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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하다는 건 어떤 거야?”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중 오정희(배종옥)의 수양딸 미란(한선화)은 정희가 버린 친딸 은아(고윤정)에게 묻는다.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던 두 사람은 자존감덩어리인 정희가 뱉은 한마디 말을 사이에 두고 교감한다. 자신의 친딸을 두고 ‘근사하다’고 평가하는 정희의 말은 미란, 은아, 정희 세 인물이 놓인 처지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띤다. 동시에 각자 마음속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핵심은 교차하는, 같은 결의 정서이기도 하다. 감정을 글로 전한다는 게 이렇다. 정확한 내용보다는 둘러싼 맥락이 중요하다. 상황이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좋겠다. 덕분에 우리는 (설사 착각일지라도) 미지의 상대와 이어지는 공감의 통로를 낼 수 있다.
근사할 일 하나 없는 주변을 둘러보며 새삼 생각에 잠긴다. 정말로, 근사하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가장 최근엔 칸영화제 수상 결과를 발표하는 박찬욱 감독의 재치 있는 한마디에 저절로 이 단어가 떠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근사한 영화(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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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 감독의 걸작 <블레이드 러너>는 사이버펑크의 고전으로 영화사뿐만 아니라 음악사에도 남을 작품이다. 그 음악 중에서도 특히 데커드가 레이첼과 처음으로 입을 맞추는 장면에 흐르던 사랑의 테마가 유명하다. 자신이 로봇이었고 모든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무너져버린 레이철에게 곧바로 사랑의 감정이 닥쳐오고, 혼란스러운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입맞춤을 피한다. 레이철과 데커드와 그 장면을 보는 관객들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어떤 악기, 어떤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음악을 맡은 반젤리스는 이 장면에 꼭 맞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현악기, 관악기와 같은 자연 악기의 소리를 억지로 따라하는 ‘찌질한 모조품’으로 천대받던 신시사이저는 그의 손에서 완전히 새로운, 그리고 사이버펑크의 세계와 너무나 잘 맞는 악기로 새로 태어났고, 곡 전체의 구성과 문법도 신시사이저의 소리에 맞게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 이제는 신시사이저가 음악의 중심과 전체를 이루는 새로운 음악, 새
[홍기빈의 클로징] AI 미술의 반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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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물체. 감독 나홍진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싶다. 살을 조금 보태자면, 그의 영화는 확인되지 않은 물체라기보다는 확인이 되어도 여전히 미지의 상태를 유지하는 에너지덩어리에 가깝다. 명확히 보여주지 않고 지연시킴으로써 관객의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정석의 ‘서스펜스’와는 비행 궤도가 다르다. 나홍진이 구성한 장면들은 존재감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기주장이 분명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분명히 해당 장면에서 무언가를 정확하게 본다. 그리고 이내 곤경에 처한다. 목격하긴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대상은 투명한데 해석이 불투명해지는 상태. 한마디로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다.
<호프>는 공개 전부터 이미 수많은 풍문이 돌았다. 나홍진 감독의 신작이 단일 영화로 한국영화 최고 수준에 이를 거란 소식이 들리자마자 기대가 하늘을 찔렀다. 단순히 규모가 큰 작품, 이른바 대작에 거는 기대와는 결이 조금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칸에 뜬 미확인 한국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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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OTT가 제시하는 방대한 영상 목록 앞에서 무엇을 고를지 주저하다가 시간만 낭비하거나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워낙 흔한 일이 되었고, 딱히 어려운 말도 아니어서 기가 막힌 용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게 된다. 이 풍요의 시대에, 누구나, 여기저기서 겪고 있는 결정 장애만을 의미할까? 뭔가 더 깊은 이유가 있고, 더 방대한 함의가 있을 것 같은데?
넷플릭스 증후군에 연계되어 있는 여러 현상이 있다. 주저함, 쓸데없는 시간 낭비, 선택한 것에 대한 집중력 저하와 불만족, 전체적인 효용과 만족감의 하락,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음. 이건 단지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생기는 현상인 것만 같지는 않다. 나는 원래 선택지가 많다고 해서 결정 장애를 겪는 성향도 아니다. 최적의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게다가 선택지가 많다면 개별 선택에 대해서 너무 고심하지 않아도 된다. 실패하면 다시 선택하면 되고 새로
[정준희의 클로징] 풍요의 시대라서만 생기는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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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영화제의 계절이다. 몸이 그렇게 길들여져버렸다. 물론 2월에도 베를린국제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가 있지만 직접 가본 적이 없는지라 글로만 접한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주관적인 생체시계를 기준으로, 5월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영화의 꽃이 핀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부터 칸영화제로 이어지는 시즌이 되면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아니면 살인적인 스케줄에 비명을 지르거나. 아무튼 날이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직접 영화제가 가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멀리서나마 글과 이야기로 전해 들으며 영화 소식에 파묻혀 지낸다.
