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가운 바람에 슬픈 소식들이 실려온다. 어떤 우연은 지나치게 정교해서 누군가 써놓은 이야기 같다. 최불암과 패트릭 스튜어트, 한번도 같은 작품에 출연한 적 없는 두 배우가 하루 사이에 나란히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은 1959년 한국에서 연극 <햄릿>으로, 다른한 사람은 같은 해 영국 브리스톨의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고 1967년에는 나란히 텔레비전에 처음 얼굴을 비췄다. 사는 곳도 쓰는 말도 달랐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수사반장>의 박 반장과 <전원일기>의 김 회장, <스타트렉>의 피카드 함장과 <엑스맨>의 자비에 교수는 시절을 초월하는 캐릭터들이다. 이제 두 사람의 시대가 황혼 너머로 저물었지만 화면 속 반장은 여전히 범인을 쫓고, 함장은 여전히 다음 항로를 고민한다. 화면에 불이 들어올 때마다 거기엔 우리가 오래 믿고 기대어온 어른의 얼굴이 있다.
두 배우의 부고를 듣고 문득 두편의 영화가 뇌리를 스쳤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다시 만난 세계, 다시 만날 시간
-
재정위기는 프랑스에서 났는데 신이 난 것은 한국의 ‘경제’ 유튜버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프랑스 위기의 원인은 과도한 연금을 위시한 방만한 복지 지출과 느슨한 노동기율에 있다고 떠들어댄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공중파방송에서 레거시 매체 일간지에서 경제학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저마다 이런저런 숫자를 늘어놓으며 프랑스의 ‘복지병’을 질타하면서 그것을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 숫자들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때 연금 지출의 비중이 높고 노동 일수가 적은 것도 사실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를 들어 지금 위기의 원인으로 연결하는 것은 한마디로 황당한 일이다. 이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거의 반세기 동안 작동해온 기본적이고 구조적인 조건일 뿐, 지금 화급하게 터지고 있는 재정위기의 원인으로 갖다 붙이는 것은 인과 귀속이라는 과학적 설명의 기본조차 무시한 억설이다. 프랑스의 연금 지출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몫이 10%를 넘었던 것은 1980년대의 일이며, 지
[홍기빈의 클로징] 프랑스 위기가 연금 때문이라니
-
프랑수아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1973)은 니스의 촬영소에서 ‘파멜라를 소개합니다’라는 멜로드라마를 찍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감독 페랑(트뤼포 본인이 연기했다)은 영화 만드는 일을 서부로 가는 역마차 여행에 빗대며 처음엔 근사한 여행을 꿈꾸지만 얼마 못 가 목적지에 닿을 수나 있을지 걱정하게 된다고 토로한다. 같은 영화에서 페랑은 연인에게 버림받고 촬영을 그만두겠다는 배우 알퐁스를 붙잡고 이렇게도 말한다. 영화는 인생보다 조화로워 막히는 구간도 죽은 시간도 없이 밤기차처럼 앞으로 달려갈 뿐이라고. 나는 오랫동안 두 대사 사이의 낙차를 음미했다. 스크린 위의 영화에는 죽은 시간이 없다. 하지만 그 영화를 만드는 현장은 거의 죽은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략 10년 전 촬영 현장 실습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한국영화의 굵직한 폭발을 도맡아온 특수효과팀 데몰리션이 폭파 장면을 준비하던 날이었다. 대단한 광경을 목격하리라는 들뜬 기대는 금세 긴 기다림으로 바뀌었다. 현장의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영화 현장에 가서, 고양이를 기다리며
-
