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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잘한 일 가운데 하나는 처음으로 책을 써서 냈다는 거다. 옆자리에 앉았던 김혜리 기자의 배려로 <씨네21>이 펴내는 <필름 셰익스피어> 필진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나는 셰익스피어 전문가도, 탁월한 영화비평가도 아니다. 다만 셰익스피어를 ‘느낄’ 기회를 좀 더 많이 얻었을 뿐이다.
대학 마지막 해에 누더기가 된 학점을 기우느라 1학년 교양필수인 교양영어를 재수강했는데, 선생님은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드>(The Tragedy of Macbeth)를 보여주었다. 자막도 없이 억센 영국식 발음을 들었지만 이상하게 빨려들었다. 그 감동의 힘 탓인지, 물어 물어 구로사와 아키라가 <맥베드>를 각색한 <거미집의 성>(蜘蛛巢城)까지 빌려 보게 되었다. 취업 계획을 바꾸고 대학원에 들어가 셰익스피어 수업을 들으면서 케네스 브래너와 구스 반 산트의 셰익스피어도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그 시간에 다른 더 유용한 일들을 하지 못했다고
[칼럼있수다] 느끼기 전엔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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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해기스 감독의 <크래쉬>는 이른바 ‘날이 선’ 영화다. 등장인물만도 계층과 피부색이 다른 미국인이 한 다스. 이들이 로스앤젤레스 곳곳에서 본의 아니게 얽히고 설키면서 마음속에 숨은 증오와 두려움을 한바탕 드러내고야 마는 소동극이니 오죽하랴. 이들의 감정적 충돌이 얼마나 날이 섰는가 하면, 비평가들은 <크래쉬>를 미국영화 역사상 가장 터프한 대사들로 가득한 영화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상당히 미국적인 이 터프함의 실체는 현대 미국사회의 금기 중 하나라 할 만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인종 비하 발언들이다. ‘인종’ 문제야말로 숨기고 싶으나 숨길 수 없는 미국사회의 비수 아닌가.
지난해 5월, <크래쉬>가 개봉했을 때는 <그랜드 캐년> <숏컷> <매그놀리아>의 맥을 잇는 복합 인종 도시 로스앤젤레스에 대한 또 한편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브랜트우드, 사우스캠튼(사우스햄프턴??), 다운타운, 샌타모니카, 차이나타운
2005년 우리가 놓친 외화 10 [10] - <크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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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이런 것이다. 여기는 전쟁터, 사진기자 앞에서 살인이 벌어진다. 그때 그는 카메라를 버리고 그를 구해야 하는가 혹은 그 잔혹함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셔터를 눌러야 하는가. 설령 이 한장의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타리라는 마음으로 셔터를 눌렀다 한들 그가 그 죽음에 도덕적인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가. 예술적 성취와 유명세를 얻은 냉혈 악마가 될 것인가. 양심과 도덕을 가진 따뜻한 인간이 될 것인가. 이것은 딜레마다. 취재를 통해 무언가를 창작해내는 모든 이들에게 내린 잔혹한 선택의 저주.