일부러 발품 팔아 영화제까지 가는 이유가 뭘까. 나중에 개봉할 때 편하게 볼 수도 있지만 영화제에서 영화를 만나는 건 단순히 일찍 보는 것 이상의 체험을 제공한다. 사실 영화제 시즌의 영화 소식은 태반이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인지라 영화 바깥의 말들이 더 힘을 얻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의 축제 한가운데에 머물 때 (약간의 과장을 보태) 온 세상이 영화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영화제는 영화가 꾸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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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화제다. 화두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화제가 이미 타오르고 있는 불이라면 화두는 성냥이다. 담론 내에서 현재 활발히 이야기되고 있는 주제가 화제라면 화두는 그 이전 단계, 사유와 성찰을 촉발하는 물음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접어들었으므로 이제는 질문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몇몇 글을 보고 처음엔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그 ‘질문’이 인공지능을 다루기 위한 도구적인 조건문이라는 내용을 보고 갑갑해졌다. 원하는 결과를 빠르고 정확하게 도출하기 위해 던지는 물음은 까탈스러운 계약서의 세부 항목에 불과하다. 인공지능을 다루기 위해 질문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은 사유의 빛을 기꺼이 등진다.
지난 몇년간, 자기 소개문을 작성할 때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은 사랑과 질문”이라는 문장을 써왔다. 이 선물에는 인공지능을 잘 길들이는 능력도 포함될까? 질문은 ‘나’와 세상을 향해 던져야 하는 것이지 화면 안 알고리즘의 부품으로 구축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전승민의 클로징] 질문에 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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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씨네21> 입사 전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좋고 싫고, 또는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그 언어의 울타리 안에 발을 디디지도 못했다. 몇 가지 그럴듯한 핑계가 있지만, 돌이켜보니 가장 큰 이유는 보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게 홍상수 영화는, 늘 직접 보는 것보다 정교한 언어로 주석을 달아놓은 글들을 보며 읽는 쪽이 더 흥미로웠다.
홍상수 영화를 둘러싼 비평의 언어가 흥미로웠던 건 특별히 고결하거나 심도 있는 통찰 때문은 아니다. 홍상수 영화에 화답하는 글들은 (그 영화와 닮아서) 모두 어딘가 꼬여 있다. 아니면 헤매거나. 때때로 조롱과 혐오가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 보잘것없음이 불편하고 불쾌할지라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계속 흘끔거릴 수밖에 없도록 유혹한다. 거칠게 말해 먹물들의, 혹은 먹물이 되고 싶은 이들의 혐관(혐오 관계)이라고 해도 좋겠다. 2000년대 홍상수 영화는 확실히 지식인(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홍상수 영화’라는 덩어리, 불가항력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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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본 것’만이 영화다. 한번 보고 만 것은 영화가 아니다. 그건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목격하게 된 교통사고와 같은 것.”(장정일) 내게는 한번 보고 만 인생 영화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시의원 하비 밀크를 그린 <밀크>다. 2010년 기초의원 선거를 준비할 무렵 개봉했다. 2009년 말 나는 고향인 구미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울에 있어봤자 취업 전망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서울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 “내년에 진보진영 선거를 거들겠다”고 했다.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너 같은 놈이 해야 하는데.” 나는 정치 지망생이 아니었다. 당시 구미는 모두 2인선거구였기에 승산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사정과 배경이 나를 이끌었다. ‘어차피 기회는 이번뿐이다. 내 20대의 정치 활동을 결산하자. 져도 괜찮다. 이기면 4년만 조금 다르게 살자.’ 그런데 그 직후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구미에 3인선거구가 네 군데 생겼다. 지역 진보진영은 출마자 기근이었고, 그중 한 군데가
[김수민의 클로징] 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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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부분이 전체의 합보다 크다. 스토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도, 아니 희미해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대사들이 있다. 드라마 <미생>의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지금도 필요할 때 종종 꺼내 보는 조언은 ‘체력을 기르라’는 말이다.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길러라. (중략)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도 떨어지고, 그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성공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이 올바른 말이 뇌리에 박힌 건 현명한 통찰이 담긴 내용 때문만은 아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승부 따윈 상관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표현이 와닿아서 좋았다. 따끔한 일침을 듣고 새긴 지금도 여전히, 운동 안 하고 넘어갈 핑계를 찾는 쪽으로 몸이 기울어진다. 오늘도 어김없이, 승부 따윈 상관없는 지경에 방치된 몸뚱이를 끌고 허덕이다가 자기 전에 다짐한다. 내일은 꼭 운동 시작해야지.
