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는 숨을 쉰다. 말풍선과 말풍선 사이에서, 칸과 칸 사이에서, 대사와 효과음 사이에서, 의미의 숨을 내쉰다. 흑백의 그림 속엔 색채를 입지 못한 음성들이 들숨으로 나돌고, 그 위엔 형태만 갖춰 입은 동작들이 날숨으로 포개진다. 만화는 음소거의 장르인지라 항상 귀가 외롭다. 숨가쁘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그 나름의 재미를 주지만, 그와는 또 별개로 소리의 유혹도 남긴다. 특히 음악을 소재로 하는 만화라면, 주인공의 음성이 독특하다면, 이 유혹은 배가 된다.
‘백독불여일청’(百讀不如一聽), ‘신비스러우면서 육감적이고, 슬픔과 꿈의 조화가 감미로우며, 힘찬 구성에서 스며나오는 영혼의 느낌이 인상적인’ 쇼팽의 <야상곡 9번>은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기껏해야 전라도 사투리 정도로 번역되는 일본 명랑 소녀의 말투도 영 내키지 않는다. 그냥 ‘혼모노’(진짜)가 필요한 상황, 사실 만화의 영상화는 외로운 귀가 꾸며낸 오감만족 프로젝트인지도 모른다.
<후지TV>의 게
노다메의 방귀 교향곡에 일본 침몰! <노다메 칸타빌레>
-
<미스 포터>는 포터가 그림책 계약을 맺고, 연달아 성공을 거두면서 워른과 사랑에 빠지는 1900년대 초의 ‘현재’와, 소녀 시절의 포터가 가족과 함께 아름다운 호숫가인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휴가를 보내고, 어린 동생에게 인형놀이를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던 1890년대 말의 ‘과거’를 교차해 보여준다. 특별한 굴곡이 없는 포터의 삶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함으로써 좀더 생기있고 다채로운 것이 되었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영국의 그림책 작가다. <피터 래빗 이야기> <제미마 퍼들덕 이야기> 등 한국에 번역 소개된 작품만도 10권이 넘는 그녀의 그림책에는 토끼, 오리 등 흔히 볼 수 있는 앙증맞은 동물 캐릭터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미스 포터>는 그 베아트릭스 포터의 삶을 그린 영화다. 포터가 첫 그림책을 계약하고 성공을 거두고, 담당 편집자 워른과 사랑에 빠지는 일련의 과정을 <미스 포터>는 100년 전 영국을 배경으로 보여준다.
[현지보고] 19세기의 브리짓 존스, 사랑에 빠지다
-
기자를 지망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입사 희망 언론사를 적어내라고 했다. 매체 구분 없이 3순위까지 적힌 희망 언론사 유형을 5년 정도 모아보니 일정한 패턴이 있다. 다수의 학생은 일단 지상파 방송을 1지망으로 생각한다. 이 경우 2, 3지망으로 신문을 선택할 경우 조중동과 한겨레신문이 많다. 신문을 1지망으로 할 경우는 중앙일보가 많다. 그 다음은 한겨레신문이다. 조선, 동아는 2, 3지망에 많다. 종종 자신이 지망하는 언론사가 아니라 기피하는 언론사를 적어내는 경우도 있는데, ‘조선, 동아 제외’, ‘조선 제외’, ‘조선, 동아 및 한겨레 제외’, ‘한겨레 제외’ 등이 많다. 이들을 면접해보니 조선, 동아는 ‘‘정파성이 부담스러워서’ 기피하고, 한겨레는 주로 ‘월급이 낮아서’ 기피한단다. 중앙일보만 기피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중앙일보는 기자 지망생들에게 ‘합리적 진보 내지 중도’로 자리매김해 있다. 실제 논조는 그보다 보수적이다. 그런데 실제보다 더 진보적으로 비친 것은 왜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합리적 진보
-
출국하는 날 아침,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외할아버지가 오늘내일하신다는 말씀이었다. 연세도 많으신데다 몇번 위험한 고비를 넘긴 중풍 환자셨기 때문에 울먹이는 엄마 목소리가 내겐 더 불안하게 들렸다. 짐을 부치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면서도 정말 그냥 가도 되는 걸까 조마조마했다. 미국에 도착해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현진아, 할아버지 돌아가셨어. 진짜? 하고 어색하게 되물은 나는 어떤 소식을 예상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무감각했다. 고단한 뒷바라지가 계속될 걸 알면서도 한고비 넘기셨단 소식을 바라긴 했을까? 공항에서 듣는 이런 이야기는 비현실 세계 속으로 들어가라는 신호 같다. 2001년,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공항에서 아버지가 쓰러졌다고, 수술이 다음날이니 병원으로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기분이 비슷했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면 청천벽력이었겠지만, 오고 가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인생과 비슷한 공항에서는 그저 뜬구름 같은 이야기였다. 때마침 시작된 성수기로 귀국 일정
[오픈칼럼] 세검정 고개 만두집, 붕어싸만코
-
-
어느 날 자고 있는데 ‘펑!’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 드디어 폭발한 것인가.
