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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서거했을 때, 빈에서 거행된 장례식장에는 무려 2만명에 달하는 조문객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기록자는 3만명에 달했다고 쓰고 있다. 대서양 맞은편의 신생독립국에서도 조문단이 건너왔다. 당대 최고 음악가의 장례식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유럽 전역에 걸쳐 황실의 영향력을 드리우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가에 대한 외교적 예우의 측면도 있었다. 프란츠 스토버의 기록화를 보면, 1827년 3월29일 오후 4시경, 빈의 슈바르츠 슈파니어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 때 훔멜, 그릴파르처, 체르니, 슈베르트 같은 당대의 예술가들이 만기를 들거나 운구를 하였고, 드넓은 광장을 수많은 조문객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그때 관 속의 베토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당대 최고의 작곡가, 국민 작곡가, 원로 예술가, 사회 저명인사 등등의 말들이 지시하는 이미지들 그러니까 대가다운 풍모, 두루두루 존경받는 원숙한 명망가로 드러누워 있을까, 아니면 관 뚜껑을 발작적으로 두드리면서
죽는 날까지 타협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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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세살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 소프는 타락한 천사라고 불리곤 했다. 거대한 성기를 드러낸 흑인 남자들, 음부처럼 피어난 꽃잎, 불경한 사도마조히즘의 관계. 천사의 곱슬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청년은 그런 사진들을 찍으며 스스로 악마에 가깝다고 믿었고, 다른 이들도 그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패티 스미스, 스물한살에 뉴욕 길바닥에서 그를 만나 한때 연인이자 평생 친구로 남은 그녀는 달랐다. 그를 위한 추모곡에서 그녀는 노래했다. “작은 에메랄드 빛 영혼/작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 작은 에메랄드 빛 새/ 작별 인사를 해야만 할까.”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갈 힘을 얻을 때까지 서로 떠나지 않기로 맹세했던 어린 영혼들. 그 하나를 먼저 보내고 20년이 지나 스미스는 <저스트 키즈>를 썼다. 그 시절 스미스는 뮤지션이 아니었고 메이플소프는 사진작가가 아니었다. 서점에서 일하며 시를 쓰던 스미스 곁에서 메이플소프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과 소품을 모아 콜라
당신이 그 수줍은 포르노그래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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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 없는 문장은 길을 잃는다. 어딘가 응시하고 있지만 목적지가 어디인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문장이 처한 위치가 어둠뿐인 암전 상태의 극장이어도 좋고 끝이 없이 빙빙 돌아가는 미로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에서 주어는 종종 생략된다. 책은 목차가 없으며 소제목 없는 몇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단락 사이의 여백이 주네와 자코메티가 함께 보낸 시간을 가늠케 할 뿐이다. 책 속의 문장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든 작품은 조각가이자 화가인 자코메티의 것이다. 여기 있는 문장이 기록하고 있는 인물은 ‘그’로 지칭되는 자코메티다. 그외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은 자코메티의 그림과 조각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모델들인 작가의 아내 아네트와 동생 디에고, 그리고 자코메티에 관한 글을 남긴 샤르트르 등이다.
눈을 감고 더듬어보는 조각상
이 책에서 ‘우리는’이라는 주어는 이렇게 처음
우리는 빛나는 어둠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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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뒤러의 모습은 자화상으로 기억될 것 같다. 미술사에서 자화상이라는 세부 장르를 개척한 뒤러답게, 그의 자화상은 여러 편 있지만, 특히 1500년에 발표한 세칭 ‘뮌헨판’(뮌헨 고미술관 소장) <자화상>이 가장 유명하다. 긴 머리, 정면을 쳐다보는 형형한 눈빛, 여기서 뿜어나오는 엄숙한 분위기는 28살 뒤러가 누구를 가슴에 품고 있는지 한눈에 알게 했다. 그것은 청년 예수로, 말하자면 뒤러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전야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삶을 혁신의 초상인 예수에게 투사했던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다시 태어나다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도상해석학(Iconology) 연구로 유명한 독일의 미술학자이다. 도상(Icon)의 의미에 대한 풍부한 이해, 더 나아가 도상의 역사적 관계를 읽는 도상해석학은 지금도 서양미술의 수수께끼를 푸는 비밀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짧게 말해, 도상학(Iconography)이 ‘무엇’에 대한 질문이라면, 도상해석학은 ‘왜’에 대한 탐구이다.