세상은 좋아지고 있을까, 나빠지고 있을까. 앞으로는 지금보다 좋아질까, 아니면 더 나빠질까. 앞 문장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진단이고 뒤 문장은 미래에 관련된 전망이다. 둘 다 기본적으로는 사실에 관련된 것이지만, 그 사실을 통해 창조하거나 투사하는 현실은 가치관과 당시의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낙관적이라거나 비관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회와 역사 수준으로 이시야를 넓히면 진보적 사관이 되기도 하고 보수적 사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수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관적인 것도 아니고, 진보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낙관적인 것도 아니다. 진보는 개선의 ‘의지’에 가깝기에 주로 미래를 향하는 반면, 보수는 되도록 좋은 것을 골라 가능한 한 덜 바꾸려는 ‘태도’로 기울기에 대체로 과거를 향한다. 굳이 말하자면 보수가 낙관의 눈으로 과거와 현재를 보면서 미래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할 때, 진보는 비관의 눈으로 과거와 현재를 다루면서 미래에 대한 낙관을 품으려 노력하는 셈이다
[정준희의 클로징] 어떻게 살까, 어떻게 살았을까
-
-
축제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시 영화를 보고 아이디어를 내고 일정을 잡는다. 이번주에는 무엇을 소개할지,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전할지 궁리하다 보니 어느새 한주가 지났다. 주간지의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생각해보면 <씨네21>이 주간지로 출발한 이유는 단순하다. 영화가 매주 개봉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화가 도착하면 그 소식을 전하고 관객과 만날 자리를 마련한다. 물론 영화잡지의 일은 정보를 전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를 이렇게 보면 어떨까, 이런 구석에도 눈길을 주면 어떨까, 미처 몰랐던 재미를 발견하고 익숙한 영화를 조금 다르게 만나는 방법을 제안하는 발견으로 이어져야 한다. 영화를 소개한다는 건 결국 영화와 관객 사이에 하나의 길, 새로운 길을 내는 일이다.
요즘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반가운 소식이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로 퉁치기엔 외곽에 자리 잡은 작품들도 있다. 한 장면을 붙들고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용기와 온기의 일
-
솔직히 조금 망설였다. 영화 주간지에서 넷플릭스 코리아 10주년 특별호를 만든다니. 10년 전만 해도 ‘넷플릭스 영화’라는 말은 묘한 이질감을 풍겼다. 영화는 영화고 드라마는 드라마였다. 무엇보다 영화는 극장에서 만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도 그 믿음을 버릴 생각은 없지만 믿음과 현실을 구분할 필요는 있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넷플릭스가 무엇을 바꾸었고, 어떻게 바뀌었는지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던가.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영화는 자신을 다시 정의해왔는데, 어쩌면 너무 가까이 있다는 핑계로 정작 중요한 질문을 건너뛰었던 건 아닐까 싶다.
2016년 한국에 첫발을 들인 지 10년, 돌이켜보니 넷플릭스는 당연하다고 믿었던 관습과 경계를 부숴왔다. 궤적은 변함없지만 지금 달라진 건 스노볼이 굴러가는 속도와 규모다. <킹덤>이 등장했을 땐 ‘영화적 완성도를 갖춘 시리즈’라는 표현이 홍보 문구로 어색하지 않았지만 이젠 오히려 그런 식의 구분이 무색하다. <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이야기가 도착하는 곳, 아로새겨진 사람들의 시간
-
경찰이 경찰에게 총구를 겨눈다면 그건 어떤 상황일까? 동료 모건 로이스턴에게 약 5초 동안 총구를 겨눈 경찰 도미닉 게이너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로이스턴이 게이너에게 <탑건: 매버릭>을 스포일러하려 했기 때문이다. 게이너는 방아쇠에 손을 대지도 않았으며 로이스턴을 위협할 의도가 없었다고 증언했지만 총구가 주는 공포는 의도와 무관할 것이다. 3년 전 호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스포일러가 단지 반전과 서스펜스의 해석을 침해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스포일러는 미지의 상태에 놓인 관객의 초기 상태를 훼손한다. 텍스트에 관한 첫 경험을 박탈당하는 일이 무의식적으로 총을 들게 할 만큼 두렵고 싫은 일이라는 것, 얼마간 이해가 될 것도 같다고 말한다면 나 또한 범죄자의 심리를 가지고 있는 걸까?
