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까지 한국영화계는 소수의 허가받은 영화사들이 충무로에 옹기종기 모여 그들만의 정겹고 지린내 나는 전통의 기운을, 한길 건너 골목길을 지날 때마다 끈질기게 내뿜는 것이었다. 혁신과는 전혀 무관했다. 1년에 4편의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제작해 운이 좋으면 한두편 흥행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한국영화를 제작하면) 보너스로 주어지는 외화 수입쿼터로 들여온 영화들이 거의 100% 흥행이 보장되는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독과점 체제 감미료에 취해 있던 영화사들은, 자체 기획 능력은 제쳐두고 감독들의 능력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형편이었다. 이 당시 매일매일 다니던 충무로 영화사를 폭파하고 싶다는 분노와 열등감에 시달리던 일부 젊은 엘리트 초짜 영화인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개방 물결이 영화계를 휩쓸며 전통적인 영화산업에 균열이 생기자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장르영화의 춘추전국이 시작되기까지
영화제작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고 외화 수입이 전면 개방되면서 미국 직배 영화를 틀었던 전통적인 극장들과 그 극장에 기생했던 기존 영화사들은, 그게 자기 운명의 종말론적 서곡이 되리라는 건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젊은 제작자 신철의 ‘신씨네’가 기획하고 삼성전자가 투자한 <결혼이야기>(1992)는 기획영화(High-Concept Film) 개념을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우면서 당대의 연애와 결혼 풍속도를 빠른 속도의 이야기로 풀어내 한국영화가 젊은 세대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는 드문 사례로 입소문을 타며 흥행했다. 이 영화는 충무로 자본이 대기업 자본으로 이동했던 전환기적 사건이자, 빨리 찍는 능력을 보유했거나 영화제용 품질을 보증하는 감독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나태한 기존 영화사들에 대한 도전이었다.
신철을 위시한 젊은 제작자·기획자들은 장르 관행과 스타 페르소나라는 이중 안전판으로 새로운 상업영화의 물결을 이끌어내겠다는 결의와 자신감을 장착하고 산업의 권력 판도를 뒤흔들며 작가영화나 민중영화에 경도되어 있던 젊은 평론가들의 우려를 뒤로한 채 빠르게 세를 확장했다. 영화는 당연히 ‘흥행 상품’이었고 기획영화라는 상투적인 말이 의기양양한 브랜드가 됐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며 정치 검열과 영세 자본의 이중고 속에서 장르의 ‘고전기-심화기-수정기’를 거칠 체력이 없었던 한국영화계는 선배 영화의 전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빠른 세대교체를 이루고, <결혼이야기>의 뒤를 이어 <미스터 맘마>(1992), <101번째 프로포즈>(1993) 등 트렌디한 로맨틱코미디를 쏟아냈다.
장르의 유행과 흥망성쇠가 그렇듯 한국영화계의 특정 트렌드는 원류와 아류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침을 거듭했고 소수의 성공작과 다수의 망작이라는 사이클 속에서도 부지런히 자기혁신을 거듭했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결말은 참혹했던, 무모한 패기만큼은 최상급 레벨이었던 <구미호>(1994)는 1990년대의 영화산업을 견인했던 신씨네가 본격적인 컴퓨터그래픽을 시도한 영화였고 그 실패를 본보기 삼아 재도전한 판타지 멜로 <은행나무 침대>(1996)는 경이적인 성공을 거둔다. 신씨네와 한때 파트너를 이루며 세대교체를 했던 강우석은 제작자이자 감독으로서 <투캅스>(1993)를 연출해 메가 히트를 거두는데 이후 그는 지방 극장 체인을 장악하고 있던 합동영화사와 대기업 자본 사이에서 영리하게 줄타기를 하며 자본을 끌어모으고 꾸준히 흥행작을 직접 연출하거나 제작하면서 ‘시네마서비스’라는 영화 투자제작사를 한국영화사에 등재하게 된다.
할리우드영화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자본인데도 겁 없이 감히 ‘블록버스터’라는 말을 최초로 한국영화에 갖다 붙인 공포 판타지 <퇴마록>(1998)은 이후 나온 <용가리>(1999),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 등과 같은 재앙적 사건들의 시초였지만 한국영화의 대작 콤플렉스를 풍선 터뜨리듯이 깨버린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은행나무 침대>로 솜씨를 보였던 강제규의 첩보액션영화 <쉬리>(1998)는 한국 분단 현실을 웅장한 스펙터클로 꾸며낼 수 있다는 착시효과를 대중에게 안겨주면서 여의도에서 대규모 총격전을 벌이는 규모의 볼거리로 블록버스터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 신드롬이 ‘국뽕’의 희열로 치닫는 기간은 <실미도>(2003), <태극기 휘날리며>(2004) 개봉 때까지 불과 5년도 걸리지 않았다.
