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움과 설렘이 교차했던 2011년 한국영화계. 기대했던 스타들의 영화가 조용히 사라진 자리에서 의외의 영화들이 힘자랑을 했고, 3D영화의 원년은 되지 못했지만 국산 애니메이션 성공의 원년이라고는 말할 수 있었으며, 기다려왔던 감독들은 해외에서의 작업을 통해 재회의 시간을 유보했다. 실화영화들이 주목받을 때 실패와 소멸의 진짜 ‘실화’의 순간도 많은 영화인과 관객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2011년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 ‘침체’와 ‘격동’ 그 두 가지로도 설명할 수 있는 해였다. <개그콘서트>의 ‘애정남’과 ‘일수꾼’이 지난 1년을 되돌아봤다. 여기에 보태고 싶은 당신의 또 다른 사건과 실화는 무엇인가.
Keyword 06. 한국 애니메이션의 도약
닭과 돼지의 해 일수꾼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만드는 거 어렵지 않아요. 6년 동안 한 작품에만 매달려서 일하다가 힘들면 3번 정도 사무실을 옮기면 돼요. 그러면서 시나리오작가는 2번 정도만 바꾸면 돼요. 힘든 일도 없어요. 그냥 쉬는 날 없이 매일 한 300장 정도만 그리세요. 언제 작품이 완성되는지 자기도 모를 때는 한국영화 제작진행표에 몇년 동안 그냥 ‘개봉대기 중’이라고만 써놓으면 돼요. 그러다보면 맨 처음 목소리 연기를 맡았던 아이가 변성기가 지나는 일이 발생해서 1인2역도 가능하게 되고요, 30대 때 작업을 시작한 감독은 40대에 개봉을 하게 되니 작품에는 더욱 성숙미가 묻어나는 효과도 생겨요. 어때요, 애니메이션 만들기 참 쉽죠?”
오래도록 실패의 기록만 남겨온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무려 6년의 제작기간이 걸린 오성윤 감독의 <마당을 나온 암탉>은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새로운 역사를 썼다. 시체스국제영화제 애니메이션 부문 가족영화상, 아태영화상 최우수애니상까지 받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할리우드식 3D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스타일에다 아동 애니메이션이라고 하기에는 풍부한 테마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평범한 성공 그 이상의 의미를 줬다. 한편, 처음부터 성인 취향의 잔혹 스릴러를 표방한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독립장편애니메이션의 쾌거임과 동시에 그간 축적된 독립영화계의 인적, 물적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집약한 의미있는 발걸음이다. 누구나 애니메이션 장르에서 기대할 법한 밝고 상쾌한 그림체와 유쾌한 스토리, 그리고 해피엔딩 등을 일거에 뒤집는 <돼지의 왕>은 천편일률적인 여러 당대의 실사 극영화들을 향한 멋진 한방이기도 했다. 이렇듯 2011년은 그동안 희망으로만 맴돌던 ‘한국 애니메이션의 도약’이라는 표현을 마음 놓고 쓸 수 있었던 근사한 한해였다.
Keyword 07. 흥행공식의 파괴
‘어메이징’한 성공과 실패 애정남 “이거 애매합니다. <푸른 소금>이 아무리 안돼도 송강호 쇠고랑 안 차요. 경찰 출동 안 해요.”
최근 <도가니>와 <완득이>를 비롯해 앞선 흥행작인 <써니> <퀵> <최종병기 활>까지 불러오자면 올해는 흥행보증수표 배우들의 처절한 몰락의 해였다. 지난 추석 한국영화 전쟁에서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흥행 1위를 기록한 영화 역시 <가문의 영광4: 가문의 수난>이다. ‘<시크릿 가든> 신드롬’이 무색하게 현빈의 <만추>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원의 <7광구>의 흥행참패는 그야말로 ‘어메이징’했다. <카운트다운>의 전도연과 정재영은 또 어떤가. 또한 지난 몇년간 한 영화(<황해>)를 두고 하정우처럼 고생한 배우가 있을까. 배우의 고난이 영화의 흥행을 무조건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배우를 외면하는 관객에게 진심으로 화를 낼 법도 하다.
<써니>는 흥행배우는 말할 것도 없고 아역, 성인 캐릭터 할 것 없이 아예 영화 출연 자체가 처음인 배우들이 대부분이다. 유호정, 심은경의 이름에 티켓 파워를 기대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에서 처음으로 코믹 연기에 도전한 김명민 또한 이전작들인 <리턴>(2007), <파괴된 사나이>(2010) 등 흥행 영화배우로서의 파괴력은 미미했다. <사랑이 무서워>의 임창정과 <수상한 고객들>의 류승범이 그보다 더한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들일 것이다. 관객이 원하는 ‘배우의 변신’이란 <악마를 보았다>에서 이병헌이 살인마의 입을 찢는 것이 아니라,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에서 김명민이 몸 개그를 하는 것이다. 현빈과 하지원, 그리고 정재영과 김명민을 보면서 이제 과연 어떤 배우를 흥행보증수표라고 불러야 할까. 드라마만 잘돼선 안돼요, 영화도 잘돼야 흥행의 보증수표가 되는 거예요. 앞으로 이렇게 정한 거예요. 자, 그럼 긴장하고 있는 한 배우가 있을 것이다. TV드라마 <최고의 사랑>의 ‘독고진’ 차승원이 “부디 협조 좀 해주셔야겠습니다”라며 찾아올 것이다.