OTT 플랫폼으로 영화를 보는 환경과 SNS 생태계는 섬네일 한장만으로도 우리의 경험 세계를 손쉽게 물들인다. 초고속으로 온라인화되어가는 세계에서 ‘스포’ 당하지 않고 살기란 거
[전승민의 클로징] 스포일러 예절론에 반대하며
-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며칠째 데일리 잡지를 제작 중이다. 매일 새벽 2시까지 마감하면서 몸도 마음도 지쳐갈 무렵, 영화제에서 일하는 분과 짧게 밥을 먹었다. 서로 초췌해진 얼굴을 마주보며 방금 본 영화 이야기로 운을 띄웠다. 이건 재미있더라. 그건 좀 아쉽더라. 저건 꼭 봐야 한다. 한참을 떠들던 그분이 문득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영화 이야기만 하니 너무 좋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영화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정작 영화 이야기만 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영화제를 찾은 수많은 관객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객석에 앉아 영화를 즐기는 사람에게도 극장 밖으로 나가면 각자의 일과 사정과 무게가 기다리고 있다. 잠시 그것들을 내려놓고 영화 이야기만 해도 되는 시간. 어쩌면 영화제가 주는 가장 사치스러운 선물은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무렵이면 영화가 익는 소리가 들린다. 기억은 계절과 장소에도 쌓이나 보다. 20년 넘게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부산국제영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영화가 익어가는 동안
-
10월5일 또는 6일은 독립운동가 박상희의 80주기다. 아직도 낭설이 떠돈다. “공산당원이었다.”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소속이었다.” 가까운 동지들 몇몇은 공산당원이었고 선생도 일제의 공산당 관련 수사를 받았지만, 그의 공산당 활동을 증명하는 자료는 없다. 남로당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창당되었다. 선생은 해방 즈음 건국동맹 구성원이었다. 여운형 계열의 ‘비공산계 좌익’이었을 수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진보적 민족주의/사회민주주의/공산주의의 구분선이 흐릿하기도 했다. 선생의 운동 입문은 ‘구산구락부’였다. 청년운동과 형평운동을 북돋았고 좌우합작단체 신간회에 참여했다. 선생은 수리조합의 농민 착취에 맞서기도 했고, 언론인으로서는 경북보도협조망에 가담해 지역 운동을 지원했다. 목숨을 건 타도 투쟁은 아니었지만(구미에는 폭탄 의거를 벌인 인물들이 여럿 있었다), 실력양성론이나 애국계몽을 넘어선 변혁운동이면서, 당파성보다 풀뿌리를 중시했다.
한동안은 대구 10월 봉기 때 선생이 구미 지역
[김수민의 클로징] 가을의 전설
-
추석 연휴를 보내고 돌아왔더니 세상이 시끄럽다. 아니, 늘 시끄러웠는데 며칠 몰랐을 따름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3일간 휴대폰을 끄고 디지털 디톡스라는 걸 해봤다. 문제는 돌아온 뒤였다. 고작 사흘 떠나 있었는데 읽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누군가 분노하고 누군가는 반박한 말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말이 필요했던가. 말은 넘쳐나는데 듣는 사람은 없다. 귀를 막고 결론을 낸 뒤에 서로 악다구니를 쓰다 보니, 어느새 목적은 잊고 그저 상대를 상처 입힐 궁리만 하는 공격으로 넘쳐난다.
추석 극장가의 결과도 얼추 윤곽을 드러냈다. 기대에 못 미친 성적보다 심란한 건 영화를 둘러싼 험악한 반응들이다. 지난해부터 부쩍 실감한다. 영화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이 어쩌다 이토록 화를 내고 조롱하고 폄하하는 데 몰두하게 됐을까. 가령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을 둘러싼 호평과 혹평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버닝> 때 경험한 일에 비하면 이번엔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우리는 서로 다르기 위해 같은 영화를 본다
-
절대적 빈곤에 처한 사람들은 모두 거의 비슷한 삶의 체험을 하게 된다. 삶이 저주스럽고, 지겹고, 미래가 막막하고, 자신의 인간성이 근본에서 부정당하는 일상이 누적된다. 무거운 짐마차를 질질 끌면서 산길을 올라가는 늙은 노새가 된 느낌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런 “노새”들은 서로를 보면 금방 알아차린다. 그렇다고 바로 친해지거나 하나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래서 연대의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이렇게 함께 어깨동무가 된 노새들은 짐차에 올라앉은 마부나 객실에서 시가를 피우는 승객을 향해 “우리는 노새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보편적인 평등을 주장하기도 한다. 20세기 중반까지의 자본주의 역사에서는 익숙하게 발견되는 패턴이었다.
