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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자 <폴리와 함께>의 주인공 루벤 페퍼(벤 스틸러)는 행복한 신혼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아내의 이름은 ‘폴리’(제니퍼 애니스톤)가 아니라 ‘리사’이다. 신혼의 꿈은 아내가 신혼여행지에서 만난 스쿠버다이버와 바람을 피우면서 순식간에 파경에 이른다. 그것은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두 번째 만나게 되는 여자의 이름이 비로소 폴리이다. <폴리와 함께>는 한번의 가짜 이후에야 진정한 진짜를 찾게 된다는 다소 계몽적인 할리우드 로맨틱 서사를 끌어간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자기 변화의 감동적인 모티브와 실수 연발의 웃음 코드들이 배치되어 있다. 우선은 그 캐릭터들의 상충되는 면이 호기심을 자아내고, 그 성격차가 웃음을 유발하는 촉진제가 되며, 다시 진지한 사건의 갈등에 이른 뒤에, 중요한 일생일대의 감정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도착하게 된다.
말하자면, 루벤은 삶을 위험도의 확률로 계산하며 살아가야 하는 손해보험사정사이고, 조금만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
평이한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 <폴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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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제도에 대한 독한 회의(懷疑)가 그 주제만 아니라면, 결혼제도의 인위적 성격은 로맨틱코미디가 꽃피기 가장 좋은 환경이다. 따라서 아무리 극단적으로 다른 커플이라도 결혼반지라는 절대반지의 구속에 스스로를 변모해내게 마련인 것이다. 이처럼 결말이 이미 내장되어 있는 바에야 그 설정이란 여하간 상관없는 편이다. 여기, 24살의 바람기 다분한 청년 상민(김래원)과 16살의 보은의 결혼도 그렇다. 건강이 악화된 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하기 싫은 결혼을 ‘어쩌다 보니’ 했지만 그 다음은 모두 진짜 부부가 되기 위한 도상일 뿐인 것이다.
여기서 개화기도 아닌 요즘 세상에 정혼 같은 것이 도대체 가능한 것인가 하는 따위의 질문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포인트는 ‘정혼’을 통해 파격적으로 삭감된 신부의 ‘나이’이다. 그러니까 ‘낭랑 18세’가 아니라 ‘낭랑 16세’ 정도랄까. 그러나 이 ‘두살’의 의미는 적지 않다. ‘성년’과 ‘미성년’의 경계가 이 사이에 놓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TV드라마와
깜찍함으로 승부하는 얄팍한 결혼 이야기, <어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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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사만 빼면 원제 그대로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당연한 말이지만) 예수의 옷차림(fashion)이 아니라 수난(Passion)을 다룬 영화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수난극은 오직 피 흘리는 피부밖에 걸칠 게 없었던 한 인간의 처절한 패션쇼이기도 하다. 예수는 인류 최악의 고문으로 온몸이 찢어질 때까지 아무 기적도 행하지 못한 채 줄곧 상처투성이 육체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유다가 예수를 유대인 제사장들에게 팔아넘기고, 예수는 신의 아들을 자처했다는 불경죄로 공격당하며, 로마 총독 빌라도는 유대 군중의 압력에 밀려 십자가형을 언도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사흘 뒤 부활하더라, 는 줄거리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이런 유의 사극엔 으레 따라붙는 내레이션이나 배경 설명이 전무한 <패션…>은 모든 인물과 내러티브를 관객이 다 안다는 전제 아래 출발한다. 관객은 마치 <패션…> 10부작의 최종회를 보듯, 겟세마네 동산에서 골고다 언덕으로 이어지는 예
철저하고 처절하게 재현해낸 예수의 수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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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 1%’다. 물론 고급승용차를 타는 1%가 아니다. 92년 1.0%, 97년 1.2%, 2002년 3.9%. 내가 찍은 대통령 후보들이 얻은 득표율이다. 투표 경력 10년이 넘었지만,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은커녕 당선권에도 들어가본 적이 없다. 좋게 말해서 정치적 소수자고, 나쁘게 말해서 철없는 똘아이다.축제가 한창이다. 뉴스에도 중계된다. 축제의 슬로건은 ‘Again 1987’, 노래는 ‘아 옛날이여’, 준비물은 촛불이다. 긴 밤 지새우며 이들이 할 일은 “6월 항쟁의 쓰다만 뒤 페이지를 다시 쓰는 일”이다.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촛불을 들어야 마땅한 분위기다. 잠시 그의 과오는 잊고, 적들의 침탈에 맞서야 한다. 상식있는 자는 광분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1%는 그 상식에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는다. 1%는 공화국의 헌정질서에 흔쾌히 동의할 수 없다. 그저 대한민국에 대한 ‘안 좋은’ 기억만 많다. 초라한 1%는 졸지에 상식없는 놈까지 된다.그리하여 세상에는 또다
