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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비웃지 말아주시길. 지난 주말에 ‘영크크’라는 표현을 배웠다. ‘영크크’는 K팝 그룹 코르티스(CORTIS)가 지난봄에 발매한 곡 <YOUNGCREATORCREW>의 제목을 한글로 축약한 말로 최신 트렌드의 감각을 향유하는 젊은이를 말한다. 반대말은 ‘늙크크’ 또는 ‘올크크’(올드제너레이션)다. ‘영크크’의 외연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내가 이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할 순 없다. 나는 여전히 그 화용론과 문화의 맥락 밖에 있기 때문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각종 신조어 앞에서 당황해하며 소외감을 느끼는 나는 이제 더이상 ‘요즘 젊은이’가 아니다.
물론, 기성세대의 문화에 반발하며 ‘나’만의 개성을 주장하는 ‘영크크’들은 언제나 있었다. 서태지의 <시대유감>(1996), 젝스키스의 <학원별곡>(1997) 그리고 “처음 만나는 자유, 스무살의 011, TTL”(1999)까지(그렇다. 나의 ‘연식’은 이 정도다). 그런데 나는 왜 유독 2026
[전승민의 클로징] 시대유감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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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업계 바깥의 사람을 만날 때마다 “영화가 잘돼서 좋겠다”는 축하 인사를 받는다. 얼버무리면서도 기분이 묘하다. 왜 나한테 이러지 싶은 것도 있지만 호황을 한 꺼풀 벗긴 실상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수치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올해 상반기 극장 매출은 4할 넘게 뛰었고 연일 매진 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그 성적표의 대부분은 손에 꼽을 몇편이 쓸어 담은 것이다. 잔치의 소문은 무성한데 정작 상에 둘러앉은 이는 많지 않다.
<오디세이>를 둘러싼 풍경만 봐도 그렇다. 개봉 27일 만에 900만 관객을 넘어선 이 영화는 열명 중 한명이 아이맥스관에서 관람했다. 2만원짜리 표가 수십만원에 거래되는 촌극을 넘어 국내에선 제대로 볼 수 있는 극장이 없다는 이른바 ‘진짜 아이맥스’ 논쟁까지 불붙었다. 여기에 제도적인 문제도 불거진다. 연간 상영일의 5분의 1을 한국영화로 채워야 하는 스크린쿼터는 특별관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기에 관객이 미어터져도 특정 영화는 두달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발 디딜 틈 없는 극장과 사라지는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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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발표자의 모든 표현과 주장이 곧 주최자인 제 견해이거나 국민의힘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8월13일 열린 ‘5·18 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국회공개포럼’이 5·18 관련 발언으로 논란이 일자, 이튿날 국회의원 이진숙이 늘어놓은 변명이다. “5월 광주에서 있었던 그 소요 사태”(이영훈 새역사국민운동 공동대표), “전라도 빨갱이”(5·18 단체 관계자의 항의에 대한 청중 반응), “대한민국의 정통 주인은 이승만 그리고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맥락”, “주사파와 호남을 절묘하게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5·18”(주동식 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 주최인 이진숙은 자신이 깐 판에 쏟아진 망언들을 두고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고 중간중간 박수도 보냈다. 국민의힘은 이진숙을 징계하지 않겠다고 한다. “전두환이 광주에서 총을 쏜 건 아니다.” 이런 소리와 흡사하다.
가장 두드러진 망언자는 주동식이다. 1980년대 운동권 출신이자 광주 태생인 그는 2010년대에는 호남 차별에 대항하는 시민운동을
[김수민의 클로징] 화려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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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신세기 에반게리온>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다.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지금도 망설여지는데 메카닉 전투 신만큼은 에스카플로네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갑주형 로봇 가이멜레프의 검을 맞부딪칠 때의 무게감은 물론이고 검격의 각도와 장갑이 구겨지는 질감까지 일일이 손으로 그려낸, 가히 변태적인 작화는 지금 다시 봐도 경탄이 새어나온다. 와, 저걸 어떻게 그렸지? 돌이켜보면 그 시절엔 <아키라>처럼 80년대 버블 시대의 돈과 인력을 갈아넣어 만든 전설의 애니메이션들을 찾아보며 똑같은 감탄을 했던 기억이 있다. 경이의 순간은 그렇게 세대를 건너 대물림된다.
