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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스 맬릭 감독은 몇살인가요.
=1943년 11월30일생입니다. 67살입니다.
-인터뷰를 찾아볼 수가 없어요.
=맬릭은 정식 인터뷰를 딱 두번 했습니다. 둘 다 데뷔작 <황무지>를 만든 다음인 1975년에 한 것입니다. 영국 영화 월간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 프랑스 영화 월간지 <포지티프>와 했습니다. 이후로는 전무합니다.
-젊었을 때 모습이 궁금한데 사진이 없어요.
=궁금하시다면 <황무지>를 보면 됩니다. 영화의 남녀주인공들이 어느 부잣집을 점령하고 있을 때, 멋모르고 이 집을 찾는 ‘카우보이 남자’로 잠깐 단역 출연합니다. 은둔자라더니 아니라고요? 사정이 있었답니다. “아침 9시30분까지 오기로 되어 있었던 배우가 오지 않았다. 우리는 기다렸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에 내가 카우보이 모자를 집어 쓰고 그 역을 연기했다.” 가장 최근 모습은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으실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 베일과 함께
당신을 진정한 은둔자로 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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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막 뒤에서 비밀스럽게 살아가는 테렌스 맬릭에게 동료들과의 우정은 절실하다. 맬릭이 자신의 영화에 대해 침묵할 때 그들은 맬릭의 세계를 지지하고, 대변해주는 사람들이다. 여기 소개한 프로덕션 디자이너 잭 피스크, 촬영감독 에마뉘엘 루베츠키, 제작자 사라 그린은 그중 가장 중요한 맬릭의 식구들이다. 그들이 맬릭의 화폭에 인간의 얼굴과 풍경과 집과 나비를 그려 넣는 방식을 알고 나면 맬릭에 대한 궁금증도 조금은 가시지 않을까.
구체적 공간에 관념이 뿌리내리도록…
프로덕션 디자이너 잭 피스크
1970년대 초, 미술감독으로 데뷔한 잭 피스크는 시대극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테렌스 맬릭도 1950년대 연쇄살인마 찰리 스타크웨더에 관한 영화(<황무지>)를 준비 중이었다. 소식을 들은 피스크는 흥분에 겨워 혼자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몇몇 친구들이 그에 관한 소문을 맬릭에게 전했고, 결국 피스크가 <황무지>의 미술을 맡게 되었다. 이후
테렌스 맬릭의 좋은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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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스 맬릭 군단이 <트리 오브 라이프>의 제작기를 들려줄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유기적’(oraganic)이라는 단어다. 현장에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에 몰두했던 이들도, 고립된 실험실에서 화학약품이나 컴퓨터와 씨름했던 이들도 한결같이 입에 올리는 단어다. <뉴 월드> 때부터 맬릭과 함께해온 제작자 사라 그린과 맬릭의 모든 영화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아왔던 잭 피스크는 특히 배우들과의 작업이 유기적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런가 하면 시각효과감독 댄 글래스와 시각효과 컨설턴트 더글러스 트럼블(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시각효과를 담당했던 인물로 당시의 기술을 이 영화에서 복원, 발전시키고 있다)은 “유기적인 결과물을 원했다”는 말로 작업 의도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자연스러운’(natural)이란 표현을 대신해 ‘유기적’이란 단어를 반복적으로 선택할 때 흥미롭게도 맬릭이 추구하는 자연의 잔혹한 이면이 드러
정교하게 설계된 인위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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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는 구약 성서의 주인공 중 한명인 욥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착하고 부유했던 욥은 신의 시험을 받아 자식과 돈을 잃고 질병까지 얻었으나 신앙을 끝끝내 버리지 않아 신에게 다시 구제받는다. 영화는 그런 욥기의 한 구절로 시작한다. 대사들도 대사라기보다는 거의 내레이션이며 기도이며 고백이다. 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가. 이것이 욥기의 주제일 것이라고 어느 성경에 관한 해설서에는 쓰여 있는데, <트리 오브 라이프>의 질문도 외견상으로는 유사하다.
1950년대 미국 남부의 어느 평범한 가정. 다소 권위적인 아버지 브라이언(브래드 피트)에게는 자애로움이 넘치는 아내가 있고 세명의 귀여운 아들이 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사고로 죽는 참극이 벌어진다. 나머지 가족은 슬픔에 잠긴다. 영화는 브라이언의 세 아들이 아직 유년이었던 시간과 중년의 남자 잭(숀 펜), 그러니까 첫째아들의 시간을 서로 교차한다. 브라이언과 그의 아내와 그
우린 아직 ‘생명의 나무’의 실체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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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스 맬릭의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가 개봉한다. 국내 개봉작으로는 <씬 레드 라인> 이후 근 10여년 만이다. 그 사이에 만든 <뉴 월드>는 개봉하지 않았다. 위대한 영화감독이며 유명한 은둔자인 테렌스 맬릭은 이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로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평가는 엇갈렸다. 이 작품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지 혹은 실패의 지점은 어디인지 맬릭의 감독론으로 짚어본다. 한편 작업 방식 자체가 신화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주의자인 맬릭이 어떻게 이 영화의 제작을 준비하고 이끌었는지 그 제작기를 보탠다. 오랫동안 맬릭과 함께 일해온 일등 스탭들의 면면도 소개한다. 더불어 우리가 맬릭에 관해 궁금했던 그러나 사소해서 묻지 못했던 것들도 함께 전한다.
