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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네는 도시 모형을 설명하며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운디네>를 보며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직 멀었나보다.
부서진 세계
어쩌면 이렇게 시치미 뚝 떼고 역사와 신화, 현실과 가상, 정치와 예술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을까? 아니, 그 경계를 넘나드는 정도가 아니라, 이 둘이 한몸이 되어 그 성격을 단선적으로 규정하기 힘든 ‘유령의 영화’가 있다면, 그것은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일 것이다. <트랜짓>에서도 그랬지만,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이 신비한 세계를 펼쳐 보이면서도 그 신비한 매력을 의도적으로 과시하거나 하지 않는다. 천연덕스러울 정도다. 어쩌면 페촐트는 영화란 애초에 유령의 예술(또는 매체)이라고 믿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트랜짓>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운디네>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그리고 절실하다.
배신당한 베를린의 꿈
물의 정령인 신화 속 운디네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결
'운디네', 신화를 경유해 베를린을 바라보는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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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도 래환이도 봄 같은 사람이다.” 유태오 배우의 말처럼, 흰 눈밭을 배경으로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래환(유태오)과 오월(최수영)의 눈빛은 더없이 따뜻하다. 패럴림픽 스노보드 국가대표 선수인 래환과 원예사인 오월은 “단짝 친구 같은 오랜 연인 사이”다. 하지만 의족을 사용하는 래환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결혼을 준비하던 두 사람 사이에 조금씩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다.
유태오 배우는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연말마다 찾아보는 시즌 무비가 될 수 있겠다”고 직감했다. “하얀 눈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오월과 래환의 이야기가 특히 매력적이었다.” 유태오 배우는 패럴림픽 출전 선수 대부분 사고로 인해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됐다는 사실을 래환의 전사에 접목시켰다. “래환이도 한때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었지만 현재는 이를 극복한 뒤 자유로워진 선수라고 생각했다. 촬영 현장에 갈 때마다 그 배경을 되새겼다.” 또한 신체의 불편함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인종차별을 경험했던 당시의 감정
영화 '새해전야' 최수영·유태오…사려 깊은 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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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지칠 때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날까. 낯선 공간은 그 자체로 일상에서 얻기 힘든 활력과 자극을 준다. 그저 새로운 만남과 경험 때문만은 아니다. 일상에서 멀어질수록 나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사회가 바라는 역할, 주변 지인들의 기대, 주어진 레일에서 벗어난 것들을 허락하지 않는 시선 등 나도 모르는 사이 덧씌워진, 내게서 오지 않은 것들. 진짜 나를 가리고 자존감을 위축시키는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가끔 필요한 것이 바로 낯선 공간과 새로운 만남이다.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 말하기 힘든 고민을 의외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겐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새해전야>의 재헌(유연석)과 진아(이연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나 마음을 나눈다. 먼 타향에서 아무런 인연도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이 몇번의 스침을 반복한 끝에 내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일주일의 마법 같은 시간이 설득력을 얻는 건 유연
영화 '새해전야' 이연희·유연석…내일을 위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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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행복해야 하잖아요.” <새해전야>를 소개하는 유태오 배우의 한마디는 영화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새해전야>는 새해를 준비하는 네 커플의 일주일을 담은 영화다. 새해를 일주일 앞둔 네 커플, 각기 다른 만남과 인연을 통해 한뼘 더 행복해진 세상이 열릴 수 있을까.
