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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에세이, 수필… 다 비슷한 글을 일컫는 것 같지만 그것들이 주는 느낌은 제작기 다르다. 문학과지성사의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는 에세이보다는 산문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린다. 일상생활이나 체험한 것을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간 글이 있는가 하면 소설과 시의 중간쯤에 자리한 것 같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산문도 시리즈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형식으로서의 에세이>에서 ‘에세이는 자신의 영역이 지정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에크리는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 혹은 ‘쓰다’라는 뜻인데, ‘문지 에크리’가 쓰다를 강조하며 산문집을 엮은 이유는 작가들의 자유로운 표현 방식 때문이다. 이를테면 김현의 책은 작고한 그가 쓴 수많은 문학 비평과 잡문들 중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의 글을 묶은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현보다는 프랑스 문예에 정통한 70년대의 불문학자를 떠올릴 때 더 적합한 글들이 산발적으로 엮여 있다. 얼마 전 그리핀 시문학상을 수상
씨네21 추천도서 <문지 에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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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는 어디로 가요?” 두명 이상이 모이면 휴가 계획이 대화 소재로 언급되는 시기다. 과거에는 내가 떠날 여행지에 대한 책을 몇권 사는 것부터 여행 준비가 시작됐다. 비행기표만 끊어놓고 숙소조차 예약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문가가 정리한 정보들은 유용한 가이드가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여행 정보는 책보다 SNS나 블로그로 얻는 경우가 많아졌다. 발간 후 한해만 지나도 해당 여행지에 대한 책 속 정보가 유효하지 않고, 책보다는 인터넷에서 취하는 정보가 최신의 현지 상황을 업데이트해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가방에 에세이형 여행책과 정보성 여행책을 2권은 끼워 넣어야 안심이 되는 비효율적 여행자다. 비자 발급법부터 현지 교통편과 계절에 따른 날씨까지 책으로 예습해야만 여행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24개국, 54개 도시를 여행한 자매의 여행기 <스물다섯, 서른, 세계여행>은 블로그의 여행기처럼 쉽게 읽히는 책이다. 해당 국가와 도시에 대한 세세한 정보보
씨네21 추천도서 <스물다섯, 서른,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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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당했다는 사람은 많은데 자기가 차별했다는 사람은 참 보기 어렵다. 높은 확률로 내가 차별을 당할 때가 있다면 내가 차별을 할 때도 있을 텐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쓴 김지혜는 프롤로그에서 두 표현을 예로 든다. 이주민에게 하는 “한국인 다 되었네요”라는 말과 장애인에게 하는 “희망을 가지세요”라는 말. 말하는 사람은 격려한답시고 건넨 말이지만, 이주민은 한국인이 ‘다 되었다’는 말에 자신이 아무리 한국에서 오래 살아도 한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서 모욕적으로 느낀다. 장애인의 삶에는 당연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자의 말도 모욕이 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제목처럼, 일상의 특권 때문에 불평등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설명부터, 차별이 어떻게 지워지는지, 나아가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쟁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폭넓게 다룬다. ‘역차별’이라는 말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고 왜 문제인지, ‘공정한 차별’이
씨네21 추천도서 <선량한 차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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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바이런은 당대의 셀럽이었기 때문에, 그가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후일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를 비롯한 일행과 제네바 근처의 호수에 휴가를 갔을 때 여행객들은 망원경을 빌려 그들을 염탐했다고 한다. 그 여행객들의 심정으로, ‘세계 문학 전집’에 이름을 올린 작가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 책이 <미친 사랑의 서>다. 유명 작가들과 관련된 시시콜콜한 일화들(당대의 가십으로, 어디까지 사실인지 약간 갸웃하게 되는 것을 포함해)을 소개하는 책이다. 로버트 브라우닝과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은 서로의 글에 반해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에 빠진 경우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20개월간의 연애에서 두 시인은 574통의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브라우닝 부부의 사랑은 ‘문인답다’는 환상을 부채질할 만한 이야기로 전해지지만, 찰스 디킨스의 경우는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최고로 치는 평소의 모습 뒤에서 오랜 이중생활을 이어갔다. 디킨스는 22년간 함께 산 아내와 헤어지
씨네21 추천도서 <미친 사랑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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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해외여행을 갔을 때 나에게는 실현하고픈 로망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숱하게 보았던 영화 속 한 장면 재현하기. 푸른 잔디밭의 큰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책을 읽고 싶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살지 않는 여행자가 그 장면을 구현하는 데는 수많은 난관이 존재했다. 일단 머무는 동안 날씨가 좋아야 했고(전날 비라도 오면 잔디가 젖어 누울 수 없다), 걷다가 언제 공원이 나올지 모르니 읽고 싶은 책을 내내 배낭에 넣어 다녀야 하고, 잔디에 사람이 누워도 괜찮은 공원인지 주변 분위기도 살펴야 한다. 맨발에 벌러덩 누워야 하니 옷차림도 자유로워야 하고 등에 뭐가 묻을 수 있으니 담요도 있어야 한다. 일단 날씨가 너무 덥거나 추워도 낭만과는 멀어지니 일기가 도와줘야 한다. 아, 이렇게 눈치 보고 챙길 게 많은 것부터가 이미 동경했던 ‘자유로운 무드’와는 멀어지고 만다. 야외에 누워 책을 읽다가는 뙤약볕에서 열사병으로 사망하기 좋은 대한민국의 8월 한복판 <씨네21> 책꽂이에는 여행책,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8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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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정소설(연애소설)에 푹 빠진 조선 여인들이 모인 낭독회장. 주인공이 권총 자살을 하는 결말에 다다르자,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죽느냐고 항의가 쏟아진다. 대갓집 마님은 “이게 다 천생배필을 만나기 위한 역경”이라며 슬슬 첫날밤 대목으로 건너뛰라 하지만 이야기는 끝이다. 조선에서 볼 수 없는 ‘화끈한’ 소설을 기다리던 이들에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소개한 이는 구해령(신세경). MBC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의 주인공이다.