의문을 갖던 차에 결국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언젠가부터 화가 사라진 것이다. 내 영감의 동기는 분노였다. 분노의 찌꺼기 놀음을 하던 자에게 분노가 사라졌다는 건 의욕을 잃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분노도 의욕도 자극도 없는 삶.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자극없는 삶이란 얼마나 기이한가. 이젠 영화나 책을 봐도 전혀 자극이 되지 않는다. 언젠가 활자 중독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때, 무심코 광고들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사람은 한번쯤 활자 중독을 의심해봐야 한단 이야기였다. 바로 내 이야기였다. 나는 무의미한 시간을 싫어한다. 심심하지 않으려고 버스 앞 좌석에 붙은 검정고시학원이니, 신들린 운세 서비스니 하는 광고들을 훑기 일쑤다. 가만있는 뇌라는 것은 죽은 뇌나 다름없다. 그렇게 쓸데없는 정보들을 꾸역꾸역 넣었던 탓일까. 뇌도 감정이란 게 있나보
[이창] 펑!
-
달콤하고 광적이며 서글픔을 담고 있는 미셸 공드리의 새 영화 <수면의 과학>은 놀라운 조합물이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불행하고 채플린을 닮은 듯한 광인을 연기하는 이 장난기 가득한 낭만적 이야기에는, 공드리가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든 <이터널 선샤인>의 여운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겉모습을 볼라치면 공드리의 뮤직비디오들이 떠오른다. 이상한 옷들과 콜라주 경치, 얼기설기한 사물들의 애니메이션, 가짜 원근 착시 그리고 거친 상상의 지형도.
공상 속에 사는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자신이 <스테판 TV>라는 텔레비전 쇼의 진행자라고 상상하며 밤을 보낸다. 창고에 달걀판들을 붙여 만든 세트장. 카드보드로 만든 카메라를 보며 스테판은 음악도 연주하고 게스트들도 인터뷰하며 (주로 자기 엄마) 시청자에게 자신의 비전을 어떻게 “섞는지” 지켜보게 한다. 매일 밤마다 자신의 쇼에서 스테판은, 멕시코에서 아버지와 살다가 파리에 있는
죽음의 전조를 낭만적 판타지로 표현한 <수면의 과학>
-
582호에 세 평자들의 글이 실렸다. 변성찬은 ‘세계를 다르게 사유하는 방식을 통한 복수’를 그린 색다른 복수극으로 읽으면서, 갈등이 폭발하지 않음을 아쉬워한다. 정한석은 착각과 착란이 빚어내는 뮤지컬로 읽으면서,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공존시키며 판단을 유보시키는 박찬욱 영화의 특징상, 이 영화는 긴장이 느슨하고 판단은 원인 무효화되었다고 비판한다. 남다은은 사이보그지만 왜 괜찮은지 알 수 없으며, 행위와 원인이 누락되어버린 상태에서 사이보그, 거식증, 존재의 목적 등 의미심장한 기표들만 전시될 뿐이라며 일축한다. 또 사랑이나 칠거지악의 역설을 통해 ‘순수한 세계’로 복귀하려는 감독의 욕망은 퇴행이며, 망상을 인정하는 사랑의 윤리가 옳은지 반문한다. 나는 이들의 평가(특히 남다은의 의견)에 반대하며 이 영화의 함의를 밝히고자 한다.
