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네데타는 성녀일까 사기꾼일까. 영화의 마지막, 페샤에서 도망친 베네데타가 다시 페샤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녀를 의심했던 나의 과오를 깨달았다.
여자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무언가에 탄 상태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폴 버호벤 감독의 두편의 영화 <베네데타>와 <쇼걸>은 비슷하게 출발한다. 또한 영화의 전반적인 부분이 서로 닮아 있다. 두 주인공은 욕망을 추진체 삼아 앞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뒤를 돌아보는 플래시백도 없다. 그렇게 영화가 끝에 다다르면 두 주인공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쇼걸>의 노미(엘리자베스 버클리)는 라스베이거스의 쇼 비즈니스 중심에서 스스로 나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향해 히치하이킹을 한다. <베네데타>의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는 자신이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쳐온 페샤로 발걸음을 다시 옮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베네데타는 왜 자신에게 지옥이 된 그곳으로 스스로 걸어간
'베네데타' 접속에서 접촉으로
-
감독은 최근 부흥하고 있는 새로운 철학적 주제들, 이를테면 신유물론이나 사변적 실재론 등에 감화된 듯한 인상이 짙다. <티탄>의 등장은 이른바 ‘인류세’를 자각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려는 영화적 노력의 일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보았다.
지난 비평(<씨네21> 1317호 ‘올해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티탄>을 기다리며 <로우>를 말하다’)에서 나는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작품 두편, <주니어>와 <로우>를 경유하여 <티탄>을 점쳐본 일이 있다. 뒤쿠르노의 세계는 심화하는 자폐의 공간이며 여성인 주인공과, 조력자 또는 조련사로서 남성의 관계 양상이 <티탄>에서 어떤 식으로 다시 그려지고 규정될지 기대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후 국내 개봉한 <티탄>을 보니 뒤쿠르노의 세계는 더욱 확장되고 심화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무엇보다 새롭게 눈에 들어왔던 건 전작들에서 발견하기
'티탄' 탈인간 중심의 서사를 위한 안내서
-
[송형국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2021년에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봐야 할 이유를 묻는 질문은, 지난 50년간 무엇이 달라졌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태일이>에는 그간 전태일 열사 관련 서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인물 금화(이나영)가 나온다. 우리가 우선 주목할 대목은 금화의 등장 후 10여분간이다. 50여년 전 노동 현실과 오늘날의 사회상을 잇는 연결망이 여기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금화는 태일이(장동윤)가 짝사랑한 3살 연상의 누나로, 그가 재단사로 일한 한미사 사장(권해효)의 처제다. 실제 이름은 ‘금희’다. 평소 메모에 열심이던 전태일 열사는 한미사 재단사가 된 1967년 2월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내려갔는데 초기 한달간의 일기에 “금희 누나”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빼곡하다. 동명 원작 만화(글 박태옥, 그림 최호철)에도 금희가 등장하는 페이지만큼은 화사하게 채색돼 있다. 당시 19살이던 전태일은 불꽃같은 사랑의 열병을 앓은 이후 스
'태일이' 세상이 좋아졌다 말하는 사람들에게
-
제작 동아수출공사 / 감독 이장호 / 상영시간 118분 / 제작연도 1980년
결국 유신은 무너졌고 얼어붙었던 문화계도 해동의 순간을 맞았다. 1976년 대마초 사건으로 한국영화인협회 감독위원회에서 제명당한 후 4년 동안 활동이 막혔던 이장호도 다시 연출할 기회를 얻는다. 그의 말대로 이데올로기적 각성의 시간을 보낸 후 선택한 원작은 최일남의 중편소설 <우리들의 넝쿨>이었다. 크레딧에는 감독이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이 썼다. 당시 그가 수배 중이어서 이름을 뺀 것이다. 1980년 3월 완성된 시나리오로 문화공보부에 제작 신고해 주로 외설적인 장면들을 순화하라는 지적을 받았지만, 현재 볼 수 있는 118분 버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면들이 많아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6월 말 촬영을 마치고 7월 말 검열 신청을 했는데, 다소 늦어졌지만 8월19일 서류 기록상으로는 어떠한 수정 사항도 없이 113분의 러닝타임으로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세 청년의 서울 생존기
-
-
<지옥>의 박정자는 캐릭터의 서사를 통해 곧 세계관의 논리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다른 딸과 아들을 홀로 키우는 그는 자신의 생일 5일 후 지옥에 가게 된다는 고지를 받는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것이 아니냐며 평범한 사람을 매도하고 신상까지 터는 범사회적 광기, 신흥 종교 새진리회가 박정자의 죽음을 생중계하면서 벌어지는 내러티브 반전 모두가 그를 경유해 묘사된다. <지옥>에서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이 캐릭터는 “분석과 직관”을 중요시하는 배우 김신록에 의해 살뜰히 완성됐다. “모든 캐릭터를 연기할 때 분석과 직관이 잘 어우러지도록 연기하고 싶다. 분석의 영역도 모두 직관으로 넘어가서 수행되거나 그렇게 보일 수 있기를 바랐다. 박정자는 세계관의 로직이 성립된 이후 <지옥> 2부에서 펼쳐질 사람들의 반응에 설득력을 줄 수 있는, 극 초반에 압축적으로 셋업을 하는 역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기능 이상의 풍성함을 구현하기 위해 인물과
