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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 해야 할까, 소녀라 해야 할까, 여자라 해야 할까, 어른이라 해야 할까. 조곤조곤 야무지게 대답을 뱉어내는 고아성을 보며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망설였다. 담담한 눈빛과 말투는 어른스러웠고, 사소한 말에도 윗니를 활짝 드러내며 웃는 표정은 영락없는 소녀였으며, 간간이 긴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짓과 다소곳한 자세는 여성스러웠고, 변함없이 동그랗고 귀여운 콧방울은 아이의 것이었다. 그 모두를 조금씩 가지고 있지만 그중 어느 하나에만 속하지 않는 어른아이. 차라리 이 애매한 단어가 그녀의 인상과 연기를 말하는 데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그 어른아이의 인상이 봉준호 감독에게도 특별히 소중했던 것일까. <괴물>에서 세주를 지켰던 현서처럼, <설국열차>의 요나도 자신 역시 보호받아야 할 소녀이면서 자기보다 어린 소년을 품에 안고 있다. 일본 대지진 참사를 기리기 위한 옴니버스영화 <3.11 센스 오브 홈 필름즈>에 실린 봉준호의 단편에서도 그
[고아성] 미래를 달리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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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를 취재하기 위해 서울 시내의 한 호텔 복도 앞에 모인 수많은 매체 기자들은 고수와의 대련을 앞둔 도전자처럼 보였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거대한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손에 들린 질문지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다. 문이 30분마다 열리는 까닭에 또각또각하는 구두 소리만 들릴 뿐 복도는 날카로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장소가 복도로 바뀌었다”는 스탭의 안내를 받고 복도 한쪽 모퉁이에 자리한 소파에 이르자 장쯔이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 흐트러짐 없는 자세, 고집이 느껴지는 무표정 등 그의 태도에선 30분마다 상대를 바꿔가며 대련한 데서 오는 피곤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위엄 가득한 ‘궁이’처럼.
전국 무술계를 제패한 ‘궁(宮)가’의 유일한 혈육. 인생의 봄에서 겨울로 훌쩍 뛰어넘는 시기의 엽문(양조위)과 무술로 교감한 여자. 아버지인 궁 대인(왕경상)이 자신의 후계자였던 제자 마삼(
[장쯔이] 완벽하고 강한 구(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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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룸에 들어선 양조위는 한숨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침부터 분단위로 배정된 인터뷰 루트에서 이제야 좀 벗어난다는 안도감으로 읽혔다. 한국에서 가지는 마지막 인터뷰, 그의 밝은 미소는 ‘이제 좀 편히 있어도 좋지 않을까’라고 무언의 동의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구석자리를 골라 앉은 그는 바짝 의자를 당겨 기자와의 거리를 좁히는데, 양조위의 눈빛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다. 몇 차례 양조위와 가진 인터뷰에서 절절히 깨달은 것 하나. 그는 눈빛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엽문을 말하기 전에, 그는 <비정성시><화양연화> <무간도>에서 보았던 깊은 슬픔이 모두 뒤엉켜 있는 눈빛을 내놓는다. 배우의 정수를 훔쳐보는 것 같아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이다.
<일대종사>에서 양조위는 영춘권을 전파한 실력자이자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엽문(1893∼1972)을 연기한다. 엽문은 1930년 일제침략기 혼란스러운 정국, 남방무술의 새
[양조위] 보이지 않는 적과의 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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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의 주요 공간 중 하나인 금루는 사람의 혼을 빼가는 곳이었다. 중국 광둥 지방 최초의 승강기가 설치되고, 아름다운 기생들이 모이고, 온갖 화려한 소품들로 장식된 화려한 요정이기 때문은 아니다. 강호의 영웅들이 드나들며 서로의 내공을 확인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일대종사>가 금루라면 이는 <2046>(2004) 이후 거의 10년 만에 한자리에서 만난 왕가위 감독, 양조위, 장쯔이 세 고수 덕분일 것이다. 영화에서 장쯔이는 스스로 옳다고 판단한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궁이 역을 맡아 일생일대의 연기를 펼쳐내고, 양조위는 묵묵히 무예의 길을 지키는 엽문을 연기해 서사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는다. 6월15일 왕가위 감독과 함께 내한한 양조위, 장쯔이를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라”는 극중 궁 대인의 대사처럼 <일대종사>를 되돌아보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다음 장부터 펼쳐진다.
