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의 목적은 영화를 기억하는 것, 10억 볼트 필요!” 지난 한해 변함없이 <씨네21>의 ‘전영객잔’을 사수한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와 정성일 영화평론가, 허문영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가 2006년 한국 영화계를 추억하고 반성하는 자리에 둘러앉았다. 세 관찰자는, 한국영화가 100여편 개봉하고 그중 절반을 신인감독의 영화가 차지하는 다산의 한해를 보냈으나 기성과 신인 모두 창조적 에너지에 있어서는 예년에 비해 뚜렷한 성취와 경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총평했다. 대중의 압도적 몰표를 받은 <왕의 남자> <괴물> <타짜>에서는 새로운 취향의 대두를 감지했다. 단일한 주인공을 따라가지 않는 인물 배치 구도와 다중적인 서사 구조가 전통적 문법을 거스르고도 큰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세편의 영화는 카타르시스보다 프로페셔널리즘과 테크놀로지의 전시를 주요한 오락으로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고, 세 평자는 지적했다. 장르적 관점에서 올해는 멜로드라마가 구애에 실패하고 호러가 굴욕을 겪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장르영화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한 부류는 조폭이 등장하는 액션영화였다. 꽃미남 캐릭터와 부동산 개발이 올해 조폭 액션영화의 두드러진 모티브였다. 해석과 반론, 종합이 삼박자로 꼬리를 문 대담은 8과 1/2 시간을 넘겨서 끝났다. 여기 옮긴 대화가 한해 <씨네21>과 더불어 한국영화를 지켜본 독자 여러분의 첨언과 반박으로 메아리를 얻길 기다린다.
정성일: 올해 많은 영화인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씨네21>이 그들의 추모기사를 썼지만, 빠진 이름이 하나 있다. 다니엘 위예. 그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은 건 유감이다. 다니엘 위예에 대한 기억으로 2006년 한해의 영화 이야기를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김소영: 다니엘 위예의 영화 중 가장 처음 본 건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가 아니라 <?>였다. 그리고 초기작 중 <꼬숑?>(확인필요)을, 최근엔 <세잔>을 봤다. 위예는 샹탈 애커만이 주로 다루었던 문제, 프랑스 남쪽 뤼시드 지역의 인종적인 증오에 근거한 살인의 흔적, 즉 공간 탐구를 굉장히 전위적인 방식으로 시도했다. 샹탈 애커만과 고다르가 다뤘던 문제를 공간의 정치학이나 역사를 재고하는 문제로 끌어와 제기했다. <세잔느>에서는 누벨바그적 요소도 느껴졌다. 그의 영화에선 내레이션이 이미지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들어오고, 공간, 역사, 예술사에 대한 언급이 일말의 타협도 없이 진행된다. 나는 <거류>를 찍으면서 공간에 대해 두개의 레퍼런스를 갖고 있었는데, 하나는 샹탈 애커만이고 다른 하나는 위예의 <?>다. 내 영화에서 진해시청 앞 광장에서 차가 도는 장면은 다뉘엘 위예에 대한 오마주다.
허문영: 하스미 시게히코가 얘기해준 일화가 생각난다. 다니엘 위예와 그의 남편이자 영화 동지인 장 마리 스트라우브가 70년대 초 뉴욕을 방문한 적이 있다. 뉴욕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들의 방문을 환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가장 만나고 싶다고 한 사람은 존 포드였다고 한다. 존 포드는 우파 영화의 대부고, 당시는 베트남 전쟁 중이라 뉴욕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배척되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의 좌파 지식인 감독이 우파의 맹장감독을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모두들 놀랄 수밖에. 돌아보면 위예는 포스트68, 포스트 누벨바그 세대 중 어떠한 변질도 거부하고, 영화의 정치성을 끝까지 지키려고 한 마지막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정성일: 다니엘 위예가 세상을 떠나자 장 마리 스트라우브도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두 사람을 동시에 잃어버린 셈이다. 여기서 두 가지가 안타깝다. 하나는 두 사람의 영화가 더이상 동시대와 함께 진행되지 않고 과거의 영화가 되어버렸다는 것. 또 하나는 한국의 젊은 시네필들이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에 대한 영화적 체험없이 이들을 그냥 스쳐 보내버렸다는 점. 고다르나 파스빈더와 달리 이들의 이름은 한국영화 문화에 교훈을 주지 못하고 그냥 떠나가버렸다. 이를테면,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서 느닷없이 마주치게 되는 절대적 숏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성찰, 그 순간에 대한 사유를 보자. 최근 이미지가 낭비되고, 필요없는 숏이 넘쳐나는 한국영화에서 두 사람의 작업은 큰 교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다소 느닷없이 다니엘 위예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한 건, 올해 한국영화가 이미지와 숏의 낭비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점점 필요없는 이미지의 잡동사니에 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니엘 위예의 영화를 반성적으로 경유하여 한국영화 이야기로 돌아갔으면 한다.
