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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은 1993년 제작된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이다. 음산하지만 귀여운 인형 캐릭터들이 말썽을 부리고 사랑을 하고 노래도 불렀던 이 애니메이션은 할로윈과 크리스마스라는 이질적인 명절을 조합하여 두고두고 떠올리며 즐거워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13년이 지났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특수효과를 담당한 ILM은 디지털 소스도 존재하지 않는 <팀 버튼의…>를 3D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만들어 크리스마스가 임박한 2006년 겨울에 내놓았다. 아마도 관객은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심정으로 이 영화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공들인 수공예품이었던 <팀 버튼의…>가 무자비한 테크닉을 견디고 살아남았을까 혹은 조금 춥게 살아도 이사하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던 할로윈과 크리스마스 마을이 입체적인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다니 얼마나 설레는가. 어쨌든 이야기는 그대로이다.
할로윈 마을의 인기 스타인 해골인형 잭(크리스 서랜던)은 왠지 모
3D로 부활한 산타클로스 납치사건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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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결단>의 카메라는 질퍽하고 펄떡거린다. 인물들의 숨소리, 땀, 눈빛이 콘트라스트 강한 조명 아래 하나하나 잡힐 만큼 집요하고 뜨겁다. 최호 감독과 <바이준>을 작업했던 오현제 촬영감독은 최호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건네받으며 “장르적으로는 누아르, 그러나 사실감있는 누아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섞일 수 없는 두 단어를 듣고 상당히 고민했다. 그러다 어떤 영화를 보고나서 기사를 봤는데 ‘다큐적 누아르’란 말이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게 명확해졌다.” 그리고 오현제 촬영감독은 이 영화를 100% 핸드헬드로 촬영하자고 감독에게 제의했다. 줌인·아웃이 들어간 숏만 빼고 <사생결단>은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감독이 ARRI LT 기종 카메라를 자신의 어깨 위에 얹고 찍은 영화다. 추운 겨울, 굳어지는 근육의 고통을 못 견뎌 트라이포드에 살짝 얹어놓고 포기할까도 했는데, 러시를 보는 순간 “느낌 자체가 달라서” 4개월 반을 끝까지 갔다. 이상
<사생결단>의 촬영감독 오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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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시를 사랑한다”는 그녀는, 그러나 도시의 사랑에는 숙맥이다. 외국계 M&A회사의 애널리스트 민준(엄정화)은 여행간 홍콩에서 그녀의 “아낌없이 다 주리라”식 연애에 지친 남자친구에게 바람을 맞는다. 다음날 출근길, 경황없는 그녀는 근사한 슈트를 빼입은 완벽남 로빈 헤이든(대니얼 헤니)의 차를 들이받고 마는데, 알고 보니 로빈은 민준의 회사에 새로 부임한 CEO. 둘은 일본 기업 합병건을 함께 진행하게 되며 슬금슬금 서로에게 끌리지만, 민준은 자신의 사랑법을 무시하며 ‘연애는 파워 게임’이라 주장하는 이 남자가 너무나도 밥맛없다.