[일대종사] 검무의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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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우 감독의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사장님이 이걸 재미있게 읽으셨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예순이 넘으셨지만 안목은 젊으세요.” “왜 자꾸 나이 얘기를 하고 그래. 내가 철딱서니가 없어서 얘한테 야단맞을 때도 많긴 한데.” “말에 뼈가 있는데요. (웃음)” 티격태격, 옥신각신.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부녀 지간처럼 지내온 이춘연 대표와 전려경 PD의 대화는 여느 때와 비슷했다. 씨네2000 창립이 꼭 20주년인 2013년, 그들의 작은 재난영화 <더 테러 라이브>가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결코 작지 않은 승리를 이어가고 있는 8월19일에도, 그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면 “과거는 히스토리, 미래는 미스터리, 현재는 선물(present)”이라는 이춘연 대표의 목소리에서 사뭇 밝은 기운을 감지할 수도 있었다. 간만에 수백만 관객이 건네온 선물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받아든 그들을 만나 테러 중계 작전의 뒷이야기와 제작자-PD-감독의 삼위일체 포메이션에 대
[이춘연, 전려경] 우린 사람 영화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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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효 감독과 함께 위안부 그림책 작가 권윤덕의 스토리를 쫓아온 시간만 4년. 그 시간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킨 것 같냐는 질문에 안보영 PD는 “잠깐 생각해봐야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망설였다. 그러고도 끝내 드라마틱한 변곡점들을 찍어 보여주기보다 “작가님이 12권의 더미본을 수정했듯 우리도 12편 이상의 편집본을 고치고 또 고쳤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그 지난한 과정 끝에 <그리고 싶은 것>의 개봉까지 성사시킨 그녀의 표정에는 호들갑스러운 데가 전혀 없었다. 개봉 당일인 8월15일 <그리고 싶은 것>이 종일 상영되고 있는 인디스페이스 앞에서 그녀를 만나 그녀가 권효 감독과 비로소 그려낸 것과 앞으로 그녀가 독립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서 그려내고 싶은 것에 대해 물었다.
-광복절 개봉은 애초 계획했던 건가.
=빤하지만 최적이라 판단했다. 365일 유효한 이슈라는 건 없으니까.
-올해도 아침부터 인터넷이 야스쿠니 참배 신사 문제로 시끄럽더라.
=올
[flash on] 호들갑 떨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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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가 어느덧 천만 관객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지금, 원작자인 장 마르크 로셰트(Jean Marc Rochette, 그림)와 뱅자맹 르그랑(Benjamin Legrand, 글)이 한국을 찾았다. 1970년대부터 자크 로브(글)와 알렉시스(그림)의 구상으로 시작된 <설국열차>는 1977년 알렉시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장 마르크 로셰트가 새로이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기나긴 작업 끝에 <설국열차>는 1984년 드디어 1권 <탈주자>가 세상에 공개됐고 1986년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크 로브마저 1990년 세상을 떠났고, 장 마르크 로셰트는 뱅자맹 르그랑과 함께 후속편을 구상하여 시리즈를 재개했다. 그렇게 2권 <선발대>와 3권 <횡단> 작업이 시작되어 지난 2000년 현재의 모습으로 완결됐다.
두 사람은 <설국열차> 외에도 <백색진혼곡>
[flash on] 영화의 긍정적인 결말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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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토는 가장 전문적인 배우이면서 또한 가장 정신 나간 사람이기도 하다. 분명 그 둘 중 하나일 텐데(웃음) 아무튼 그에게는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정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엘리시움> 홍보차 샬토 코플리와 함께 방한한 맷 데이먼은 그에 대해 “뭔가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이 그로 하여금 배우로서의 독창성을 지니게 한 것 같다”고 했다. <디스트릭트9>과 <A특공대>를 통해 단숨에 할리우드 메이저 스타로 발돋움했지만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는 것 같은 그의 존재는, 오랜 시간 함께한 동료의 입에서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오게 만든다. 그만큼 그가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는 어떤 계보로 쉽게 파악되지 않는 독특함이 있다. 미확인 비행물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엘리시움>의 샬토 코플리는 영화 속 맷 데이먼의 반대말이다. 오직 살기 위해 엘리시움으로 가려는 맥스(맷 데이먼)를 가로막는 주인공이 바로 크루거(샬토
[샬토 코플리] 미확인 돌발 생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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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ography
<군도: 민란의 시대>(2013), <감기>(2013), <베를린>(2012), <연가시>(2012), <하울링>(2011), <악마를 보았다>(2010), <황해>(2010), <박쥐>(2009),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해부학교실>(2007), <괴물>(2006) 등
<감기>가 보여주는 인간 살(殺)처분의 처참한 광경은 단연 압권이다. 구제역 파동 때 수백만 마리의 돼지를 구덩이로 몰아넣던 광경에 충격받은 김성수 감독은, 그것이 언젠가 인간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대재앙이라 여겼다.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종합운동장 안에서, 굴착기가 비닐로 포장된 사체들을 구덩이로 쏟아붓는 장면은 실로 끔찍하다. 감염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비닐을 다 구하지 못했기에 각기 다른 색깔의 비닐들로 무질서하게 보