기획성 강조, 순기능 멈춘 프로듀서 작가주의
허문영: 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흥미로운 성취에는 두 측면이 있었다. 독창적 스타일과 세계관을 지닌 신인감독의 지속적 배출과 장르 안에서 작업하는 포스트 시네필 세대 감수성을 보여주는 독립형 감독의 창조력. 2006년은 이 두 가지 동력 모두 예년에 비해 미흡했다. 100편 가까이 제작된 한국 장편 극영화 중 데뷔작이 46편이었다. 신인들의 기술은 숙련돼 있으나, 도전적인 힘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올해는 두 흐름 모두 지난해에 비해 진전한 것 같지 않다.
정성일: 헤아려보니 올해 개봉한 장편 실사 극영화 97편 중 데뷔감독의 영화가 46편이다. 한해 영화의 절반을 신인이 찍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게 꼭 좋은 일일까. 도대체 어떤 이유로 신인감독이 한국영화 전체 목록의 절반을 채우는지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대체 지난 5년간 데뷔했던 감독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들은 단 한편의 데뷔작을 찍을 재능만 가지고 있었던 건가. 한국영화에서 감독은 제작자와 프로듀서의 간택으로 이뤄진다. 이 간택의 절반이 신인감독들에게 돌아간다. 그 다음엔 힘있는 감독들에게. 한국영화는 프로듀서 중심 산업으로, 기획영화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제 이 영화들을 프로듀서 작가주의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김소영: 프로듀서 작가주의 혹은 프로듀서 브랜드주의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의 자본축적을 목표로 투자가 이뤄지고 프로듀서나 제작자가 브랜드화되고, 여기에 감독이 붙어서 하나의 기획상품으로 팔리고 있는 게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이게 점점 심화되는 추세다.
허문영: 프로듀서 작가주의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것이 지금 점점 위축되거나 소멸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가 싸이더스다. 싸이더스는 우노 시절부터 독립형 장르감독들의 산실 역할을 해왔다. 여기서 데뷔하는 감독들은 비평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주목의 대상이 됐고, 그 감독들 중 상당수가 이후에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나갔다. 하지만 싸이더스의 이 같은 역할이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이후 멈춘 것 같다.
김소영: <달콤, 살벌한 연인>의 손재곤 감독 정도가 있었다.
허문영: 물론 장준환 이후에도 신인감독이 배출되긴 했다. 하지만 이제는 기획성이 더 강조되고 있다. 이는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영화에서 순기능을 해오던 프로듀서 작가주의가 그 기능을 멈췄기 때문이다. 명필름에서 이어진 MK픽처스에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신인감독들에게 패기가 없다는 건 감독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영화산업이 변화하면서 가져온 산물이다.
정성일: 올해 한국영화에 대한 또 다른 인상은, 그냥 영화가 세편만 있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왕의 남자> <괴물> <타짜>. 이외의 영화들은 언제 마주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말하자면 와이드 릴리즈되고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몇편의 큰 영화들이 영화시장은 물론 영화 담론까지 장악하고 말았다. 완전한 양극화와 극단화이다. 산술적으로 순제작비 10억원, 마케팅비 5억원의 영화가 적자를 면하려면 50만명의 관객이 영화를 봐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 영화시장에서 50만명의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300만명의 영화와 10만명의 영화뿐이다.
김소영: 실상 <왕의 남자>는 말씀한 방식을 깨고 나온 영화다. 이 영화는 적절한 기획과 예산으로 만들어졌고 흥행에 성공했다. 모범이 될 만한 사례다. 물론 이 영화를 제외하면 거의 대다수가 우려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영화의 범주는 좀더 넓게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양극화, 극단화라고 설정해버리면 그 사이 범주에 해당하는 영화들을 논할 여지마저 잃는다. 담론 안에서마저 그 영화들이 자리를 잃게 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나는 <괴물> <한반도> <타짜> 등의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1군으로, <왕의 남자> 정도의 규모 영화를 2군, 홍상수, 김기덕 감독의 작가영화를 3군, 이보다 좀더 낮은 예산으로 만들어지는, 이윤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손님> 같은 영화를 4군, 독립영화를 5군으로 나누고 싶다.