<Mr. 로빈 꼬시기>가 벤치마킹한 대상은 한국 로맨틱코미디가 아니라 할리우드와 워킹 타이틀의 공산품이다. 주인공을 둘러싼 정감있는 조연들에서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브리짓 존스’식으로 세공되어 있으며, 심지어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모습조차 실제보다 매끈하다. 이토록 잘빠진 스타일의 극점은 두명의 주연배우다. 제작
할리우드와 워킹 타이틀의 공산품 < Mr.로빈 꼬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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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돌(Devil Doll)이 누구야? 영화 <삼거리극장>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정보를 모은 사람이라면 분명 이런 질문을 떠올렸을 것이다. 여기저기 기사화되기도 했지만 전계수 감독은 <삼거리극장>의 시나리오를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의 아트록밴드 ‘데빌 돌’의 음악을 들으면서 썼고, 김동기 음악감독에게 시나리오를 건네줄 때 “데빌 돌이 컨셉”이라고 했다. “경외의 대상일 뿐 감히 모방도 할 수 없다”고 여겼던 존재의 이름을 대학 선배이자 감독에게서 듣는 순간, 김동기 음악감독은 ‘데빌 돌 흉내냈네’라는 말만 들어도 성공일 거란 생각으로 작업에 뛰어들었다. 저예산 기획영화라는 압박 때문에 결국 <삼거리극장>의 전체 음악은 애초 두 사람이 의도했던 록뮤지컬 스타일은 되지 못했지만 한국영화로서는 요즘 관객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운드트랙 감상 기회를 주는 건 확실하다. 경쾌한 인디록 넘버, 고란 브레고비치 곡들을 염두에 두고 쓴 집시음악풍의 넘버 그리
<삼거리극장>의 음악감독 김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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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인 1997년 어학연수차 뉴욕에 갔던 하정우는 우연히 한 영화학교 학생들의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오전에는 어학 수업, 저녁에는 영화 촬영이라는 바쁜 나날 속에서 삶의 희열을 느끼던 그는 두손 모아 기도했다. “하나님, 저 여기서 제대로 된 영화 한편 찍게 해주세요.” 그리고 9년 뒤 그의 소망은 이뤄졌다. 올 여름 그는 뉴욕에서 촬영된 김진아 감독의 <네버 포에버>에 남자주인공 지하 역으로 출연했다. 그가 2006년을 “믿을 수 없었던” 한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랜 희망이 이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와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등 지난해 말의 기세를 몰아 올해 김기덕 감독의 <시간>과 이형곤 감독의 <구미호 가족>에 출연했고, 결국 ‘충무로 차세대’ 리스트 최정점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리얼한 연기를 펼쳤던 그는 <시간
<시간> <구미호 가족>의 배우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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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과적으로도 올해 대한민국영화대상 조연상은 다른 배우에게 갔지만, 진구 본인도 소속사 식구들도 그가 <비열한 거리>로 영화제 조연상 후보에 오를 줄 예상조차 안 했다 한다. 후보에 오른 사실도 (일주일에 한두번씩 해오던 대로) 제 이름 쳐넣어 기사 검색하던 와중에 우연히 발견했다. 회사에는 모른 척했고, 회사 식구들도 지나가는 말인 양 ‘후보에 오른 건 알지?’라고 물은 정도였다. “되게 기분 좋았”으며 시상식장에서 떨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덤덤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올인>(2003)을 하면서 하루 200통씩 오던 팬레터들이 한달 만에 “누가 훔쳐간 것처럼” 뚝 끊겼던 그때가 지금도 감사하다고 진구는 몇번을 말한다. "상처를 좀 많이 받았죠. 근데 그때 그런 걸 경험 안 했으면 지금쯤 되게 거만해졌을 거예요.” 영화제가 대표작으로 언급한 건 <비열한 거리>라 해도, 그가 올해 보여준 재능은 상두(조인성)에 대한 충