[STAFF 37.5] 겸손한 사기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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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2013 영화 <투 마더스> <드리프트>
2012 영화 <베이트> <어 퓨 베스트 맨>
2011 영화 <위대한 비밀>
2010 영화 <이클립스> <로드 트레인>
2009 영화 <러브드 원스>
2008 영화 <뉴 캐슬>
2007 영화 <9월>
2006 영화 <안젤라스 디씨전> <2:37>
자비에르 사무엘에게 2013년 8월은 어떤 달로 기억될까. 한국에서는 8월 한달 동안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세편이나 개봉했다. <베이트>에서는 식인 상어들로부터 연인과 주변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적인 인물을, <투 마더스>에서는 자신의 어머니조차 감탄할 정도로 ‘신과 같은 아우라’를 지닌 멋진 사내를, <드리프트>에서는 서핑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 혈기왕성한 청년을 연기한 그는 각각의 영화에서 다양한 매력을 펼
[who are you] 자비에르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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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154년, 버려진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과 질병이 없는 선택받은 1%의 세상 엘리시움으로의 이주를 꿈꾼다. 황폐한 지구에 사는 맥스(맷 데이먼)는 어려서부터 엘리시움으로 가는 날만을 기다려왔다. <엘리시움>은 뜻하지 않게 최후의 시간 5일 동안, 맥스가 엘리시움으로 떠나야 하는 악전고투의 기록이다. 삭발에 문신, 그리고 각종 기계장치를 몸에 붙인 맥스의 모습은 맷 데이먼 영화인생에 있어 가장 큰 변화의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외양 변화를 통한 센세이션만 기대했다면 처음부터 <엘리시움>에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맷 데이먼이 <디스트릭트9>의 닐 블롬캠프와 만나고자 했던 이유는 결국 ‘순수’에 대한 갈망이었다.
<엘리시움>의 맷 데이먼 몸에는 뜨거운 노동자의 피가 흐른다. 과거 자동차 절도의 ‘달인’이었던 맥스는 마음을 고쳐먹고 드로이드(미래사회의 경찰로봇)를 만드는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그에게
[맷 데이먼] 그를 멈출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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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합리적”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깐깐하다”고도 한다. 다소 엇갈리는 평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선비나 학자 같은 스타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무언가에 꽂히면 죽어라 파고드는 성향 때문일 것이다. 삼성나이세스와 삼성영상사업단 영화팀 소속으로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총잡이>(1995), <돈을 갖고 튀어라>(1995), <정글스토리>(1996) 등의 제작을 담당한 이후, 한국영화아카데미 프로듀싱 전공 책임교수를 거쳐 2005년 마케팅전략기획실 실장으로 CJ엔터테인먼트에 합류한 뒤 지금까지 기획실장(2007~2009년), 콘텐츠연구소장(2009~2011년), CJ엔터테인먼트 국내사업 대표(2011~2012년)를 역임했던 CJ E&M 길종철 상무에 대한 이야기다. 2012년 콘텐츠 개발실로 자리를 옮겼던 그는 신인 감독을 발굴해 지원하고, 원천 콘텐츠를 확보하는 일을 맡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건강상의 이유로
[길종철] 비주류 장르를 활성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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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인권영화제는 경찰과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영화제다. 영화제를 주최하는 경찰청인권보호센터는 과거 인권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남영동 ‘대공분실’을 보수한 건물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공간으로 시민들을 초대하여 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갖는다면 그 자체로 의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센터장을 맡고 있는 이창무 총경을 만나 그가 품고있는 인권영화제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경찰인권영화제가 2회를 맞이했다. 어떤 취지로 시작한 행사인가.
=어떻게 하면 시민과 경찰이 함께 인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지 생각해왔다. 경찰 내부에서도 인권의식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결국 경찰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이 시대의 인권에 대해 시민들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또한 영화를 통해 경찰을 고발해달라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다.
-국가기관이 주최하는 최초의 영화제다.
=그동안 상영회 형식의
[flash on] 영화를 통한 경찰 고발,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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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사단의 지칠 줄 모르는 오른팔.” 오래전, <버라이어티>는 재키 펑(Jacky Pang) 프로듀서를 두고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중경삼림>(1994)부터 최근의 <일대종사>(2013)까지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모든 작품의 제작과 투자를 담당해왔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왕가위 감독은 프로듀서로서 재키 펑의 어떤 점을 높이 사기때문에 지금껏 그와 함께 작업해 온 것일까. 홍콩영화산업에 정통한 베를린영화제 아시아 프로그램 카운슬링 담당 노먼왕에게 메일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이런 내용의 답장을 보내왔다. “투자, 프로듀서는 물론이고 감독, 제작부, 프로덕션 슈퍼바이저, 심지어 헤어•메이크업까지 두루 거쳤던 경험 덕분인지 스탭들의 마음을 잘 안다. 그게 왕가위 감독, 스탭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다. 무엇보다 그는 너무나 열심히 일한다. 어떤 메일을 보내도 곧바로 답장한다.”
-<2046>(2004)에 이어 <일대종사>
[flash on] 우리 팀은 서커스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