허문영: 한국 영화시장에서 배급 시스템이 다양한 층위의 영화를 양극으로 밀어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산업구조만의 책임도 프로듀서나 감독만의 책임도 아니다. 그건 관객의 선택과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은 중규모 수준의 배급과 스타 캐스팅을 했다. 하지만 흥행엔 실패했다. 이 같은 관객 문화는 이제 존재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정성일: 어떤 경우에도 대중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연말 최대 영화상인 대한민국 영화대상과 청룡영화상이 작품상 후보에서조차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과 김기덕의 <시간>을 배제했다는 것은 매우 신기하고 거의 적대감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해변의 여인>은 일정 규모의 배급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이는 한국에서 <해변의 여인>을 방어할 관객 수가 그 정도도 안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낳는다. 거꾸로 고다르의 얘기도 떠오른다. 그는 영화를 찍을 때 그의 영화를 볼 관객 수를 생각하고 그들이 내는 총액보다 적은 제작비로 찍는 것이 영화의 경제학이라고 말했다. 이제 홍상수에게 그걸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허문영: 그 질문은 당연히 홍감독 스스로 오랫동안 해왔다. 사실 그 대답이 지난해에 차린 전원사라는 제작사였다.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의 대중적 소통력에 대해 가능성을 본 제작자의 적극적 지원이 있어서 만들어졌고, 그런 작업은 여전히 뜻있는 일이다. 정책·해외시장을 포함해 고려할 때 홍상수 영화의 지금 규모가 불안정한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것은 홍상수나 김기덕 정도의 국제적 지명도가 없으나 훌륭한 가능성을 지닌 신인감독들의 길이다. 그들은 1억, 2억원 수준의 디지털영화에 상당 기간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김소영: 구로사와 기요시나 차이밍량도 그렇지만 어느 나라에나 국제시장과 자국시장의 틈새에서 합작으로 작업하는 예술영화 감독이 있다. 나는 홍상수, 김기덕 감독이 합작에서 제작비만 갖고 오는 게 아니라 외국 프로듀서와 대화도 하기 때문에 사실 작가로서 열리는 과정이라고도 본다. 좀더 전방위적 태도로 마음을 열고 젊은 감독들과 합작시장을 같이 생각하고 네트워크를 만들고 다음 세대의 김기덕, 홍상수를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홍상수 감독의 미학적 전진, <해변의 여인>
정성일: 올해의 영화는 뭐라고 생각하나.
김소영: <망종>.
허문영: <해변의 여인>.
정성일: 나도 <해변의 여인>이다.
허문영: <해변의 여인>은 그냥 영화가 감동적이다. 홍상수 영화는 언제나 끝에서 ‘죽음’을 맞는다. 김기덕 영화가 시간의 순환을 다루고 있다면 홍상수 영화는 반복의 끝에 죽음이 있다. 그 끝을 자의식적으로 드러낸 게 <극장전>이고, 그래도 시간이 계속된다면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이 <해변의 여인>이다. 홍상수는 굉장히 폐쇄적이고 견고했던 형식에 틈을 벌리면서 질문을 진행시킨다. 특히 해변에서 중래와 문숙이 개와 노는 장면은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황홀한 카메라워크와 불길하면서도 서정적인 음악, 멍청할 정도로 천진난만한 두 남녀의 표정이 그냥 심금을 울렸다. <해변의 여인>은 죽음이란 끝을 맞이해야 함에도 살아가야 하는 시간에 대해 열린 감각을 보여준 영화다.