그런데 상대적 박탈감에서도 이런 논리가 작동할까. 이러한 박탈감의 체험은 자신의 실재 존재 조건에서 나온다기보다 사회적 기준과의 비교에서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보이지 않고 비참하고 허접해 보이는 “나”만 보인다. 나와 비슷한 처지, 나아가 나보
[홍기빈의 클로징] 상대적 박탈감에서도 연대와 평등이 나올 수 있을까
-
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적들을 위하여>의 GV를 진행했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에 걸쳐 있는 이 작품을 보고 처음에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정에서 극적인 연출을 덧붙인 영화라고 생각했다. 내한한 페데리코 루이스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감독은 연출 상황을 먼저 구상하되, 결과가 정해지지 않은 실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했다. 예를 들어, 영화 속 복싱 소년이 패배한 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다. 이때 감독은 소년에게 “눈물을 흘려달라”고 주문하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러운 소년에게 “울어도 괜찮다”라고 솔직하게 감정을 쏟아낼 상황을 마련했을 뿐이다. 그 눈물의 정체가 분함인지 두려움인지 해방감인지는 여전히 알 길이 없지만 확실한 건 저기 화면 너머 진실한 무언가가 터져 나온다는 실감이다.
원하는 감정을 요구하는 것과 어떤 감정이 도착할 자리를 열어두는 건 전혀 다른 태도다. 페데리코 루이스 감독은 이를 ‘연결’이라고 표현했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우리는 영화로 연결되어 있다
-
나와 다른 의견을 갖는 사람들과 나는 공존할 수 있을까? 민주사회 속을 살아가는, 아니 그냥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의견을 가진 동물’로서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질문이다. 물론 정답은 알고 있다. 공존할 수 있고, 공존해야 하고, 공존하려 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아는 게 힘’인 것 같지 않은 순간이 바로 이때다. 알지만 그 앎이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제대로 알지 못해서인 걸까 아니면 애초에 앎이 힘일 수는 없는 걸까.
알아야 하는 게 그것만이 아니어서 그럴 테다. 공존해야 한다는 ‘당위’를 안다. 역사적으로 공존해왔고 지금도 어쨌든 공존하고 있으니 ‘현실’에 대해서도 안다. 당위와 현실을 모두 알고 있다면 다 아는 게 아닌가 싶지만, 본래의 질문에 하나 빠진 것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이 그것이다. 당위도 알고 현실도 알지만 그런 당위와 현실을 ‘나’에게 묶어주는 해법과 방법론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다. ‘어떻게 하면’ 나와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정준희의 클로징] 따로 또 같이
-
베니스에서 날아온 소식에 잠시 8년 전으로 다녀왔다.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의 베니스국제영화제 기자회견장은 팬 사인회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질문보다 고백에 가까운 얼굴로 마이크 앞에 줄을 서는 외신기자들을 보다가 문득 2018년 칸에서 <버닝>을 취재하던 밤이 떠올랐다. 그날 상영이 끝난 극장 앞, 방금 본 것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의 흥분이 밤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영화제에선 영화와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벽이 낮아진다. 그래서였을까. 귀국 후 마주한 국내의 갈린 반응 앞에서 적잖이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 영화제에서 만장일치처럼 보였던 사랑이 대중 앞에선 호불호의 치열한 전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같은 영화는 어떻게 다르게 도착하는가. 장소가, 곁에 앉은 사람들이, 주변의 공기가 반응을 만드는 법이다.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한국에는 영화제가 왜 이렇게 많은가. 엄밀히 말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국제영화제의 규모와 규격을 갖춘 곳은 손에 꼽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강은 지류가 많을수록 멀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