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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누벨바그의 유령과 멜랑콜리, 이지현 평론가가 바라본 <국외자들>

영화 <국외자들>(1964)이 촬영될 즈음의 상황을 되짚는다. 당시 혁명적이었던 누벨바그의 열기가 시들면서 극장가에는 다시 전통적인 방식의 프랑스영화가 대두되고 있었다. 당시 누벨바그 작가들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400번의 구타>(1959) 후 프랑수아 트뤼포는 대중과 점차 멀어졌고, 알랭 레네의 신작 <뮤리엘>은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자크 리베트의 경우에는 <파리는 우리의 것>(1961)이 실패한 이후로 완전히 창작을 멈춘 상태였다. 그나마 에릭 로메르가 텔레비전용 저예산영화를 지속적으로 선보였지만, 그의 방식은 지극히 장인적인 모델에 가까웠다. 장뤼크 고다르는 자신의 동료들과 비슷한 처지에 속해 있었다. <네 멋대로 해라>(1960) 이후에 그는 <작은 병정>(1963)을 작업했지만, 이 작품은 알제리전쟁에 대한 언급 탓에 3년간 검열 중이었다. 그사이에 <여자는 여자다>(1961)와 <기관총부대>(1963)가 개봉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물론 <경멸>(1963)은 예외라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이 브리지트 바르도의 출연작 중 가장 적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란 사실은 상기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국외자들>을 작업하던 시기에 고다르는 사라지는 누벨바그의 불꽃을 되살려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캐스팅으로부터 시작되다

새 영화 <국외자들>을 위해 고다르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캐스팅이었다. 이 작품을 위해서 그는 안나 카리나와 재회했다. 이 영화에는 총 세명의 주연배우들이 등장하는데, 단언컨대 오딜 역의 그녀가 가장 돋보인다. 우둔하지만 아름다운 인물인 오딜은 두명의 다정한 사기꾼들에게 휩싸여 있다. 먼저 사미 프레이가 연기하는 프란스는 항상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착한 늑대 같은 캐릭터로,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9분45초보다 더 빨리 루브르 뛰기’를 제안하는 장본인이다. 그리고 클로드 브라소가 연기하는 아르튀르가 등장한다. 언뜻 매우 불량하고 죄질이 나빠 보이는 이 캐릭터는 실상 어린양에 더 가깝다. 삼촌의 나쁜 요구에 항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총을 들고 그는 도둑질에 뛰어든다. 이렇게 세 인물이 만나서 영화의 이야기가 성사된다. 그들은 파리 근교의 어느 저택에 숨겨진 다량의 현금을 훔치기 위한 계획을 도모하는데, 만약 그들 중 한명이 빠졌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계략이다.