오늘날 동아시아 애니메이션 시장은 겉보기엔 유례없는 성장세다. 중국에선 <너자 2>가 비할리우드영화 최초로 단일 시장 흥행 10억달러를 돌파하며 자국 역대 1위에 올라 여러 기록을 갈아치웠다. 일본은 또 어떤가. 지난해 일본영화 흥행의 절반 이상이 애니메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꿈과 낭만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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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두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불평이 터져나오기도 한다. 자기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를 너무나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백인 보수주의자들은 “하얀 피부와 금발의 미녀” 헬레네가 어째서 흑인이냐며 불평을 터뜨린다. 일부 고전학자들은 호메로스의 원작에 깃든 여러 다양한 모습들이 제거되었다고 불만이 많다. 여하간, 3천년에 걸쳐 유럽인들에게 꿈과 용기와 상상력을 심어주었던 마음의 고향, 정신의 요람과 같은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왜 당신 멋대로 바꾸어 놓았느냐는 것이다.
이건 허구다. 3천년 어쩌고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로마제국 후기까지 내려오던 헬레니즘 전승은 중세 이후 완전히 끊어지고 그리스어를 읽을 수 있는 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 단테와 같이 박식한 인문주의자조차 호메로스를 읽은 바가 없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호메로스에 매료된 이들이 서서히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문주의자라는 소수의 집단
[홍기빈의 클로징] <오디세이아>가 서양 정신의 ‘요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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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룸>을 보고 극장을 나서며 처음 든 생각은 의외로 ‘고전적’이라는 것이었다. 유튜브가 낳은 공포라기에 각오했던 어지러운 화면은 없고, 단정한 프레임과 착실한 서사, 배우의 얼굴이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순서가 뒤바뀐 관객이다. 영화를 먼저 보고 그날 밤에야 원작인 유튜브 <백룸> 시리즈를 찾아봤다. 두 <백룸>은 다른 정도가 아니라 거의 다른 차원에 속한 결과물이다. 10대의 침실에서 시작된 케인 파슨스의 유튜브판은 낡은 VHS 테이프의 기록인 양 위장한 파운드 푸티지 그 자체다. 캐릭터도 서사도 없이 노란 방과 형광등 소음이라는 감각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모호한 단서의 해석은 댓글창과 위키의 몫으로 남겨둔 열린 텍스트. 반면 영화는 오리지널 각본 위에 추이텔 에지오포와 레나테 레인스베를 세우고 트라우마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통과하는, 처음과 끝이 닫힌 이야기였다.
굳이 구분해보자면 유튜브 영상은 프로덕션보다 포스트프로덕션에 더 비중을 두는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내일의 고전, 오늘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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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성인이 된 이후로 줄곧 ‘커리큘럼’을 짜는 인생을 살았다. 우리말로 하면 교과과정, 학습 프로그램(도 외래어이기는 하다마는) 정도로 옮길 수 있을 텐데,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일이니, 아뿔싸, 물경 30년이 훌쩍 넘었고, 앞으로도 족히 10년에서 20년은 그 일을 하게 될 듯하다. 당시 대학에는 ‘학회’라는 자발적 독서토론 모임이 활성화되어 있었고, 나는 일주일에 다섯개를 넘나드는 ‘세미나’에 참여하기도 했다. 시위 나가고 학생회 활동하느라 강의는 빠져도, 그 모임들만큼은 꼬박꼬박 참여했으니, 지금의 나를 만든 8할은 그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학년이 되면 누구나 한번쯤 그런 역할을 맡기는 했지만, 소규모 자발적인 모임을 넘어서서 전국적 규모에서 여러 대상에게 쓰일 커리큘럼을 짜고, 스스로 교재를 만드는 시도로까지 이어질 만큼 꽤 진지했고 꽤 깊었다.
