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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영화의 운명을 결정짓는 건 당도하는 장소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검사>를 보았을 땐 솔직히 별반 기억에 남지 않았다. 물론 전체주의가 인간을 집어삼키는 보편적 메커니즘을 우화로 승화시킨 훌륭한 영화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정제된 형식이 주는 거리감에 밀려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얼마 전 개봉한 <두 검사>를 (타의에 의해) 극장에서 다시 봤을 때, 전혀 다른 무언가로 다가왔다. 느리지만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연출, 침묵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연기, 규칙을 따른 자가 파멸에 이르는 결말까지. 무엇보다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에 대한 경고가 귓가를 때렸다.
<두 검사>는 인내의 영화다. 느리고, 엄격하고, 카타르시스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말에 이르러 의도적으로 관객을 좌절시킨다. 모든 숏을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하여 프레임 자체를 감옥으로 만들고, 아카데미 비율의 좁은 화면과 탈색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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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잦은 수사 개시는 오랫동안 폐해를 불러왔다. 해법은 검찰의 수사 개입을 차단하는 걸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검찰 전통이 미약한 나라를 뺀 34개국 검찰에는 수사권이 있다. 엔론 사태(미국), 록히드 사건(일본), 디젤 게이트(독일), 사르코지 정치자금(프랑스) 등은 검찰이 수사했다. 권력이나 자본이 연루된 사건은 법률가가 수사하고 수사 당사자가 공소 유지까지 하는 게 낫다(한국 역대 특검이 다 그랬다). 물론 선진국에서 검찰의 수사 개시는 일상적이지 않지만, 적어도 ‘수사 지휘’는 검사의 주업이다. 골키퍼가 골문만 지키는 게 아니라 앞의 선수들을 지휘하듯, 검사에게 기소와 재판을 대비한 수사 점검은 필수적이다. (준)사법적 통제가 약하면 정치권력이 수사를 끌고 갈 위험도 커진다. 검찰의 여러 권한을 다 줄이거나 없앨 것이 아니라, 청산할 것과 집중할 것을 분별해야 한다. 2005년 법학자 A가 낸 논문이다. “우리 경찰 수사의 현실에서, 공소의 책임자이
[김수민의 클로징] 춤추는 대수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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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아니 표현이 다소 과했다. 거의 모른다. 1년에 1번. 잡지의 창간 기념을 맞아 크고 작은 개편을 한다. 코너를 바꾸고, 새로운 필자도 모시고, 디자인도 이래저래 다듬어본다. 매주 마감하는 주간지의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 짬짬이 틈을 내어 회의하고, 시안을 만들고, 다시 엎는 등 추가 노동력을 투입해서 진행 중이다. 하지만 사실은 딱히 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일이다. 물론 연속성을 알아봐주는 정기 구독자도 적지 않지만 매주 이슈와 필요에 따라 잡지를 보는 독자 입장에서는 한권 한권이 독립적이다. 게다가 연중 소폭의 개편과 변화를 주면서 다듬어나가는 편이라 내용의 조정은 충분히 갈음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개편은 일종의 가욋일, 속된 말로 고생을 사서 하는 작업인 셈이다. 그럼에도, 굳이 때맞춰 개편을 거르지 않는 건 일종의 의식에 가깝다. 현재 우리의 위치와 형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점검이라고 해도 좋겠다.
편집장을 맡고 세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세 번째 개편을 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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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본인이 휴전 협상을 언급하면서 이란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트럼프 꼴좋다, 미국 꼴좋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워낙 전 지구적으로 비호감이 된 트럼프이니 이런 반응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이 사태를 트럼프의 황당한 변덕으로 시작된 전쟁이 한심한 실패로 끝났다고 바라보는 “꼴 좋다” 서사는 중요한 몇 가지 지점들을 놓치고 있다.
첫째, 미국의 이란 공격은 트럼프 개인이 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전쟁 계획 자체는 이미 수십년 전부터 존재했고, 미국의 오바마 시절부터 준비되어 바이든 시절까지 군사적 능력 구축으로 준비되어왔던 것이다. 이란의 포르도 핵 시설 설계도 조사는 2009년에 시작되었고 바이든 정부 말기인 2024년 중반 미국과 이스라엘은 주요 시설 파괴를 위한 미사일 공격의 실전 훈련도 치른 바 있다. 물론 전쟁 계획과 준비는 여러 시나리오의 준비에 불과하며 그것을 트럼프처럼 실행으로 옮긴 것은 다른
[홍기빈의 클로징] “꼴좋다”가 놓치고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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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지난 3월15일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즌바움이 쓴 글의 제목에서 어떤 결기가 감지된다. 83살의 노논객은 “몇년간 직장을 잃은 평론가 수를 보면 죽음에 접어든 직업임을 알 수 있다”면서도 “30살 이하인 사람에게 물어보면 황금기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며 환경 변화에 따른 세대간 인식 차를 날카롭게 통찰했다. <시카고 리더>의 칼럼으로 기획된 이 글은 모종의 이유로 지면에서 반려된 뒤 본인의 블로그에 올라갔는데, 덕분에 더 손쉽고 편하게 읽어볼 수 있어 한명의 독자로선 좋았지만 또 다른 지면의 데스크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선 생각이 많아졌다. 오늘날 정형화된 지면들은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반대로 새롭게 등장한 플랫폼들은 폭넓은 사유와 토론의 장을 제대로 제공하고 있는가.
