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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초반, 미국의 지적이고 진보적인, 상류이기까지 한 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억압적인 사회에 맞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인 <모나리자 스마일>은 그리 공격적인 영화는 아니다. 여자대학교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캠퍼스 하며 예절교육 하며 화려한 댄스파티에 하버드를 나온 멋진 남자친구에 훌륭한 미술사 강의까지, 뭔가 너무 누리고 있다 싶은 사람들의 자아찾기는 사실 많이 감동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한국이라는 싸움판에서 사는 내게는 그저 모든 게 아름답고 편안해 보일 뿐이다.
1950년대라면 미국의 10대들에겐 로큰롤의 리듬을 발견하는 시대이지만 이 영화의, 비교적 성숙하고 예절바른 20대 초반의 아가씨들에게는 여전히 화려하고 달콤한 빅밴드 스타일의 스윙재즈가 더 어울린다. 파티장면 같은 곳에서 주로 화려한 빅밴드 재즈가 흐른다. 빅밴드 재즈는 원래 댄스홀의 춤음악이었으나 지금은 일종의 미국적인 ‘고전’을 보여주는 격조 높은 음악으로 취급받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형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복고풍 선율, <모나리자 스마일>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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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빅 피쉬>의 구라 정신에 공감하다“병장 때는 애들 다 잡았지”, “이등병 때 많이 맞았지”로 시작되는 군대 이야기는 남성 마초의 신화적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도 여전히 술자리의 단골 레퍼토리다. 군대 이야기도 싫고 축구 이야기도 싫지만,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가 가장 싫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 하지만 얼마 전 조재현이 코미디 프로에서 군대 구라의 결정판을 내놓았을 때, 친구들이 군대 얘기만 꺼내면 딴청을 피웠던 기억들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좀 더 열심히 맞장구 치며 들어둘 걸. 입대 직후 눈물로 얼룩진 옷과 소지품을 집으로 부치는데, 조재현 같은 ‘짝퉁’ 군인의 경우 짐보다 사람이 먼저 도착할 거라는 차인표의 넉살은 압권이었다. 친구들의 ‘군대뻥’은 3년 안팎의 의미 없는 시간들의 권태와 무기력을 잊는 유일한 무기가 아니었을까.영화 <빅 피쉬>는 한술 더 떠, ‘무기로서의 구라’의 수준을 넘는다. 삶 자체가 구라이며 구라 자체가 예술이 되는
아트 오브 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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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독일에서 본 방송. 의회의 몸싸움 장면을 엮은 것이다. 먼저 러시아 의회. 한 의원이 나오더니 단상의 물컵을 집어 연설하는 다른 의원의 얼굴에 들이붓는다. 물벼락을 맞은 의원, 당장 상대의 멱살을 잡는다. 일본의 의회. 과거의 군국주의 전통이 남아 있어서일까? 야당 의원들이 표결을 저지한답시고, 슬로모션으로 제자리걸음을 한다. 황군의 제식훈련을 보는 듯. 다음은 인도 국회. 파키스탄과 포격전을 벌이는 나라답다. 여야 의원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갈려 닥치는 대로 집기를 들어 상대방 진지로 날린다. 그 사이에 머리 깨진 부상병들이 쉴새없이 들것에 실려나간다.압권은 대만 의회. 여기에는 소림사가 살아 숨쉰다. 한 의원이 단상에 올라가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에게 발차기를 날린다. 그 민족이 브루스 리와 재키찬을 배출한 게 우연이겠는가? 이 장면을 보여주며 거리를 지나는 한 여인에게 소감을 묻는다. “저게 다 남성들이 만든 정치예요.” 페미니스트였나보다. 순간 카메라는 한