천문학과 수학을 익힌 독서광 해령은 결혼을 마다하고 나라에서 공고한 여사(여성 사관)별시를 치르러 달려간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원으로 궁에 들어간 해령은 사관의 일을 배우고 도원대군 이림(차은우)과 교분을 쌓아간다. 여태껏 보아온 사극 로맨스 드라마의 여성 주인공이 어쩔 수 없이 남장을 하고, 사랑을 얻고 비로소 본 모습을 찾아왔다면, 일과 취미로 즐겁게 살기를 원하는 26살 해령은 남장을하지 않고, 공식적인 직업인으로 궁에 들어갔다
[TVIEW] <신입사관 구해령>, 새로운가 했더니 또 왕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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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물리학>
제작 엠씨엠씨 / 감독 이성태 / 출연 박해수, 서예지, 김상호 / 배급 메리크리스마스 / 개봉 9월 예정
죽어가는 업소도 살려내는 유흥계의 화타, 클럽 사장 찬우(박해수)는 유명 래퍼 프렉탈이 연루된 마약 파티를 우연히 목격하고 오랜 기간 알고 지낸 범죄정보과 형사 박기헌(김상호)에게 제보한다. 하지만 주요 참고인이 실종되면서 사건은 묻히고, 단순한 연예인 스캔들이 아니라 검찰과 정치계가 연루된 복잡한 네트워크를 건드린 찬우는 권력의 희생양이 될 위험에 처한다.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을 만큼 머리가 명석하지만 아버지의 사채 빚 때문에 화류계에 들어온 은영(서예지)은 매사 우아함을 잃지 않고 어떤 분야든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당발이다. 찬우가 새로 오픈한 클럽 매니저가 된 그는 위기에 처한 찬우를 돕기로 마음먹고,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다 오히려 구속될 위기에 처하는 기헌 역시 힘을 보탠다. ‘양자물리학’이란 제목은 “생각이 현실이 된다”는
[Coming Soon] <양자물리학>, 생각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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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봄밤>의 유지호가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준희와 같은 남자면 어쩌지. 이제는 ‘멜로’의 대명사가 된 정해인의 내공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한 기우였다. 둘은 너무도 다른 ‘남자’였고, 이번 봄은 지난해처럼 또다시 정해인표 멜로에 심각하게 빠졌었다. 이번에 정해인이 택한 캐릭터는 정지우 감독이 연출하는 <유열의 음악앨범>의 남자 현우다. 라디오의 호흡, 그 시대의 속도를 담은 인물. “현우는 지금까지 내가 한 캐릭터 중 누구와도 닮았다는 생각이 안 들 거다.” 정해인이 또 한명의,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을 남자로 다가온다.
-올해 1/4분기는 <봄밤>과 함께 보낸 것 같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이후 <봄밤>까지 연달아 멜로계를 석권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웃음) <봄밤> 찍기 전에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유열의 음악앨범> 촬영을 했다. <밥 잘
<유열의 음악앨범> 정해인 - 배우 정해인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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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열의 음악앨범>은 배우 김고은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상대 캐릭터와 나이 차이가 가장 적은, 그러니까 동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인물과 호흡을 맞추는 영화다. 캐릭터나 상대 배우와 물리적인 나이 차이가 있던 작품이 많다 보니 또래 배우 정해인과의 작업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 같다. “정말 그러네요. 뭐, 저는 좋아요”라며 고개 숙여 웃는 그녀의 모습이 극중 현우(정해인)를 처음 만난 미수(김고은)처럼 느껴졌다. 1990년대에서부터 시작해 십수년간 이어져오면서 관객을 애태우게 만들 이번 영화의 아날로그 감성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물었다.