<나의 아저씨> <나의 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그래봤자 영화, 그래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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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거대 데이터 기업 팔란티어가 22개 항목의 선언문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AI 무기화는 불가피하니 더 속도를 올려라” “서양 문명의 우월성을 지켜내야 한다” “징병제 부활이 살 길이다” “실리콘밸리는 이제 국방부의 일부이다” 등. 노골적이다 못해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많은 이들이 이를 “파시즘”이라고 몰아붙인다. 피터 틸과 알렉산더 카프와 같은 자칭 천재 기업가들의 본색이 드러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는 더욱 불편한 질문이 하나 있다. 만약 이러한 “기술 파시즘”이라는 것이 일부 인사들의 일탈적인 과대망상을 넘어서서 현대의 산업 자체에 내재한 역사적 경향이라면?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파시즘은 민족주의, 군국주의, 인종주의, 보수주의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이러한 산업문명에 본질적으로 장착된 필연적 “혁명”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사실 대의제민주주의도 자유시장경제도 18세기 계몽주의에서 시작된 것들이라서 19세기 이후의 산업문명과는 기묘
[홍기빈의 클로징] ‘팔란티어 선언’을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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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봤다. 이자연 기자가 무려 14번 관람한 끝에 이벤트로 서프라이즈 박스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이 일어 부랴부랴 극장을 찾았다. 영화 보는 일이 업이지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같은 영화를 두번 이상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거의 없다. 두 번째 볼 때부터는 진짜 ‘일’처럼 느껴지는 탓에 아무리 좋은 영화도 왠지 피로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마음이 같은 영화를 저렇게 여러 번 볼 수 있도록 이끄는 걸까.
요즘은 대체로 글을 통해 영화를 먼저 접하다 보니, 보지 않았음에도 이미 여러 번 봤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도 그중 하나였다. 이미 원작 소설까지 읽었을 뿐 아니라 장면 하나하나까지 구체적으로 스포일러를 당한 상태라 어쩐지 심드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극장에서 직접 확인한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확실히 달랐다. 아마도 온도 때문인 것 같다. 올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보고 또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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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트럼프란 인물이 대통령이 됐을 때부터 한마디로 미국은 우스꽝스러워졌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무시해도 좋을 만큼 약해졌다는 게 아니라 우스워졌다는 거다. 거의 모든 면에서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지만 그런 강함에 대한 경외라든가 공포를 품게 하지 않는다. 좋든 싫든, 존경하든 무서워하든, 어떻게든 신경을 쓰거나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송능한 감독의 1997년 영화 <넘버 3>의 송강호 배우가 맡았던 불사파 두목 조필을 떠올리면 된다. 조금 고쳐 말하자면, 그런 조필이 거대 조직의 두목이 되어 있다고, 거대 조직이 그런 조필을 두목으로 삼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처한 셈이라고 여기면 적절할 것 같다.
<넘버 3>의 조필에게는 힘이 있다. 딱히 반기를 든 것도 아닌 그저 자기 자존심을 조금 상하게 했을 뿐인 부하를 흠씬 두들겨패도 누구 하나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지배력 말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정준희의 클로징] 웃기고 자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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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를 켰다, 껐다. 이걸 잘해야 오래 간다. 슬픔엔 역치가 있는 법이라 주변이 온통 괴롭고 어려운 소식뿐이라도 내내 괴로워만 하면서 살 순 없다. 전쟁의 화마 속 매일 불의, 부당, 부조리한 뉴스로 넘쳐나지만 다들 묵묵히 오늘을 살아간다. 그 앞에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하게’ 따위의 말을 쉽게 붙이는 건 무례하고 둔감한 짓일 것이다. 슬픔이 자신을 완전 집어삼키기 전에 치열한 마음으로 스위치를 끄고, 일상을 버티고 있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버틴다’는 선택을 한 모든 이들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무너져가는 세상 또한 그렇게 모인 일상의 힘을 기둥 삼아 간신히 꼴을 유지한 채 버티는 중이다.
다들 스위치를 끄는 신호나 의식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최근 내가 택한 방식은 출퇴근길에 음악을 크게 듣는 거다. 너무 멀다고 투덜거렸지만 습관이 된 뒤엔 하루 2시간 남짓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랜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스위치를 켜고 끄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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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담벼락을 신나게 뛰어넘은 노란 개나리가 무색하다. 제주 4·3 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현재를 잠식하는 과거다. 귀향한 참전군인이 겪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의 대표적인 증상은 그들이 여전히 전쟁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고 착각하는 환상 속으로 호출되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시간의 흐름과 영원히 불화하기를 택한 과거라면, 역사적 참사를 잊지 말자고 외치는 구호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될까? ‘기억하자’는 네 글자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실천이고 그것은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자는 말인 동시에 참사에 관한 공동의 서사를 창안하여 함께 ‘기억’하자는 말이다. 그러니까 ‘기억’은 두 가지의 실천을 선행조건으로 삼는다. 정확한 사실의 발굴,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사회적 서사의 작성이다.
사회학자 제프리 C. 알렉산더는 사건의 발생 자체가 트라우마를 직접 촉발하는 것이 아니며 사건 전후를 둘러싼 맥락과 사실의 재구성, 사건에
[전승민의 클로징] 비극은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