않고 ‘베트남전쟁’이라는 근현대사를 ‘유령’ 담론과 연결지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체제 비판까지 나아간 담대하고 미래지향적인 세계관”(오수경)에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현대사의 큼직한 사건을 재구성하여 그 중심에 자매들이 종횡무진할 수 있도록 조율”(이자연)하고 “어떻게 보일지 개의치 않는 여성 캐릭터를 만나는 낯선 해방감”(유선주)을 선사하는 방향으로 소설 <작은 아씨들>을 재해석한 작품이지만, “세 자
[기획] 2022년 시리즈 BEST 2위, ‘작은 아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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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의 사회현상.(남지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2, 3위보다 두배 가까운 득표를 얻어 1위를 차지한 것은 이변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언론사마다 정치, 경제, 연예부가 대동단결하여 관련 기사를 쏟아내”(김현수)고, “작품성과 화제성, 대중성과 시청률 모두 압도적”(김송희)인 성취를 거둔 작품이 남긴 변화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한편의 작품이 사회에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인식 전환”(배동미)을 일으켜 “장애인 담론을 문화 공론장 중심부로 가져오는 데 성공하고 심지어 신드롬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작품 혹은 현상”(위근우)이었다. “장애인이 현 사회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사람들과 갈등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 그렸다”(조혜영)거나 “자신의 위치를 계속 고민하는 우영우라는 사람을 이해하려면 필연적으로 이 사람의 위치, 좌표나 위상을 계속 갱신”(유선주)하게 되고 “장애를 갈등 요인만이 아니라 인물의 여러 특성 중
[기획] 2022년 시리즈 BEST 1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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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자. 콘텐츠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진단은 영화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기존 영화감독들이 OTT 플랫폼에서 시리즈를 연출하기 시작하면서 영화와 드라마의 구분이 모호해졌다는 가설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반드시 기성 영화를 중심에 놓아야 할까? 영화가 드라마보다 우위에 있다는 오래되고 편협한 편견을 차치하더라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씨네21>의 시리즈 결산 결과는 그에 대한 근거다.
지난해부터 기자·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시리즈’ 송년 베스트 설문에 총 29명의 영화 평론가와 기자 그리고 TV 비평가가 참여했다. 선정 대상은 2021년 12월20일부터 2022년 12월4일까지 방영된 시리즈물로, 단막극도 포함했다. 12월4일 기준 모든 회차가 공개된 시리즈, 다시 말해 해당 기간 내에 ‘마지막회’가 방송됐느냐를 기준으로 삼았다. 올해는 특히 기존 드라마 업계가 쌓아온 자산이 빛을 본 작품이 평자들의 지지를 받아서 눈길을 끌었다. 코로나19로 극장 산업이 침
[기획] 2022년을 빛낸 시리즈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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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9회차에 접어든 ‘타이틀 매치’는 2인전이라는 틀 속에서 매년 새롭게 시도하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대표적인 연례전시다. 2022년에는 영화감독이자 영상설치작가인 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를 초청해 2023년 4월2일까지 <2022 타이틀 매치: 임흥순 vs. 오메르 파스트 《컷!》> 전시를 연다. 타이틀 매치 최초의 해외 초청 작가인 오메르 파스트는 <캐스팅>으로 2008년 휘트니비엔날레 벅스바움 어워드를 수상하고, 2009년엔 독일 내셔널 갤러리가 수여하는 40살 이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들며 개인과 집단의 기억이 매개되고 변화하는 방식을 구체화하는 데 관심이 많다.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와 공공미술 등 다양한 형식을 차용하는 임흥순은 재난과 전쟁, 그로 인해 희생된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며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영화 <위로공단>으로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려행>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
[인터뷰] ‘2022 타이틀 매치: 임흥순 vs. 오메르 파스트 《컷!》’ 작가 임흥순, 오메르 파스트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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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에서 필름앤비디오 2022년 하반기 프로그램으로 ‘영화로, 영화를 쓰다’를 상영 중이다. 차학경, 수전 손태그, 마르그리트 뒤라스, 포루그 파로흐자드의 작품들을 모은 이번 전시는 다른 지역, 다른 언어,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으나 이를 융합해 영화의 세계에서 만난 네명의 20세기 여성 작가들의 정신 세계로 잠입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활자(시, 소설, 에세이, 시나리오, 비평 등)를 쓰다가 이를 전복적인 영화 쓰기의 행위로 옮겨온 인물들이다. 4인의 작가 모두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 목소리는 길고 선명하다. 상영작 프로그램은 12월18일까지 만날 수 있다.