당시에는 ‘커리’라는 줄임말을 흔히 사용했고, ‘교안’이라는 말도 섞어 썼
[정준희의 클로징] 소위 ‘러닝 크루’와 내 인생의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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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 에이미 파스칼은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새로 출발할 때마다 두 주연배우를 따로 불러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제발 사귀지는 말라고. 소용없었다. 토비 맥과이어와 커스틴 던스트도, 앤드루 가필드와 에마 스톤도, 그리고 톰 홀랜드와 젠데이아도 보기 좋게 그 당부를 어겼다. 3세대의 피터 파커가 하나같이 자신의 MJ와 사랑에 빠졌으니 저주라면 퍽 낭만적인 징크스다. 이 세 번째 커플은 약혼 소식에 이어 올여름 아예 극장가를 통째로 접수했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와 <오디세이>, 어느 상영관에 들어가도 이 연인을 마주친다. 번외로 연말엔 젠데이아가 출연할 <듄: 파트3>가 베일을 벗을 예정인데, <오디세이> <더 드라마> <듄: 파트3>까지 이어지는 젠데이아와 로버트 패틴슨의 동반 캐스팅 조합도 흥미롭다.
주말에 극장을 찾았다가 놀랐다. 발권기 앞에서 상영 시간을 고르는 가족들과 데이트 나온 연인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여름의 극장, 극장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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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롤링은 평등법(Equal Act 2010) 위반으로 고소당한 적 있다. 영국 최초의 트랜스젠더(MTF) 뉴스 앵커 인디아 윌러비를 남성이라고 지칭했기 때문이다. 2024년 3월, 롤링은 X(트위터)에 트랜스여성의 여성 탈의실 사용을 비판하는 글을 썼고 이에 대해 한 이용자가 멘션으로 윌러비의 영상을 그녀에게 보냈다. 이후 롤링은 윌러비가 여성이 아니며 단지 “여성에 대한 여성혐오적 남성 판타지를 코스프레하고 있”을 뿐이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지난 7월27일, 롤링은 자신이 여전히 같은 입장임을 강조하는 글을 올렸다: “여성은 의상이 아니다. […] 트랜스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롤링의 입장은 많은 팬들을 분노하게 했다. 일부 독자들은 쓰레기통에 처박힌 해리 포터 페이퍼백의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 했다.
불현듯, 오래전 ‘초 챙’이라는 캐릭터를 보며 느꼈던 복잡한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동아시아인에게 따라붙는 멸칭 ‘칭챙총’의 연상을 피하기
[전승민의 클로징] 구멍 난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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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나는 신도, 외계인도, 귀신도, 사후 세계도 믿는다. 무슨 영험하고 특별한 체험이 있었던 건 아니다. 실은 내가 믿는 건 딱 하나다.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세상에 무수히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니 모르는 것을 서둘러 ‘없음’의 서랍에 넣어버리는 대신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다. 믿음이란 증명이 아니라 결심이고, 지식이 아니라 태도다. 내가 모르는 자리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앞에서 기꺼이 겸손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오디세이>를 극장에서 영접한 후 그 믿음을 새삼 확인했다. 감독의 이름만으로 관객을 극장까지 불러 모으는 영향력, 그 고집을 기어이 감당해주는 할리우드 시스템, 극장 영화를 향한 존경과 집념. 그 교차점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결과물이, 3천년 묵은 이야기를 사상 최초로 전편 아이맥스 필름에 담았다. 이런 유일한 영화들을 좋아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극장의 위기라는 말이 인사말처럼 굳어진 시대에, 관객들은 3시간짜리 고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여전히, 명백한 마법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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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대표라는 정청래는 이재명과 김어준의 똘마니를 자처하고 있다.” 2025년 9월21일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집회에서 한 연설이다. 자신이 ‘윤석열과 전한길의 똘마니인 줄 몰라서 하는 ‘사돈 남 말’인가. 아니면 ‘너나 나나 넘버 스리’라는 자백 겸 자조인가. 그는 지방선거에서 지고도 사퇴하지 않는다. 큰 정치인이라면 스스로 물러난 뒤 지지자의 아쉬움과 미안함을 등에 업고 다시 돌아온다. 장동혁은 그럴 수 없는 처지다. 어떤 인사는 “배 째라는 건 건달이나 하는 짓”이라 비판했지만, 장동혁에게 어울리는 건 “하늘 건, 이를 달”(<넘버 3>)이 아니라 ‘땅 지, 못 박을 정’(地釘)이다. 장동혁의 반면교사는 김문수일 것이다. 극성 지지층에 영합해 대선 후보가 되었고 40% 넘는 득표율까지 올렸지만, 장동혁에게 패해 당대표가 되지 못하면서 정치 중심에서 밀려났다. 장동혁도 마찬가지다. 대표직에서 내려오는 즉시 지지층이 대체재를 찾을까 겁을 내고 있다.