1. 왜 사이보그이며,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가?
변성찬은 영군(임수정)이 사이보그 망상을 갖게 된 것은 이미 할머니가 쥐-사이보그였기 때문이라 해석
[영화읽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변성찬·정한석·남다은의 비평에 대한 반론
-
“장기이식 같은 거 안 되는 거냐? 정말 안 되는 거야?” 친구인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죽음을 늦춰달라고 애원하는 사내가 있다. 돈도 없고 백도 없었지만 악착같이 일해서 승승장구, 사회에서 직장에서 인정받던 남자. 이제 막 사장으로 승진해 정상에 오른 쾌감을 맛보려는 순간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이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항변한다. 평소 담배도 안 피우고 건강관리도 철저히 했는데 이렇게 죽는 건 억울하다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되삼킨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기적>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시한부인생이야 TV에서 숱하게 봤던 이야기지만 <기적>은 억지스러운 사랑의 신화를 만드는 드라마가 아니다. <기적>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는 놀랄 만큼 우리 이웃의 얼굴을 닮았다. 선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얼굴들.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진실된 삶을 살려 했지만 어디에선가 어긋난다. 아버지와 딸은, 아버지
[편집장이 독자에게] <기적>이 남긴 흔적
-
1990년 모 대학에 근무하던 여성 청소원의 급여는 29만8천원으로,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남성 경비원 임금(121만원)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당시 여성들은 두 직종이 모두 20년 장기근속에 대동소이한 업무라고 생각하여, 남녀고용평등법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조항 위반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사건을 맡은 ○○지방법원은 두 업무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능하다며 임금 격차가 합리적이라고 판결했다. 달리 말하면, 청소보다 ‘외부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경호 업무가 더 중요하고 우월하다는 것이다. 청소 노동은 경비 업무에 비해 쉼없이 일해야 하며 노동 강도가 훨씬 센데도 말이다.
전쟁영화나 조폭영화를 보면, 성(gender)을 기준으로 한 분업이 확연하다. 남자들은 평소에는 빈둥거리거나 체력단련(군사훈련)을 하다가 가끔 싸우는 데 반해, 여자들은 일상적으로 노동한다. 한마디로, 남자는 싸움에 목숨을 걸고 여자는 목숨을 유지하는 일을 한다. 여성이 전투를 하고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안전한 KTX를 위해
-
12월2일 토요일 밤 <디어 평양>을 보았습니다. 내가 신뢰하는 동료들이 일찍부터 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어쩌다보니 내 삶의 조건과 리듬에 맞춰 그냥 그날 밤 우연히 보았습니다.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개 눈물을 흘렸는데, 그들과 섞여 있던 나는 문득 울음 말고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편지를 씁니다.
거듭 다시 생각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 비스듬히 누워 촬영하는 바람에 잠깐씩 잡히던 당신의 발가락, 그에게 용돈을 들이미는 당신의 유쾌한 손등, 그리고 병환으로 굳어버린 아버지의 손목을 강건하게 부여잡는 다시 당신의 손목. 당신의 몸 일부가 그렇게 프레임 안으로 불쑥 들어올 때마다 나는 당신 마음의 공기를 마시는 듯했습니다. 혹은 짓궂게 카메라를 치워버리려 아버지의 팔이 당신의 카메라를 툭 건드릴 때, 그가 탄 느려터진 자전거의 속력에 맞춰 걸으며 내던 당신의 호흡이 들려올 때, 당신
[오픈칼럼] 디어 양영희
-
##스무살의 꿈
스무살, 나의 꿈은 진보정당의 당원으로 늙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운동(Excersise)을 하고, 일도 끝내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운동(Movement)을 하는 것이 좋겠군, 그것이 건강한 시민이야. 도대체 무언가를 위해서 헌신한다는 일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다행히 비겁해서 무언가에 목숨 걸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주말에 클럽에 가면서 뜬금없이 주사파 생각을 한다. 그리고 슬며시 안도한다. 어쩌면 그들은 순결한 사람이야,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잡힌 쓸쓸한 사람들이야, 생각한다. 그렇게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년을 살아온 그들에게 이제 와서 당신의 신념은 틀렸으니, 당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인하라고 말하는 것은 좀 가혹하지 않아, 혼자서 되뇐다. 어쨌든 그들은 선의에서 출발했잖아? 물론 세상이 바뀌는데 그들은 바뀌지 않았다고, 그것도 그들의 선택이었다고 한다면, 달리 할 말은 없다. 오홋, 냉담한!