-제작보고회에서 눈물을 흘렸다. 정지우 감독이 데뷔 이후 배우 김고은의 변화에 대해,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아이에서 어느새 고민이 많은 어른이 됐다. 그 모습이 이번 영화에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았다”라고 한 말을 듣고서였는데.
=정지우 감독님은 나를 데뷔시켜준 분이다. 다시 작품을 같이 하기 전에도 1년에 한번씩 꾸준히 뵀던 것
<유열의 음악앨범> 김고은 - 잔잔한 호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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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열의 음악앨범>을 듣는 것처럼. 정지우 감독의 서정 멜로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122분의 러닝타임 동안 미수(김고은)의 사연 같은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다. 1994년, 고등학생 현우(정해인)와 제과점에서 일하던 대학생 미수는 서로에 대한 호감은 있지만, 마치 먹구름처럼 그들을 가로막는 현실 앞에서 만났다 헤어졌다 하며,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않고 2000년대까지 긴 시간 동안 인연을 이어왔다. SNS와 페이스타임이 도착하기 훨씬 전, 우리의 몸이 아날로그 시대에 적응되어 있던 시절의 라디오 속도를 머금은 멜로. 드라마 <도깨비>에서 도깨비신부(김고은)와 첫사랑 야구부 선배(정해인)로 만났던 김고은, 정해인이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춘다. 트레이드마크 같은 두 사람의 사랑스런 미소가 가득했던 현장을 화보로 전한다.
<유열의 음악앨범> 김고은·정해인 - 시처럼 영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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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봉오동 전투> 동지, 나도 함께 가겠소!
[정훈이 만화] <봉오동 전투> 동지, 나도 함께 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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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상반기를 얼추 마무리 지었다면 이젠 하반기를 기대할 시점이다. 캐스팅이나 촬영 소식 등 제작 과정 하나하나 귀 기울여 온 영화팬들. 개봉만을 기다렸던 몇몇 기대작들의 개봉 윤곽이 어느 정도 잡히고 있다. 많은 팬들이 기대하는 하반기 국내 개봉 영화 5편을 모았다.
유열의 음악앨범
<유열의 음악앨범>은 1994년 가수 유열이 라디오 DJ로 첫 방송에 나선 하루로 시작한다. 실제로 존재했던 추억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목에 차용한 건 이 라디오 방송이 영화 속 두 주인공을 이어주는 매개로 중요한 역할을 해 주기 때문. 꺼지지 않는 레트로 열풍에 합류한 아련한 로맨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김고은, 정해인 두 배우의 조합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라디오 주파수에 실린 당대의 유행가들,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풋풋한 설렘을 자극한다. <해피엔드>, <사랑니>, <은교> 등 인상적인 로맨스 영화들을 만들어 온 정지우 감
언제 개봉해요? 애타게 기다리는 하반기 국내 개봉작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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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의 연작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의 표지는 2종으로 제작되었다. 자동차 일러스트가 있는 표지는 나가이 히로시의 시티팝 음반 커버 일러스트를 사용했고, 껴안은 남자들 일러스트 표지는 전나환 작가가 올랜도 총기난사사건 때 기부금 마련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 <Pray for Orlando>를 썼다. 두 이미지 모두 박상영 작가가 골라 편집부에 보낸 것들이다. <슬픔과 눈물의 투움바 파스타>를 비롯한 수많은 2차 창작 제목을 보유했던 전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교훈을 떠올려 단편들의 제목 역시 미리 표제작이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지었다. 쓰는 단계에서부터 네편의 소설이 한권으로 묶일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점까지, 박상영의 아이디어대로 구현된 책이 <대도시의 사랑법>인 셈이다. 진지하다가, 웃기다가, 울적해지는 영과 그의 남자들의 이야기를, 박상영은 사랑하는 대도시방콕과 상하이, 무엇보다 서울에 바친
<대도시의 사랑법> 출간한 소설가 박상영, "소설의 코어 중 하나가 공간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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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소설가 토니 모리슨이 8월 5일 별세했다. 향년 88살. 출판사에 따르면, 토니 모리슨은 5일 밤 몬테피오어 메디컬센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킨 가족들은 “자기 자신은 물론 학생들과 다른 이들이 쓴 글도 소중히 여기는 완벽한 작가였다. 우리는 그가 오래도록 잘 살아왔다는 사실에 감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가장 푸른 눈> <빌러비드> <솔로몬의 노래> <재즈> 등 토니 모리슨의 작품은 기존의 백인 중심이 아닌, 미국에서 살아가는 흑인 여성의 시각을 시적이고 세밀한 필치로 담아냈다. 퓰리처상을 받은 <빌러비드>는 오프라 윈프리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버락 오바마는 “좋은 이야기꾼으로서, 그의 글에서 살아 숨쉬는 매력적인 사람으로서 토니 모리슨은 국가적 보물이었다”는 추모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남겼다. 영화계에서도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에바 두버네
흑인 여성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토니 모리슨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