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고보니 1997년 9월13일 피카디리극장에서 <접속>을 보고 헤어지며, 몇년 후 다시 그 앞에서 만나기로 한 남자가 있었다. LA에 적을 둔 그 남자는, 연락처를 교환하는 대신 그런 영화 같은 만남을 제안했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 우린 참 ‘<비포 선라이즈>적’인 연애모드를 가동 중이었나 보다. 서울과 LA간에 펼쳐진 그 거리, 카톡도 페이스타임도 없던 90년대의 그 연애가 남긴 약속은 미련이었을까, 아님 어떤 기대였을까.
무수한 ‘단기연애’ 연인들에게 이렇게 기약 없는 운명론을 제시해준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는, 커플들이 그 애매한 약속을 까맣게 잊고 다음 연애로 돌입한 9년 후 느닷없이 만난다. 이 만남에서는 “혹시나 너랑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너를 주인공으로 소설까지 썼다”는 제시의 늦은 고백보다, 그가 강연에 온다는 정보를 한달 전에 알고 챙겨두었다가 그곳에 나타난 셀린느의 용기가 100배쯤 가상해 보
[이화정의 다른 나라에서] 기억 나? 한때 우리가…
-
‘아시아 단편영화의 허브’로 도약할 제33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가 4월22일부터 26일까지 부산 해운대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다. 올해 상영작은 총 40개국의 140편이다.
국제경쟁에 출품된 109개국 4,180편 중 29개국의 37편, 한국경쟁에 출품된 총 776편 중 18편이 본선 진출작으로 선정됐다. 89: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올라온 54편의 영화들은 소재면이나 형식면에서 고유한 가치를 지닌 차별적인 작품들로 세계 단편영화의 흐름과 한국 단편의 면면을 폭넓게 보여준다.
올해 본선 진출작을 살펴보면 국제경쟁의 경우 애니메이션 1편, 다큐멘터리 4편, 실험영화 5편이며 극영화가 27편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진출작 중 꾸준히 단편 영화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감독들의 작품이 주목된다. 국제경쟁 본선에 오른 <선생님>의 샤 모 감독은 제30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 대학교류전에서 <흑어>를 통해 관객과 만난 적이 있다. <사랑, 광기, 죽음에 관하여&g
서른셋, 부산국제단편영화제 4월22일부터 5일간 열린다
-
[정훈이 만화] <클로버필드 10번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정훈이 만화] <클로버필드 10번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
봄밤의 일렉트로니카
영화 팬들에게는 ‘<오블리비언>의 스코어를 만든 이’라는 소개가 더 빠를까? 프랑스 일렉트로닉팝밴드 M83이 5월24일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첫 내한공연을 갖는다. 이제 막 발표된 따끈따끈한 일곱 번째 앨범 《Junk》를 즐기며 찬찬히 콘서트를 기다리기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찾는 셈. 바다뱀자리의 은하에서 따온 M83이라는 이름처럼 포근한 계절의 밤하늘이 떠오르는 소리들 아래 몸을 흔들기에 더없이 좋은 밤이 될 것이다.
이중섭은 죽었다
서울미술관이 화가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이중섭은 죽었다展>을 열었다. 전시는 화가의 연대기를 역순으로 되짚는 구성이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화가의 묘에서 출발해 창작활동에 몰두했던 통영 시절을 거쳐 홀로 분투하며 개인전을 준비하던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시절까지로 이어진다. 구획된 공간들을 따라가다보면, 생전 쓸쓸하고 고독했던 화가의 초상과 마주하게 된다. 3월에 시작한 전시는 5월29일
[culture highway] 봄밤의 일렉트로니카
-
-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크로닉>의 데이비드(팀 로스)는 중병 말기 환자를 마지막까지 돌보는 간병인이다. 죽음 앞에 신체 기능이 쇠약해진 환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족보다 생판 남인 데이비드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헌신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 남자는 환자를 가상의 가족으로 여기고 과거 자신의 어떤 기억을 보상하려는 듯하다. 오랜만에 내면으로 수렴하는 연기를 보여주는 <크로닉>의 팀 로스는, 데이비드가 가진 이타적 면모와 병적 측면을 모두 과하지 않게 표현한다. 아무도 언성을 높이지 않는 이 고요한 영화에서 제일 동적인 대목은 데이비드의 러닝 장면이다. 처음에는 체력관리로 보였던 이 광경은 서너 차례 반복되면서, 마음의 응어리를 육체의 고역으로 전치(轉置)하려는 몸부림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03/25
후환이 있을 줄 알았다. <맨 오브 스틸>의 대량 파괴 시가전 말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크로스피트
-