정성일: <해변의 여인>은 세 가지 점에서 특별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홍상수가 자신이 초현실주의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다는 점. 그는 이제 초현실주의의 길을 가겠다고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두 번째는 홍상수가 공간을 다루는 부분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홍상수가 일상을 잘 관찰하고, 제스처를 잘 찍어낸다고만 말한다. 그가 공간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는 펜션의 1층과 2층을 오가며, 방문과 창문을 경계로 공간을 매우 훌륭하게 만들어낸다. 자크 타티의 <윌로씨의 휴가>가 생각날 정도다. 또 이 영화에는 계절의 공기가 느껴진다. 홍상수는 점점 더 예민해지고 있고, 그걸 영화 속에서 매우 실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말하자면 영화 자체가 하나의 신체감각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홍상수는 여전히 희망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문숙이 모래사장에 차를 들이받고, 난데없이 나타난 두 청년의 아무런 대가없는 도움을 받은 뒤, 차를 유턴하여 원래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갈 때, 내가 본 건 희망이 아니라 회귀와 같은 것이었다. 홍상수는 미학적으로는 분명 더 나아가고 있지만, 그가 다루는 세계는 여전히 매우 음산한, 희비극의 형식을 띠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문호가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처럼 문숙은 과연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를 생각하게 됐다.
김소영: <해변의 여인>은 영화적으로 오케스트레이션이 굉장히 잘되어 있는 영화다. 사실 많은 실험영화들이 추구하지만 좀체 이루지 못하는 목표가 무의미를 의미화하는 작업인데, 홍상수는 의미와 무의미의 변주를 굉장히 잘 만들어낸다. 또 그런 부분들이 영화의 형식, 언어적인 활용과 잘 연결되어 있다. 문숙이 처음으로 “지랄이야”라고 할 때, 영화에 집중하게 되더라.
허문영: <극장전>에서 프레임의 안정성을 지속적으로 무너뜨리는 부분이 흥미로웠다면, <해변의 여인>에서는 그것과 또 다른 의미에서 감정과 심리의 불안정성을 텍스트의 육체로 끌어오는 변주가 흥미로웠다.
정성일: 자명한 건 동시대 감독 중에서 홍상수가 삶의 피곤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는(웃음) 유일한 감독이라는 거다. 블랑쇼는 “모던한 삶의 특징은 피곤함”이라고 하지 않았나. <해변의 여인>을 보면 홍상수 감독이 한국영화에서 유일하게 모던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나는 <극장전>이 굉장했기 때문에 이번엔 좀 쉬어갈 줄 알았다. 실제로 영화 전반부만 볼 때는 쉬어간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고, 중래가 통곡을 하자,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홍 감독은 가까스로 자신이 만들어낸 구도를 부수고, 그 안에서 삶의 피곤함을 끌어안고 있었다.
김소영: <해변의 여인>을 보면 차이밍량과 홍상수가 달라지는 지점이 보인다. 예를 들어, 황사가 온다고 할 때 차이밍량 영화에선 주인공들이 마스크를 쓰고 고통스러워하며, 그 고통이 끝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홍상수 영화에서는 황사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가 희비극을 만들어낸다. 차이밍량 영화는 고통을 끝까지 견디기 때문에 견딜 만한 것이 되지만, 홍상수 영화는 고통 안에서 서사를 만들어내고 모던의 권태(ennui)를 제기한다. 그게 곧 고통을 견디게 만들고, 동시대적인 것이 된다.
허문영: 홍상수 영화는 끝내 서사를 버리지 않고 버텨낸다는 게 굉장히 파워풀한 것 같다. 영화에 드러나는 세계관만 보면 그의 영화는 어느 순간 서사를 중단하고 회화의 한 면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그런 절박한 순간에서도 끝내 서사를 중단하지 않고 완결한다.
트랜스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국면, <망종>
김소영: 나는 개인적으로는 <망종>이 올해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소수민족 이야기를 한다는 건 지하전영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망종>은 조선족 감독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굉장히 놀라운 점이다. 주인공은 조선족을 상징하는 김치에 쥐약을 타서 파국을 보는데, 그 부분 역시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왔다.
정성일: 장률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그가 만들어내는 미니멀한 세계다. 중국 영화계와도 지하전영과도 떨어져 존재하는 곳. 그는 고립감을 안고 조선족의 삶을 좇아간다. 본인 자신은 인터뷰에서 희망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의 영화엔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장소는 로케이션임에도 세트처럼 보이고, 그 세트는 중국사회의 자본화 과정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담아낸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한 여자가 묵묵히 살아간다. 여기서 이 침묵의 계보를 좇아 올라가면 로베르 브레송의 <무쉐뜨>와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 <성냥공장 소녀>의 고립과 만난다. 나는 <망종>을 유위강의 <데이지>, 이즈쓰 가즈유키의 <박치기!>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김소영 선생님이 연구하고 계신 트랜스아시아란 토픽의 한 예라고도 생각한다. 가령 <데이지>는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민족지학적 영화처럼 진행된다. 영화의 인물들은 오로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연이 된다. <박치기!>에서는 한국의 젊은 세대와 무관한 역사적 산물, 재일조선인의 문제가 제기된다. 한국의 젊은 관객은 <박치기!>에서 어색한 한국어 발음으로 연기하는 일본 배우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망종>. 중국 조선족 지식인 장률 감독은 조선족 여자 최순희의 자멸극을 이야기한다. 이 세편의 영화에서 민족과 국가는 해체되면서 동시에 희미하게 묶인다.