바야흐로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시작될 즈음이었다. 오랫동안 한국영화를 옥죄던 사전검열제도는 위헌 판결을 받아 21세기 벽두에 철폐되었고 국가 부도를 딛고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언감생심 문화정책을 표방했으며 수천억원의 정책자금이 영화계에 투입되자 젊은 제작자들이 선도하는 진취적이고 무모하고 어리석고 기이하고 새롭고 우스꽝스럽고 활달한, 그 모든 것들이 공존하는 장르영화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장르영화의 과제
무말랭이가 화면에 출현하는 것만으로도 관객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겠다는 희한한 야심의 소유자로서 청년 감독 봉준호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를 만들었으나 이 만화적인 소품은 싱크대의 세제 거품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놀라운 것은 차승재가 대표였던 영화사 ‘싸이더스’가 이 젊은 감독에게 기회를 한번 더 줬다는 것이며 그 영화는 범인이 잡히지 않는 농촌 스릴러 <살인의 추억>(2003)이었다. 촬영 당시는 물론이고 개봉 직전까지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던 이 영화는 한달 전 개봉했다 망한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로 대미를 장식할 뻔했던, 2000년대 초반 <화산고>(2001)와 같은 모험적인 시도들의 실패로 부도설에 시달리던 제작사 싸이더스를 기적적으로 구해냈다. 멍청하게도 <살인의 추억>을 거부한 칸영화제는 같은 해 하반기에 개봉한 박찬욱의 <올드보이>를 이듬해 경쟁부문에 선정하는 이례적인 선택을 했다(심사위원대상 수상). 이는 한국영화의 전통과는 무관한 채 건방지게 전 세계 위대한 영화의 전통을 레퍼런스로 삼는다고 하는, ‘부모 없는 세대’로서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장르 문법을 따르는 척하지만 실은 다른 경로의 영화를 만드는 일군의 젊은 한국 감독들이 세계 영화사에 등장하는 출발점이었다. 그들은 박찬욱의 말대로 ‘상업 장르의 표준에서 한 발짝만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들로 세련을 꾀했고 박찬욱의 곁에는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최동훈 등이 나란히 비슷한 노선을 추구했으며, 결이 조금 다르거나 너무 드문드문 영화를 만들었던 그들의 선배 이창동, 이명세 등도 이 행진에 이름을 올렸다.
주류로 올라선 박찬욱은 여세를 몰아 <친절한 금자씨>(2005)로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를 잇는 복수 3부작을 완성했고, 봉준호는 한국 도심 한복판에 괴수가 등장하는 <괴물>(2006)로 흥행 기록을 경신했으며 예술과 흥행 두 토끼를 잡는 그의 경이적인 행보는 <기생충>(2019)까지 이어진다. 최동훈은 한국형 케이퍼 무비의 시초인 <범죄의 재구성>(2004)의 여세를 몰아 <도둑들>(2012) 등으로 탄탄대로 상업 장르영화의 거두로 자리했으며 김지운은 한국형 만주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으로 하이브리드 스타일을 선보이는 한편 <악마를 보았다>(2010)와 같은 익스트림 고어영화까지 나아갔다.
뉴할리우드와 비교됐던 박찬욱, 봉준호 세대 영화의 혁신과 동시에 한국영화계는 할리우드를 벤치마킹하면서 이제는 제법 블록버스터 규모에 근접하는 장르의 대형화와 프랜차이즈를 시작했다. 한때 한국영화 흥행 지표의 대명사였던 종로의 서울극장이 존재감을 잃어간 사이에 대기업 멀티플렉스 체인의 고착화와 함께 스타 파워와 장르 관행의 경직화는 점점 만연했고 한국영화는 활황과 위기의 반복 사이클을 타면서 2000년대 초반의 창의적 활기를 잃어버린 대신 <추격자>(2008), <곡성>(2016)의 나홍진을 예외로 하면 <해운대>(2009)나 <신과 함께> 시리즈(2017~18)처럼 반들반들한 표면에 비해 깊이는 없고 감정적 장식으로 호객하는 상업영화들이 으스대는 전시장으로 변해갔다.
코로나 시대를 거쳐 만개한 OTT 플랫폼의 확장으로 한국 장르영화는 OTT 시리즈와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는데 마동석이라는 불세출의 스타 페르소나에 기초해 응징 서사 액션 프랜차이즈의 신기원을 연 <범죄도시> 시리즈(2017~)와 <파묘>(2024) 등의 오컬트 장르가 슬그머니 주류로 밀고 들어오는 현상을 주목하고 나면, <부산행>(2016) 이후 줄기차게 자기복제를 거듭하며 흥행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연상호와 <베테랑>(2015)으로 꾸준히 장르영화 시그니처를 갱신하는 류승완 등이 겨우 상업 장르영화의 생존자로 꼽을 정도다.
한국영화계는 이제 충무로를 이정표로 삼지 않고 각개전투에 돌입한 채 2000년대 초중반에 맹렬하게 밀어붙였던 모험적 기세를 잃어버린 절박한 상황에서, 규모를 키워 전 세계를 상대로 하거나 저예산으로 다시 대장정의 모험을 떠나야 하는 기로에 섰다. <무사>(2001)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무협영화의 표준을 다시 쓰려다 실패했으나 <아수라>(2016), <서울의 봄>(2022)으로 산등성이에 늠름하게 다시 선 김성수 감독의 사례는 아주 이례적인 것이 됐다. 그 고지 밑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창의적으로 재미있는 영화들을 만들었던 감독들, 운이 나쁘면 한두편에 그치고 겨우 운을 연장해도 열편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필모그래피를 남긴 감독들의 영화들을 기억하게 된다. 이를테면 <정글쥬스>(2002), <품행제로>(2002), <사랑니>(2005), <청연>(2005), <마파도>(2005), <형사 Duelist>(2005), <사생결단>(2006), <구타유발자들>(2006), <시실리 2km>(2004), <천하장사 마돈나>(2006), <님은 먼 곳에>(2008), <김씨표류기>(2009), <무뢰한>(2014) 등의 영화와 감독들이야말로 은밀하거나 통쾌한 장르영화의 즐거움을 우리에게 만끽하게 해준 공로로 영예로운 월계관을 씌워야 마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