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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해고 노동자들이 헬싱키의 한 노래방에서 마주친다. 안사(알마 포이스티)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챙기다 해고되었고, 홀라파(주시 바타넨)는 술을 마신 채 건설 현장에 나갔다가 잘린 상태다. 절제된 배경과 데드팬 코미디를 노련하게 구사하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세계 속에서 이들의 사랑은 좀처럼 성사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한 남녀가 끝내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그린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을 제외하면 대체로 19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미장센은 동시대의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음을 알린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그 어둠과 균형을 맞추려는 듯, 회색 조의 영혼에 희망의 빛이 들어차는 순간을 향해 어느 때보다도 부단히 나아가는 로맨스영화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너무도 냉혹한 세상에서 거의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결국 사랑하는 일뿐이라는 사실을 유머처럼 던진다. 너무나 동화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감동시킨다는 것이 유일한
[리뷰] ‘사랑은 낙엽을 타고’, 모던 타임즈에 응답하는 시린 영혼의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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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도리, 스프루스, 클레이, 플로이드, 브랜치 다섯 트롤 형제로 구성된 보이밴드 브로존. 한때는 정상급 아이돌이었으나 다이아몬드를 부술 수 있는 완벽한 화음을 불러야 한다는 부담에 무대를 역대급으로 망친다. 맏형이자 리더 존(에릭 안드레)의 독단적인 태도는 갈등에 불을 지피고, 그날 팀은 해체된다. 이후 홀로 남겨진 막내 브랜치는 브로존으로 활동한 과거를 숨기고 살아간다. 그로부터 20년 뒤, 브랜치(저스틴 팀버레이크)는 파피(안나 켄드릭)와 함께 친구의 결혼식에 간다. 그때 20년 만에 나타난 존이 결혼식장에 난입한다. 멤버였던 플로이드가 팝스타 벨벳과 비너에게 납치당해서 다이아몬드 감옥에서 재능을 착취당하는 중이란 것이다. 플로이드를 구하려면 팀을 모아서 완벽한 화음을 내야 한다. 브랜치는 뿔뿔이 흩어진 브로존을 모으기 위해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서히 닫힌 마음을 연다.
<트롤: 밴드 투게더>는 드림웍스의 뮤지컬 애니메이션 <트롤> 시리즈의 3편이다. 여
[리뷰] ‘트롤: 밴드 투게더’, 너무도 완벽한 오색찬란한 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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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혼란한 일본에서는 조명연합수군의 수세에 밀려 거듭 패배하던 왜군을 철병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조선-명나라 연합군은 사로병진 전략을 밀어붙이면서 조선에 남아 있는 왜군을 섬멸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이규형)는 명나라 군을 이끄는 진린(정재영)을 찾아가 이미 끝난 전쟁이니 더이상의 출혈을 막아야 하지 않느냐며 퇴로를 열어 달라 간곡히 요청한다. 한편 이순신(김윤석)은 막내아들을 잃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아들은 물론 지난 7년간 죽어나간 병사들과 백성들을 떠올리며 전쟁을 이대로 끝내서는 안된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진린이 고니시의 뇌물에 넘어가 퇴로를 열어주고 왜군 수장 시마즈(백윤식)가 고니시의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나서면서 오히려 조명연합수군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퇴각하려는 왜군과 이를 막아내 그들을 섬멸하려는 조선과 명이 노량해협에서 최후의 전투를 시작한다.
<명량> <한산: 용의 출현>에 이어 ‘
[리뷰] ‘노량: 죽음의 바다’, 죽음을 끝내기 위해 더 많은 죽음을 택한 숭고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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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푸르셰 지음 / 김주경 옮김 / 비채 펴냄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고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썼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자아가 충돌하며 나와 다른 상대를 확인하고 또 그 과정에서 몰랐던 나를 확인하기도 하는 것이 사랑이기에, 프롬은 사랑을 실존의 핵심에서 자신을 경험한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흔히들 “불이 붙었다”고 비유하고, 연인이 심하게 싸울 때 “불같이 싸웠다”고 표현한다. 마리아 푸르셰는 <불>의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활활 타오르다 소멸하고, 잿더미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기까지. 불은 사랑의 모든 형태를 보여준다”고 소개한다. 사회과학 교수인 로르는 심포지엄에서 증권가에서 일하는 클레망을 만난다. 로르는 클레망의 속이 다 비칠 듯한 피부와 남자치고는 예쁘고 가느다란 손목을 보
씨네21 추천도서 -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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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 지음 / 창비 펴냄