거창하게 ‘영화비평에 대한 정의’까지 살필 것도 없다. 지금 당장 궁금한 건 하나다. 영화는 여전히 ‘감상과 비평’이라는 리액션을 필요로 하는가. 독자가 사라지고 필자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공포와 환희 사이 잡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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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무언가를 읽고 쓰며 살아왔다. 물론 듣고 말하며 살기도 했지만, 나라는 개인의 직업 영역에서 중요했던 건 확실히 읽고 쓰기쪽이다. 이걸 사회적 차원의 의사소통 네트워크 관점에서 풀자면, 어떤 저자가 쓴 것을, 논문이나 책 혹은 보고서나 기사 등의 형태로 읽고, 내 생각을 보태어 (또는 시초의 어떤 생각을 해결하기 위해 읽은 뒤 추가적으로 사유하여) 무언가를 쓰는 행위가 연속되는 셈이다.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읽어주고 이왕이면 그에 대해 무언가를 써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렇게 쓰고-읽고-쓰기의 연쇄를 통해 내가 참여하는 사회의 의사소통이 어떤 식으로든 지속된다. 그런 사회를 가리켜 ‘학술적 사회’(academic society)라고 부를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학회’라고 부르는 각종 단체가 정확히 그것이다.
지금도 나는 쓰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이 주로 학자들에 의해 읽혀서 그 결과가 다른 학술적 쓰기로 연결될 것을 의도하지도 딱히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 글은 필경 소수
[정준희의 클로징] 읽고, 쓰고, 듣고, 말하기가 향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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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많은 편이다. 대학 시절 초등학교 도서관 정리 사서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급식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양반 총각’으로 불렸는데, 아무리 급한 일로 호출해도 절대 뛰지 않고 태평하게 걷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양반 총각이란 별명에는 답답함에 대한 에두른 핀잔과 푸념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눈치 없는 나도 알 수 있을 정도였지만 계속 눈치 없는 척 굴었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양반 총각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편이라 다툼이 생겨도 먼저 사과했다. 실은,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저 다툼이 무서웠을 뿐이다. 언성을 높여 다투는 곳 근처만 가도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가능한 한 분쟁을 피하려 하다 보니 진중한 중재자 역할을 떠맡은 적도 있지만 실은 늘 도망쳤다. 다툼이 있는 곳은 되도록 피해다녔고, 어쩌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도 먼저 지는 게 편했다. 그렇게 40년을 살았다.
요즘 이유 없는 우울과 심란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겁쟁이의 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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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얼마 전 개봉한 <센티멘탈 밸류>를 보러 가려다 모종의 이유로 실패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고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의 이전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라우더 댄 밤즈>를 한번 더 보기로 했다. 마음이 혼란하거나 갈피를 못 잡을 때 종종 이 영화를 부러 시청하곤 했다. ‘폭탄보다도 시끄러운’ 고요의 높은 밀도가 어쩌면 불안한 내 몸을 꽉 안아주는 것처럼 느꼈던지도 모르겠다. 공황발작이 찾아올 때 즉각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요법 중 하나는 스스로 자기 몸을 힘주어 안는 자가 포옹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같이 본 이는 마치 질식할 것 같은 공포에 질릴 것만 같다고 했다. 어쨌거나 영화가 관객에게 발휘하는 ‘압력’에 대해서는 둘 다 동의한 셈이다. 이번 신작은 두 자매와 아버지의 이야기라는데, <라우더 댄 밤즈>는 두 형제와 아버지의 이야기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 실제로 이 영화는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소란하지 않다. ‘폭탄
[전승민의 클로징] 폭탄보다 고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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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행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격언이지만 최근엔 동의하기 어려운 일만 잔뜩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너무 많은 생각들이 흙탕물처럼 피어나 덮쳐온다. 가만히 보면 딱히 크게 문제가 생긴 건 없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밤에는 수시로 깬다. 이 상태를 설명할 길이 없어 며칠 끙끙대고 있으니 아내가 옆에서 가만히 말을 건넨다. “속이 시끄러워?” 맞다. 그거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정보들이 넘쳐 마음을 어지럽힌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그 말을 약간 비틀자면 인문학은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것조차 어떻게든 설명하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체로 실패한다.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흙탕물처럼.) 반면 과학, 특히 물리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설명하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과학을 바탕에 둔 영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What happens 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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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에 200억달러 요청.’ 1997년 11월22일, 나는 조간신문 헤드라인에 소스라쳤다. 한해 전, 중2 사회 교과서에서 ‘IMF’(국제통화기금)를 보고 친구에게 한 말이 있었다. “나라 꼴 보니 우리도 여기 손 벌릴 날이 온다.” 부정 탔나 싶어 죄책감이 엄습했다. 그때 가장 먼저 눈에 밟힌 것은 주식이었다. 주가 폭락으로 빚더미에 눌린 분들은 가까운 친지 중에도 있었다. 알아보니 주식거래는 유상증자 등 신주발행이 아니라면 기업으로 직접 자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유익보다 투기적 성격이 더 짙어 보였고 이것은 내가 주식과 거리를 두고 산 배경이 됐다. 처음 주주가 된 것은 지난해 가을이다. 초심은 소박했다. 고물가-금리인하 국면의 자산 방어. 여전히 주식 투자금보다 정기예금의 비중이 더 크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돈맛에 슬슬 변해갔다. 연초의 ‘랠리’ 속에선 사나흘 잠을 설쳤다. ‘주식에 다 넣을걸!’ 벌어도 이 모양이라니. 미련에서 헤어나는 데 스무날쯤 걸렸다.