책을 덮고, 자화상을 그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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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은 넘쳐나지만 정작 예술을 제대로 접하긴 어려운 시대다. 쉽게 소비되고 쉽게 잊히는 사이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새삼스레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해보고자 ‘예술가들의 삶’을 다룬 책들을 살펴봤다. 미술, 음악, 사진, 문학, 건축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에게 영감과 아름다움을 전한 위대한 예술가들은 삶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예술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독일 르네상스 회화를 완성한 알브레히트 뒤러, 실존과 고뇌를 새겨 넣은 스위스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도발적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 악성 루드비히 반 베토벤,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 오노레드 발자크, 건축의 성자 안토니 가우디, 6인의 예술가들이 남긴, 그들의 작품 이상으로 아름다운 삶이 여기에 있다.
모두가 예술이 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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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4 <히말라야> <강남 블루스> <제보자> <명량>
2013 <끝까지 간다> <코알라>
2012 <서울유람> <내가 살인범이다> <동창생>
2011 <최종병기 활> <악인은 너무 많다>
“옛날 조명은 스위치를 켜면 ‘퐁’ 하는 소리가 난다. 그 순간 배우를 환하게 비추는데, 와~ 나는 조명 아닌 다른 일은 못할 것 같더라.” 조명이야기에 선량한 인상이 더욱 둥그스름해진다. 김경석 조명감독은 19살 때부터 MBC에서 드라마, 교양팀 조명 스탭으로 일을 시작해 지금껏 한길만 파왔다. 경력은 어느덧 20년 가까이 됐지만 감독 타이틀은 <최종병기 활> 때부터 달았다. 단편 작업을 함께한 박종철 촬영감독이 <최종병기 활>의 촬영팀이었기에 그에게 조명감독직을 제의해왔다. “김한민 감독님을 처음 뵌 날 밥을 먹자고 하셨는데 너무 떨려서 쭈뼛거리
[STAFF 37.5] 캐릭터에 맞는 콘트라스트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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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는 단단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일정한 패턴으로 변주되는 그 구조들은 공간, 주체, 재현에 관한 문제를 던진다. 이번 신작 <자유의 언덕>은 덧붙여 시간을 섞어놓았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연대기 순으로는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 모리(가세 료)는 과거에 결혼하려고 했던 권(서영화)을 찾기 위해 한국에 다시 왔다. 그때 권은 집을 떠나 요양을 가고 없다. 모리는 그녀에게 편지를 남겼고 몸 상태가 나아진 권은 이전에 일했던 학원에 가서 모리의 편지를 전해받는다. 권이 처음 편지를 펼쳐 읽다가 바닥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편지 순서는 뒤죽박죽 섞인다. 권은 그 상태로 편지를 읽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모리가 편지에 쓴 북촌에서의 행적들, 그것들이 뒤섞인 형태의 일상기록은 모리의 내레이션을 통해 그의 회상처럼 화면에서 재현된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연대기 순으로 펼쳐지지 않으므로 그에 대해 관객이 괘념치 않아도 된다는 것은
[신 전영객잔] 현실인가 꿈인가 환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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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뺑덕>은 <남극일기>(2005), <헨젤과 그레텔>(2007)을 만든 임필성 감독의 세번째 장편영화다. 그사이 옴니버스영화 <인류멸망보고서>(2012)가 개봉했다. 고전 <심청전>을 재해석한 <마담 뺑덕>은 연기 경력 20년 된 배우 정우성이 처음으로 전신 노출을 감행한 영화로 화제가 됐지만, 변신은 배우만 한 것이 아니다. “당대의 트렌드를 거스르는 작품”들을 만드는 바람에 흥행에서 썩 좋은 결과를 맛보지 못했던 임필성 감독이 이번엔 상업적 노선을 따르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임필성 감독의 비주류적 감성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 둘 사이의 긴장이 <마담 뺑덕>을 흥미롭게 만든다. 삼청동의 한 카페로 임필성 감독이 덕이와 학규와 청이를 불러냈다.
-키 큰 배우들과 함께 무대인사 다니느라 고생 많겠다.