걸리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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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는 자기 책에 그림이나 삽화를 싣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했다는 말을 어떤 책으로부터 옮겨보자: "등장 인물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순간, 보편적인 성격은 사라져 버리고 이미 알려진 많은 사물 가운데 하나처럼 되고 만다... 결국 삽화나 그림은 이해력과 상상력을 차단할 뿐만 아니라 글로 묘사된 내용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는 매우 민감한 미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어떤 종류의 삽화나 그림도 반대한다." 참 애쓴다. "매우 민감한 미학적인 문제"라는 구절에서는 비장감마저 느껴진다.그런데 그림은 모두 다 구체적인가? 추상미술 작품을 보면 그건 아닌거 같다. 그것은 그림인데도 그것으로부터는 구체적인 것을 읽어낼 수가 없다. 그걸 읽어내려면 뭔가 고도의 훈련을 받아야만 할 것 같다.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도 있고, 그림으로도 드러낼 수 없는 뭔가가 있다면 - 그게 있는지 없는지 어찌 알겠는가마는 있다고 치면 - 입을 딱 다물고 있는게 낫다는 것을 말해주고
플로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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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한 그루의 나무다. 면면히 이어온 뿌리가 있고, 중심이 되는 줄기가 있고, 또 갈래갈래 가지를 치고, 꽃피우고 열매 맺고, 그리고 또 씨앗들을 떠나보낸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듯이 자식 많은 집에 근심걱정 끊일 날이 없는 것이 인생이다. 변덕 심한 봄바람에 새잎을 흩날리며 흔들리는 가지 많은 나무- 집을 그리자니 부모형제, 일가친척들의 지난한 인생역정들이 그려놓은 가지와 잎새 수 만큼 머릿속에 스치운다. 그리고 두 그루의 쓰러진 나무 이야기- <김약국의 딸들>(박경리 원작, 유현목 감독, 1963년작)과 <휘청거리는 오후>(박완서 원작, 주영중 감독, 1978년작)를 생각한다.<김약국의 딸들>의 김봉제씨에게는 다섯딸이 있고, <휘청거리는 오후>의 허성씨에게는 세딸이 있다. 이 여덟명의 딸들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가지들이지만 그들이 받아내는 세파의 바람은 한결같이 모질고 험하다. 다섯딸의 순탄치 못한 삶 속에
[김형태의 생각도감] 집16 - [가지 많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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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 <송환>을 만나다
영화는 김동원 감독의 약간 나른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의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되었다. 촬영을 시작하던 1992년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배경과 이 다큐를 찍게 된 자신의 내적/외적 동기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진다.
다큐에서 1인칭 내레이션은 가장 손쉽고 진부한 방식이기도 하지만 또 관객에게 신뢰를 주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차분하면서도 듣기에 편안한 음색과 발음이 일단 2시간30분여에 이르는 긴 시간을 이끌어가는 데 무리가 없다(러닝타임에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하나도 안 지루하니까~).
인간에 대한 예의
감독의 모든 설명이 있고난 영화의 초반부, 무료요양원에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모시러 간 감독은 두 할아버지 사이에 끼어 앉게 된 자신의 처지를 매우 어색해하면서도 자리를 바꾸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 어색함을 끝까지 견디어낸다.
