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동안 SNS에서 나폴리탄 괴담이 유행했다. 나폴리탄 괴담은 사건의 전말을 정확히 해설하지 않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만 묘사하는, 기승전결 중 기승 구간이 강조되고 전결은 생략된 형태의 짧은 괴담이다. 한국에서는 나폴리탄 괴담이 매뉴얼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에 실린 ‘궁녀 규칙 조례’의 항목 역시 그렇다. 가장 눈에 띄는 항목은 이런 식이다. “궁궐 내에 설치된 우물은 어떠한 것이라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사용 중인 우물을 발견했다면 그 안을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경위가 어찌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오싹하다. 그런 이야기와 괴담이 잔뜩 실린 책이 바로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이다.
때는 태종 6년(1406), 아직 고려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조선 초가 배경이다. 경복궁 내명부에서 일하는 궁녀들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규칙이 있는데, 실제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모은 금기
씨네21 추천도서 -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
-
<소설 보다: 가을 2022>에선 세편의 단편소설을 만난다. 위수정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노년의 삶이 생동감을 느끼는 지점을 짚어낸다. 2020년대 대중문화를 말하는 동시에 나이 드는 몸을 돌아보게 한다. 열정이 마음만큼이나 몸의 일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60대인 원희는 친구를 따라 간 연주회에서 만난 젊은 피아니스트 고주완에게 끌림을 느낀다. 원희는 오랜 시간 잊고 지낸 감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한다. 심지어 고주완이 즐겨 연주하는 버르토크나 프로코피예프 같은 20세기 작곡가는 원희가 좋아하지 않는 불협화음이다. 그리고 고주완을 경유해 삶의 불협화음을 끌어안는 방향으로 생각이 흐른다. 이서수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의 인간관계를 다룬다. 모임을 가진 뒤 한 사람이 코로나19에 걸리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2020년대의 응급실 풍경부터 결혼식 참석을 거부할 빌미로서의 코로나19, 그리고 도시에서의 가난을 두루 훑어간다
씨네21 추천도서 - <소설 보다: 가을 2022>
-
<지구별 인간>의 주인공 나쓰키는 초등학교 5학년이다. 두살 터울인 언니가 있는데, 가족으로부터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나쓰키는 자신이 마법소녀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고, 사촌인 유우와는 연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유우는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생각한다. 설정만 보면 기묘하지만, 읽어가면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나쓰키가 마법소녀가 된 뒤 익힌 마법으로는 ‘사라지기’라는 것이 있다. 진짜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숨을 죽이고 기척을 숨긴다는 뜻이다. ‘사라지기’를 쓰면 부모와 언니는 단란한 3인 가족이 되어 시간을 보낸다는 식이다. 유일하게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나쓰키와 유우는 몰래 부부가 되기로 한다. 둘이 만든 규칙 중에는 이런 조항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하지만 그 생존이라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학교에서 나쓰키를 특별히 잘 돌봐주는 이가사키 선생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지만, 나쓰키를 대상으로 한 성추행의 강도를
씨네21 추천도서 - <지구별 인간>
-
이야기는 통일신라 시대의 장군 장보고의 사망에서 시작한다. 장보고를 따르다 일이 없어진 장희는 우연히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멀끔한 얼굴의 서생 한수생을 구해주고, 청해진의 해체 이후 난장판이 되어버린 바다 위 해적의 세계로 휘말리고 만다. 이들은 돌덩이를 날려보내는 장치를 배에 싣고 다니는 서해 해적 대포고래에 잡히기도 하고, 신라를 무찌른 다음 멸망한 지 200년이 지난 백제를 다시 세우자는 허황된 꿈 아래 공주를 모시고 섬에 터를 잡은 해적을 만나기도 한다. 장희와 한수생은 잘 어울리는 콤비다. 평생 농사를 짓고 글만 읽으며 살아온 데다 임기응변과는 거리가 멀어도 신의를 지키는 우직한 한수생과, 돈이 우선이고 나만 살면 된다는 꾀 많은 생존주의자이면서도 ‘세상의 온 바다를 치마폭에’ 담던 포부가 있어 이기적이지만은 않은 장희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모험을 겪는다. 이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욕망과 사람간의 연대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장희가 특유의 화술로 적의 허점
씨네21 추천도서 - <신라 공주 해적전>
-
-
1898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페기 구겐하임은 광산업과 제련업으로 부를 축적한 구겐하임 집안 출신으로, 일찍부터 서점 아르바이트를 자처하는 등 상류층 여성의 모범적 인생을 거부한다. 유럽으로 떠난 페기는 초현실주의를 비롯하여 21세기 초반 격동의 시대와 어우러진 수많은 예술 운동을 접하고 작가들과 사랑과 우정을 나눈다. 한때 예술가 남편 곁에서 자신 없는 모습으로 폭력을 견디며 순종적인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나 점차 자신만의 안목으로 미술 작품을 하나둘 사들이며 컬렉터로서의 인생을 개척한다. 페기의 인생이 가장 극적인 순간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파리로 닥치는 와중에 열심히 작품을 사들인 때일 것이다. 대다수 시민이 피난을 떠난 가운데 미국인이라 해도 유대인이면 잡혀갈 수 있는 아찔한 상황 속에서, 페기는 열정적으로 모은 작품을 가구로 포장해서 미국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페기는 뉴욕에서 ‘금세기 예술 갤러리’를 열어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유럽 예술과 미국 예술을 혼합한 현
씨네21 추천도서 - <페기 구겐하임>
-
페기 구겐하임_메리 V. 디어본 지음
신라 공주 해적전_곽재식 지음
지구별 인간_무라타 사야카 지음
소설 보다: 가을 2022_김기태, 위수정, 이서수 지음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_현찬양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0월의 책
-
‘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티빙 <환승연애2>
관찰 카메라를 통해 출연진의 솔직한 행동은 물론 내밀한 속마음도 알 수 있다. 다양한 갈등과 선택, 진솔한 감정과 드라마를 한데 볼 수 있어 어떤 인물의 감정선을 연기할 때 도움을 얻는다.