<카포티>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인 ‘트루먼 카포티’가 처음으로 논픽션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1959년 미국 캔자스에서 농장의 일가족을 두명의 남자가 처참하게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다. <뉴욕타임스>에서 이 기사를 읽은 카포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는 당장 경쟁사인 <뉴요커>로 전화를 걸어 자신이 이 사건을 취재하
2005년 우리가 놓친 외화 10 [9] - <카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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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옴진리교의 지하철 독가스테러 사건은 일본인의 마음에 치료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 정신적 공황을 아오야마 신지는 <유레카> 같은 한편의 ‘영상시’로 쓰기도 했지만, 정면으로 이 사건에 맞서는 영화는 좀체 나오지 않았다. 2005년 3월 <카나리아>가 개봉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개봉 전부터 도쿄필름엑스국제영화제의 오프닝작으로 선정되었던 이 작품은 2005년 9월 런던에서 열린 13회 레인댄스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아동학대, 원조교제 같은 사회 문제부터 ‘아버지’에 대한 부정까지, 무거운 테마에 대한 메시지를 쏟아대며 거친 에너지가 제멋대로 넘치는 작품 자체에 대해선 호불호가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모든 언론과 비평이 일제히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고 말한 것은, 그만큼 이 상처를 응시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소년, 소녀를 맡은 이시다 호시와 다니무라 미쓰키는 <아무도 모른다>의 야기라 유
2005년 우리가 놓친 외화 10 [8] - <카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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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들의 엄숙한 얼굴들 위로 하얀 눈송이가 벚꽃처럼 흩뿌린다. 찰스 1세의 잘린 머리가 구르고 아버지의 새빨간 선혈이 왕자의 얼굴 위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긴다. 영국 영화·TV예술아카데미(BAFTA) 작품상을 수상한 드라마 <마지막 왕: 찰스 2세의 열정>의 인상적인 첫 장면은, 영국의 신예 조라이트에게 워킹 타이틀의 야심작 <오만과 편견>을 은막의 데뷔작으로 안겨주었다. 그 결과, 역대 가장 불경하고 감각적이고 또 적나라하게 로맨틱한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영화가 탄생한다. 감각적이고 뻔뻔스럽게 로맨틱한 제인 오스틴이라니 모순어법이 아니냐고? 그야 물론이다. 이 모순어법이 창출하는 긴장이 2005년의 새 영화 <오만과 편견>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물론 신랄한 오스틴을 ‘낭만적’인 서사로 살짝 덧칠하는 건 현대의 오스틴 영화들이 꾸준히 추구했던 바다. <BBC>의 전설적인 미니시리즈 <오만과 편견>에서 영화 <센스,
2005년 우리가 놓친 외화 10 [7] - <오만과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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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결산하며 최고의 영화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어느새 비평가들의 의무처럼 되어버린 현실에는 어쩐지 떨떠름한 구석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굳이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면 약간은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미래의 작가’들을 점쳐보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 좀더 흥미진진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 한해 국내 각종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지만 (단지 데뷔작이고 그런 만큼 감독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관객의 외면을 받은 작품들 가운데서 유독 애착이 가는 것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메르세데스 알바레즈의 <고향의 하늘>은 빅토르 에리세에게 영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 즉 우리의 영화적 경험과 세계를 관련짓는 작업이 여기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찬사를 내뱉게 한 작품이다. 또한 이 영화는 레이몽 드파르동의 <농촌소묘> 연작과 함께 사라져가는 전원의 풍경을 진솔하게 담은 동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전주국제영
2005년 우리가 놓친 외화 10 [6] - <버려진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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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내 나이 여덟살. 다섯시간이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다섯시간, 상실된, 흔적도 없이 지워져버린….” 사라져버린 기억을 복원하고픈 소년이 있다. 소나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코피를 흘리고 쓰러진 후 기억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브라이언(브래디 코벳). 그는 어린 시절 집 위로 나는 이상한 물체를 보았던 기억과 꿈속에 계속 등장하는 또래 소년의 모습, 여전히 주먹에 끈적하게 남아 있는 이상한 느낌을 추적해나가며 점점 자신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생체실험을 받았다고 의심하게 된다. 또한 스스로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고 주장하는 한 여자와 왕래하면서 그의 습관적인 코피가 생체실험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트릭이었음을, 다리의 상처가 추적장치를 이식한 자국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그리고 급기야 그 꿈속의 소년을 찾아나선다.
