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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번뜩이는, 나를 찾아줘
젊은 감성과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무장한 짧지만 임팩트가 있는 단편영화들은 ‘판타스틱’영화제에 가장 어울리는 부문인지도 모르겠다. 전통적인 판타스틱영화라고 볼 수 있는 SF나 호러 같은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올해 부천영화제의 단편들은 장르와 섹션을 불문하고 어느 구석엔가 빛나는 유머를 간직하고 있는 영화들이다.
부천 초이스(단편)
<전쟁포로><좁아!><당근파이 음악회>(위부터)
올해 미쟝센영화제에서도 소개되어 좋은 평가를 받은 <핑거프린트>(Fingerprint/ 조규옥/ 한국/ 21분20초/ 2004년)는 성장의 공포를 호러영화 속에서 표현해낸 수작이다. 수많은 복사물들을 만들어내는 ‘복사실’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일들은 견고한 비유로 배치되어 관객에게 성장의 의미를 묻는다. 후세인의 거처를 묻는 두 미군 병사와 이라크인 포로 사이에서 오가던 대화가 허무하지만 따뜻한 반전으로 끝맺는 <전쟁
PiFan 2004 - 네 안의 숨겨진 환상을 찾아줄게 [5] -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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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 롱택샘의 일생>
The Magical Life of Long Tack Sam l 앤 마리 플레밍 l 90분 l 2003년 l 월드판타스틱시네마
캐나다 여성감독이 마술사이자 기예가인 중국인 증조부, 롱택샘의 과거를 찾아가는 다큐멘터리. 타고난 재능으로 전세계를 돌며 공연했던 증조부의 화려했지만 잊혀진 삶이 감독에 의해 재탄생한다. 그 자체로 영화적인 롱택샘의 일생은 실사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흥미진진하게 재구성된다. 감독은 롱택샘의 일생을 진실 그대로 복원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발랄한 상상력을 동원하며 마술사 롱택샘의 극적인 삶을 독특한 방식으로 서사화하는 데 성공한다. 핏줄을 찾아가는 눈물겨운 감상 대신 담담하면서도 유쾌한 시선을 택한 그녀는 자신의 뿌리를 긍정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 방식은 매우 신선하다.
<가감보이>
Gagamboy l 에릭 찰스 마티 l 필리핀 l 109분 l 2003년
PiFan 2004 - 네 안의 숨겨진 환상을 찾아줄게 [4] - 추천 판타지영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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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상력, 뻔뻔하다
<페스티발 익스프레스>
Festival Express l 로버트 스미튼 l 영국 l 90분 l 2003년 l 월드판타스틱시네마
<페스티발 익스프레스>는 1970년 여름에 있었던 캐나다 횡단 록콘서트의 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1970년은 60년대의 자유분방한 록 정신이 마지막으로 불길 속에서 산화하고 있었던 때. 지금은 전설로 남은 재니스 조플린, 그레이트풀 데드 등의 록 뮤지션들은 기차 속에서 잼세션을 벌이고, 비싼 티켓 가격에 항의하는 팬들을 위해 즉석 무료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기록들에 들떠 있다가 극장 밖을 나서면 좀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자유와 평화와 사랑을 외쳤던 세대의 록 정신은 어느 순간 맨바닥에 엎어져버렸고, 화면 속에서 에너지를 분출하는 재니스 조플린은 젊은 나이에 약물로 요절했다. 33년 동안 창고에 박혀 있었던 이 다큐멘터리가 ‘월드판타스틱시네마’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지금
PiFan 2004 - 네 안의 숨겨진 환상을 찾아줄게 [3] - 추천 판타지영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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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그 부트게라이트 특별전나의 사랑하는 시체들을 소개할께
<네그로맨틱><슈람><시체애호의 예술>(위부터)
부천영화제의 카탈로그에서 요르그 부트게라이트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이 낯선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만한 규모의 영화제에서 부트게라이트의 작품을 ‘특별전’이라는 이름으로 관람한다는 것은 드문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들은 시체애호증, 신체 훼손, 자해와 살인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고 여전히 정상적인 경로로 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국가들은 한정되어 있다. 그의 1987년 장편 데뷔작 <네크로맨틱>(Nekromantik/ 독일/ 75분/1987년)과 1991년에 제작된 속편 <네크로맨틱2>(Nekromantik2/ 독일/ 104분/1991년)는 ‘네크로필리아’(시체애호증)에 대한 영화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네크로파일(시체애호자)의 사랑은 어떤 형태일까’라는 것. 이 두편의 도발적인 작업물은