대한민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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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매혹의 시대로의 여행“영화는 시를 위한 가장 강력한 매체이다”라는 문장을 실제로 쓴 사람은 장 엡스탱이었지만 아마도 이것의 요체에 대해서는 장 비고도, 그리고 장 콕토도 동의하지 않았을까 싶다. 엡스탱, 비고, 콕토는 세인들로부터 우선 영화의 시인들이라고 불렸던 시네아스트들이다. 그건 영화 만들기를 통해서 그들이 공히 고심했던 것이 자유롭게 눈을 위한 글을 쓴다는 것의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론적으로든 직관적으로든 아니면 경험적으로든 그들은 자신들이 이용할 언어에 대한 성찰에 이르려 했고 그로부터 나온 자신들의 혁신적인 문체로 상상력을 좀더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면서 그들만의 매혹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그래서 그 시인들은 아방가르디스트들이면서 시각적 몽상가들이기도 했다. 엡스탱의 죽음에 즈음해 콕토는 그에 대해 쓴 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이미지들과 리듬은 노화를 겪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아주 우아하고 힘이 있는 리듬과 이미지를 발견하고는 즐거움을 느끼
‘프랑스 아방가르드 회고전’ 세 거장의 대표작 18편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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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안 하겠다는 남자의 얘기.” 구자홍 감독은 연출의 변에서 <마지막 늑대>를 이렇게 요약한다. 딱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하이컨셉이 이 영화에 귀가 솔깃해지는 이유다. 주인공 최철권(양동근)은 서울에서 강력계 형사로 일하다 탈진한 어느 날 선언한다. “오늘부터 나 일 안 해.” 곧이어 강원도 산간오지 무위마을에 도착한 최철권이 보인다. 맑은 공기, 푸른 숲, 청명한 하늘, 무위도식을 위한 최상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수십년간 범죄가 없는 마을, 일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작은 파출소에서 꿈같은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나 1년 뒤, 범죄율 낮은 파출소를 없앤다는 공문이 내려오면서 문제가 생긴다. 아무 일도 안 하기 위해 그는 이제 구슬땀을 흘려야 한다. 없는 범죄도 만들어내야 한다. 나의 평화를 위해 마을의 평화를 흔들어야 하는 아이러니, 거기서 <마지막 늑대>의 코미디가 시작된다.
물론 아이러니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야 제 맛이다. <마지막
파출소 폐쇄위기에 처한 두 경찰의 악전고투, <마지막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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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중년의 품위 그려낸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스칼렛 요한슨의 둔부를 탐닉하듯 관조하는 오달리스크풍(역주: 터키 궁중의 시녀들을 그린 나체화)의 화면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빌 머레이의 영화라고밖에 볼 수 없다. 다른 어떤 배우도 그만큼 훌륭하게 뒤틀리고 상처받은 중년의 품위를 연기해내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이 오히려 무색하다고나 할까?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에서 감독 소피아 코폴라는 빌 머레이에게 마음껏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줬고, 그녀의 선택은 어릿광대와도 같이 우울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빌 머레이의 탁월한 캐릭터로 보상받았다.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빌 머레이는 마치 현실 속의 자기 자신과도 같은 미국의 영화스타 밥 해리스 역을 맡았는데, 그는 여느 스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재빨리 산토리 위스키 광고를 한편 찍고 손쉽게 200만∼300만달러쯤 챙겨갈 심산으
빌 머레이의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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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에서 흥미로운 점이 그것인데 원조교제이건 매춘이건 특수한 한두명의 잘못을 그리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렇다는 식이다. 매춘과 결혼에 대해 지금 말한 것도 연결되는 지점 같다.