“어떤 사람도 나를 그렇게 특별하게 만들지는 못했어.” 세월이 흘러도 생생한 기억 속에 휩싸여 사는 소년이 있다. 늘 밖으로만 나도는 엄마 대신 함께 놀아주고 안아주고
2005년 우리가 놓친 외화 10 [5] - <미스테리어스 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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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미국 서해안의 베니스 비치 근교에 ‘독타운’이란 빈민가가 있었다. 독타운의 아이들은 대체로 서핑에 미쳐 있지만, 언젠가부터 스케이트보드의 즐거움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거리를 달리는 것뿐이었지만, 새로운 소재로 만들어진 스케이트보드는 서핑에서 하는 대부분의 동작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 거칠고 도전적인 독타운의 아이들은 스케이드보드의 혁명가가 되었다. 드디어 ‘Z-Boy’가 탄생한 것이다.
2001년 선댄스영화제에 <독타운과 Z보이스>란 다큐멘터리가 공개되어 감독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감독인 스테이시 퍼렐타는 실제 Z보이스의 일원이었다. 스테이시 퍼렐타는 <독타운과 Z보이스>의 이야기를 극영화로 만든 <로드 오브 독타운>의 시나리오를 썼고, 연출은 <13살의 반란>을 만든 캐서린 하드윅이 맡았다. 1955년생인 캐서린 하드윅은 이제 겨우 2편의 영화를 연출했지만, <툼스톤> <탱크
2005년 우리가 놓친 외화 10 [4] - <로드 오브 독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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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영화사의 유전자는 여전히 브리튼 섬사람들의 핏줄 속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대니 보일의 <28일후…>(2002)와 닐 마셜의 <독 솔져>(2002), 런던 지하철을 무대로 한 크리스토퍼 스미스의 <크립>(2004)과 워킹 타이틀의 패러디 좀비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까지, 미국 호러영화계가 PG-13등급의 안온한 취향에 화답하며 오래된 걸작들의 리메이크에 전념하는 동안 영국인들은 창의적인 호러영화들을 생산해왔다. 그런 가운데 지난 2005년 영국의 여름을 비명소리로 도배한 <디센트>는 중흥기를 맞이한 영국 호러영화계가 어떤 정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플롯은 군살없이 날씬하다. 존 부어맨의 불쾌한 호러영화 <서바이벌 게임>처럼 막을 올리는 <디센트>는 스코틀랜드에서 래프팅을 즐기는 한 무리의 여자친구들을 비춘다. 그들은 행복하고, 대담하고, 모험을 즐기는 여자들이다. 그러나 돌
2005년 우리가 놓친 외화 10 [3] - <디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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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계 오스트리아 감독 위베르 소페(Hubert Sauper)가 연출한 <다윈의 악몽>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3국이 공동제작한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2005년 3월2일 프랑스 개봉 이후 두달 만에 20만명 이상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이 영화는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언뜻 제목을 보면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성격의 영화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과학영화가 아니다. <다윈의 악몽>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정책이 아프리카 대륙을 어떻게 황폐화시켰는지, 아프리카 대륙의 일상화된 전쟁 원인이 무엇인지를 빅토리아 호수의 생태질서 파괴라는 메타포를 사용해 신랄하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 영화가 회자되면서 프랑스에서는 아프리카 대륙을 비롯한 제3세계를 대상으로 자행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정책에 반대하는 여론과 운동이 조성되고 있다.