<비열한 거리> <아이스케키>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배우 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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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많이 들어오면 됐지, 뭐.” 아들에게 가드 올리라면서 펀치를 날리는 <천하장사 마돈나>의 무지막지한 아버지, 배에 칼이 들어와도 웃을 것만 같은 <타짜>의 무시무시한 아귀. 조연상 하나쯤은 당연히 받아야 할 한해인데 빈손이 웬일이냐고 했더니, “일감 많이 들어오면 된 것 아니냐”라고 허허한다. 어느 때보다 그물코에 고기가 많이 걸리는 대목. 그렇다고 덥석 물진 않는다. 어느 때보다 신중한 선택을 위해 기다리는 중이다. “올해 여름에 두편의 영화 말고도 연극과 드라마까지 겹쳤다. 배우라는 존재는 몸을 도구로 써야 하고, 그러다보니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아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근데 스케줄이 빡빡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벅차더라. 무대에 섰는데 숨이 턱까지 차오르더라니까.” 현재는 드라마 <있을 때 잘해!>에 전념하고 있다. 일주일에 4, 5일, 드라마 촬영에만 나선다. “주 5일 근무제도 해보니까 힘들다. 푹 쉬는 것도 아니고. 하루는 애
<천하장사 마돈나> <타짜>의 배우 김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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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하다, 멋지다, 기대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2006년은 신선했노라. 올해 한국 영화계는 어느 해 못지않게 새로운 얼굴들을 많이 선보였다. 여기 소개하는 9명은 2006년 들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들이다. <시간> <비열한 거리> 등을 통해 ‘차세대 대형 연기자’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힌 하정우와 진구를 비롯해, <천하장사 마돈나>와 <타짜>로 뒤늦게 눈부신 빛을 발한 배우 김윤석, <사이에서>로 한국 다큐멘터리 흥행기록을 세운 이창재 감독, <사생결단>을 통해 빛과 어둠의 격렬한 충돌을 보여준 오현제 촬영감독, 뮤지컬영화 <삼거리극장>의 오묘기묘한 음악을 만들어낸 김동기 음악감독, 충무로 역사를 바꾸는 영화노조를 일궈낸 최진욱 전국영화산업노조 위원장, 일본영화 전용관 CQN을 만든 이애숙 씨네콰논 부사장, <괴물>의 처연한 괴물을 디자인한 장희철씨가 그들이다. 사실, ‘발견’이란
2006년 한국 영화계를 사로잡은 영화인 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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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우와 김상경을 투톱으로 내세우고, 소녀 연쇄 살인범을 쫓는다는 설정의 <조용한 세상> 이 품고 있는 메시지는 좋은 편이다. 위탁 아동(혹은 입양아)에 대한 가정내 학대의 문제는 (<예의없는 것들>도 다루었듯) 사회적 환기를 요하는 심각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의 만듦새는 그러한 발언을 담아내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최대 문제는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지만, 좀처럼 '스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시나리오 자체가 스릴러의 감각을 지니지 못해서, 뻔하고 지루하게 전개되다가 예상보다 일찍 등장한 반전 역시 그다지 약빨이 없다. 후반부엔 여러가지 감동의 요소를 덤으로 얹으려고 하지만, 이미 김이 빠진 상태에서 그 감동을 받아들일 관객은 없어 보인다. 시나리오 만큼이나 감독의 연출력도 짧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지닌 김상경의 캐릭터는 답답하고 모호하여, 어떤 환기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박용우 캐릭터는 그나마 무난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
[전문가 100자평] <조용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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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관객을 자극하는 에로틱 판타지
“이상한 일이오. 오늘 저녁 내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소. (…)
자 당신에게 말하는 것, 이게 내 운명이오. 마치 처음인 것처럼 당신에게 말하는 것, 다시 또 그 말들, 늘 같은 말들(…)
당신이 적어도 단 한번만이라도 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거짓처럼 들리는 황홀한 말들, 전략적 말들을. 당신은 나의 금지된 꿈, 그게 거짓이어도 내 유일한 내 고통, 내 유일한 희망이오.”