PiFan 2004 - 네 안의 숨겨진 환상을 찾아줄게 [2] -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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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곤두서는 즐거움
<개미들의 왕>
King of the Ants l 스튜어트 고든 l 미국 l 102분 l 2003년 l 개막작
당신이 호러영화의 마니아라면 <좀비오>, <지옥인간>(From Beyond) 등 80년대 호러영화 걸작들을 만들어낸 스튜어트 고든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다. 초창기 브라이언 유즈나(<리빙데드3>)와 함께 만들었던 이 두편의 H. P. 러브크래프트 원작 각색영화들은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스플래터영화에 뒤틀린 유머감각을 발휘한 걸작들이었다. 이 작품 이후로 90년대 내내, 고든은 잡다한 할리우드영화들에 매진하면서 명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돌아왔음을 알린 작품은, 다시 한번 브라이언 유즈나·러브크래프트의 팀워크로 만들어낸 2001년작 <데이곤>. 그리고 부천영화제 개막작인 <개미들의 왕>은 우리가 여전히 스튜어트 고든에게 주목해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주인공인 숀은 남의 집에 페
PiFan 2004 - 네 안의 숨겨진 환상을 찾아줄게 [1] - 추천 호러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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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은 유난히 신데렐라 이야기가 강세다. 14일 시작하는 KBS 2TV 수목극 <풀하우스>(극본 민효정, 연출 표민수)가 가세하면서 각 방송사는 신데렐라 드라마 한 편씩을 보유하게 됐다. SBS에선 <파리의 연인>, MBC는 <황태자의 첫사랑>을 방영중이다. <풀하우스>는 드라마화가 결정된 작년부터 화제를 모았다. 원작이 93년 출간돼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원수연 작가의 순정만화이기 때문이다. 호리호리한 엘리 역의 여자주인공으로 송혜교가 캐스팅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화제성은 가수 비가 라이더 배역으로 캐스팅되며 절정에 이르렀다.
이 드라마 역시 스토리라인은 단순하다. 부모도 잃고 변변한 직업도 없이 가진 건 달랑 부모님이 남겨준 '풀하우스'라는 집밖에 없는 한 여자가 아시아 최고의 영화배우를 만나 집을 되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약결혼을 하고, 진짜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것. 여기에 두 가지 얼개의 삼각
또 한편의 신데렐라 스토리 <풀하우스> 출격준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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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그리너웨이 초기작품집> The Early Films of Peter Greenaway Vol. 1 & 21969∼80년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상영시간 311분화면포맷 1.33:1 스탠더드음성포맷 DD 2.0 영어자막 영어출시사 BFI(영국)<건축가의 배> The Belly of an Architect1987년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상영시간 119분화면포맷 1.85:1 아나모픽음성포맷 DD 2.0 영어자막 영어출시사 MGM(미국)<털시 루퍼의 가방> The Tulse Luper Suitcases: The Moab Story2003년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상영시간 127분화면포맷 1.85:1 아나모픽음성포맷 DD 5.1 영어자막 스페인어출시사 라우렌필름(스페인)피터 그리너웨이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 방법은 그의 영화를 유유자적 따라가는 것으로서, 그의 영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본 사람을 위한 선택이
피터 그리너웨이 작품 보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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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에 담긴 인터뷰 영상에서 최동훈 감독은 <바람난 가족>에 단역으로 출연했었다고 밝힌다. <바람난 가족>을 다시 보니 멱살이 잡혔으면서도 웃고 있는 경찰2가 바로 최 감독이다. 그런 넉살스러움이 <리피피>로부터 내려온 전통, 즉 실패하는 직업으로서의 은행강도를 성공하게끔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배우들은 이 영화를 해피엔딩이라 말하지만 진작 감독은 실패한 범죄로 규정한다. 실제 큰 사기를 당하기도 했던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조금이나마 사기 근절에 도움이 되길 코멘터리에서 염원하며 앞으로 범죄 삼부작을 완성시키겠다고 말한다.
