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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안나는 졸업 20주년 동창회에 참석하여 옛 친구들과 재회한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주로 덕담을 나누지만 “늙었네” “나도 못 알아 봤어” 같은 직설적인 대화도 오고 간다. 그럭저럭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안나의 발언으로 서늘하다 못해 냉랭해진다. 한 마디씩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안나는 과거의 상처를 토로하며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했던 친구들을 공격한다. 지금은 배우로 성공했지만 학창 시절 안나는 존재감 없는 이상한 아이로 따돌림 당했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연설(speech)’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안나의 발언과 이로 인해 벌어지는 소동을 그리고 있다. 두 번째는 ‘모임(meeting)’인데 친구들과의 인터뷰와 동창회를 기획하는 과정을 담는다. 결국 <동창회>라는 영화는 동창회 풍경을 다룬 극과 동창들 사이의 위계를 확인하는 페이크 다큐로 구성된 영화다. 안나의 피해의식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CINE CHOICE] <동창회> The Reu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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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한국영화감독조합 사단법인 조합장으로 만났던 이준익 감독은 복귀작이자 아동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소원>에 대해 말을 아끼며 “뚜벅뚜벅 걸어서 마지막 장면까지 가봐야겠다”고 전했다. 그 길이 어떤 모양일지,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한치 앞을 모르겠으니 직접 가본 뒤에 이야기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 같았다. 그의 전공분야인 질펀한 시대극도, 소재만 보고 예상할 수 있는 스릴러나 법정드라마도 아닐 것이라는 귀띔만 했다. 그리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10월 초, 그가 따뜻한 공기를 한껏 머금은 영화 <소원>을 들고 돌아왔다. 그를 몇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이라면, 상처입은 소녀의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에 집중한 이 영화의 온기가 이준익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쉽게 짐작할 것이다. 그를 만나러 길을 나선 월요일 오후, 주말 동안 흐렸다가 갠 날씨도 더없이 푸근했다.
-일
[이준익] 꿈의 공장에서 빚어낸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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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자 자끄는 런던에서 새로운 삶을 출발하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일 거라 믿는 위대한 요리사 빅터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배우며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레스토랑 주방에서 그는 크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스텔라라는 여자를 만난다. 스텔라는 과거에 겪은 어떤 상처 때문에 외로움과 폭식증을 겪고 있다. 런던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자끄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스텔라, 두 사람은 금방 가까워진다. 런던이라는 대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준다.
<딜리셔스>는 로맨스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두 남녀의 성장영화에 더 가깝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보다 상대방을 통한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딜리셔스>가 그리는 사랑이 ‘판타지’가 아닌 ‘현실적인 문제’로 느껴진다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문제를 함께 극복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노력은 어떤 판
[CINE CHOICE] <딜리셔스> Delic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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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 한국 | 1972년 | 90분 | 한국영화회고전
OCT08 시네마테크 13:00
<삼국대협>은 협객물과 변종 웨스턴, 암흑가 장르를 두루 섭렵했던 장르 장인 임권택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영화다. 임진왜란 때 구로다 시게미스에게 빼앗긴 보검을 되찾으려는 일지매, 구로다와 은원(恩怨)이 깊은 명나라의 외팔이 마천, 역시 구로다에게 아내와 두 눈을 빼앗긴 맹인 검객이 한 배를 탄다. 서로가 구로다와 맺은 악연을 모르고 티격태격하던 이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의기투합해 구로다와의 결전을 치른다. 조선, 명, 일본의 3국 협객이 절대 악의 근원인 공공의 적에 복수한다는 전형적인 복수극이다. 검술 액션에 코믹 터치가 가미된 <삼국대협>에서 주목할 것은 공간을 통한 액션의 연출이다. 초기작부터 한결 같이 유지되고 있는 깊은 심도의 화면, 문과 기둥, 구조물을 활용한 걸고 찍기가 완성형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적 액션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
[CINE CHOICE] <삼국대협> Seize the Precious S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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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첸 | 싱가포르 | 2013년 | 99분 | 아시아영화의 창
OCT08 M해운대1 10:00 OCT08 M해운대2 10:00 OCT10 롯데10 10:00
맞벌이로 바쁜 한 부부가 필리핀에서 온 테리를 가정부로 맞는다. 테리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말썽꾸러기 아들의 고약한 심술로 인해 한동안 힘든 시간들을 보낸다. 가족들은 몇 가지 사건들을 겪으며 마음씨 착한 테리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지만 이번에는 이들에게 경제적 위기가 닥치고 만다.