써야만 비로소 시작되는 기억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쓰지 않으면 내게 이런 과거가 있었는지조차 묻고 살다가, 쓰기 시작하면 재생버튼을 누른 듯 기억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나를 흔들어놓고, 나이 든 지금의 나를 형성했던 중요했던 기억들을 왜 이토록 묻어두고 살았나 싶어진다. 이주혜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은 ‘나’가 우울증 상담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편이 함께 정당 활동을 하던 여자 동료를 스토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혼한 ‘나’는 딸과도 멀어지고 그간의 생활을 정리한 뒤 폐인처럼 살아간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 우울증 상담을 받던 중 의사는 ‘일기를 써보’라고 추천한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객관화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이랄까요”라는 의사의 말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씨네21 추천도서 -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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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성해나, 예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고등학교 교사 곽은 고전 읽기 수업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독서를 통해 보편적인 교양과 바람직한 인성을 가르치고 싶어 한다. 고전을 열심히 읽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에 대해 설득력 있는 논술을 써내는 은재 같은 우등생은 곽에게 빛과 소금 같은 존재다. 수능 시험에 나올 문제집 풀이가 아닌 독서를 통해 청소년의 인격 함양을 꾀한다는 점에서 곽은 좋은 선생님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독자로서 곽을 완전히 지지하긴 어렵다. 그가 무지한 학생들을 향해 뇌까리는 속마음이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계절마다 세편의 소설을 선정해 출간하는 <소설 보다> 시리즈의 2023년 겨울편에 수록된 김기태의 <보편 교양>은 이처럼 지극히 평범한, 보편적인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소설 보다> 시리즈는 단편소설 다음에 작가의 긴 인터뷰를 수록하는데, 김기태 작가는 일반적인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다루는 문제
씨네21 추천도서 - <소설 보다: 겨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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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 지음 / 을유문화사 펴냄
인디안 페일 에일이 ‘창백한’(pale)이란 뜻인 줄 알고 색이 옅으면 도수가 낮을까 싶어 주문했더니, 뜻밖에도 독하고 써서 놀란 적 있는지. 인도로 간 영국인들이 고국의 맥주를 그리워해, 기나긴 항해를 버티라고 높은 알코올 도수로 제조하여 인도로 수출한 술이란다. 술을 사랑하는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잊지 못할 묘한 단편 <레더호젠>과 관련된 일화도 소개한다. 이 단편은 남편의 부탁을 받은 아내가 멜빵 달린 반바지 레더호젠을 사면서 저도 몰랐던 미움이 솟구친다는 내용이다. 옥토버 페스트용 의상인 가죽 레더호젠으로 꽉꽉 들어찬 베를린의 백화점 풍경을 실제로 본 저자는, 아내가 왜 화를 냈는지 바로 이해가 갔단다. 이처럼 술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쉽게 찾는 음료이기도 하지만, 어원과 문화적 맥락을 따지고 들어가면 세계를 한층 넓혀주는 취향이 된다.
<밤은 부드러워, 마셔>는 술과 그 술에 어
씨네21 추천도서 - <밤은 부드러워, 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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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정신 질환을 바라보는 관점 하나. 보통의 사람과는 다르게 감각하고 생각하며 진리에 다다른 사람을, 의사나 심리사가 그 다름을 이유로 질환으로 규정한다는 것. DSM 같은 정신 질환 분류법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풍부한 정신적 세계가 있다는 발상은 여러 작품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스텔라 마리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 발로 정신병원에 찾아온 천재 수학자 얼리샤와 정신과 의사의 대화로 진행되는 소설이다. 얼리샤는 정신의학의 관점에서는 조현병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손에 물갈퀴가 달린 ‘키드’라는 이질적인 생명체를 어릴 때부터 보았다. 이같은 남다른 지각은, 양자역학을 비롯하여 20세기 과학사가 거둔 빛나는 성과를 어린 나이에 단숨에 이해한 비범함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과학은 진보한 만큼 어둠을 드리웠고, 그 어둠은 얼리샤의 개인사에도 스며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물리학자였던 얼리샤의 아버지는 쓸쓸하게
씨네21 추천도서 - <스텔라 마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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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마리스> - 코맥 매카시 지음
<밤은 부드러워, 마셔> - 한은형 지음
<소설 보다: 겨울 2023> - 김기태, 성해나, 예소연 지음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 이주혜 지음
<불> - 마리아 푸르셰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2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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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마치 코로나19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취약한 이들의 사망 원인 가운데 무척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현재진행형의 위협이다. 단지 미디어가 다루지 않을 뿐이고, 국가가 관심을 거두었을 따름이다. 특정 위협에 대한 사회의 과민한 반응도 과소한 관심도 이들이 어찌 하느냐에 달렸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우리말로는 꽤 이상한 용어에 짓눌려 살았던 지난 몇년. 그동안 우리가 알던 사회라는 건 꽤 많이 파괴됐다. 거리두기를 거두었어도 한번 벌어지기 시작한 거리는 도통 좁혀지지 않는다. 물론 단지 얼마간의 강력한 방역정책 탓만도 아니고 오로지 코로나19가 원흉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던 사회의 해체를 가속화시켰을 따름이다. ‘언택트’라는 더 괴이했던 용어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수시로 ‘접속’하되 여간해선 ‘접촉’하지 않는 우리의 사회적 변형을 꽤 정확히 찌르고 든다는 점일 테다.