추위와 감기, 진짜 상관이 있을까? 털을 깎으면 더 굵고 뻣뻣한 털이 난다는 게 사실일까? 우리는 왜 욕을 할까? 왜 우리는 간지럼을 탈까? <기발한 과학책>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쓰인 데다 그림도 많은 과학교양서다. 하지만 질문만큼은 성인 독자들 역시 품고 있던 것들이다. 과학을 다룬 인기 유튜브 채널 ‘AsapSCIENCE’를 만든 미첼 모피트와 그레그 브라운이 쓴 책이다. ‘입냄새의 과학’이라는 장을 잠시 설명하면, 입냄새의 원리와 그 해결방법을 논한다. “이것은 박테리아가 우리 장에서 음식물을 분해할 때 방출하는 것과 같은 물질입니다. 그 기체는 결국 방귀로 나오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고약한 입냄새를 풍길 때 실은 입으로 방귀를 뀌는 것과 마찬가지랍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커피(특히 단것을 함께 먹으면)는 박테리아의 증식을 돕는다. 그리고 결론은? 이를 닦을 때 혀도 같이 닦기, 치실 사용하기, 정기적으로 치과 찾기다. 욕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도서] 끝까지 읽게 되는 쉽고 재미있는 책 <기발한 과학책>
-
좋은 성적을 내고서, 훌륭한 기량을 가진 축구선수가 별안간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할 때가 있다. 감독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플레이 스타일을 선수에게 고집할 때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반대로 선수에게 맞는 전술을 구사하는 감독도 있다. 그 유명한 ‘크리스마스 트리’ 포메이션(4-3-2-1)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의 그런 성향 덕분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4명의 수비수, 3명의 미드필드, 2명의 공격형 미드필드, 1명의 스트라이커를 세운 모양이 크리스마스 트리와 똑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AC밀란 감독 부임 두 번째 시즌(2002~3) 개막을 앞두고 안첼로티는 히바우두, 후이 코스타, 세도르프, 피를로 등 세계 최고 미드필드 네명 중 한명도 벤치에 앉혀두고 싶지 않았다. “아름다운 축구를 하는 게 먼저”였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당시 세계 축구계에서 생소했던 이 포메이션은 시즌 내내 반짝거리며 AC밀란을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려놓았다. <카를로 안첼로티-카
[도서] 우승 청부사의 아름다운 축구
-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힌 여자 정연. 억울함을 호소해보지만 그녀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없다. 어느 날 밤 그녀는 같은 병실에 있는 심현이 다른 환자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인류멸망보고서>(2011),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 <감기>(2013), <좋은 친구들>(2014) 연출부, <오피스>(2014) 조연출 등 지난 4년간 꾸준히 영화현장에서 경험을 쌓아온 김태준 감독의 데뷔작이 될 <심증>의 시작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우수 크리에이터 발굴 지원사업’ 가운데 오퍼스픽쳐스와 진행한 ‘크리에이터의 한걸음’ 프로젝트에 선정된 <심증>의 시나리오는, 지난 2월 발표된 최종심에서는 제외됐지만 프로젝트에서 운영한 멘토링을 거쳐 괄목할 만한 진전을 자랑하며 선정작들 가운데 가장 먼저 영화화가 결정됐다. 올가을 촬영을 시작해 내년 초 개봉을 앞둔 <심증>의 김태준 감독을
[people] 여자 캐릭터들의 기운만으로 채운 긴장감
-
“인터뷰까지 하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최승연 감독은 무척 쑥스러워했다. 그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수색역>은 1999년 수색을 배경으로, 윤석(맹세창), 상우(공명), 원선(이태환), 호영(이진성), 네 친구의 사연을 그린 이야기다.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가 결정되면서 수색에 재개발 열풍이 불었고, 한때 절친했던 네 친구는 그로 인한 어떤 사건을 겪으며 우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엇갈린 우정이 새로운 소재는 아니지만, 최승연 감독이 빚어낸 인물들은 꽤 생생하다. 무엇보다 감독의 겸손한 태도와 달리 이 영화는 사건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힘이 세다. 3월31일 극장 개봉한 이 영화를 기억해야 할 이유다. 중앙대 연극영화과(04학번)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차례로 졸업한 뒤, 데뷔작 <수색역>을 만들어 관객 앞에 내놓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6여년. 개봉한 다음날, 최승연 감독을 만나 긴 시간 동안 진행된 제작 뒷이야기에 대해 들
[people] “외부의 시선으로 나를 되돌아보게 된 영화”
-
D-1.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전 투표 하셨다고요? 그럼 지금 바로 뒤로 가기 버튼을… 농담입니다. 총선을 하루 앞둔 지금 몇몇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들이 생각났습니다. 특정 후보의 선거운동을 한다거나 비방하려는 목적은 아닙니다. 꼭 보셨으면 하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절대 보지 않겠지만요.