어떤 자리에서도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조심성과 인위적인 것을 싫어
임순례 감독, <송환>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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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떠나왔다. 약속한 일 독촉하러 전화했던 말수 적으신 학교 선배, 몸이 비상신호를 보내와서 1년 만에 휴가 갖는 거라는 변명 듣더니 “그런 식으로 일한다고 누가 상 주나” 하신다. “그러게요.” “상 받은들 뭐 할 거라고.” “그러게요.” 일을 한주 연기해놨다는 전화를 다음날 받았다.하루 반에 걸쳐 도착한 강릉. 피로를 이기지 못해 도중에 1박을 한 때문이지만 여행을 꼼꼼하게 계획하지 않고 즉흥성을 즐기는 탓이 더 크다. 인적 드문 바다, 늦은 오후의 호숫가, 선교장의 뒷산 솔숲을 걸어다니며 회복의 느낌, 장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갖다. 다음날 다시 찾은 선교장. 세종 임금의 형이었던 효녕대군의 후손이 중종대, <대장금>의 바로 그 시절부터 세거하던 대저택. 날씨가 쌀쌀해선지 오후부터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한옥. 이 집이 매혹적인 한 이유다. 비는 오지 않았다. 서울발 일기예보에서는 동쪽에서도 비가 내릴 거라고 했다. 중앙에서 뿌려대는 지
외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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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컬러 100분감독 김화랑 출연 문희, 남정임, 고은아EBS 3월28일(일) 밤 11시10분사회가 급속히 변하고 세상이 달라짐에 따라 언어도 변하는 것. 우리 사회의 현대사에선 그렇게 사라지고 변한 말들이 많다. 그런 말들 중에 1960년대를 살았던 이들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말이 ‘식모’라는 단어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급속한 산업화와 이에 따른 도시화의 결과로 많은 농촌 처녀들이 도시로 올라와 식모로 일을 했다.그런 식모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꽤 많이 만들어졌는데, 김화랑 감독의 <식모 삼형제>도 그중 하나이다. 문희, 남정임, 고은아, 세 여배우가 분한 예쁘고 착한 시골 처녀 세 자매는 아버지의 회갑연 비용을 마련하려고 서울로 식모살이를 하러 왔는데, 이 세 자매는 한 골목에 위치한 집에 살면서 세 집안이 각기 가진 고민과 불화를 서로 협력해서 덜어주고 해소시킨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서 자꾸만 잊혀져가는 우리네 고향의 느낌을
명랑식모 성공기, <식모 삼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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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프를 하다> 2000년감독 김대승 출연 이병헌KBS2 3월27일(토) 밤 11시20분환생 모티브를 응용한 멜로드라마. 개봉 당시 영화 마니아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국문과 2학년 인우는 어느 날 운명적인 사랑과 만난다. 비오는 날 자신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어온 태희. 그날 이후 인우는 학교에서 태희를 찾기 위해 온 종일 보내기 시작한다. 그녀가 조소과인 것을 알게 된 인우는 아예 수업을 쫓아다니며 태희에 대한 사랑을 키운다.<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Wind 1940년감독 빅터 플레밍 출연 비비안 리SBS 3월26일(금) 새벽 1시5분원작소설을 빅터 플레밍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야”라는 명대사가 기억에 남는 고전이다. 조지아주 타라 농장의 장녀 스칼렛 오하라는 마을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빼어난 미모의 여인이다. 하지만 스칼렛이 사랑하는 남자는 애슐리뿐이다. 그 무렵 행실 나쁘다고 온 동네
[주말TV] 번지점프를 하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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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erto Rosso 1964년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출연 모니카 비티EBS 3월27일(토) 밤 11시1960년대까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는 비교적 단순하게 읽혔다. 현대인의 고독감과 소외, 그리고 불안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 것이다. 이후의 비평가들, 피터 브루넷 등은 이러한 견해에서 일정 정도 거리를 둔다.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시각적이고 문화적인 은유, 그리고 산업적 맥락을 함께 재고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안토니오니의 <정사>(1960)나 <밤>(1961), 그리고 <일식>(1962) 등은 현대적 텍스트, 다시 말해 영화 스타일이나 인물의 심리적 형상을 들여다볼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걸작들이다. <붉은 사막> 역시 그렇다. 감독이 만든 ‘삼부작’에 이어지는 <붉은 사막>은 어느 비평가의 말을 빌리자면 안토니오니 영화 중에서 “최고의 영화이자 가장 불완전한 영화”라는 이중적 잣대가 적용된다.이탈리아의 공업도시