해상력이 뛰어나 근래 출시된 한국영화 DVD 중에서도 괜찮은 화질을 보여준다. 배경과 사물이 간혹 들썩거리고 등고선 노이즈가 보이지만 모니터에 근접감상을 하지 않는 이상 느끼기 힘들다. 돌비디지털과 DTS 5.1 채널을 지원하는 데 우퍼활용도가 낮아 5.0 채널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 두장의 디스크에 꽉 채워넣었
로또 복권 찾아보세요, <범죄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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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한 지 10여년이 지난 마흔 나이의 감독이 풋풋한 감성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작품에는 변하지 않는 맥이 있다. 근작 <웨이킹 라이프>는 장편 데뷔작 <슬래커>에 상큼하면서도 우아한 철학옷을 입혀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 작품 <라스트 스쿨 데이>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나옴직한 영화를 만들었다. 바로 <스쿨 오브 락>이다. <스쿨 오브 락>은 그로선 비교적 큰 규모의 프로젝트였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소품이다. <스쿨 오브 락>의 주인공은 남의 눈치엔 관심없고, 자기가 즐거워하는 음악에만 미쳐 있는 사람이자 아이들의 왕이며, 주연을 맡은 잭 블랙은 연기에 대한 예의라곤 없어 보인다. 록의 반항정신이 유쾌함과 함께하는 것이라면, <스쿨 오브 락>은 그것의 가장 적확한 예라 하겠다. 영화의 웃음은 종종 대책없음에 이르지만 즐거움엔 규칙이 없는 법. <스쿨 오브 락>은
‘록’에 홀려봤어? <스쿨 오브 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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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Something’s Gotta Give2003년감독 낸시 마이어스상영시간 128분화면포맷 1.85:1 아나모픽음성포맷 DD 5.1 영어자막 한글, 영어출시사 워너극작가 에리카와 노련한 바람둥이 해리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다. 해리가 힙합 음반사 사장이라면 에리카는 샹송을 즐겨 듣고, 에리카가 침대에서 홀로 자는 것에 여전히 익숙지 않을 때 해리는 섹스 뒤라도 여자는 돌려보내고 잠은 혼자 자야 한다고 말한다. 그랬던 두 사람이 서로의 안경을 바꿔 쓰고 자신보다는 상대방을 점차 더 많이 바라보게 된다. 코멘터리에서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이 영화가 자전적 이야기임을 밝힌다. <신부의 아버지>나 <사랑의 특종> 같은 영화에서 샤이어-마이어스 부부팀은 각본을 공동집필하고 남편이 연출하는 식의 작품 활동을 해왔다. 이혼 뒤 갑자기 넓어진 침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전남편과의 식사 도중 사귀던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있는
마이어스와 니콜슨의 구수한 토크쇼,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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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슈렉2> 덕분에 그녀 안의 괴물과 화해하다멀쩡한 일상이 뒤뚱뒤뚱 굴러가던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니 익숙한 실루엣이 온데간데없다. 피부는 파충류처럼 초록빛으로 번들거리고, 눈코입은 방금 막 행성을 탈출한 듯 제각기 따로 논다. 몸은 거대한 애드벌룬처럼 옹골차게 부풀어 있다. 아무리 볼따구니를 꼬집어도 아픔은 소름끼치게 생생하다. 그렇게 몇년이 흐른다. 새삼 거울 앞에 다시 선다. 어느새 괴물이 된 자화상에 익숙해진 스스로를 발견한다. 아직 젊디젊은 내 육체에, 내 히스테리를 견뎌준 가족에게, 문득 미안해진다. 이제 그만 세상 밖으로 나가자. 뻔질나게 보고 또 보니, 흉물스런 내 상판도 귀여운 표정으로 커버할 수 있겠는걸. 운동화끈 질끈 동여매며 대문을 박차는 순간, 가족들이 날 만류한다! “그 꼴로 어딜 가려구!” 이 순간, ‘괴물로 살아가야 하는 내 운명’과 ‘괴물이 된 날 부끄러워하는 가족’, 둘 중 어느 것이 더 슬픈 일일까.방귀소리로 부창부수의 하모니를