김소영: 일단 유위강의 <데이지>는 위의 두 영화보다는 범아시아 합작영화의 흐름으로 <엽기적인 그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와 함께 논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조폭마누라3> <묵공> 등도 함께 묶일 수 있겠다. 하지만 <박치기!>와 <망종>은 함께 이야기하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허문영: 확실히 <데이지>는 좀 다른 거 같다. <데이지>의 공간이 무국적적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사실 유럽적인 기표다. <데이지>는 유럽적인 이미지를 떠돌아다니는 동양인의 정서를 그린 영화다. 여기서 민족은 일종의 흔적, 추억, 기억이다. 대면해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흘러간 무엇이며, 마주쳤을 때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다. 이와 달리 <박치기!>와 <망종>은 현실문제를 제기한다. <박치기!>는 <린다 린다 린다> <스윙걸즈> 등과 함께 생각해볼 수도 있는데, 여기서 공통점은 이들의 영화가 화해 가능한 만큼의 갈등만 제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들의 갈등은 순전히 화해나, 해결을 위한 인위적인 장치로 보인다. 모든 문제가 일정한 틀 안에서 제기된다. 갈등과 문제에 대한 아픔은 있지만, 동시에 이상한 달콤함도 묻어난다. 그래서 나는 <박치기!>가 타협적이며 퇴행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동시대 일본이 지니고 있는 문제들을 텍스트 안으로 끌어오면서 이를 고통스럽지만 견딜 만한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탈내셔널을 포섭하는 내셔널영화. 일본사회의 타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포섭하겠다는 메시지가 있다. 하지만 <망종>은 다르다. 일단 소수자가 소수자의 위치에서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다르며, 공간 묘사 방식이 뛰어나다. 어떤 영화에서도 공간이 <망종>처럼 죽음의 느낌으로 표현됐던 적은 없다. 그게 굉장히 놀라웠다. 브레송을 연상시키는 부분이다. 이 영화는 최근 중국에서 나온 어떤 영화보다 중국 제국주의- 자본주의라기보다- 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지하전영의 상당 부분이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정치적으로 둔감해지고 있는 요즘, <망종>은 유일하게 중국의 제국주의와 맞서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파국은 좀 수월한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김소영: 나는 이 영화가 계급, 민족, 젠더의 문제를 동시에 끌어안으면서 그것이 왜 해결 불가능의 상태에 있는지를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위치까지 끌고 간다는 점에서 트랜스아시아 영화의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정성일: <린다 린다 린다> <스윙걸스> <박치기!> 그리고 <씨네21>이 영화읽기에서 놓친 <녹차의 맛>까지, 올해는 일본영화 관객의 원년이라는 생각도 든다. 예전의 일본영화 관객은 셋 중 하나였다.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챙겨보는 시네필, 재패니메이션 팬, 로망 포르노를 보는 관객. 그런데 올해는 말 그대로 일본 청춘영화에 매혹된 관객층이 생겼다. 관객 다변화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이를 단지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향후 한국의 영화 문화 안에서 일본영화가 어떻게 자리잡을지 새로운 지형도가 필요하다.
허문영: 일본 청춘영화 붐의 선두주자는 이누도 잇신 감독이다. 올해 개봉한 서너편의 일본 청춘영화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고전적인 서사 방식을 갖고 있다. 양자가 대립하고, 갈등이 제기되며, 엔딩에선 결합, 화해 등의 성취가 이뤄진다.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소박한 성취. <스윙걸즈>도 <박치기!>도 <린다 린다 린다>도 소박한 주인공들의 소박한 성취를 보여준다. 이는 한국 장르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다. 가령 한국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패배하고 자학할 때, 일본영화의 주인공들은 작은 서사 안에서 나름의 성취를 이뤄낸다. 이 성취가 주는 행복감은 한국 대중영화에서 맛보기 힘든 것이다.
