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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신화의 다른 논점 ― 과학은 과학, 사랑은 사랑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넘긴 죄로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를 우리는 영웅적인 휴머니즘의 신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은 BC 5세기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중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 이후 생겨나 괴테와 마르크스 등을 거치면서 강화된 이미지일 뿐이다. 비극의 시대보다 200년 정도 앞선 서사시의 시대를 호메로스와 함께 대표하는 시인 헤시오도스가 그의 <신통기>에서 프로메테우스를 묘사하는 시선은 꽤 냉랭해서 후대의 그것과 비교된다. 그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신과 인간의 평화적 공존 무드를 망가뜨린 교활한 사기꾼에 불과한데, 그의 비신사적인 불 도둑질에 격분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끼고 도는 인간들에게도 벌을 내리기로 결정했으니, 그 벌이란 그전까지 남자들만 존재했던 인간 세계에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를 창조해 선물하는 것이었다. “즉 그녀로부터 인간에게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스페셜] 작별의 테크놀로지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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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은 장례 행렬 장면으로 시작한다. 모두 검은 상복을 입은 무리 가운데 앞줄에 선 중년 남자 오정식(안성기)이 문득 뒤돌아본다. 행렬의 끝에 붉은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보인다. 오정식이 상무로 재직 중인 회사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오정식이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여자 추은주(김규리)다. 이 영화는 오정식의 죽어가는 아내(김호정)에 대한 기록과 그런 아내를 간호하면서 젊은 여직원을 마음에 뒀던 오정식의 내면의 추이에 관한 묘사다. 원작소설도 비슷한 구성이었지만 원작에서 독백으로 묘사한 추은주에 대한 오 상무의 마음은 훨씬 건조하게 객관적으로 그려진다.
맹렬한 직설화법
이 영화에서 특이한 것은 때로 돌출하듯이 맹렬한 직설화법으로 오정식의 욕망을 그리는 장면들이다. 현재와 과거가 오가는 가운데, 영화 중반 오정식과 그의 아내가 별장에 가서 마치 의식을 치르듯이 섹스를 하는 장면이 좋은 예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참을 수 없이 비루한 느낌을 주는데 차마 연민이라도 할 수
[신 전영객잔] 인생은 치장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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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범프> Goosebumps
감독 롭 레터먼 / 출연 잭 블랙, 딜런 미넷, 오데야 루시
<걸리버 여행기> 이후 5년 만에 롭 레터먼 감독과 잭 블랙이 인기 만화 시리즈 <구스범프>의 영화판에서 다시 만났다. 뉴욕에서 작은 마을로 이사 온 잭(딜런 미넷)은 유명 호러 소설가 R. L. 스타인(잭 블랙)이 이웃인 걸 알게 된다. 스타인의 머릿속 악마들이 복화술사에 의해 풀려나고 잭과 스타인의 조카딸 한나(오데야 루시)가 그들과 맞서 싸운다. 10월16일 북미 개봉.
