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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희의 클로징] 어떻게 살까, 어떻게 살았을까

세상은 좋아지고 있을까, 나빠지고 있을까. 앞으로는 지금보다 좋아질까, 아니면 더 나빠질까. 앞 문장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진단이고 뒤 문장은 미래에 관련된 전망이다. 둘 다 기본적으로는 사실에 관련된 것이지만, 그 사실을 통해 창조하거나 투사하는 현실은 가치관과 당시의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낙관적이라거나 비관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회와 역사 수준으로 이시야를 넓히면 진보적 사관이 되기도 하고 보수적 사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수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관적인 것도 아니고, 진보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낙관적인 것도 아니다. 진보는 개선의 ‘의지’에 가깝기에 주로 미래를 향하는 반면, 보수는 되도록 좋은 것을 골라 가능한 한 덜 바꾸려는 ‘태도’로 기울기에 대체로 과거를 향한다. 굳이 말하자면 보수가 낙관의 눈으로 과거와 현재를 보면서 미래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할 때, 진보는 비관의 눈으로 과거와 현재를 다루면서 미래에 대한 낙관을 품으려 노력하는 셈이다.

나는 꽤 어렸을 적부터 현재를 보는 시선이 상당히 비관적이었다. 부조리한 것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고 그 덜 여문 머리로도 납득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조금 이상한 논리이기는 하지만, 미래를 낙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래가 현재보다 나아지리라는 희망 없이 현재의 부조리를 버텨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희망은 종종 기대 이상의 의지가 돼야 했고, 심지어 고집의 형태로까지 단단해져야 했다. 성장하면 할수록 미래가 현재로 바뀌게 마련인데, 그 현재는 비관적인 시선에 의해 껄끄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으니, 결국 그 껄끄러움이 미래를 향한 낙관을 손상시킬수 있었던 탓이다.

이게 신기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보는 눈은 꽤 따뜻했다. 고작해야 몇년 살지도 않았던 어린 나이에도 내게는 과거가 넘칠 만큼 많았고, 그걸 회상하는 마음이 늘 축축했다. 박목월 같은 목가적인 시인을 좋아했으며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이국적인 시골 풍경이 마음에 들어서 밀레 같은 화가에게 끌렸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나 <빨간 머리 앤> <허클베리핀의 모험> 등의 소설과 애니메이션이 유행했던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미국 드라마 <초원의 집>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늘 불만족스러웠던 현재, 낙관하고자 했으나 금세 비관적인 현재가 되어 내 앞에 떨어졌던 한때의 미래는, 그래도 조금의 시간만 흘려보내면 어느덧 따뜻하게 회상할 수 있는 과거가 되어주었다. 그런 경험이 쌓여, 비관적 현실을 견뎌내며, 억지로 쥐어짜지는 않아도 미래에 대한 낙관적 의지를 그럭저럭 재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내 어린 시절이나 성향이 마치 대단히 특별하고 독특한 것처럼 쓰게 됐는데, 알고 보면 많은 이들이 이렇거나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 실은 다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