-<Paroles, paroles>(달리다와 알랭 들롱이 함께 부르는 샹송) 중에서
차가운 달콤함, 내면의 절절한 고독이 스며나오는 크리스털 블루 시선, 어느 각도로 카메라를 들이대건 깔끔하게 선이 떨어지는 수려한 윤곽… 그래서 살아 있는 조각상처럼 보이는 알랭 들롱은 신화적 미모의 스타로 기억된다. 그는 당연히 압도적인 미모 덕에 배우로 발탁되었지만, 초기작 <태양은 가득히>(1960)에서 아웃사이더의 깊은 우울과 분열을 차가운 미소와 악마적
처연한 아름다움의 도취경, 배우 알랭 들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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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퍼런 새벽 같은 허무한 운명의 표정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서 항상 불만이었던 것이 있었다. 총이나 칼을 맞고 죽어가는 주인공들은 자신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애인이나 친구에게, 앞뒤에서 악당들이 에워싸고 있거나 말거나, 총알이 날아다니고 폭탄이 터지거나 말거나, 사랑한다느니, 용서해달라느니, 여동생을 부탁한다느니, 한 말 또 하고 또 하다가 옆집 삼돌이네 강아지에게 안부는 안 전하나?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할 무렵에 가서야 겨우 죽었다. 그 순간 하얀 손수건을 눈물로 적시며 우는 이모나 고모가 너무나 철없어 보였고, 어린 나를 극장에 데려간 고마운 이모와 고모를 얕잡아보기까지 했었다. 그런 형편은 주말의 명화나 동네 극장에 간간이 들어오는 할리우드영화들도 마찬가지여서, 동네 극장에 들어오기 한달 전부터 어머니에게 조르고 졸라 겨우 돈을 타내서 보러 간 <바이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멋있는 커크 더글러스가 기생오라비 같은 배신자 토니 커티스에게 손가락만한 부러진 칼에
너무 멋지게 죽어버리는 사나이! 배우 알랭 들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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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치 코트 깃을 올리고 걸어갈 때, 푸른 담배연기를 허공에 뿜을 때, 느닷없이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 알랭 들롱보다 아름답고 알랭 들롱보다 고독하고 알랭 들롱보다 쓸쓸한 배우는 없다. 남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환유이기도 하며,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남성적인 것에 대한 은유이기도 한 제일 유명한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의 회고전이 12월15일부터 24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영화제 시간표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길). <태양은 가득히> <로코와 그의 형제들> <지하실의 멜로디> <수영장> <암흑가의 세 사람> <형사> <고독한 추적> <암흑가의 두 사람> 등 대표작 10편이다. ‘그보다 더 멋지게 쓰러져 죽은 남자는 없었고 죽을 때 마지막 입김을 극장에서 코로 맡기까지 했다’는 오승욱 감독의 간증, ‘제임스 딘이나 객기를 부리는 장 폴 벨몽도의 반영웅적 이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을 추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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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휘는 좀처럼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는다. 어둑컴컴한 방 안에만 머문다. 식사도 방 안에서 혼자 해결한다. 그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인터넷이다. 그런 제휘에게 장희가 다가온다. 제빵부터 용접까지 모든 자격증을 손에 넣은 독특한 그녀는 제휘에게 관심을 보인다. 처음엔 마다하지만 제휘 또한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제휘가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할 무렵 고등학교 동창인 표와 그의 연인 로미가 나타난다. 표는 과거 제휘를 괴롭히던 덩치. 제휘는 졸업 뒤 만난 표에게 또다시 구타와 모욕을 당한다. 표를 피해다니던 제휘는 장희가 보는 앞에서 체면을 구기게 되고, 결국 인터넷 너머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한다.
“제목만 보면 동물영화 같다. 사실 그 치타가 아니라 타잔의 곁에 따라다니는 치타라는 뜻인데.” 양해훈 감독의 익살스러운 소개와 달리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살벌한 성장영화다. 죽을병이 걸렸다면서 병원을 들락거리는 병철은 초라한 치타 꼴이 된 제휘의 사연을 듣고서 표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의 양해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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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는 아이의 아빠는 남아도는 빵을 훔칠 권리가 있다.” 빈민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베 피에르 신부의 말이다. 눈물겨운 부정(父情) 앞에서 도덕률은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하다고? 신부의 말을 오해해선 안 된다. 도둑질을 권리라고까지 못박지 않는가. 이때의 도둑질은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성직자가 하늘이 내린 계율을 어기고 땅의 악행을 부추기는 건 다른 이유에서다. 한쪽은 굶고, 한쪽은 남아돌다니. 잉여에 대한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회, 배고픈 자는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 그게 마땅하다고 일갈하는 것이다. “빈곤층의 주거문제에 대한 사회와 정부의 무관심을 환기시키고 빈민 스스가 해결책을 찾는” 이른바 스쾃(squat: 점거) 운동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남미와 유럽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스쾃운동은 한국에도 있다. 이현정 감독의 <192-339: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는 한국의 ‘빈민’들이 벌인 ‘최초의’ 스쾃운동
<192-399: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의 이현정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