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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비싼 하드커버 책 한권을 두고 친구와 나는 고민에 빠졌다. 학교 앞 서점에서 책을 읽던 친구는 갑자기 삐삐가 요란하게 울려서(슬프다, 이게 웬 시대극) 조용한 서점에 폐를 끼칠까 급하게 뛰어나와 공중전화로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손에 책이 있었다, 15분 전에 들고 있던 서점 책이. 야, 민폐 끼치기 싫었다며, 요새 그 서점 책이 안 팔려서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던데. (그러니까 책이란 새삼스럽게 안 팔리는 물건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책을 훔쳤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책을 돌려줄 것인가였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될까? 그러다 잡혀가면, 너 지난해에 데모하다가 유치장 갔잖아. 착하게 살고 싶었지만 세상의 편견이 두려웠던 전과자는 그렇게 갱생하지 못한 채 훔친 책을 팔아 죄책감이 섞였기에 한점 한점 더욱 소중했던 고기를 먹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그 애는 어쩌다 도둑이 되긴 했지만 장물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양심은 없어도 안목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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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를 둘러싼 일련의 이슈에 대해서는 조종국 편집위원, 김성훈 기자의 이번호 기획 기사를 참조하면 좋고 읽어볼 만한 지난 기사들도 많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까지 굳이 돌려 말할 필요는 없지 싶다. ‘일부 수도권 영화인들이 영화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부산시의 주장과 달리 부산국제영화제는 예나 지금이나 부산 시민의 품에 있다. 그것을 ‘가카’의 품으로 안겨주려는 사람이 다름 아닌 서병수 부산시장이다. 그런데 그 가카가 천년만년 가카일까. 이건 비아냥대는 얘기가 아니라 진심어린 충고다. 자, 며칠 전 서병수 시장 앞의 부산시장이었던 허남식 전 시장이 부산 사하갑 공천에서 김척수 예비후보에게 밀리는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3선 시장 출신과 초선 시의원 출신이 맞붙으면서 대부분 허남식 전 시장의 승리를 점쳤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허남식 전 시장은 2004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부산시장이자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이었다. 가장 큰 패배 이유로 ‘서부산 홀대론’이 꼽
[에디토리얼] 당신은 시장의 자격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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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있어 단 한명의 아티스트 혹은 단 한장의 음반만 꼽아야 한다면?” 누군가에게는 곤란할 이 질문이 내게는 전혀 곤란하지 않다. 왜냐하면 음악에 관한 한 나는 요지부동,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남자이기 때문이다. 1998년이었을까. 이 음반을 누군가가 추천해줬고, 이후로 이 아티스트와 앨범은 내 인생의 ‘Only One’이 되어버렸다. 이제 이 영광(?)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밝혀야 할 때다. 그는 바로 제프 버클리이고, 앨범 제목은 《Grace》(1994)다. 이 음반은 제프 버클리의 유일한 정규작이다. 그는 1966년에 태어나 1994년에 이 앨범을 발표하고 1997년 익사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제프 버클리는 무엇보다 간략하게 설명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아티스트였다. 음악적인 다채로움부터 실존적 아이러니(아버지 팀 버클리의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았으나 아버지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를 거쳐 비극적인 생의 마무리까지, 그가 지녔던 복합성은 가히 유례를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또한 재
[마감인간의 music] 내 인생의 ‘Only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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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스트 홈>은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월 스트리트의 시점으로 브리핑한 <빅 쇼트>의 리버스 숏이다. 은행 말만 믿고 담보대출을 유지해온 성실한 건설노동자 데니스(앤드루 가필드)는 갑작스런 퇴거 명령을 받는다. 3대가 살아온 집에서 그는 불법침입자로 불린다. 그러나 부동산 업자(마이클 섀넌)에게 데니스의 ‘스위트 홈’은 비워야 할 또 하나의 박스일 따름이다. 하루만 말미를 달라 청하는 데니스와 어머니에게 2분이 주어진다. 데니스 모자는 침실까지 들어온 경찰의 재촉을 받으며 두서없이 필수품을 챙긴다. 이 와중에도 아버지와 할머니는 막 하교한 소년을, 평정한 얼굴로 안심시키려고 애쓴다. 비탄과 굴욕, 분노가 뒤엉킨 이 아수라장에서, 슬픔은 한참 더 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03/08
<아노말리사>의 찰리 카우프먼과 듀크 존슨 공동감독은 <인사이드 아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라이프, 액추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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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곧 21세기가 온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강대국이 되고 누구나 충분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 성차별이 사라질 거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첨단기술에 대한 낙관론도 있었다. ‘21’은 마법과도 같은 숫자였다. 그때가 오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사라지기라도 하는 양 당시의 어른들은 새로운 시대가 올 거라고 말했다. 나는 대충 흘려들으면서도 때가 되면 그 말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법처럼.
