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 <파괴된 사나이> <살인비가> <온에어> <여우비> <돌아서서 떠나라>….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모두 기획단계에서는 영화 제목으로 채택됐지만, 최종적으로는 다른 제목에 밀려난 경우들이다. 이들 영화는 결국 각각 <킬리만자로> <복수는 나의 것> <스물넷> <중독> <약속>으로 바뀌어 개봉됐거나 개봉될 예정이다.
영화의 제목은 영화의 첫인상을 크게 결정짓는 요소다. 때문에 영화를 만들고 홍보하는 이들은 제목에 상당한 신경을 쓴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된 제목도 자주 바뀌곤 한다. 사람 이름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쉽고 간단한 일인데, 더 나은 게 있다면 주저할 이유가 있겠나.
물론 영화 제목을 바꾸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앞서 관객에게 선보였던 영화와 비슷할 경우. 의 애초 제목은 <즐거운 편지>였다. <편지>가 앞서 개봉하지 않았다면 이 제목으로 결정됐을지 모른다. <파이란>의 원제도 아사다 지로의 원작소설 <러브레터>였다. 제목을 바꾼 이유는 이와이 순지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짐작할 터. <와니와 준하>는 <쿨>이란 제목으로 기획됐으나, 모 방송사가 같은 제목의 드라마를 제작해 부득불 변경했다. 기획중인 <어디까지 왔니?>는 애초 <가시나무>였지만, 조성모의 노래가 성공을 거두면서 <새벽>이라는 이름을 거쳐 현재 제목으로 굳어졌다.
두 번째, 제목이 주는 느낌이 복잡하고 어려울 때. <순애보>의 애초 제목은 <유린네이션>. ‘유린네이션’이라는 포르노사이트를 매개로 남녀가 교류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쉽게 와닿지 않았다. 제작중인 변영주 감독의 <밀애>는 원작인 전경린 소설의 제목 그대로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로 기획됐지만, 너무 길어 기억하기 어려워 <밀애>라고 바꿨다. 이 역시 친근하지 않아 새로운 이름을 지어야 했다. <정글쥬스>의 원제는 <딕, 조, 멕>. 영화 속 세 주인공의 별명을 딴 이 제목은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현재 촬영중인 <품행제로>도 <명랑만화와 권법소년>이라는 다소 외우기 어려운 이름의 기획에서 출발했다.
세 번째, 영화의 내용이나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할 경우.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연극 제목이기도 한 <날 보러 와요>에서 바뀐 것. 봉 감독이 연극과 달리 살인자의 입장을 강조하지 않길 원했기 때문이다. <먼지>가 <모텔 선인장>으로, <해적>이 <해적, 디스코왕 되다>로, <형사수첩>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바뀐 것도 같은 맥락.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우리들의 성생활>이라는 원제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바꿨다. 처음 제목으로 돌아오는 일도 있다. <달마야 놀자>는 장난스런 느낌을 준다는 생각 때문에 <바른생활>로 바꿨다가 주위 반응이 썰렁해 다시 원안대로 지었고, <로드무비>는 밝은 느낌을 주려고 <레인보우>로 바꿨다가 <오버 더 레인보우>가 먼저 개봉하자 애초 제목으로 돌아왔다.
예전 충무로에선 홀수에다 다섯 글자 제목을 가장 선호했다. <결혼이야기> <터미네이터> <미스터 맘마> 등이 이런 경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긴 제목은 흥행이 안 된다’는 속설을 뒤집었다. 한때는 두자 제목이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접속> 이후 <약속> <편지> <쉬리> 등이 이어지면서 사라졌다. 넉자 제목은 ‘죽을 死’자와 관련해 금기시됐지만,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 홍콩영화 덕에 오히려 유행하기도 했다. 씨네월드 정승혜 이사는 “좋은 영화 제목은 터부나 유행과 관계없이, 컨셉과 장르, 영화 내용이 묻어나는 것”이라며, <마누라 죽이기> <깡패수업> <주유소 습격사건> 등을 모범사례로 꼽는다.
영화 일에 종사하지 않는 누구라도 제목의 중요성은 인정할 것이다. <접속>의 제목이 한때 거론됐던 <접촉> <입맞춤> <블루노트>였다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제목이 <판문점> <더 라인> <선> 였다면?(이 영화의 제목은 한때 <판문점>으로 확정되기도 했다.) 결과는 모르지 않냐고? 맞는 말, 과연 누가 알겠나.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제목이 아무리 훌륭해도 영화가 빈약하다면 ‘말짱 꽝’이라는 점이다. 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