은둔자 완벽주의자 위대한 영화감독 테렌스 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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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오버> 1, 2편의 교훈은 단순하다. 주당이라면 결혼은 꿈도 꾸지 말 것. 영화는 이 얘기의 동어반복이다. 형보다 나은 아우 없고 1편보다 나은 2편 없듯 라스베이거스의 유머만 남기고 사라졌으면 좋았을걸. 그런데 달팽이관만큼은 즐겁다. 카니예 웨스트, 커티스 메이필드, 울프머더, 제니 루이스 등의 노래가 줄줄이 등장한다. 1편에서 경천동지할 노래 실력을 보여준 마이크 타이슨도 재등장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아닌 뮤직 슈퍼바이저 랜달 포스터의 안목이 번득인다.
뮤직 슈퍼바이저는 영화 삽입곡을 선정하는 직업이다(부러워!). 대표주자는 <그레이 아나토미> <가십걸> <뉴문>을 맡은 알렉산드라 팻사바스 여사다. 랜달 포스터의 경력도 만만찮다. 팻사바스 여사가 인디 록에 일가견이 있다면 포스터 아저씨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스쿨 오브 락>과 <쥬랜더> <조디악> <인 디 에어> <위핏
[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뮤직 슈퍼바이저 랜달 포스터가 죽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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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도쿄에 놀러갔다. 하루는 시부야, 다음날은 신주쿠, 그 다음날은 긴자. 하루에 한번씩 그 지역 서점에 들렀다. 하지만 우에다 쇼지(植田正治)의 책을 파는 서점은 없었다. 심지어 아오야마의 사진 전문 서점 주인은 그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눈치였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에비스의 도쿄도사진박물관에 다시 들렀다. 숙소와 가까워 첫날 도착하자마자 찾았던 곳이었다. 우에다 쇼지라는 사진가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그곳에서였다. 그의 전시회는 이미 끝난 상태였고, 대신 박물관 입구에 그가 1950년에 찍은 사구(砂丘) 풍경 사진이 대형 걸개에 걸려 있었다. 그 사진 한장 때문에 여행의 대부분을 서점 순례에 매달렸다. 마음으로라도 찍어두자. 낮술까지 마신 상태로 걸개 사진을 꽤 오랫동안 지켜봤던 것 같다. 우스운 건 그러고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박물관 내 서점에 들렀을 때, 그의 사진집이 마술처럼 진열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든 그 책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첫날의 욕심이
[타인의 취향] 오매불망, 우에다 쇼지 전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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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독의 영화노트]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 뱅크시의 거대한 농간
[올드독의 영화노트]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 뱅크시의 거대한 농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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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신병자냐, 이 악질 반동분자 같은 자식아!” 이 얼마 만에 들어보는 고색창연한 욕설인가. 나는 SBS <천일의 약속> 예고편의 이 한마디로 대가 김수현의 귀환을 실감했다. 파르르 분노하는 이미숙이 반동분자로 지목한 김래원은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동을 꾀하는 구성원… 일 리는 없고 그저 결혼을 앞두고 다른 여자가 있다며 파혼을 입에 담은 몹쓸 예비사위일 뿐이다. ‘악질 반동분자’라는 표현은 일제 부역자나 지주를 지목해 ‘숙청’하는 특정한 세대체험을 했던 조부 세대가 공유하고, 또 그 수사에 노출되었던 자식 세대는 본래 맥락과 관계없이 ‘처단, 응징’의 뉘앙스로 사용하던 일종의 오래된 유행어다. 극중 50대로 추정되는 이미숙 또래라면 본인이 생각하는 최상급의 나쁜 놈을 욕할 때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법한 대사다.