1. <두 개의 문> - 김석기 경주시 후보에게 추천합니다
감독 김일란, 홍지유 출연 권영국, 김형태 제작연도 2011년
<두 개의 문>은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입니다. 당시 상황을 <그것이 알고 싶다> 식으로 재연해서 보여줍니다. 당시 경찰병력 투입을 지시했던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출신의 새누리당 경주시 후보 김석기 후보에게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함께 보면 좋을 영화로 <소수의견>(2013)도 추천합니다. 출연진 중 한 사람인 권영국 변호사는 용산 참사 희생자측 변호사입니다.
총선 D-1, 몇몇 후보들에게 추천하는 영화들
-
한때 충무로의 재능 있는 신인감독으로 주목받았던 이철하 감독은 안타깝게도 꽤 오랫동안 잊혀진 이름이었다. 문근영, 김주혁이 주연을 맡은 <사랑따윈 필요없어>(2006)와 <스토리 오브 와인>(2008), <폐가>(2010) 등을 연출했지만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앞날을 고민하던 그는 지난 2010년, 산티아고의 800km 순례길을 걷고 온 뒤 변했다. 한 여자가 백주에 아무도 모르게 납치되어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사건을 다룬 <날, 보러와요>는 그런 이철하 감독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첫 작품이다.
-시사회 전날 밤, 자비에 돌란의 <마미>를 다시 봤다고.
=잠이 안 와서. 영화를 보며 밤을 새웠다. 글쎄, 왜 <마미>를 다시 보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원래 액션영화, 블록버스터영화보다는 그런 느낌의 작품을 좋아한다. 친한 제작자는 제발 마이너한 느낌의 이야기, 휴머니즘 드라마 그만 좀
“다양한 포맷 통한 스토리텔링을 계속해가겠다”
-
해사한 얼굴의 네 청춘배우들을 보고, 밝고 쾌활한 영화일 거라 짐작하면 오산이다. <글로리데이>는 스무살을 제대로 즐겨보기도 전에 꺾여버리고 마는, 성장통의 순간들을 서늘하게 응시하는 영화다. 그건 20대에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구상한 최정열 감독이 30대에 비로소 <글로리데이>를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렸을 때에는 진실이라는 걸 굉장히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30대를 살아가면서 어느새 나도 진실에 대해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나도 내가 보았던 어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 이 영화가 첫 장편 데뷔작인 그는 30대인 자신의 모습, 그리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글로리데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속 친구들이 더 잔혹하게 무너져내려갈수록, 어른들이 더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짐작과 함께.
-<글로리데이&
“청춘영화는 영화산업 안에서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
-
<스틸 플라워>의 주인공 하담(정하담)은 영화 제목대로 삭막한 거리의 ‘강철 같은 꽃’(Steel flower)이다. 어떤 사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일을 구하고, 만만치 않아 보이는 무게의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살 집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따뜻한 손을 쉽사리 내주지 않는다. 그런 하담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라면 탭댄스를 추는 것이다. 전작 <들꽃>에 이어 두 번째로 함께 작업한 박석영 감독과 배우 정하담이 치열하게 고민해 빚어낸 덕분에 영화 속 하담은 당당하게 세상과 맞선다. 박석영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날것의 감정’이라고 얘기하던데 영화 속 하담의 행동과 감정은 매우 논리적”이라며 “그건 정하담이라는 배우가 하담의 감정을 정확하게 알고 연기를 한 덕분이고, 카메라가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를 보면 박석영 감독이 무슨 뜻으로 한 얘기인지 알게 될 것이다.
-전작 <들
하담씨의 얼굴이 내 영감 속의 얼굴이었다
-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 극장가를 무서운 기세로 점령하고, <주토피아>가 역주행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요즘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화의 습격 가운데서도 주목할 만한 한국영화는 존재하는 법이다. 지난 2015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박석영 감독의 <스틸 플라워>와 다양성영화 부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최정열 감독의 <글로리데이>, 흡입력 있는 스릴러영화로 돌아온 이철하 감독의 <날, 보러와요>가 그들이다. 작품의 특성과 스펙트럼은 천자만별이지만 비수기 시즌의 한국 극장가를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이 영화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세 작품의 감독과 배우들을 이 지면에 소개한다.
이 한국영화, 보러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