[WHAT'S UP] <구스범프> Goosebum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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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미 감독, 아니 이제는 작가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그녀는 자신의 단편애니메이션을 그림책으로 다시 엮어 출간하는 등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는 이례적인 행보를 걷고 있다. 심지어 지난 4월2일 폐막한 2015 볼로냐아동도서전에 <나의 작은 인형상자>를 출품해 무려 2회 연속으로 수상도 했다. 매체에 최적화된 방법을 누구보다 빨리 체득하고 기어이 만들어내는 신통방통한 예술가의 다음 행보는 또 어디일까 궁금해져 그녀의 작업실을 직접 찾았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실된 자신만의 이야기라면, 그것이 매체의 특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녀가 미처 그림으로 옮겨 그리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작가로 활동 중이다. 출판과 애니메이션 제작을 동시에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애니메이션을 어렵게 완성했는데 영화제에서만 상영되고 마는 현실이 아쉬웠다.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책의 형태로 보여주면 어떨까 생각
[trans × cross] 이야기의 원천은 바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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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동그랗게 뜬 ‘아가씨’가 서울역사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분장받는 공간이 좁아서, 전환도 할 겸 구경나왔어요.” 아직 준비가 덜 된 탓에 머리에는 굵은 집게핀을 꽂고 슬리퍼를 신은 김태리의 시선은 이미 촬영을 진행 중인 김민희에 머물러 있다. 오래된 역사의 고풍스러운 공간에서 지금 막 걸어나온 것 같은 우아한 옷차림의 김민희와, 자신의 눈빛이 방해가 될 새라 벽 너머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지켜보는 김태리를 보며 영화 속 그들의 조합을 짐작해본다. “좋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김민희) 언니를 처음 만났는데…. 너~ 무 예쁘고, 너~ 무 사랑스럽고, 정말 소녀 같아요, 언니는! 저에게도 전혀 거리감 없이 대해주셔서 만날 때마다 제가 ‘치근덕’거리고 있어요. (웃음)” <연애의 온도>의 김민희를 본 뒤 <뜨거운 것이 좋아>와 <화차>를 보며 그녀를 “파기” 시작했고, <아가씨>의 오디션 과정에서도 좋아하는 배우가 누구냐는 질문에 “김민
[김태리] 나라는 인간에 대한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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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열렸던 <아가씨>의 제작사 용필름 송년모임에서 김민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아가씨>에 막 캐스팅됐기 때문일까. 그는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박찬욱 감독의 곁을 지키며 그의 말을 경청했고, 술자리에 있었던 그 누구에게도 그들의 대화에 낄 틈을 주지 않았으며, 덕분에 시끌벅적한 술집에서 두 사람의 자리만 시간이 멈춘 듯했다. 김민희가 박찬욱 감독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게 됐다는 소식이 영화계 안팎에서 화제가 됐던 때다. “박찬욱 감독님의 신작이라는 사실이 출연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냐고? 내가 뭐라고…. (웃음) 그저 그의 작품에 출연하게 된 것만으로도 행운이자 감사한 일”이라는 게 김민희의 겸손한 출연 소감이다. 불과 4개월 전의 일인데 촬영을 두달 앞둔 지금, 김민희는 그때가 까마득하다. “그 이후로 (김)태리씨, 박 감독님과 많이 만났다. 그런데 배우, 스탭 첫 미팅이 있던 지난주 하정우 선배와 처음 만나 식사를 하니 촬영
[김민희] 원작과 다르게, 원작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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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지금껏 ‘하정우’는 존재하지 않던 카드였다. 그는 윤종빈 감독의 스토리를 전달하는 생생한 페르소나(<용서받지 못한 자>(2005),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 <군도: 민란의 시대>(2014))였고, 나홍진 감독의 징글징글한 장르(<추격자>(2008), <황해>(2010))를 구현해낸 아이콘이자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2012)이나 올여름 개봉할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 같은 대형 프로젝트에서 어마어마한 활동량을 선보인 동력이었다. <더 테러 라이브>(2013)로 신인감독 김병우의 지지자로 역할했던 그는, 최근 <허삼관>(2014)으로 자신의 연출작에 힘을 더하면서 ‘새로운’ 시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정우는 어느덧 한국 영화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세계로 자리매김했고, 그 명확함이 곧 스코어로
[하정우] 두 얼굴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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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은 사진 찍기와 보기를 좋아하지만 본인이 찍히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가 <씨네21> 표지에 최다 등장한 (전업)감독이 된 오늘의 현실은, 전적으로 체념의 소산이다. “사진작가 입장에서도 일이니까요.” 물론 마지노선은 있다. 십수년 전 유망주로 묶인 김지운 감독과 나란히 신문사에 불려가, 둘이서 먼 하늘 소실점을 가리키며 그윽이 시선을 던지는 포즈를 주문받은 적이 있는데, 지금이라면 정중히 사양할 요청이다. 박찬욱 감독의 사진 수난사라면 <씨네21>도 결백하진 않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 무렵, 효창공원에 청해 그네를 태우는가 하면 비둘기 떼를 그의 앞으로 몰아서 (오우삼 스타일로) 푸드덕 날렸던 표지가 있었다. 박찬욱 감독에게 매우 어색한 하루로 추억되는 이 표지는 공교롭게도 역대 최악의 오자(‘Cooming Soon!’)가 얹히면서 <씨네21>의 흑역사로 등재되기도 했다(찾아보지 마시라). 여하튼 산전수전 끝