‘새해’라는 단어에는 설렘과 기대감이 묻어 있다. 해가 바뀌면 왠지 괜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고, 심란하고 힘들었던 상황도 원만히 해결될 것 같고,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른 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야말로 새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새해는 단지 날짜와 숫자만 바뀌는 것뿐 눈을 감았다 떠도 세상은 여전하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새해가 되면 괜히 들뜨는 건 상황이 바뀌기 때문이 아니라 의지를 다질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필요한 건 위기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 사소한 계기다. 해가 바뀐다는 건 반복되는 일상에 등을 살짝 떠밀어줄 정도의
영화 '새해전야'…HAPPY NEW YEAR, 행복을 위한 마법의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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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 이야기는 시작된다. 때는 1995년 <영챔프>가 주관하는 제2회 신인만화 공모전에서 수상한 젊은 만화가 정훈이는 <씨네21>과의 인터뷰를 인연으로 영화에 대한 2쪽짜리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1996년에 시작한 연재는 10년을 넘겨 계속되다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독자들의 성원으로 다시 <씨네21> 지면에 복귀했다. “동철이 형(남동철 기자)이 연락을 해와서는, 다시 연재하면 안되겠냐고 하더라고요. 정훈이 만화 때문에 정기구독 그만둔 사람도 있다고.” <씨네21>에서 편집장까지 지낸 남동철 기자를 ‘동철이 형’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창간 초기 밤샘이 일상 같던 주간지에서 연재 만화가와 기자들은 동고동락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고, 웹하드로 원고를 주고받으면서는 연재 작가와 편집부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어, 출판 만화에서 웹툰으로 만화판의
[스페셜] '씨네21' 정훈이 만화 연재 종료… 정훈이 만화 베스트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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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 이야기는 시작된다. 때는 1995년 <영챔프>가 주관하는 제2회 신인만화 공모전에서 수상한 젊은 만화가 정훈이는 <씨네21>과의 인터뷰를 인연으로 영화에 대한 2쪽짜리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1996년에 시작한 연재는 10년을 넘겨 계속되다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독자들의 성원으로 다시 <씨네21> 지면에 복귀했다. “동철이 형(남동철 기자)이 연락을 해와서는, 다시 연재하면 안되겠냐고 하더라고요. 정훈이 만화 때문에 정기구독 그만둔 사람도 있다고.” <씨네21>에서 편집장까지 지낸 남동철 기자를 ‘동철이 형’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창간 초기 밤샘이 일상 같던 주간지에서 연재 만화가와 기자들은 동고동락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고, 웹하드로 원고를 주고받으면서는 연재 작가와 편집부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어, 출판 만화에서 웹툰으로 만화판의
[스페셜] '씨네21' 정훈이 만화 연재 종료… 정훈이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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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대평가된 한국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코로나19 한가운데에서도 435만 관객을 동원하며 올해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대중상업영화의 모범이 될 수 있을까. “스타일도 연기도 팬덤도 구해내지 못한 앙상한 서사”(송효정)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 밖에 <남매의 여름밤>을 두고 “여러 거장의 이름들이 언급되는 것이 과연 칭찬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과소평가된 한국영화
<침입자>
개봉 당시 “어색하고 터무니없는 중후반”(박평식)이란 혹평을 받았지만 재평가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사실 <침입자>의 진가는 스릴러를 넘어 오컬트로 장르를 고쳐 잡고 난, 반전 이후부터다. 과소평가에 대해선 대체로 의견이 나뉘었는데, <여름날> <사냥의 시간> <#살아있다> <반도>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 등 놓치고 지나간 여러 영화
[스페셜] 씨네21이 선정한 2020년 과대·과소평가 영화와 올해의 영상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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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영화는 언제나 수작이 넘쳐나서 고르기가 어렵다는 평들이 많았다. 그러나 올해는 달라진 흐름을 감지한다. 평자들의 리스트에는 공통적으로 영화의 부재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물리적으로 평년에 비해 개봉영화 자체가 적은 탓도 있지만 영화의 폭과 층위, 다른 말로 영화의 영토가 점점 좁아져가는 걸 실감한다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씨네21>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극장에서 제대로 만날 수 있는 영화가 점차 줄어드는 지금, 전통적인 영화 관람 방식을 고수하고 따를 것인가. 아니면 영화의 가능성을 넓혀 새로운 형태도 받아들일 것인가.
올해 <씨네21>은 후자를 따르기로 했다. 해당 연도의 극장 개봉작을 대상으로 했던 종전의 기준을 완화하여 최초 개봉작이라면 예전 영화도 포함시켰고, OTT로만 공개된 영화까지도 선정을 받기로 했다. 이에 대한 평자들의 반응도 둘로 나뉘었다. OTT 영화를 순위에 적극 반영하거나 아예 순위에 올리지 않거나. 따라서 올
[스페셜]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외국영화 총평, 6~10위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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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외국영화 1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자체가 올해 하나의 현상”(송효정)이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한편의 영화 이상의 흔적을 아로새겼다. 올해의 외국영화 1위로 꼽은 평자들은 하나같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아니 셀린 시아마로 대표되는 하나의 파도에 주목했다. 여성의 이야기를 온전히 여성의 시선으로 포착한 여성의 영화. “<톰보이> <워터 릴리스> <걸후드>까지 올해 한국에서 개봉한 셀린 시아마의 전작을 모두 아우르는 의미”(김소미)에서 이 영화를 첫손에 꼽은 이가 적지 않았던 이유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셀린 시아마의 전작이 있었기에 도달한 성취이지만 “반대로 국내에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있었기에 <톰보이> <워터 릴리스> <걸후드>를 만날 수 있었다”(이주현). 물론 영화 자체의 타오르는 불꽃과 정념도 우리를 매료시켰다.
[스페셜]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외국영화 베스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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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신인감독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거장들의 영화를 영민하게 습득하고 자기 세계의 출발을 장대하게 알린 <남매의 여름밤>은 분명 주목할 수 밖에 없는 데뷔작이다.”(홍은미) 옥주 가족의 여름을 섬세하게 조명한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씨네21> ‘올해의 영화’ 2위에, 윤단비 감독은 ‘올해의 신인감독’에 이름을 올렸다.