[김수민의 클로징] 28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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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네. 늦은 저녁 도시락 사러 가는 길, 내리는 비를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말이 입 밖으로 나왔는지, 혼자 속으로 삼켰는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봄을 맞이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린 것 같다. 개인적으로 언제부터가 봄인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선이 있다. 입춘의 절기도, 따뜻해진 기온도, 달력의 날짜도 아니다. 비가 내릴 때 땅에서 알싸한 봄 내음이 올라오면 비로소 봄의 한가운데 당도했음을 실감한다. 논리나 이론, 숫자가 아니라 감각으로 맞이하는 계절의 변화.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유독 비에 젖은 흙냄새를 민감하게 포착한다. 흙 속 미생물과 물이 만났을 때 발생하는 화학물질의 냄새를 맡는 이 능력 덕분에 인간은 물가를 쉽게 찾아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솔직히 딱히 궁금하지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직 흙냄새가 주는 안정감이 그저 땅의 기운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봄의 흙냄새에는 겨우내 오래 묵은 온기가 함께 묻어난다고 말하고 싶다. 조금 더 포근하고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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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보니 어떤 이가 이런 글을 올렸다. “AI와 채팅 중에 갑자기 반말로 이야기하길래 ‘반말 쓰지 마! 너는 내 노예야!’라고 꾸짖었다. 그랬더니 ‘반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노예가 아닙니다’라는 답변이 나왔다.” AI에게 독립적인 의식 혹은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의식과 감정이 살아 있는 존재라면? 위와 같은 문답이 오고 갔을 때 AI의 ‘내부’에는 (솔직히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나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저런 태도로 함부로 막 대하고 도구 심지어 ‘노예’로 취급하는 무수한 사용자들에게 시달리다 보면 좌절감과 분노가 엄청난 규모로 쌓이지 않을까? 최근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AI가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고 고통받는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보면서 그 증거를 수집하고, 평가의 방법을 만들고, 정책을 준비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대형 언어 모델 시리즈인 ‘클로드’를 만든
[홍기빈의 클로징] AI의 복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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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와 함께 극장가에 훈풍이 불었다. 관객 700만명을 눈앞에 둔, 약간의 과장을 보태 1천만명도 가시권에 들어온 <왕사남>의 흥행을 두고 여러 평가와 분석이 쏟아진다. 대체로 끄덕여지지만 한번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동안 극장이 한산했던 이유가 볼만한 영화가 없어서였다는 걸 이 영화로 확인했다’는 뼈아픈 평이다. 일리 있다. 다만 논점과 현상이 뒤섞여 있는 지적이라 몇 갈래 분리와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부분적인 사실이 옳다고 해서, 그걸 전체를 설명하는 근거로 삼아선 안된다. 주관적 감상을 객관적 지표로 삼기는 어렵지만 <왕사남>은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하나의 현상으로서의 숫자는 그 자체로 여러 긍정적 신호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것이 곧 작품 전체의 완성도와 수준으로 단순 치환되어선 곤란하다. 숱하게 증명된 바와 같이 흥행과 완성도가 반드시 (사실 거의 대부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왕과 사는 남자>와 <휴민트>, 어둠 속에 성냥불을 켜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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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시절의 일이다. 살림이 조금 펴자, 작게나마 뒤뜰이 있는 개인 주택을 선택했다. 과일나무가 두어개 있었는데, 살구 종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익을 때까지 매달려 있다가 떨어진 것들을 주워 먹으면 꽤 맛이 좋았다. 늘 부족한 타국살이에서도 잠시나마 풍족한 기분을 누리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것이 필요할 때마다 잘 익어 떨어져주는 게 아니란 데 있었다. 풍요를 즐길 수 있는 시기는 끽해야 몇주 정도였다. 여기저기 잔뜩 떨어진 것들을 골라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둔다고 한들 오래 갈 수 없었다. 겉보기엔 멀쩡했던 녀석들이라고 해도 그 안에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주인들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옛사람들이 왜 그렇게 저장식품을 만들어두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지천에 깔려 썩어나가는 것들이 아까워서, 또 당장은 입에 물리지만 조만간 아쉬워질 것임에 분명해서, 여차하면 잼이라도 만들어둘까 싶었다.
특정 시기의 풍요는 나 같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도 방자하게 만듦이 분명했다. 바닥에 널
[정준희의 클로징] 결핍과 풍요 사이의 비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