고다르가 즐겨 사용한 코지프스키식 의미론에서 빌려서 표현하자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울지 않는다. 즉, 이 셋의 만남은 운명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서로 부딪히고 온갖 다양한 포즈를 지으면서 사건의 본질에 점점 더 다가간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제3자인 고다르의 목소리가 개입한다. 배우들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영화를 보다가도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면 관객들은 꿈에서 깬 듯 이야기에서 멀어진다. 일부 관객들은 이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논하기도 한다. 간혹 아주 다른 소설의 줄거리가 플롯 사이에 끼어들 때도 있다. 대표적으로 거짓말쟁이 인디언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이 일화를 전달하는 프란스의 얼굴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런 그를 오딜은 사랑스럽게 여긴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이것은 영화다”라고 직언하는 듯 보인다. 영화에서 소개되는 인디언 서사는 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이 쓴 것인데, 이 이야기를 통해 프란스는 처음으로 오딜에게 관심받는다. 뒤이어 그는 자신이 상상한 ‘니스에서 이탈리아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갈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그녀에게 들려주지만, 그녀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어쩌면 오딜이 사랑하는 것은 오직 타인의 이야기뿐인 것 같다. 프란스는 이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무언가를 깨닫는다. 전달된 이야기의 방식, 시네마의 오류를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들의 회합 장소가 영어를 가르치는 어학원이란 점은 의미심장하다. 현대의 모든 것은 세월과 함께 자동적으로 고전이 된다는 T. S. 엘리엇의 명언을 설파하는 그곳의 풍경은 간혹 <영화의 역사(들)>(1988~98)의 극영화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온갖 부차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진다. 영화는 뜬금없이 토머스 하디의 시를 글자로 보여주거나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주인공의 입을 통해 발음한다. 무언가를 보여주며 다른 요소를 연결시키고, 또 다른 것을 말하며 여타의 것을 재현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배우들의 얼굴은 영화를 유일하게 관통하는 통합의 요소가 된다. 파편화된 몽타주를 공간화시키는 이미지들의 존재, 이 장치가 모든 흩어진 사건을 한데 묶는다. 어쩌면 이 점이 고다르의 후기 작품과 이 영화의 진짜 차이점일 수도 있다.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발판으로 춤추는 인물들, 예술작품이 지워진 루브르를 흘러가듯 뜀박질하는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이 발딛고 선 파리 곳곳의 풍경이 도달하는 장소가 오쟁빌이란 점에 주목한다. 이곳이 파리 시내가 아니라 외딴 근교의 모래바람 휘날리는 장소라는 점은 흥미롭다.

오쟁빌의 저택에는 미국 소설에서 소개된 어느 도둑의 이야기가 재현되고 있다. 그곳의 여주인장은 현금을 눈앞에 쌓아두고 감추지 않는 방식으로 비밀스런 재화를 보관하는 중이다. 오딜은 말로만 전해지던 그 비법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다. 만일 그녀가 어학원에서 서사의 초월적인 힘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영화는 결코 클라이맥스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언컨대 고다르가 제작사인 컬럼비아 픽처스를 위해 여주인공과 누아르 다음으로 준비한 것은 웨스턴의 방식이다. 파리 시내에서 볼 수 없는 한적함을 머금은 교외의 어느 장소에서, 영화는 점차 인디언의 공격에 대항하는 서부극의 대목과 점점 더 가까워진다. 누구나 총을 들고 다니는 현실판 오케이목장을 지키는 것은 짖지 않는 개 한 마리뿐이다.

여러 오마주의 원전

이 영화가 고발하는 미국식 대중영화와 텔레비전의 성공 비밀에 대해 말할 차례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누벨바그의 유령을 떠올린다. 말하자면 이 작품이 루브르를 찬양하는 이유는 그곳에 보존된 예술이 아니라 그 건물의 말끔한 외양 때문이다. 이 점이 영화를 끊임없이 멜랑콜리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이중적으로 오마주한 <몽상가들>(2003)과 <펄프 픽션>(1994), <아비정전>(1990)의 특정 장면은 패러독스에 가깝다. 우리는 다시금 <영화의 역사(들)>를 생각한다. 그 영화가 중시하는 영화의 죄목, 무언가를 반사한 죄와 전쟁 이후에 너무 늦게 도착한 원죄에 대해 상기한다. 그럼에도 오딜을 통해 매력을 느끼는 것, 그것이 고다르의 유일한 창작방식일 것이다. 끊임없이 불우한 이미지를 통해 관객을 유혹하는 그의 방식, 아마도 시네마의 본질을 작품은 에둘러 표현하는 것 같다. 장르영화와 텔레비전 영상의 유치찬란한 발상, 그리고 누벨바그의 흑백에 가까운 모노톤의 기억을 상기한다. 몇몇의 아이콘과 날카로운 이미지로 남을 <국외자들>의 발견은 그런 맥락에서 근원적이다. 어쩌면 그 피상성만이 이 영화가 고발하는 진짜 서사일 수도 있다. 수많은 가짜와 가상의 이야기들, 이제 이 작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시네마스코프는 컬러로 채색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마음의 작업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과거의 이미지들과 함께 자유롭게,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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