[박찬욱]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감정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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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제작 모호필름, 용필름•배급 CJ엔터테인먼트)가 <씨네21> 1000호 커버로 첫 공개됐다. 알려진 대로 세라 워터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아가씨>는 1930년대 한국과 일본을 배경으로,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된 귀족 아가씨(김민희)와 그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하정우) 그리고 백작에게 고용돼 아가씨의 하녀로 일하게 된 소녀(김태리)를 다루는 이야기다. 박찬욱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만든 <스토커>(2013) 이후 다시 한국 영화계로 돌아와 준비하는 영화이며(물론 그 사이에 동생 박찬경 감독과 함께 만든 다큐멘터리 <고진감래>(2013)와 단편 <A Rose Reborn>이 있긴 하다) 하정우, 김민희, 김태리 등 이제껏 한번도 호흡을 맞추지 않은 배우들과의 첫 작업이다. 게다가 임승용 프로듀서, 정정훈 촬영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송종희 분장감독 등 박찬욱 감독의 오랜 동료가 오랜만
[박찬욱, 김민희, 김태리, 하정우] 아가씨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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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장수상회> 내 나이가 어때서
[정훈이 만화] <장수상회> 내 나이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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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줍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지 않았다. 불편했기 때문이다. 길을 다니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창피했다. 어색한 미소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누군가 그를 이렇게 부르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브라이언이다!”
묘한 일이었다. 그 이름이 들려오면 모든 게 달라졌다. 그것은 그에게 많은 걸 환기시키는 이름이었다. 그는 그렇게 불리는 걸 좋아했다.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브라이언을 연기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이 역할로 최악의 배우에 노미네이트되었던 기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브라이언 오코너를 사랑했다. 어쩌면 돔보다 더 말이다. 당장 닷지 차저와 나란히 질주하는 닛산 GT-R의 배기음이 들려올 것만 같다. 2013년 11월30일 토요일, 재능 있는 배우이자 훌륭한 레이서였던 폴 워커가 차에서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에게 <분노의 질주>는 그저 얄팍하고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시적으로 이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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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는 <수상록>의 한 대목에서 소크라테스의 일화를 인용한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고도 전혀 성숙해지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설명한다. 그는 여행에 자기 자신을 데려갔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다른 나’를 발견하고자 하는 여행자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끔 우리는 그 소망을 이룬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4285km에 달하는 PCT(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를 걸어서 여행한 셰릴 스트레이드의 동명의 논픽션을 바탕으로 영화화한 <와일드>에는 세상의 모든 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대목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는 차를 타고 가는 도중 나누는 모녀의 대화다. 책 <와일드>에서 인용하면, 셰릴은 엄마 바바라에게 이렇게 말한다.“내가 지금 스물한살이 되어 얼마나 더 똑똑해지고 교양 있어졌는지 보면 놀랍지 않아요? 엄마의 스물한살 때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책에는 엄마의 대답이 실리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당신에게 그 책이 진짜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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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술 에세이스트 나카노 교코가 인상파로 근대를 읽는 시도에 나섰다. 그림을 무섭게 읽는 것으로 유명한 나카노 교코는 인상파의 작품들을 유럽 사회의 변화와 연계해 설명한다. 근대 유럽 도시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시각은 어떠했는가, 그렇다면 같은 여자라도 부유층 여성과 부르주아 계급의 주부는 어떠했는가와 같은 주제가 명화와 함께 제시된다.
[도서] 인상파로 근대를 읽는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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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무질은 ‘죽은 사람이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라는 의미로 작가가 생을 마감한 후 출판되기 마련인 ‘유고’(遺稿)를, 자신이 손쓸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스스로 막고자 생전에 직접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에세이와 단편을 모은 <생전 유고>는 나치 독일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그는 7년 뒤 사망한다. 그리고 그의 진짜 유고는 미완성 상태로 그의 아내가 자비출간한 <특성 없는 남자>가 되었다.
[도서] 로베르토 무질이 생전에 출간한 유고(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