Keyword 08. 최고은과 예술인복지법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애정남 “한국에서 시나리오작가로 살아가는 거 어렵지 않아요. 영화사에서 내용을 이리저리 바꿔도 마음 편히 가만히 있으면 돼요. 내가 처음 쓴 이야기보다 훨씬 재밌고 근사하게, 그것도 공짜로 바꿔주시는 거예요. 나중에 크레딧에서 자기 이름이 빠져도 역시 가만히 있으면 돼요. 그 후진 작품을 쓴 주인공이 나라는 걸 감춰주기 위해서 영화사 대표님이 총대를 대신 메주신 거예요.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우리나라처럼 시나리오작가가 이렇게 대접받으며 살 수 있는 나라는 별로 없답니다.”
올해 한국영화계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로 새해를 시작했다. 설을 앞둔 1월29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출신 최고은 작가가 극단적인 생활고에 세상을 뜬 것. 최 작가가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사망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물을 수 있는 계약이 있었는지 밝혀진 것은 없지만 생계의 사각지대에 몰려 있었던 한 예술인의 고통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후 예술인 처우개선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뤄졌는데,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인 종사자는 20여만명으로 추산되며 이 가운데 월평균 수입이 없는 경우와 이를 포함해 100만원 이하의 월급을 받는 예술인들이 각각 40%, 60%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일명 ‘최고은 법’으로 불린 예술인복지법안이 지난 10월 국회에서 통과됐고 시행령 마련에 들어갔다. 예술인복지법 시행령은 내년 4월까지 초안을 마련, 공청회 등 의견수렴을 거친 뒤 11월 공포, 시행될 예정이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Keyword 09. SNS의 힘
트위터 없이 대박도 없다? 애정남 ”이거 애매합니다. 박중훈이 트위터 맞팔 안 해준다고 쇠고랑 안 차요. 경찰 출동 안 해요.”
영화와 미디어, 혹은 영화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만남이라는 측면에서 올해의 화두는 단연 트위터였다. 유명 배우와 감독 등 영화인과 관객이 활발히 소통하며, 140자 내외의 짧은 리뷰들은 바로 영향력있는 입소문이 되어 흥행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언론 시사회장에서 먼저 영화를 본 기자나 관계자가 개봉관을 나오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 영화에 대한 짧은 감상을 쏟아내는 일이 이제 일상의 풍경이 됐다. 개봉 당시 스타를 앞세우거나 대대적인 홍보와도 다소 거리가 멀었던 <써니>와 <완득이>는 SNS를 통한 입소문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경우다.
영화의 흥행을 떠나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둘러싼 여론, 실화영화 <도가니>가 가져온 파장도 트위터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불편한 진실’을 담은 극영화는 성공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무너뜨린 <도가니>는 영화의 실제 무대이기도 한 광주 인화학교가 SNS의 힘을 바탕으로 폐교 수순을 밟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트위터 열풍은 <슈퍼스타 K> 등 전성기를 맞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처럼 네티즌에게 ‘직접 참여’라는 멋진 무기를 선사했다. 그럼 흥행한 영화가 전적으로 SNS의 힘을 빌렸는지 아닌지 이거 애매해진다. 그 기준은 개봉 이후 주간 추이로 정하면 될 것이다. <완득이>와 <도가니> 모두 개봉 1∼2주차보다 3∼4주차에 이르러 흥행 증가세를 보여줬다. 단연 SNS의 힘이 아닐 수 없다.
Keyword 10. <나는 꼼수다>와 한국영화의 ‘빅엿’들
풍자와 조롱 없이 어찌 버티리 일수꾼 “식당, 대박 터트리는 거 어렵지 않아요. 숨 안 쉬고 1천만원만 모아서 방송국에 주면 돼요. 그리고 무조건 매운 것과 단것을 섞어서 메뉴를 만들면 돼요. 고추장이랑 카스테라를 섞어요. 고추장이랑 아이스크림을 섞어요. 고추장이랑 콜라를 섞어요. 그래도 방송국이 싫어하면 또 콜라를 섞어요. 어차피 한번 만들고 안 팔면 그만이에요.”
<나는 꼼수다>가 2011년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디테일한 꼼수’의 촘촘한 매력과 ‘빅엿’의 통쾌함을 알렸다. 꼭 이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2011년에 관객도 부당한 세력이 벌인 부당거래의 본질에 빅엿을 먹이는 영화들을 환영한 건 사실이다. 다시 <도가니>부터 이야기하자. <도가니>는 실화영화인 동시에 영화로 만든 ‘빅엿’의 아이콘이었다. 공중파 맛집 소개 프로그램의 허상을 까발리는 김재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트루맛쇼>도 ‘빅엿’의 대표적인 사례다. 거대기업이 되어버린 한국 대형병원의 속내를 까뒤집은 <하얀 정글>도 같은 맥락의 다큐멘터리다.
거짓된 허상을 벗겨버리고 직접적으로 사건을 돌파하고픈 의지가 지금 한국 관객의 욕망일 것이다. 그리고 2012년은 현 정권의 마지막 해다. 정권 말기 레임덕과 권력의 누수현상, 그와 맞물린 <나는 꼼수다>의 열풍은 2012년에도 ‘빅엿’을 향한 관객의 욕망을 더욱 거세게 자극할 것이다. 2012년에 찾아올 첫 번째 빅엿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뒤, 1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이 될 듯하다. 지난 2007년에 발생한 ‘석궁사건’을 둘러싼 “재판이 아닌 개판”을 그리는 이 영화 또한 사법부를 향해 빅엿을 날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