윤단비 감독은 “순위를 떠나 <남매의 여름밤>이 거론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많은 분들이 <남매의 여름밤>을 알아봐주시고 많은 지지를 보내주셨다. <남매의 여름밤> 제작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를 쏟아붓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운도 따랐다. 신인감독상을 받은 것도 현재 나의 역량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다음으로 잘 나아가라는 응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윤단비 감독의 당찬 포부가 그의 차기작에서 다시 한번 빛을
[스페셜]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영화인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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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감독
<사라진 시간> 정진영
올해의 한국영화 4위에 안착한 <사라진 시간>은 올해의 영화인 설문에서도 감독, 신인감독, 시나리오 등 여러 부문에 호명되며 고른 지지를 얻었다. 정진영 감독에겐 그 세 이름 모두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그는 이 작품으로 “기성감독들 사이에서 가장 신선한 결과물을 낸 신인감독”(김철홍)으로 각인된 동시에 “자신의 영감과 직관을 자유롭게 표출해 파편화된 기호들을 만든 후, 결코 공허하지 않은 방식으로 흥미로운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김소미) 각본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데뷔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매 숏이 유려하고 매혹적”(홍은미)인 한편의 영화를 완성해냈다. 그런 그가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된 배경에는 오랜 시간 연기자로 활약해오다 연출자로 첫발을 뗀 그의 행보에 대한 평자들의 감탄과 기대가 자리할테다.
“전혀 생각지 못한 거창한 타이틀에 어리둥절하고 고맙다”며 인사를 건넨 정진영 감독은 “개봉 당시 내가
[스페셜]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영화인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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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국영화는 전례 없는 위기의 한복판에 놓였다. 극장엔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지고 영화가 관객과 만날 창구를 잃어갔다. 하지만 본질은 위기 앞에서 드러나는 법, 올해 한국영화가 내놓은 답들은 일말의 희망을 품을 만하다. 2020년 올해의 영화로 꼽힌 작품들의 특징은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1위에서 5위까지 5편의 영화 중 1위 <도망친 여자>를 제외하곤 모두 데뷔작이라는 건 의미하는 바가 남다르다. 10위까지 범위를 늘려도 신인감독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8위 <남산의 부장들>과 9위 <반도> 외에 7편의 영화가 전부 개성 넘치고 야심만만한 데뷔작으로 채워졌다.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코로나19로 인한 상영 환경의 변화다. 극장의 위기 상황에서 예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인감독의 데뷔작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수월한 측면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많은 상업영화, 대작영화가 개봉을
[스페셜]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한국영화 총평, 6위~10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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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한국영화 1
도망친 여자
올해도 홍상수냐고, 다른 영화는 그렇게 꼽을 게 없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둘 다 긍정한다.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시네마’들의 흔적조차 점차 희미해져가는 자리에서 홍상수는 시간의 풍화에 아랑곳하지 않는 시금석처럼 여전히 자신의 작업에 몰두한다. 그뿐이다. 그뿐이지만, 아니 그뿐이기에 홍상수의 영화는 시간을 비껴나 언제나 신비로운 순간들을 자아낸다. <도망친 여자>를 올해의 한국영화 1위로 꼽은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올해의 홍상수 영화”(듀나)다. 그저 관성으로 믿고 보는 작가의 신작의 신작을 뽑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백은 커지고 반복은 간결해지는데도 여전히 짙은 감정을 불러내는 홍상수 영화의 신비에 또다시 항복했다”(김소미)는 말이다. 둘째, 홍상수의 작업은 사방이 폐허가 되어가는 지금이라서 더 유효하다. “영화로부터 도망치는 것인지 영화로 도망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도망침이 2020년 가장 큰
[스페셜]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한국영화 베스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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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도 시간은 간다. 코로나19로 인해 전세계가 멈췄고 영화 역시 함께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연말은 찾아오고 2020년의 달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도 <씨네21>에서는 한해의 흔적을 뒤돌아보는 연말 설문을 준비했다. 매년 그러했듯 지난 영화들을 정리하는 건 그저 순위를 정하는 줄세우기가 아니다. 혹여 놓치고 지나간 영화는 없는지, 영화 저널로서 더 찾아보고 언급해야 할 지점은 없었는지 점검해보는 시간이다. 각각의 영화와 보냈던 기억들을 써내려가는, 영화를 향한 우리의 반성문이자 러브레터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연말 베스트는 여러모로 각별하다. 본래 어려울 때 진심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힘들 때 곁에서 함께하는 친구가 진정 소중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올해 연말 베스트 설문은 지난 시간에 대한 점검인 동시에 2021년의 파도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에 대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2020년 <씨네21>이 선정한 올해
[스페셜]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영화, 영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