장편 데뷔작으로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싱가폴 출신의 젊은 감독 안소니 첸의 <일로 일로>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테리가 낯선 땅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세밀하게 묘사하며 평범했던 한 가족의 일상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다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지 차분히 보여준다.
이때 영화는 갈등의 전개를 위해 테리가 겪는 고난과 그녀의 눈물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나쁜
[CINE CHOICE] <일로 일로> Ilo 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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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마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19세 숙녀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데다가 못생기고, 말주변도 없는 그에게 밝은 미래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자그마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같은 고아원 출신인 친구 안냐가 임신을 해 거동이 불편한 까닭에 안냐를 보살펴야 하는 것도 나기마의 몫이다. 어느 날, 안냐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고, 안냐의 아기는 고아원으로 보내질 위기에 처한다. 나기마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된 안냐의 어머니를 찾아가 안냐의 아기를 대신 키워줄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안냐의 어머니는 딸을 버린 지 오래됐다는 이유로 나기마의 요청을 거절한다. 어쩔 수 없이 나기마는 안냐의 아기를 직접 키우기로 결심한다.
<나기마>는 나기마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영화다. 영화 속 나기마의 얼굴은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언제나 무표정이다. 그의 무표정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기마의 삶을 따라가는 것만
[CINE CHOICE] <나기마> Nag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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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장커 | 중국 | 2013년 | 129분 | 아시아영화의 창
OCT08 하늘연 13:00 OCT10 CGVS 17:00 OCT11 하늘연 10:00
중국 동시대의 거장 지아장커는 언제나 무협영화를 꿈꿔왔다. <스틸 라이프>를 만들었을 때에도 그는 무협영화로부터 구성을 빌려온 것이라고 했다. 청조를 배경으로 한 그의 오랜 무협 프로젝트 <재청조>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그 전에 우린 또 다른 지아장커식 무협영화 한 편을 만나게 됐다. 이 영화 <천주정>이다. 4명의 주요 인물, 광산의 노동자, 의문의 살인청부업자, 마사지숍의 접수원, 직업을 찾아 전전하는 젊은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광산의 노동자는 마을의 우두머리이자 회사의 사장에게게 민원을 넣었으나 멸시 당하자 홧김에 총을 들고 가 사람들을 쏴죽이고 만다. 그가 총을 쏘면 총에 맞은 사람들은 피를 철철 흘리고 허공을 가르며 저만치 뒹군다. 지아장커의 영화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CINE CHOICE] <천주정> 天注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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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와 기자의 연애가 깨진 사연을 알리기 위해서 기자회견이 예고되고, 검찰총장에게 혼외 자식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11살짜리 아이에게 유전자 검사에 응하라고 윽박지르는 대한민국에 진정한 의미의 사생활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사정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카트린 밀레의 책을 들고 나올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의 유명 미술잡지 편집장이 쓴 이 책은 저자 스스로의 성적인 경험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멀리는 사드 후작이 쓴 <소돔의 120일>에서부터,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폴린 레아주의 <O 이야기>, 그리고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에 이르기까지 사춘기 소년들을 잠 못 들게 한 수많은 ‘야한 책’들의 계보에서도 이 책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앞의 책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상상의 산물이라면 카트린 밀레는 자기 얘기를 썼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의 성기를 빠는 것을 좋
[금태섭의 서재에서 잠들다] 사생활을 대하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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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대중음악사를 기타리스트를 중심으로 다시 정립했다. 장고 라인하르트와 로버트 존슨 등 기타계의 레전드에서 시작해 티본 워커, 머디 워터스, 레스 폴, 비비 킹 등 초기 거장들과 지미 헨드릭스, 지미 페이지, 에릭 클랩턴, 에드워드 반 헤일런 등 70, 80년대 기타 영웅들을 거쳐, 조니 그린우드, 잭 화이트, 매튜 벨라미, 존 메이어 등 21세기 신성에 이르기까지 105명 기타리스트들의 삶과 음악을 통해 대중음악의 역사를 조명했다.