<친구>의 변주, 꽃미남과 부동산 담론의 액션영화들
김소영: 올해 한국 대중영화에서 한국사회의 기상도를 가장 잘 보여준 건 액션영화인 것 같다. 한국사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부동산 문제가 <비열한 거리> <짝패> 등 올해 개봉한 액션영화 속에 녹아들어 있다. 부동산활극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부동산 문제라는 동시대의 공포, 무의식의 공포가 하나의 장르 안에서 보이는 셈이다.
정성일: 나는 지금 충무로에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곽경택의 <친구>다. 유하의 <비열한 거리>를 보면서 <친구>를 즉각 떠올렸다. 이 영화는 <친구>의 후일담처럼 보일 만큼 <친구>를 변주하고, 패러디한다. 또 그동안 항상 참신한 아이디어로 영화를 만들었던 장진도 <거룩한 계보>에서 <친구>를 고스란히 반복했다. 곽경택의 <친구>가 경상도판 <거룩한 계보>라면, 장진의 <거룩한 계보>는 전라도판 <친구>다. 한국의 조폭영화들이 모두 <친구>의 그림자 안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부동산활극에 대해서는 좀더 큰 틀에서 논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부동산 담론이 <짝패>나 <비열한 거리>뿐 아니라 공포영화인 <아파트>까지 넘어올 때 망연자실했다. 이건 단순히 부동산 문제가 남성적 젠더를 획득하면 액션영화, 여성적 젠더를 획득하면 공포영화가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열한 거리>와 <짝패>는 아파트에 들어가려는 영화들이다. 여기에는 지난한 노력과 고통이 뒤따르며, 액션과 폭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부동산에서 더 큰 문제는 전세값 대란이다. 아파트에서 떠나지 않기 위해 버티는 사람들, 그게 안병기의 <아파트>다. 어떤 사람은 아파트에 들어가려 애쓰고, 또 다른 사람은 떠나지 않으려고 버틴다. 이렇게 악순환이 지속된다. 그리고 영화는 주인공들을 죽이면서 악순환을 멈추는 해법을 찾고 있다. 나는 이 점이 놀라웠다. <비열한 거리>와 <아파트>가 모두 주인공의 죽음에서 해법을 찾는다는 점. 나는 안병기와 유하가 아파트 문제에 대해 함께 토론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파트를 다룬 두편의 영화가 동일한 결론에 도착했다. 부동산 담론이 대중영화 안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해봐야 할 것 같다.
허문영: 나는 <친구>라는 유령에 김성수의 <비트>라는 유령을 보태고 싶다. 최근의 액션영화들은 <친구>와 <비트>를 변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것이 한국 액션영화의 진화를 보여주는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해 액션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건 이제 액션영화가 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건 흥행성적에서도 바로 드러난다. <사생결단> <강적> <비열한 거리>는 만듦새만 보면 그렇게 나쁜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흥행에 실패하거나,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소년의 육체를 비장하게 파멸시키는 영화들이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김소영: <친구>가 계속 리메이크되고 있다는 건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올해 개봉한 액션영화들과 <친구> 사이에는 차이점도 보인다. 인물들의 관계가 그러하다. 기존의 조폭영화에서는 남자들 사이의 서열화가 중요했다. <무간도> 시리즈를 봐도 주인공들이 의리를 얼마나 잘 지키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한국 조폭영화에는 위험한 정서가 있다. 예를 들면 <열혈남아>에서 주인공이 꽃미남 후배에게 살해되는 장면이다. 이는 매우 비극적이고 처절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관계가 하나의 관행처럼 들어오고 있다. <비열한 거리>도 그렇지 않나. 이제 아버지도, 친구도, 후배도 믿을 수 없다. 한국의 조폭영화가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남성간의 가치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더욱 안타까운 건 스폰서는 계속 살아남는다는 점이다. 예전엔 조폭영화가 스폰서를 죽였다면, 이제는 스폰서가 꽃미남을 갈아치우는 구조다. 과거 호스티스영화의 컨벤션을 이어받으며 호스티스 자리에 ‘호스트’가 들어와 페이소스를 분출한다. 또한 꽃미남의 신체적 특징이 강조된다. 한편 올해 약세였던 멜로드라마와 호러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이끄는 장르였는데, 앞서 말한 변화는 현실에서 여배우의 자리가 좁아질 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도 여주인공의 설 자리가 사라져간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