세기말의 분위기로 접어들던 199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온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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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이랜드>는 하이더르(알리 준조)가 유령 역할을 맡아 흰 천을 뒤집어쓴 채 조카들과 유령놀이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소 범박하지만 흰 천에서 영화관의 스크린을 떠올려볼 수 있다면, (극)영화 또한 배우들에게 개별 역할을 부여하여 작동되는 일종의 역할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이랜드> 속 인물들은 그 어떤 극의 배우들보다도 더 엄격한 사회적, 가족적, 관습적 역할극에 복무해야 하는 처지다. 문제는 그 역할극이 지극히 경직된 채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화면비가 강조하듯 그들은 억압과 속박, 구속과 굴레로 유지되는 역할극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파키스탄 아만(살만 파르자다) 집안의 차남 하이더르는 어느 날 백업 댄서 일자리를 얻는다. 미용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열정과 자부심을 지닌 하이더르의 아내 뭄타즈(라스티 파루프)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취업 선언과 함께 강제로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때 뭄타즈의
[비평] 속박의 역할극이 막을 내리면, ‘조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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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홈> 시즌2의 뉴 페이스는 배우 진영이다. 그가 분한 이등병 찬영은 괴물화 사태가 터지자마자 괴물 처리를 전담하는 까마귀부대에 자원 입대해 생존자들을 구출하는 정의로운 남자다. 작품을 연출한 이응복 감독이 찬영에 대해 “진영을 두고 만든 캐릭터다”라고 공언했을 만큼, 진영은 그 어떤 배역보다 자신과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캐릭터를 만나 백방으로 뛰며 쑥대밭 세상 속 미약한 인류를 구한다.
- <스위트홈> 세계관에 새로 합류한 소감은.
= 시즌1을 정말 재밌게 봤다. 당시 시청자로서, 또 배우로서 <스위트홈>을 보며 내가 저 세계 안에 있으면 어떤 모습일까를 그려보기도 했는데, 마침 캐스팅 제안이 와 기분이 좋았다. ‘어떤 캐릭터일까?’ ‘나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매일 기대하며 촬영을 기다렸다.
- 이응복 감독과 촬영 전 미팅을 가졌다고 들었다.
=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찬영이 어떤 삶을 살다 까마귀부대에
[인터뷰] 아스팔트 위에 핀 장미, <스위트홈> 시즌2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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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적이던 10대 소녀 은유는 이복오빠 은혁(이도현)이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시즌2를 시작한다. 이전보다 한결 차분하고 무게감 있는 얼굴로 배우 고민시는 그린홈 아파트를 벗어난 소녀의 심리적·태도적 변화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스위트홈> 시즌2의 변화와 질주 속에 자기만의 한획을 더한 고민시를 만났다.
- <스위트홈> 시즌2는 시즌1보다 더 음울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진행된다. 은유에게 어떤 심리적 변화가 생겼다고 분석했나.
= 감정 자체가 엄청나게 깊어졌다. 시즌1은 딱 그 나이대에 맞는 사춘기 고등학생 같았다. 표현도 서툴고 행동보다는 말이 앞섰다. 반면 시즌2에서는 말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말보다 행동을, 행동보다 생각을 먼저 한다. 섬처럼 혼자 있지만 누구도 잃고 싶지 않다는 슬픔 섞인 결연한 마음도 두드러진다. 외적으로는 중성적인 변화가 돋보인다.
- 슬픔이 계속 누적되는 와중에도 은유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인터뷰] 예리한 감각으로, <스위트홈> 시즌2 고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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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홈> 시즌1에서 서이경(이시영)이 보여준 짜릿한 액션과 애통한 눈물을 기억하는 시청자라면, <스위트홈> 시즌2의 이경이 반가운 동시에 낯설 것이다. 그린홈 아파트를 떠나 군대에 입대한 이경은 배 속의 아이와 함께 남편 상원을 찾기 위해 밤섬 특수재난기지로 향한다.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출산까지 하게 된 이경은 끔찍한 세상에 태어난 자신의 분신이 낯설고 또 두렵다. 부모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의 기회가 이경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이경은 황폐한 아포칼립스만큼이나 피폐한 마음을 애써 눌러둔 채 언제나 그랬듯 고독하고 묵묵하게 싸운다. 눈앞에 도사린 괴물과도, 가슴속에 똬리 튼 죄책감과도.
- 누구보다 <스위트홈> 시즌2를 기다린 것으로 안다. 시즌2와 3의 제작 확정 소식이 들렸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 이경이 소화해야 하는 감정의 폭이 깊고 어려워 겁이 나긴 했다. 다시 <스위트홈>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 이응복 감독님의 얼굴을
[인터뷰] 진퇴양난의 모성, <스위트홈> 시즌2 이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