그건 일종의 공범의식이다. 9시 뉴스를 볼 때 얼굴에 모자이크된 인물이 가해자고 시청자는 다 피해자냐?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하늘에서 인간을 내려다보면 인간 키가 3미터를 넘는 사람은 없지 않나. 아무리 커도 몇십센티미터 크다. 하늘에서 보면 다 똑같다. 과연 우량한 인간과 불량한 인간의 데이터가 있는가? 이 사회에. 사회가 어떤 그물망을 던져서 그물에 걸리는 사람은 악이고 빠져나가는 사람은 선으로 정리될 뿐이다. 그물코에 따라서 다 걸린다. 이 사회의 법과 제도는 그물코다. 그물코가 좁으면 걸리고 넓으면 빠져나오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이렇게 살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내 영화는 한번도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이게 우리 모습이 아니냐. 극장에서 우리 모습을 한번 확인
김기덕은 변화하는가? [2] - 우량한 인간과 불량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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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받았지만 지난 3월2일 만난 김기덕 감독은 우울했다. 최근 한 스포츠신문이 ‘김기덕 감독이 이승연을 다음 영화에 캐스팅한다’고 보도한 사건 때문이다. “1시간 동안 <사마리아>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그러더니 마지막에 이승연이랑 영화 찍을 생각도 있느냐, 그렇게 묻기에 기회가 된다면 그럴 수 있다, 고 답했다. 그런데 다음날 이승연이랑 영화 찍는다는 기사가 나간 거다. <사마리아>에 대한 인터뷰는 거의 쓰지도 않았다.” 그는 법적 소송까지 생각해봤지만 그냥 참는다고 덧붙였다. <사마리아>가 전하는 메시지가 그런 것이므로. 아무튼 김기덕 감독과 <사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사마리아>는 일반적 리얼리즘의 잣대로는 잘 보이지 않는 맥락을 갖고 있다. 비현실적 캐릭터와 성긴 이야기 구조 때문에 아주 쉽게 독해가 되는 영화는 아닌 것이다. 둘째 김기덕 영화가 변
김기덕은 변화하는가? <사마리아>, 이전 영화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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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씨의 설익은 이분법 논리를 비판한다
우리는 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권력의 편으로부터 우리를 저항의 입장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사회의 모순이지, 그 모순 속에서 태어난 예술 작품(혹은 비평)이어서는 안 된다.
-인터넷상 블로그에서, 사드에 대해 푸코가 한 말
지난 5년간, 학생들과의 사석에서 술자리를 갖거나, 특강 뒤의 질문 시간에, 혹은 메타 비평을 써보라고 내준 작문에서, ‘입을 찢어버리겠다’는 욕설이 담긴 이메일까지 사람들은 특히 남학생들은 비슷한 질문과 그보다 더 비슷한 질문을 하곤 했다. ‘전 김기덕을 좋아합니다. 그는 이런이런 장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왜….’ 이 소리가 김기덕 감독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성폭력 예방을 위한 세미나 시간에도 나오니, 섬이란 평론이 내게는 참 질기고도 긴 업보인가보다.