장동혁이 넘버
[김수민의 클로징] 넘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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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이 한번은 온다. 그때 누군가는 천근의 몸과 만근의 마음을 짊어지고 기어이 자리로 돌아가 그날 맡은 일을 한다. 왜? 일이니까. 시시하고 맥없는 대답 같지만 이 짧은 문장 안에는 어른의 하루가 통째로 들어 있다. 어떤 일도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일은 누군가와 이어진 연결이고, 내가 서 있어야 할 위치이며, 끝내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그 세 가지 무게를 한 단어 안에 욱여넣다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는 말이 바로 ‘그냥’이다.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끝이 보이지 않아도 그냥 한다. 체념한 듯 들리는 이 말이 실은 어른이 세상을 버티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라는 걸 매일 깨닫는 요즘이다. 공교롭게도 올여름 극장에 나란히 도착한 두 남자, 지친 거미와 길 잃은 왕이 약속이나 한 듯 그 ‘그냥’의 얼굴을 하고 있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의 피터 파커는 모든 것을 잃은 채 돌아온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이후 4년, 사랑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어른은 그냥,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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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촉즉발이다. 모두가 화가 나 있다. 화풀이에 굶주린 사람들은 어떤 이슈가 터져도 순식간에 ‘모세의 기적’속 앞바다마냥 두편으로 쫙 갈라서고 상대를 잡아먹을 기세로 으르렁거린다. 단순한 의견의 대립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희들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외친다. ‘이렇게까지 싸울 일이냐’고 싸움을 말리려는 이들에게는 ‘양비론자여, 그대 이름은 시어머니보다 더 괘씸한 시누이로다’고 더 거친 공격이 들어온다. 여기서 한번 짚어볼 게 있다. 이러한 과열된 분쟁 구도의 상시화로 이익을 보는 이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그 대립 구도를 앞장서서 만드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핵분열의 원리를 생각해보자. 우주에 작동하는 네 가지 힘 중 하나인 ‘강력’(strong force)은 원자핵이 스스로를 견고하게 묶어두려는 힘이다. 핵을 이루는 양성자와 중성자 등의 소립자들은 서로간에 다른 무언가를 (옛날에는 ‘중간자’라고 불렀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강력한 결속을 이룬다. 그런데 외부
[홍기빈의 클로징] 모두 싸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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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 보셨어요? 어떻게 보셨어요?” 한주 내내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호프>이야기로 운을 뗐다.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식의 미지근한 대답은 거의 없었다. 좋았다 아니면 싫었다는 의견을 이렇게 자신 있게 내뱉게 만드는 한국영화가 최근 10년 내에 있었나 싶다. 오프라인에서는 그나마 취향과 평가의 차이를 구분하는 정도의 선은 지키면서 의견을 밝히는데, 온라인에서는 다른 차원으로 시끄럽다. 졸작을 좋아할 수 있고, 걸작도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취향을 식견의 문제로 연결하고 타인의 판단을 잘못된 것으로 매도할 때 문제는 다른 영역으로 접어든다. <호프>를 호평한 평론가의 ‘판단’이 온갖 오해와 억측의 근거가 되는 순간, 그 자리엔 논쟁과 담론 따윈 없다. 오직 혐오에 기반한 폭력과 배설이 있을 뿐이다.
미리 밝히자면 나는 <호프>를 긍정하지 않는 쪽이다. 이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나 장면의 부분적 성취, 롤러코스터 같은 오락적인 재미를 부정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빈 놀이터의 구덩이에 빠졌을 때 해야 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