여행 브이로그
평소 ‘가고 싶은 나라 + Vlog’ 검색어를 조합하여 자주 찾아본다.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을 대리 만족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내가 살지 않는 낯선 나라의 이야기를 편히 들을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
최근 파리 여행을 가서 다양한 미술 전시를 오랫동안 봤다. 작가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이 작품을 그렸을지 상상하다 보면 하루 종일 미술관에 있어도 지치지 않는다.
<나를 위로하는 그림>
미술 전시를 즐겁게 본 경험에서 읽기 시작한 책. 일상과 미술 작품을 연결해 해석해
[LIST] 배우 최예빈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
비 오는 저녁의 파리. 비를 피하러 잠깐 들어간 음식점에서 미아(비르지니 에피라)는 무차별 총격에 휘말린다. 3개월 뒤, 아직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미아는 무의식적으로 지워버린 그날 저녁의 일을 회상하기 위해 우연히 알게 된 다른 생존자들과 만남을 이어간다.
<어거스틴>(2012), <매릴랜드>(2015), <프록시마>(2019)에 이은 앨리스 위노커 감독의 네 번째 장편 <파리 메모리즈>(2021)는 2015년 11월13일, 파리와 인근 외곽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난 연쇄 테러의 아픈 기억을 소환한다. 이 사건으로 130명의 사망자와 350여명의 부상자가 나왔으며 위노커 감독의 오빠는 이날 100명 이상 사망자를 낸 파리 바타클랑 극장 총격 사건의 인질 중 한명이었고, 감독은 그날 밤 현장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오빠와 간간이 문자로 상황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이후 오빠를 통해 발을 들이게 된 피해자 모임에서 그녀는 그날 잃어버린
[파리] 파리 연쇄 테러의 상황을 소환하는 ‘파리 메모리즈’
-
<메리 미>
넷플릭스
<노팅 힐> 같은 영화를 찾아 OTT를 헤매는 독자가 무난히 즐길 만한 로맨틱 코미디다. <메리 미>에서는 여성 팝 스타 캣(제니퍼 로페즈)과 평범한 남성 수학 교사 찰리(오언 윌슨)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노팅 힐>보다 훨씬 급작스럽고 규모도 크다. 결혼식을 겸한 콘서트에서 정혼자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된 캣이 관객으로 온 찰리에게 충동적으로 청혼한다. 찰리가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둘은 일단 결혼부터 하고 상대를 알아간다. 예상대로 서로 너무 달라서 호감을 느끼고 그래서 시련을 겪는다. 두 주연배우의 안정적인 연기로 온기를 얻은 남녀 캐릭터와 인생 전반을 소재로 한 풍부한 대사가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의 지루함을 상쇄한다. 무엇보다 영화의 주제곡 <Marry Me>가 <노팅 힐>의 <She> 못지않게 강력하다.
<미래를 향한 10 카운트>
[OTT 추천작] '메리 미' '미래를 향한 10 카운트' '유니콘을 타고' '지상 최대 맥주 배달 작전'
-
“이제 제가 제일 잘하는 거 해볼라고요.” 지역 전통시장과 노포를 찾아가 밥 먹고 이야기 나누는 콘텐츠에 백종원만 한 적임자가 또 있을까. 자신을 ‘마트 아저씨’로 착각했던 곡성 콩국숫집 사장님을 놀렸다 띄웠다 하며 묵은지에 대한 자부심을 술술 털어놓게 만드는 화법, 원산지 표시를 깜박해 과태료 낼 걱정이 태산 같은 동해 게 찌갯집 사장님에게 “우리가 벌금만치 먹어줄게요”라며 지폐 몇장을 얼른 내미는 센스는 요식업계에서 잔뼈가 굵어온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감각이다.