'지옥' 김신록, 영감은 네트워크처럼
-
“대박 서프라이즈!” 어두운 골방에 틀어박혀 붉은 가발을 뒤집어쓰고 걸걸한 목소리로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BJ 이동욱의 정체는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지옥>의 첫화부터 독특한 비주얼로 시선을 잡아끌더니 마지막화에서 반전을 선보이는 이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는 <곡성>에서 성직자, <반도>에서 주인공 정석(강동원)의 매형을 연기한 김도윤이다. 그는 <반도> 촬영이 끝난 뒤 연상호 감독으로부터 <지옥> 출연을 제안받았다. <염력> <반도>, 그리고 드라마 <방법>에 이어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건 이번이 네 번째다. 그가 맡은 동욱은 새진리회 정진수 의장(유아인)만큼이나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동욱은 새진리회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집단 ‘화살촉’에 올바르지 못한 방향을 제시하고 폭력성을 증폭시키는 캐릭터다. 그는 정진수 의장의 ‘공포’에다 ‘분노’까지 더한
'지옥' 김도윤, 이토록 강렬한 주변부
-
백현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는 메인스트림에서 주로 ‘한없이 후진 남성’ , 줄여서 ‘한남’을 연기한다. <붉은 달 푸른 해>의 아동을 학대하는 개장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무능하고 질투심 많은 회장 아들, <모범택시>의 불법 동영상을 유통하는 웹하드 회사 회장, <해피니스>에서 아파트 주민들을 모두 전염병에 걸리게 하려고 계략을 짜는 피부과 의사. 하나같이 현실에서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들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극중 인물은 욕할지언정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날것의 연기를 하는 배우의 등장에 호기심을 가졌고, 그가 유명한 미술가이자 방준석 음악감독과 ‘방백’, 장영규 음악감독과 ‘어어부 프로젝트’로 활동하기도 한 음악가(에 더해 90년대 말 <씨네21>에서 김봉석과 듀나의 고정칼럼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를 직접 그린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했다.-편집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백현진이 왜 연기를 하지? 근데 왜 저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백현진, 완전 땡큐다
-
깜깜한 배경에 테이블 하나 덩그러니 놓인 여느 시사 토크쇼 세트장. 카메라가 돌아가기 직전에 짬이 나자 검찰 출신 보수야당 의원 차정원(배해선)이 상대 패널에게만 들리도록 배우자 학력 위조 문제를 꼬집는다. “전 진즉에 남편 분리수거했더니 이런 악재 터질 일이 이젠 없네요. 이런 걸 견제구라고, 몸속 깊숙이 찔러만 본 거니까 너무 쫄진 마시고. 내 직접 맞히진 않을게.” 차정원은 상대 패널의 가족 문제를 짚은 뒤 호탕하게 웃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당황한 상대는 녹화가 시작되자 차정원의 페이스에 말리기 시작한다. 차정원은 고수다. 상대방의 공격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기선 제압에 성공하는 정치 9단이다. 법정 싸움을 이기고 오느라 적잖이 세월을 까먹고 어느새 당내에선 비주류가 됐지만 ‘비주류 감성’만은 없다. 이길 수 있다는 배짱 ‘위닝 멘털리티’를 지녔기 때문이다. 배해선은 스스로의 캐릭터를 “자기 힘으로 성장하고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정치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요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배해선, 노력파 고수
-
드라마 <구경이>는 배우 조현철에게 오랜 기간 익숙한 작품이었다. “성초이 작가들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라 몇년 전부터 열심히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네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이라며 오경수를 소개했다. 대구 출신에 맨박스의 틀을 깨고 나오는 캐릭터라고, 드라마 <마인드헌터>의 FBI 요원 홀든처럼 연기하면 된다고 했다. 홀든 이야기가 미끼였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웃음)” 조현철이 연기한 오경수는 NT생명 조사B팀에 속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여기며 나제희 팀장(곽선영)을 무시하고 B팀에서 실적을 쌓아 A팀으로 이적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구경이(이영애), 산타(백성철)와 함께 팀을 꾸린 뒤로 B팀에 잔류하기로 결심한다. “초반에는 아직 맨박스에 갇힌 설정이라 여성인 나제희와 구경이에게 경계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틀이 깨지며 오히려 두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그런 변
'구경이' 조현철, 가장 보통의 특별함
-