##서른다섯의 토요일
[이창] 블루밍 데이즈
-
극장이란 참으로 독특한 공간이다. 사회적 불황에도 외려 호황이오, 라고 외칠 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한반도는 미군의 네이팜탄 무차별 투하로 가공할 만한 전소(全燒)의 스펙터클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대구와 부산 등 피난지의 극장들은 “기마 경관들이 등장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특히 1951년 가을부터 외화 수입이 재개된 뒤로 “유일한 오락공간이었던” 극장을 찾는 관객이 급증했다. “저속하고 질 낮은 영화를 창고 같은 극장에서 상영해도” 개의치 않았다. 1951년 불이무역주식회사, 신한문화사를 시작으로 2년 동안 외화 수입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는 30여곳으로 늘어났을 정도다. 극장을 중심으로 댄스홀과 탁구장 등도 생겨났다.
영화사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홍보전 또한 격렬해졌다. ‘초특작’, ‘신수입’, ‘최신판’, ‘결정판’이라는 짤막한 광고문구가 이미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들통난 이상 계속 써먹을 순 없었다. 새로운 유인책을 만들어야 했다. 외화의 경우 이른바 스퍼
[한국영화 후면비사] 한반도는 전쟁, 극장가는 홍보 전쟁
-
영화의 첫 장면은 인종차별이 팽배한 60년대 보스턴을 찍은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설리반의 시체가 놓인 아파트 베란다 위를 유유히 지나가는 쥐로 끝난다. 인종차별과 ‘쥐새끼’, 이 영화의 두 가지 모티브는 서로 얽혀 있다.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냉소적으로.
<갱스 오브 뉴욕>에서 이미 아일랜드인들의 핏빛 정착기를 그렸던 마틴 스코시즈는 이 영화로 그 아일랜드인들의 현재를 그린다. 20세기 초 뉴욕이나 21세기 보스턴이나 이들이 갈 곳 없기는 마찬가지다. 백인 학교에 가지 못하는 흑인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첫 장면과 겹치는 부분이다(‘하얀 흑인’으로서의 아이리시). 살아내긴 해야 하지만 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을 때 서로 모여 갱이 되는 일은 가장 쉬운 길이다. 차별받는 흑인과 아일랜드인이 갱단을 만드는 일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코스텔로의 독백처럼 “환경이 나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갱(설리반의 선택)이 싫을 때
[영화읽기] 쥐새끼 되길 권하는 사회
-
옛날(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만)의 일을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필자가 영화평이라는 걸 쓰기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영화는 ‘뭔가 볼 만한 것’의 대열에 거의 끼지 못했었다. 대신 그 대열에 끼기 위한 노력이 막 시작되고 있었더랬는데, 그때 등장한 영화들이 바로, 아아 생각이나 나시는가, <퇴마록>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쉬리> 그리고 <용가리> 등등의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2007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2006년 말. 거의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뭔가 볼 만한 것’은 놀랍게도 미국산 대작영화들이 아닌 한국영화들이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이번주 영업실적 1위를 먹은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되면 ‘뭐 그런 영화가 있기는 했어?’라는 반응이나 간신히 먹은 뒤 분루를 뿌리며 미국 땅으로 돌아가는 현상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왠지 공허함과 불안
[투덜군 투덜양] 마이 컸다, 근데 왜 공허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