풍부한 어종을 가지고 어업으로 소박하고 순수하게 살아가던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빅
2005년 우리가 놓친 외화 10 [2] - <다윈의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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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과 베스트 목록 작성의 계절이 다가오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낯선 영화들이 외신을 점령하고 있다. 이들 중 몇몇은 국내영화제를 통해 조용히 소개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직접 보기 힘든 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사이드웨이>가 그랬듯 느닷없는 희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고,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처럼 제작된 지 몇년이 지나고 나서 갑자기 개봉하는 영화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니 <씨네21> 통신원들과 필자들이 선정한 이 영화들은 유효기간 없는 장바구니와도 같을지 모르겠다. 기억하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챙겨볼 수 있도록. 이중에는 <그리즐리 맨>의 베르너 헤어초크와 같은 거장도 있지만,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스리랑카 감독 비묵티 자야순다라 같은 낯선 이도 섞여 있고, 예술보다는 대중문화의 전통을 흡수한 <로드 오브 독타운> <디센트> 같은 영화들도 있다. 세계 각국에서 끌어모은 제
2005년 우리가 놓친 외화 10 [1] - <그리즐리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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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진짜 잡고 싶어!” 도 경장(황정민)이 떨리는 두 손을 오므리며 호소한다. 마주 앉은 마약상 이상도(류승범)는 “언제 비즈니스를 해봤어야 알지”라며 코웃음칠 뿐이다. 부산 사투리가 울려퍼지는 이곳은 <사생결단> 촬영현장, 부산 영상위원회 스튜디오다. 불빛에 반짝이는 미러볼이 돌아가고 노래방 TV에는 여인들의 노출 장면이 흘러간다. 인물을 정면에서 응시하는 A카메라가 터를 잡으면 B카메라는 노래방 전경과 내부를 찍기 위해 핸드헬드로 움직인다. 베테랑 임재영 조명기사는 “<사생결단>은 빛에 관한 새로운 시도가 많다. 특히 로케이션에서는 타 작품에 비해 2∼3배의 조명이 동원된다”고 설명했다. 최호 감독은 “배우들의 연기를 믿기 때문에 두대의 카메라를 상시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덧붙였다.
영어제목 <마약중개상, 미친 형사를 만나다>처럼 이날 촬영은 ‘악어’ 도 경장과 8개월간 감옥살이를 한 ‘악어새’ 상도가 재회하는 장면이다. 도 경장은
악어와 악어새의 롱테이크, <사생결단> 부산 촬영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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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넣어서”, “너무 달려가지 마”. 대전 엑스포 전시장 근처에 마련된 세트장엔 정갈한 피아노 선율과 함께 지수(엄정화)의 목소리만이 울려퍼지고 있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워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이 주문은 그랜드 피아노에 몸이 가려지는 작은 체구의 소년, 경민(신의재)을 향한 것이다. 그가 능숙하게 연주하는 곡은 바흐 인벤션 중 하나. 각각 독립된 선율을 연주하는 오른손과 왼손이 결국 온전한 조화를 이루는 곡이다. 나란히 앉은 스승과 제자, 지수와 경민 역시 순탄치만은 않은 과정을 통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며 힘이 될 것이다.
“호러 비치? 공포영화야?”라는 오해를 듣기 십상인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피아노를 통해 세상을 보는 아이 경민과 그런 경민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는 피아노 선생 지수의 교감을 그린 휴먼드라마다. 지방에서 촬영할 당시에는 지역 주민들이 준비한 환영 플래카드까지 공포영화 컨셉이었을 정도로 낯선 제목이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꿈은 피아노 선율을 타고, <호로비츠를 위하여> 촬영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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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구정 무렵 찾아갔던 <청연>의 목포 촬영현장에는 붐마이크를 손에 쥐고 현장을 뛰어다니던 인상좋은 녹음기사가 있었다. 더욱 눈길을 끈 것은 녹음이 필요없던 밤 촬영에도 끝까지 남아서 조명부를 도와주던 따뜻한 그의 손길이었다. 그러한 적극적인 태도 때문에 “기사면 기사답게 행동하라”는 핀잔도 많이 들었던 이 남자는 <청연>의 현장녹음기사 은희수씨다. “<청연>은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직접 붐마이크를 잡고 작업하기로 결심했다. 고민 끝에 윤종찬 감독님께 상의하자, ‘은 기사가 제일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라’고 흔쾌히 수락했다”며 속사정을 설명했다. 1970년생 은희수씨는 대학입시에 거듭 낙방하고 친척의 회유와 부탁으로 전문대 환경관리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뒤 환경기사로 1년간 직장 생활을 했지만 그는 영화에 대한 짝사랑을 떨치지 못했다. 결국 1999년 3월 한겨레 영화제작학교 9기로 수강했고, 이후 영화아카데
붐마이크를 사랑한 사나이, <청연>의 현장녹음기사 은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