“평생 통틀어도 나보다 선배 편인 사람 없을걸.” 분노와 서운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구경이(이영애)에게 토로하는 나제희를 보며 생각했다. 대체 상대를 얼마나 믿고 지지해야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구경이>의 나제희는 NT생명의 조사B팀 팀장으로, 경찰 시절 같이 일한 선배 구경이에게 함께 보험 사기로 의심되는 사건들을 조사할 것을 제안하는 인물이다. “성초이 작가가 전한 두 페이지 분량의 제희의 전사가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나제희는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두루뭉술하게 살아왔다. 그러다 경찰 시절 뭐든 명확한 구경이 선배를 만나면서 그를 동경하고 전적으로 지지하게 된 것이다. 제희의 분노도 구경이를 정말 아끼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혼자 아이를 키우고 나이 든 아버지를 부양하는 게 버거워 구경이를 배신하고 용 국장(김해숙)의 편에 서기도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돌아와 구경이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곽선영은 나제희의 텍스트를 면밀히 분석해
'구경이' 곽선영, 딱 좋은 거리감
-
작품의 특정 순간은 배우의 얼굴로 기억되곤 한다. 익숙한 배우가 전에 없던 새로운 에너지를 내비칠 때, 혹은 잘 모르던 배우의 빛나는 눈빛을 발견할 때 더욱 그렇다. 2021년은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배우들이 많은 해였다. <씨네21>은 2021년 하반기 화제에 오른 드라마 <구경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지옥> 중 6명의 신스틸러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맡은 캐릭터에 관해, 그리고 각자의 연기 철학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 <구경이>의 곽선영과 조현철,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배해선, 백현진, <지옥>의 김도윤, 김신록의 인터뷰를 전한다.
Scene Stealer. 마음을 훔치다
-
“대상을 이해하고 상대와 소통하는 것이 모든 작업의 기본이다.” 콘텐츠 생태계 구축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에 올해 7월 경기콘텐츠진흥원(이하 경기콘진원) 10대 원장으로 취임한 민세희 원장은 간결하고 담백하게 핵심을 짚었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변해도 성패는 결국 소통에 달렸다. 사람과 사람을 어떻게 잇고, 새로운 환경을 조성할지에 대한 변하지 않는 정답. 그런 의미에서 민세희 원장은 전문가라고 자부한다. 그는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인터랙티브 미디어로 석사 수료 후 MIT 센서블 시티랩 연구원, 한국인 최초 TED 펠로를 거쳐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랜덤웍스 대표로 활동 했다. 2001년에 설립된 경기콘진원은 게임, 영상, 음악 산업은 물론 VR/AR, MCN 등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융복합 콘텐츠 분야까지 육성하고, 창업을 지원해왔다. 행정 분야의 수장에 과감히 현장 출신 전문가를 영입한 것만 봐도 변화를 향한 경기콘진원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2021년 끝자락에
민세희 경기콘텐츠진흥원 원장
-
2018년 12월5일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자료원)의 새 원장으로 취임한 주진숙 원장은 전임 원장의 불명예 사퇴 이후 어수선한 조직의 분위기를 쇄신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업무를 시작했다. 영상자료의 수집, 보존, 전시 등 자료원 본연의 업무도 강화해야 했으며,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대응해 디지털 정보자원 창출도 고민해야 했다.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교수, 여성영화인모임 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등을 지내고 3년 임기로 자료원을 이끌어온 주진숙 원장은 일복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일을 너무 많이 벌여 후임 원장에게 죄송하다”면서도 “좋은 분이 후임으로 와서 계속해서 전진하는 자료원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의 말을 전한 주진숙 원장을 퇴임을 얼마 앞두고 만났다.
마지막 출근일은 언제인가.
공식적으로는 12월4일이다. 현재 후임 원장 인선이 늦어지고 있어 상황을 보고 있다.
지난 3년은 스스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나.
영화 전공자가 아니었던 전임 원장이 불명예
퇴임 앞둔 한국영상자료원 주진숙 원장
-
<티탄>의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은 올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역대 두 번째 여성감독으로 칸의 역사를 새로 썼다. 채식주의자 집안에서 억압받으며 살던 소녀가 수의대학 입학 후 식인에 눈을 뜨는 (반)성장담을 그린 <로우>(2016)가 영화제 관객의 실신 소동까지 일으킨 데 이어 <티탄> 역시 양극단에서 최고의 찬사와 혹평이 쏟아지며 또 한번 페스티벌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여성을 눈요기 내지 상품으로 대하는 남성들이 가득한 모터쇼에서 춤을 추며 살아가는 알렉시아(아가트 루셀)는 인간 남자는 물론 인간 여자에게도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연쇄살인범이다. 그를 유일하게 흥분시키는 존재는, 금속이다. 자동차와 성적인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한 알렉시아는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강박적으로 주사를 맞는 소방관 뱅상(뱅상 랭동)을 만나면서 새로운 감정에 눈을 뜬다. 언제나 금기에 도전하고 관습을 도발하는 작품을 만드는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을 화상으로 만났다
'티탄'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 "몸은 그냥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