괴물의 추억, <슈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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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 사이에 눈이 많이 나빠졌다. 학생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10포인트 크기로 출력해오는 리포트의 잔글씨들을 이제 맨눈으로는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은행에서 예금청구서 같은 것을 적을 때 고객용으로 비치해둔 돋보기에 거리낌없이 손이 가고, 음식점에서 자잘한 글씨로 쓰여진 메뉴판이 나오면 안경을 꺼내기가 싫어서 다른 사람이 시키는 걸 그냥 따라서 주문하게 되었다. 내가 다뤄야 할 세상은 점점 더 작은 기계와 단추와 액정화면 글자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데, 내 눈은 작은 것들을 한사코 외면하려 드는 것이다. 노안(老眼), 노인성 원시라는 것. 카메라로 치면 접사(接寫)기능이 망가진 셈이다. 내 몸에서 가장 투명하고 밝았던 부분에서 발생한 이 파업은, 좀 과장하자면 세상과 사물들이 조금씩 나를 떠나 소실점을 향해 출발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눈이 어두워지는 만큼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이다.이 유쾌하지 않은 현상의 가장 기이한 특성은 가까울수록 잘 안 보인다는 것이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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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골드(marigold)를 키운 적이 있었다. 금잔화라고도 하던가. 크게 자라도 50cm 남짓 되는데 노란꽃, 주황꽃 등을 피운다. 매리골드가 가득 핀 꽃밭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봄의 내음새가 코를 찌르던 어느 날 흙을 사다가 용기에 깔고서 씨앗을 간격 띄우고 살포시 앉혔다. 그 위에 다시 폭신하게 흙을 덮고 정원으로 향한 부엌 창가에서 날마다 물을 주며 기다렸다. 뾰족하게 올라오는 그 어린 싹들을 발견했을 때의 흐뭇함을 무엇이라 설명하겠는가.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던 그들을 정원 한구석에 옮겨 심던 날은 정말 기르던 자식을 독립시키는 마음이었다. 제 땅에서 잘 자라다오.봄비도 때맞추어 내려주었다. 그들은 한잎 두잎, 한 마디 한 마디씩 내게 생명의 성장을 선사해주었다. 노오란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그 수줍던 꽃잎들이 얼굴을 보여주던 날들의 만남을 나는 나도 모르게 너무나 사랑했다.그러나 정작 내가 모르던 것은 나보다 더 처절하게 매리골드를 좋아하던 또 다른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이었
달팽이가 부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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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면 우리는 엄청난 시각적 공해의 바다에 침몰하게 된다. 대도시 서울은 무분별한 간판들과 건축물들과 플래카드와 포스터와 각종 홍보물들이 태풍에 휩쓸려온 파괴된 도시의 잔해들처럼 우리의 시각을 괴롭힌다. 이제는 대도시뿐이 아니다. 이 시각적 난장판의 정글에서의 피곤함을 달래보려 교외로 탈출을 시도해도 서울보다 더 심한 시각공해의 첨단을 달리는 위성도시들을 통과해야 하고, 이제 한적한 국도로 접어들었다 싶은 순간부터 해남의 땅끝까지 가는 동안, 역시나 온갖 무자비한 간판들의 시각적 공격을 피할 길이 없다. 이렇듯 엉망진창인 간판들의 시각공해를 한탄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대한민국에 미술대학이 몇개이고 해마다 디자인과를 졸업하는 인구가 몇이나 되는데 왜 그들 전문가들은 동네간판에 신경쓰지 않는가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알고보면 간판에 대한 규제와 규칙과 법률은 디자인 전문가들이 개입되어 상당히 까다롭게 제정되어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간판이 그 규칙을
규제와 자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