그러나 김수현 작가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현대물에서 20대 젊은이들의 대사까지 예스런 표현을 고집할 때는 도리없이 흠칫 놀라게 된다. 예를 들면
[유선주의 TVIEW] 중년 유머… 마저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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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9일
동시통역으로 진행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부산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는 녹음이 불가능했다. 끝나자마자 행여 기억이 새어나갈까봐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적어내려간 메모를 여기 옮겨둔다. 우선 감독으로서 적성에 관한 독특한 해석. “나는 누나 둘에 터울이 많이 지는 장남이자 막내로 일본에서는 최악의 신랑감이다. 그런데 그 응석받이 천성이 감독의 일과 잘 어울린다. 감독은 스스로 뭘 못해도 된다. 잘하는 스탭한테 시키면 되니까. (웃음) 술도 못하고 가라오케도 싫어하고 지도도 못 보고 운전도 못하는 내가 회사원이 됐다면 대박이었을 거다. 감독이란 직업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 경위도 맥락이 비슷하다. 촬영감독에게 야단맞고 심지어 손찌검당하는 집단 작업이 싫어서 궁여지책으로 혼자서도 만들 수 있는 다큐멘터리에 입문했는데 거기서 불현듯 영화에 매료된 거다. 도피가 기회로 승화된 형국이다. 한편 좋은 배우의 정의를 묻는 연기자 지망생 청중의 질문에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움직임의 소용돌이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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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작가영화의 계보를 잇는 감독 중 현재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무랄리 나이르다. 1999년 데뷔작 <사좌>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이후 영국과 인도를 오가며 꾸준히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개의 날> (2001), <사마귀>(2003), <처녀염소>(2010) 등 그의 풍자영화는 우화를 바탕으로 현대 인도사회를 신랄하게 꼬집어왔다. 특히 그는 계급 차이로 생겨나는 부조리한 상황을 늘 다루어왔다.
그런 그가 최근 ‘영화를 통한 풍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화를 통한 사회운동’으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다. ‘Voice of Rural India’가 바로 그것이다. ‘변화를 위한 예술’(Art for Change) 재단의 지원을 받는 이 프로젝트는 가난한 농촌 여성들과 도시의 여성노동자에게 비디오카메라를 쥐어주고 그들에게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 발언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육이 필요한데, 무랄리 나이
[김지석의 시네마나우] 여성들이여, 카메라를 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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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알려진 사실들에서 알려지지 않은 결론을 추론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이미 알려진 것’과 ‘아직 도출해야 할 결론’을 이어줄 사실들이 빠져 있기에, 이 경우 그 ‘잃어버린 고리’를 둘러싸고 온갖 가설과 억측이 난무하게 된다. 과학은 물론이고, 정치나 사법, 그 밖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는 예외라기보다는 차라리 정상적 상황. 이 경우 우리는 동일한 사안에 대해 서로 비슷하게 개연적인, 그러나 가끔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복수의 가설들을 갖게 된다. 그중 어떤 것을 택해야 할까?
인색함의 원칙
이때 사람들은 흔히 ‘오캄의 면도날’(Occam’s razor)을 얘기한다. 즉 ‘이론을 구성할 때 불필요한 가설들은 되도록 제거하라’는 격률이다. 이 원칙은 스콜라 철학자 윌리엄 오캄(1285∼1347)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더 적은 수(의 가설)로 할 수 있는 것을 많은 수(의 가설)로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하지만 동일한 문장이 한
[진중권의 아이콘] 진실은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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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가 불러일으킨 사회적 파장과 달리 이 작품에 대한 비평적 접근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듯하다. 물론 이 작품에 대한 비평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그 대부분이 <도가니>가 한국사회에 불러일으킨 파장에 방점을 두면서 작품의 성격을 환원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현상과 무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는 영화의 몇몇 특징이 침묵의 영역에 가라앉아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나는 <도가니>가 일으킨 사회적 영향으로 환원하지 않고, 이 작품을 보며 느꼈던 영화의 몇몇 특징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었다.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
최근 한국영화의 경향 중 하나는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가는 인물들의 처참함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들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파토스는 인물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순간이 아닌 몰락과 죽음의 길 위에서 허망한 파국을 맞이하는 순간에 발생하곤 했다. <도가니>는 이들 영
[전영객잔] 너무 뜨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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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됐구나, 이게 <완득이>를 보면서 첫 번째 느낀 점이다. 주인공 도완득(유아인)의 엄마는 필리핀인이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엄마가 필리핀인이었던 영화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한국인 아빠와 베트남인 엄마 사이에 태어난 라이따이한하고는 다른 문제다. 가난해서 한국에 시집 온 동남아 여성이 엄마로 등장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지표다. 결혼을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날아갔던 노총각(<나의 결혼원정기>) 이야기 훨씬 전에 이미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 신부들이 있었고 이들이 이젠 청소년기를 맞은 자녀를 둘 나이가 된 것이다. 최근 몇년 동안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는 한국영화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의형제> <반두비> <방가? 방가!> 같은 영화들). 동료로서, 친구로서,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적어도 영화에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엄마는 생소하다.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이 그렇다. <완득이>는
[영화읽기] 안전하다, 그래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