차학경 Theresa Hak Kyung Cha, 1951~82
여성, 한국인, 디아스포라
MMCA 필름앤비디오 상영작 <비밀스런 유출>(1974), <입에서 입으로>(1975) <치환>(1976), <비데오엠>(1976) <다시 사라짐&g
[기획] 잊혀지지 않은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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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힘’이 존재한다. 그 힘이 없다면 모든 게 신이 될 것이다.' _<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한때 성역처럼 여겨지던 역사의 시간이 있다. 1986년 광장에서 민주화를 이끌던 주역들. 그러나 90년대 이후 그 많던 이들은 광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민주화의 꿈도, 혁명의 이상도 모두 실패로 녹아내리고, 액체는 부패하고 있다. 누군가 외친다. 시간을 거슬러보자고. 비호받던 시간들의 영광을 다시 품에 안아보자고. “깨끗한” 시간으로 되돌아가자고.
아카이브 사료들 사이에서 수해로 소실된 줄 알았던 필름들이 발견된다. 민족사진연구회 박승화는 이것이 어쩌면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의 진격 같은 항쟁의 장면들을 촬영한 A컷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필름을 복원하려 한다. 이와 같은 도입부에서 어쩌면 관객은 사진의 복원을 가까이서 관찰하며 역사를 되짚는 친절한 역사서 같은 영화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멜팅 아이스크림>은 반대로 복원 작
[기획] 액체에서 저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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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조건들을 떠올려보자. 빛, 어둠, 시간 약속, 정해진 자리, 스크린, 스크린의 가장자리, 덜 채워진 객석, 집중하는 이의 옆얼굴 혹은 뒤통수, 비상구 사인이 내뿜는 희미한 빛….
이렇게 극장의 조건들을 아주 작은 단위까지 고심하다 보면 기이하게도 극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경험이 떠오른다. 한 전시장에서의 기억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긴 긴 어둠이 진입을 막아선다. 비틀거리면서 한참 걸어가다 보면 스크린과 몇개의 빈백이 놓인 구간이 뒤늦게 나타난다. 2019년 11월부터 2020년 2월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된 김희천의 <탱크>를 보기 위해 통과해야 했던 걸음의 경로다. 사실상 이렇게 짙고 긴 어둠을 관람의 조건으로 삼는 것은 극장을 드나드는 이들에게는 낯선 일이 아니다. 극장에서 우리는 시간을 약속하고 어둠을 합의한다.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이미 어둠은 극장에 도착해버리고, 관객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전시장과
[기획] 미술관과 극장, 교환의 조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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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는 ‘상영’되고 어떤 영화는 ‘전시’된다. 어떤 것은 필름이 되고 어떤 것은 비디오가 된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요나스 메카스를 누군가는 영화의 거장이라 하고 누군가는 미디어 아티스트라 칭한다. 반대로 어떤 이미지는 그림(drawing)이 되고 어떤 이미지는 픽처(moving picture)가 되어 움직인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디지털 아트의 다양한 종류를 아우르기 어려워지면서 움직이는 이미지인 영화의 경계는 더욱 복잡다단해졌다. 극장과 미술관의 자리를 오가는 동안 그중 ‘영화’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 기획에서는 김예솔비 영화평론가가 미술관과 극장의 구분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들에 주목하며 궁극적으로는 지금 극장에 필요한 영화들은 무엇인가 질문했다. 이어 홍진훤 감독이 전시용으로 제작했으나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된 실험 다큐멘터리 <멜팅 아이스크림>(2021)도 이 기회에 자세히 들여다보는 지면을 마련했다. 12월18일까지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기획]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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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영화감독. 영화 <비트> <태양은 없다> <감기> <아수라> 등 연출
“섬뜩한 꼰대 김준평을 낳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강퍅했던 한 시대가 저물어간다.”