[도서] 105명의 기타리스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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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를 재구성해 만화로 펴냈다. 재구성이 필요했던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주는 9.11과 그 이후의 현실 인식에서 시작해, <미국 민중사>가 그랬듯 운디드니에서의 인디언 학살, 미국-에스파냐 전쟁 등 미국 역사를 알기 쉽게 풀어낸다. 참정권을 쟁취한 여성들, 정부가 은폐하려던 베트남전의 진실을 담은 기밀문서를 몰래 빼내와 언론에 공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도서] 쉽게 보는 미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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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를 따라 그린다”라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탄생한 워크북. 매리언 듀카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서 앤디 워홀까지, 열두명의 위대한 예술가들과 이들의 창작 기법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기법을 바탕으로 어떻게 그림 그리기를 배울 수 있는지 알려준다. 짧게 읽는 미술사인 동시에 그림 그리기 교재이기도 한 셈. 그림 그리기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책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하나의 스케치북이기도 하다.
[도서] 그림을 어떻게 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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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영화 마니아가 있다. 그들은 어떤 사람 눈에는 4차원이거나 별종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사람 눈에는 악당이거나 비정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호러영화를 좋아한다면, 멜로드라마나 사극, 혹은 뮤지컬을 좋아하는 것, 아니면 SF나 필름누아르, 혹은 갱스터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저급한 취향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그러나 호러영화야말로 장르영화가 가진 반복과 일탈의 즐거움을 만끽하기에 적합한 장르다. 그래서 호러영화는 열혈 마니아 장르가 되었다. 장르 규칙의 반복과 위반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서 환호하고 경탄하는 영화보기의 방식, 이것이 호러 마니아들이 향유하는 즐거움이다.
마니아만의 것이었던 호러영화를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정신분석학이 영화비평에 유입되면서부터고, 장르가 동시대 대중과 호흡하며 시대의 취향과 욕망,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을 읽어내는 데 적절한 것임을 보여주는 뚜렷한 지표로서 호러영화는 활용되어왔다. 호러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을 보여주는 거울이
[도서] 부들부들 골라 보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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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국내 영화산업의 기술적 도약을 꿈꾸어볼 수 있게 됐다. 오는 10월25일 개원을 앞둔 대전액션영상센터에서 말이다. 이효정 대전문화산업진흥원장이 “국내 영상산업의 첨단 클러스터”로 청사진을 그려 설계한 대전액션영상센터는 액션스쿨, 모션캡처 촬영 스튜디오, 수중촬영장, 액션연구실 등 액션연출에 필요한 각종 시설을 고루 갖췄다. 대전액션스쿨은 정두홍 무술감독이 총지휘로 나서고, 6개월 과정의 수강료는 무료이며, 모집은 10월16일까지다. “청운의 꿈을 품은 차기 액션배우들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며 이효정 원장은 사람 좋게 웃었다.
-사단법인 한국방송연기자협회의 이사장을 거쳐 2011년엔 대전문화산업진흥원장에 취임했다.
=연출을 전공해 배우로, 제작자로 34년의 삶을 꾸려왔다. 마음 한켠에선 늘 제작 시스템의 선진화를 꿈꿨다. 어떤 산업이 영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전근대적인 관행들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 업계에 있는 사람들이 현실인식을 정확히 하고, 우리가 가진 체력으로
[flash on] 액션배우 지망생들은 여기여기 모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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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 질렌홀이 연기한 <프리즈너스>의 로키 형사는 화를 참는 인물이다. 영화는 로키의 캐릭터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소년원 출신이라는 것과 목까지 올라온 커다란 문신을 통해 그리 평탄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오로지 제이크 질렌홀의 몫. 그는 그 여백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는 눈빛으로 채운다. 상대역인 휴 잭맨이 딸을 잃은 아버지 역을 맡아 시종일관 강렬한 분노를 발산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두 배우가 좁은 차 안에 앉아 거칠게 서로의 책임을 따져 묻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술에 취한 채 욕을 섞어가며 무섭게 소리를 지르는 휴 잭맨과 달리 제이크 질렌홀은 계속해서 화를 삼킨다. 사건의 피해자가 분노할 때 아직 범인을 잡지 못한 형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음주운전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던 상대와 마침내 한 공간에서 마주한 상황이니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연기를
[제이크 질렌홀] 감추어야 드러나는 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