=배우들과 함께 찍힌 사진이 인터넷에 뜨면 악성댓글이 300개씩 달린다. 대왕오징어라고. &
[임필성] 욕망에서 권태까지, 사랑이라 불리는 모든 감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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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미를 인터뷰하는 건 오래된 사전을 뒤적거리는 일과 비슷하다. 그녀는 한번에 ‘이것’이라고 단정지어 답하는 법이 없다. 처음 도전하는 스릴러 장르가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쉽지는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오고, 액션 연기가 육체적으로 버겁지 않았냐는 질문에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렵다’와 ‘쉽지 않다’ 사이에 놓일 수 있는 방대한 행간을 읽지 못하는 이는 그녀의 대답을 무성의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시만이라도 그녀를 직접 대면해본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그녀가 지금 자신의 진심을 온전히 전달하려 갖은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대충 기계적으로 답변을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텐데 단어 하나라도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쉽게 내뱉지 못하는 그녀는 검색어를 치면 답이 툭 튀어나오는 전자사전이 아니라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기며 앞뒤 아래위 단어까지 함께 읽게 되는 오래된 사전 같다. 익숙한 울림들 사이, 정유미라는 행간을
[정유미] 친근해서 더욱 특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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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뜻 늦은 출발을 질책하는 당신에게 변명하는 말
속뜻 당신의 출발을 격려하는 말
주석 한 시간째 소식 없는 중국집이다. 뱃속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성조가 붙은 중국어 같다. 위장과 십이지장과 소장이 민란 일보 직전이다. 참다못한 당신이 다시 전화해도 중국집은 요지부동이다. 그 이름처럼 만리장성이다. 그래도 중국집은 당신에게 복음 하나를 선포해준다. “방금 출발했어요.” 그것은 조만간 현관 벨이 울릴 거라는 암시. 사실은 삼십분 전에 전화했어도, 삼십분 후에 전화해도 똑같이 들었을 말.
인디언의 기우제는 반드시 효과를 발휘했다고 한다. 그것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마침내 배달원이 온다. 일하는 젊은이는 누구나 비슷하다. 소음기 뗀 오토바이를 탔고 머리에는 노란 물을 들였고 한손에 철가방을 들었다. 귀에는 이어폰, 허리엔 전대, 거기에는 당신에게 제공할 쿠폰도 있다. 서른 그릇에 탕수육, 쉰 그릇에 팔보채. 당신은 앞으로도 자장면 스
[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방금 출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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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광화문에는 쓰레기 냄새가 진동한다고 한다. 바로 일베충들이 풍기는 악취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정부에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와중에, 일베충들은 닭을 시켜먹는 등 온갖 쓰레기 같은 짓으로 그들을 욕보이고 있다. 온라인에서 자기들끼리 누가 더 쓰레기 같은지, 누가 더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지 배틀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진 않으니까. 하지만 일베충들이 온라인을 빠져나와 오프라인에서 악취를 풍겨대니 정상적인 사람들의 불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쓰레기들은 역시 쓰레기통에 모여 있을 때가 가장 쾌적하다. 고로 일베 사이트는 우리 사회를 쾌적하게 만드는 쓰레기통이며, 절대 없어져서는 안 될 사회의 안전장치다.
주인공보다 사랑스러운 쓰레기통 캐릭터
영화에도 쓰레기통이 있다. 영화에서는 모든 캐릭터와 상황들이 제각각의 논리와 이유를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데, 말이 쉽지 극을 짜다보면 앞뒤가 맞지 않거나 동기가 부족하거나 심지어 개연성이 떨어져 극
[곡사의 아수라장] 없앨 수 없다면 한곳에 모아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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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Annie
감독 윌 글럭 / 출연 제이미 폭스, 쿠벤자네 왈리스, 로즈 번, 바비 카나베일
비즈니스계의 거물이자 시장 후보 출마를 준비하는 벤자민 스택(제이미 폭스)은 심술궂은 양어머니 밑에서 고군분투하는 어른 소녀 애니(쿠벤자네 왈리스)를 데려오려고 한다. 1982년과 1999년에도 선보인 바 있는 고아 소녀 애니의 가족 상봉기 <애니>의 또 다른 버전. <프렌즈 위드 베네핏>을 연출한 윌 글럭이 메가폰을 잡았다. 12월19일 북미 개봉한다.
[WHAT'S UP] <애니> An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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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슬로우 비디오> 동체시력 능력자
[정훈이 만화] <슬로우 비디오> 동체시력 능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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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말할 때 중심이 되는 것은 남자의 욕망이다.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머니를 성적으로 욕망하는 아들의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그리고 신탁을 내린 존재들이 있다. 샐리 비커스는 아들의 욕망에 초점을 맞춘 프로이트의 신화 해석은 틀렸다고 판단했다. <세 길이 만나는 곳>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중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해당하는 부분을 인용하고, 프로이트의 말년을 설명한 뒤, 그 둘을 합친다. 프로이트는 누군가의 방문을 받는다. 프로이트는 그가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10년 넘게 훌쩍 건너뛰며 방문객은 자신이 행한 일을 그에게 들려준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결정지은 두번의 그 악명 높은 신탁이 어떻게 행해졌는지를 듣는다. 그렇게 다시 살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이야기이다. 또한 자신에 차, 알지 말아야 할 것까지 알고자 하고 어떤 진실이든 감당할 수 있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리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