그러므로 강성률
페미니즘 비평이 몸부림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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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의 SF 미니시리즈 <테이큰>, 외계인 음모이론 배경으로 한 어느 가족의 연대기그들은 여전히 우리를 방문하고 있는가. 2002년 가을, SF전문 케이블 Sci-Fi 채널에서 2주 동안 방영되었던 10부작 미니시리즈가 채널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며 북미대륙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은 2003년 1월에는 영국 에서 석달에 걸쳐 방영되며 대서양 너머까지 폭발적인 인기 바이러스를 전염시켰고 2003 에미상 최우수 미니시리즈 부문을 수상했다. 외계인에 의한 납치(Alien Abduction), UFO와의 조우, 로스웰에 관련된 음모이론 등 멀더와 스컬리적 요소를 모두 끌어모아 3집안의 4대에 걸친 역사 속에 풀어넣은 SF 미니시리즈 <테이큰>의 신드롬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47년의 로스웰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테이큰>은 3가족의 역사를 따라 현재의 시간까지 천천히 흘러간다. 2차대전 중 외계인에게 납치된 경험이 있는 전투기
진실은 여전히 저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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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영화의 반대말이 ‘좋은’ 영화가 아니라 ‘착한’ 영화가 될 때 그 말은 매우 교활해진다. 그것은 곧장 우리로 하여금 기대의 지평을 끌어들이고, 거기에 기대서 세상을 보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세상 속의 현실은 점점 더 거기서 멀어지거나, 혹은 세상의 모순에 대해서 눈멀게 만든다. ‘나쁜’ 영화는 우리를 비겁한 죄인으로 만들지만, ‘착한’ 영화는 무기력한 바보로 만든다.
위기철이 1991년에 발표한 지 10년 만에 문화방송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가 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동명 소설을 영화로 옮긴 윤인호의 <아홉 살 인생>은 선한 의도로 가득 차 있다. 윤인호와 (시나리오를 쓴) 이만희, (기획한) 서현석과 황지웅, (프로듀서) 정종헌의 선한 의도는 기꺼이 위기철의 원작 소설이 지니고 있는 현실 속의 모순과 구체적인 슬픔마저도 내다 버릴 만큼 착하다.
그러나 그들은 위기철의 동화를 오해한 것이다. 사실상 위기철의 동화는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비평 릴레이] <아홉살 인생>, 정성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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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라는 산 정상에 ‘결혼’이라는 고지가 있지만, 고지를 점령했다고 해서 반드시 두 남녀 간의 로맨스가 끝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개봉작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가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결혼이 곧 인격적 성숙의 척도라고 말했다가는 구시대의 유물을 보는 듯한 눈초리를 받을 법한 요즘, 영화도 결혼이라는 분기점에서 가족드라마로 넘어가기보다는 로맨틱 코미디의 2차전, 또는 속편을 따라가고 싶어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김래원, 문근영 주연의 <어린 신부> 역시 결혼 뒤에 펼쳐지는 로맨틱 코미디를 그린 영화다. 결혼한 남녀의 아웅다웅 싸움과 달콤한 화해를 그리지만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나 텔레비전 드라마 <천생연분>보다 극단적인 설정이다. 열여섯 여고생과 스물넷 대학생이 결혼을 했으니 한세기 전이 아니고서야 정상으로 보일 리 만무다. 그러나 이게 말이 되나라고 흥분하거나 두 사람이 결혼한 이유의 빈약함을 꼬투리잡는 건 ‘이유없는
[새영화] <어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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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부삼천지교>, <프리키 프라이데이>, <저지걸> 등
`가정의 달' 5월을 한달 남겨 놓은 초봄 극장가에 부모와 자식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가족영화가 잇따라 간판을 내걸고 있다. 26일 부자(父子)간의 사랑을 담은 <맹부삼천지교(孟父三遷之敎)>가 개봉한 것을 시작으로 4월 2일 모녀(母女)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프리키 프라이데이>가 바통을 이어받고 일주일 후에는 부녀(父女)의 이야기인 <저지걸>이 가세해 관객에게 모처럼 아들딸의 손을 잡고 극장 나들이에 나서보라고 손짓한다.
주인공의 성별이 각기 다른 이들 삼색(三色) 가족영화는 배합비율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코미디와 드라마를 섞어놓은 유쾌하면서도 훈훈한 이야기. 콘서트, 오디션, 학예회 등의 무대에서 부모와 자식이 완전한 화해를 이루는 것으로 끝을 맺는 방식도 비슷하다.
조재현ㆍ손창민 주연의 <맹부삼천지교>는 아들을 서울대에 입학시키려고
부모와 자식 사랑 그린 가족영화 줄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