불안에 대한 불완전한 영화, <붉은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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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인스포팅> 국내판 DVD는 미라맥스에서 출시한 미국판에 토대를 두고 있다. 때문에 미국판과 마찬가지로 비아나모픽 화면에 보통 이하의 화질, 평범한 사운드에 특별한 부록도 없었다. 더군다나 2002년은 요즘처럼 DVD 심의가 완화된 시점도 아니어서 국내판은 두 장면이 잘려진 채로 출시됐다. 그런데도 국내판에는 스페셜 에디션이란 이름이 버젓이 달려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트레인스포팅>은 코멘터리와 삭제신 등이 담긴 크라테리언 LD가 DVD보다 여전히 소장가치가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유니버설에 의한 완전판이 지난해 하반기 영국에서 출시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완전판의 장점은 크라테리언 LD의 서플먼트 전부는 물론 삼총사들인 감독과 제작자 앤드루 맥도널드 그리고 작가인 존 허지의 추가 인터뷰 영상, 렌튼이 특수 제작된 가짜팔에 주사놓는 장면의 메이킹 다큐 그리고 96년 칸영화제에서의 시사회 모습 등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심리스 브렌칭
[DVD vs DVD] <트레인스포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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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검> 斷腸劍1967년감독 장철상영시간 104분화면포맷 2.35:1 아나모픽음성포맷 만다린 DD 5.1자막 한글 자막출시사 스펙트럼사후에 작가로서의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홍콩 감독 장철의 <단장의 검> 출시는 여러모로 의미있는 사건이다. 같이 출시되는 과 더불어 이 작품은 외팔이 시리즈부터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장철의 선혈어린 폭력의 형상화, 그리고 동성애 혹은 동지애적 결합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남성주의적 작품세계가 어떻게 형성돼가는지에 대한 단초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장철의 영화세계뿐 아니라 홍콩 무협영화사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특히 70년대 애크러배틱하게 변형되기 이전의 무협영화의 원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강인하고 결단있는 우아함으로 형상화된 무협영화의 시선을 직접 체험할 수 있으며, 무협영화의 뿌리가 중국의 전통적인 선의 철학에 얼마나 가까이 자리해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이번 출시는 장철의 오랜 팬들에게나 장철을 처음
무협영화의 원형, 장철세계의 뿌리, <단장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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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토레 줄리아노> Salvatore Giuliano1961년감독 프란체스코 로지상영시간 123분화면포맷 1.85:1 아나모픽음성포맷 DD 1.0 이탈리아어자막 영어출시사 크라이테리언(미국)‘무정부주의자가 뭐냐’는 꼬마의 질문에 어머니는 ‘왕을 죽이고 폭탄을 던진 뒤 교수형당하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이탈리아영화 <사랑과 무정부주의>의 한 장면이다. 이런 나라에서 정치영화의 대가인 프란체스코 로지가 나온 건 당연한 일이다.로지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살바토레 줄리아노>는 총에 맞아 죽은 줄리아노의 몸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로지는 일그러진 영웅에 관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다. 실제로 줄리아노의 얼굴은 제대로 보여지지도 않고, 그의 대사라곤 단 몇줄뿐이다(이에 비해 마이클 치미노의 <시실리안>에서 우수에 찬 영웅으로 활약하는 살바토레 줄리아노는 우스울 뿐이다). 로지는 도적 줄리아노가 활동했던 1943년부터 1950년까
권력자의 뒤틀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살바토레 줄리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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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가 1964년 2월9일과 16일, 23일에 걸쳐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의 <에드 설리번 쇼>에 3주간 연속 출연해 미국 전역에 그들의 연주 모습을 선보이자, 미국은 순식간에 폭발적인 비틀스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이제는 역사의 한장이 된 이 3일에 1965년 9월12일의 방영분까지 비틀스가 출연한 4회의 <에드 설리번 쇼> 전체를 광고까지 고스란히 수록해놓은 이 두장의 DVD는 비틀스 마니아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 소장품이다.
프로그램은 비틀스가 처음과 마지막에 2∼3곡씩 연주하고, 그 사이사이에 다른 가수들의 노래나 코미디, 마술쇼 등이 공연되는 형식인데, 객석의 유명 인사들의 모습도 눈길을 끈다. 비틀스는 <예스터데이> 등 넘버1 히트 7곡을 포함한 20곡을 하루에 3∼6곡씩 부르는데, 음반에서와는 약간씩 다르게 연주되는 실황 특유의 묘미가 감칠맛있다.
4:3 흑백화면은 무척 깨끗하고 선명한 화면에서부터 비디오 노이즈나
<에드 설리번 쇼> 라이브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