흥미롭게도 ‘님아, 그 시장을 가오’는 단순한 맛집 탐방이 아니라 지역 관광자원 발굴과 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만들어진 콘텐츠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심각한 지역에 사람이 북적이고 돈이 돈다면 다행일 것이다. 게다가 황홀할 만큼 푸짐한 굴김치와 두부 부침, 놀랍도록 저렴한 국밥과 수육, 직접 기른 채소와 손수 담근 장, 돈 버는 데 ‘욕심’ 내지 않고 손님을 제 식구처럼 여기며 좋은 걸 먹이겠다는 사장님들의 마인드
[최지은의 논픽션 다이어리] 유튜브 백종원의 요리비책 ‘님아, 그 시장을 가오’
-
넷플릭스 / 감독 앤드루 도미닉 / 출연 아나 데 아르마스, 줄리앤 니컬슨, 에이드리언 브로디 / 플레이지수 ▶▶
선택한 실존 인물의 일생을 일직선으로 펼쳐놓고 어느 시기에 핀셋을 꽂아 보여줄 것인가. 이것이 전기영화의 첫 번째 고민일 테다.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블론드>는 그가 어떤 남자들을 거쳐왔는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화가 압축한 바에 따르면 마릴린 먼로는 유명 배우의 아들들을 동시에 만났으며 전직 운동선수, 극작가와 결혼하고 이혼한 여자이자 평생 한명의 남자, 만난 적 없는 아버지에 집착한 리틀 걸이다. 널리 알려진 인물의 이면에 주목하고자 한 도전이 아니다. 연기력과 흥행력을 고루 인정받은 배우이자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서 그가 쌓은 이력을 지우고 그를 헤픈 여자란 협소한 틀에 가두어 얄팍하게 축소한 결과다. 강간당하는 장면과 섹스 신, 성적 대상이 되는 장면을 포함하기로 한 영화가 그를 어떤 인물로 정의내리고 그릴 작정이었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OTT 리뷰] 넷플릭스 '블론드'
-
※ 스페이스는 트위터의 실시간 음성 대화 기능입니다. <씨네21>은 2022년부터 트위터 코리아와 함께 매주 목요일 또는 금요일 밤 11시부터 자정까지 1시간 동안 영화와 시리즈를 주제로 대화를 나눕니다. 스페이스는 실시간 방송이 끝난 뒤에도 다시 듣기가 가능합니다.(https://twitter.com/cine21_editor/status/1575483061923643393)
김혜리 @imagolog 오늘 소개할 <성덕>을 한줄로 요약하자면, ‘어느 날 오빠가 범죄자가 되었다’입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긴 세월 동안 애정을 바치고 지원해온 나의 스타가 성 착취 동영상을 촬영, 배포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팬으로서 살아온 시간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집니다. 감독은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또래 세대 여성 팬들의 인터뷰 위주로 영화를 구성했습니다. <성덕>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됐을 때부터 큰 공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l
[트위터 스페이스] 김혜리의 랑데부 : 오세연 감독의 ‘성덕’
-
넷플릭스가 영국 방송사시청자조사위원회(Broadcasters’ Audience Research Board, 약칭 BARB)에 가입했다고 10월12일(한국 시간)에 발표했다.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의 성공을 강조했던 것에 반해, 11월부터 더 자세한 시청 데이터를 BARB에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넷플릭스의 시청 데이터를 ‘삼바TV’와 같은 업체에서 측정해서 공개한 적은 있지만, 공식 기관에서 제공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BARB는 영국의 공영방송사 BBC 및 TP 소속 방송사, 채널4, 채널5, BSkyB, IPA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 BARB에 참여하는 시청자들은 TV 세트 위에 시청하는 프로그램을 기록하는 기계를 올려놓고 BARB는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식이다. 한국의 TNMS, 닐슨코리아 같은 원리이나 BARB는 방송사들이 소유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시청 데이터의 톱10만 공개하며 지금까지 자료 공개에 대해 폐쇄적이었던 넷플릭스가 이렇게 행보를 바꾼 건 광고
[김조한의 OTT 인사이트] 넷플릭스, TV와 극장을 넘보다
-
올해도 망 사용료가 국회 국정감사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넷플릭스, 유튜브와 같이 데이터 이용량이 많은 글로벌 콘텐츠 사업자에게 망 사용료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통신사 요구에 국회가 입법 카드를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OTT 소관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를 포함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의 국정감사 곳곳에서 망 사용료에 관한 논란이 불붙었다. 이에 구글과 트위치 등 콘텐츠 사업자들은 법안에 반대하는 움직임에 나섰고 통신업계 3사는 10월12일 공개간담회를 열어 맞대응하기도 했다. 통신업계와 콘텐츠업계의 신경전이 팽팽해지는 가운데 문체부는 “국내 콘텐츠 제작자에 대한 부담 가중으로 이어질 수 있어 충분한 의견수렴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했다. 국내 콘텐츠의 해외 진출을 우려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와 반대 여론까지 더해지면서 망 사용료 입법은 다시 쳇바퀴를 돌고 있는 상태다. 구글 코리아 대표, 넷플릭스서비시스코리아 대표를 증인으로 신청한 21일 방송통신위원회 감사에서도
2022년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 시작, 망 사용료와 사재기 논란 도마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