한준희 영화감독. 영화 <차이나타운> <뺑반>, 넷플릭스 드라마 <D.P.> 연출
“지금도 한번씩 <피와 뼈>를 찾아 볼 때가 있다. 내가 쓰고 찍는 이야기들은 그런 들끓는 에너지가 있는가. 작품도, 삶도 하드보일드 그 자체였던, 영화보다 더 영화같이 살다 홀연히 사라진 감독.”
기타노 다케시 영화감독이자 배우.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 출연
“같은 세대의 영화 동료가 잇따라 죽어버려 낙담하고 있습니다. 최양일 감독과 영화를 만들면서 싸우기도 했고 술도 마시고 이런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 좋은 추억이에요.”
기시타니 고로 영화배우. 최양일 감독의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출연
“연극밖에 하
[추모] 영화인들이 기억하는 최양일 감독과 그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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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27일, 최양일 감독이 방광암으로 별세했다. <피와 뼈>(2004)의 거칠고 폭력적인 주인공 김준평처럼, 언제나 세상을 거스르며 꼿꼿하게 살아남을 것 같은 감독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아무리 강인해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시대도 변했다. 스탭에 대한 폭언과 폭력으로 유명했던 최양일을 마냥 추앙하기도 쉽지 않다. 재일 조선인 2세로서 험난한 세월을 헤쳐온, 빛나는 영화들을 남긴 최양일 감독의 명복을 빈다.
최양일은 1949년 나가노현에서 태어났다. 조선학교를 졸업한 후, 사진전문학교에 들어갔다가 중퇴하고 영화계로 뛰어들었다. 조명부, 소품부를 거쳐 연출부로 갔고, 오시마 나기사 연출의 <감각의 제국>(1976), 마쓰다 유사쿠 주연의 <가장 위험한 놀이>(1978) 등에서 수석 조감독을 맡았다. 첫 연출을 맡은 작품은 드라마 <프로헌터>(1981). 이후 뮤지션이며 배우인 우치다 유야가 기획한 <10층의 모
[추모] 최양일 감독: 폭력으로 세상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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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1968)
어쩌면 장 마리 스트로브야말로 진정한 앙리 랑글루아의 후예인지 모른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는 악보와 편지가 등장하는데, 이들을 통해 관객은 기표의 제약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사운드 필름의 등장 이후, 막간 자막의 사용은 불필요해졌다. 무성영화에서 자막은 대사를 전달했지만, 토키영화의 등장으로 역할을 잃었다. 구조적인 면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결과물만을 바라보면, 이 영화가 시네마의 관점에서 음성과 텍스트를 고민한 흔적이 발견된다.
1950년대 프랑스의 시네필들은 프랑스어 자막 없이도 의미가 전달되는 외국영화들에 열광했다. 대표적으로 미조구치 겐지가 그랬다. 그들은 스스로 미조구치의 스타일을 납득했다고 믿었다. 이 점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의 결과물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곳에서 음악은 음성보다 더 중요한 구성요소로 작동한다. 관객이 청취한 텍스트는 ‘편지’가 아니라 오히려 ‘악보’에 더 가까운 듯
[기획] 2022년에 돌아보는 장 마리 스트로브의 주요작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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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마리 스트로브가 11월20일, 스위스 롤의 자택에서 89살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계의 비순응주의자, 철저한 순수주의자로 불렸던 이가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의 영화는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번이라도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의 단호함에 경외심을 가졌다. 평론가 필리프 아주리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모든 사람, 한 국가 전체, 여러 국가를 동시에 소외시키는 사람”이라고 그를 소개한 적이 있다. 또한 영화감독 주앙 세자르 몬테이루는 장뤽 고다르나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보다 훨씬 더 추앙받아야 하는 감독이라고 말했다. 예술과 권력 사이에서 스트로브가 보여준 호전적인 태도를 기억하며, 평생을 무언가의 반대를 위해 바친 예술가 스트로브를 돌아본다.
1933년 1월, 프랑스 메스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에 관심을 보였다. 스트로브는 고등학교에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빠져들었고, 이후 낭시의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향후 언어학의 구조주의적인 관점은 그의 작품에 영향
[추모] 장 마리 스트로브 감독: 반동적 시네아스트, 현대영화의 지층을 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