그리고 21세기가 되었다.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긍정적인 일들은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날짜 탓인지 5년 전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떠오른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일은 우리에게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생선이 테이블에 올라올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잊지 않고 방사능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다. 한창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진행 중일 때, 나는 이 글을 어떤 내용으로 채울 수 있을지 궁금했다. 섣불리 낙관할 수는 없었지만 단상
[한유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밝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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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적이 실수할 때 방해하지 않아.” “전사로 와서 전사자로 돌아갈 순 없다.” 비무장지대에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과 그를 북으로 돌려보내려는 한국 특전사가 육탄전을 벌이다 잘 갈고닦은 멋진 말을 주고받으며 헤어진다. 총을 겨누고 격투를 해도, 여기는 대화의 기량이 가장 중요한 로맨틱 코미디의 세계다.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특전사 대위 유시진(송중기)의 위협적인 신체능력을 자주 보여주지만, 그를 위험한 남자와 위험한 직업에 투신한 남자로 가르는 경계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상체를 벗고 ‘알통구보’하는 특전사들을 병풍처럼 세우면서도 유 대위가 외과의 강모연(송혜교) 선생 앞에서 함부로 옷을 벗어 근육을 자랑하는 일은 없다. 티셔츠를 올려 배를 살짝 들추는 장면조차 상황의 통제권은 상처를 치료하는 강 선생에게 있다.
언제 군용헬기를 타고 훌쩍 떠날지 모르는 남자. 어디서 뭘 하는지도 물을 수 없는 남자의 연인이 되긴 곤란하다고 강 선생이 결론을 낼 때마다
[유선주의 TVIEW] 품위를 갖춘 강인한 남자의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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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중반, 신촌 로터리 중앙에는 시계탑이 있었고 지금보다는 버스 정류장이 많았다. 버스 정류장에는 꼭 한두개의 신문 가판대가 있었는데 새마을운동 깃발의 색깔과 똑같은 초록색의 가판대에는 신문뿐만이 아니라 울긋불긋한 색깔의 만화책과 각종 성인 주간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고우영의 성인극화 <수호지>가 인기를 끌자, 가판대 위에는 성인극화란 딱지를 단 얇은 만화책들이 앞다투어 진열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의 어느 날, 나의 눈길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선데이서울>의 표지였다. 미스 롯데 서미경이 등이 훤히 드러난 붉은 드레스를 입고 고개를 돌린 뒷모습의 표지였다. 사고 싶었지만 어른들이 보는 책이란 생각에 감히 <선데이서울>을 살 수 없었고, 그나마 만화책은 어른들이 보는 것이라도 덜 죄스러워 옆에 있던 성인극화 <여간첩 마타하리>를 사서 보았다. 만홧가게에서 어린이 만화를 보던 내가 성인극화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 것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사악한 악당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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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후회를 한다. 한 사람이 일생에서 겪는 후회의 총량을 무게로 느낄 수 있다면 인류는 중력 없이도 땅에 붙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쪼그라드는 이유가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후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어깨도 쑤시고 등도 구부러지고 점점 더 작아지다가 마침내 대지로 스며드는.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필연적인 질문. 거기서 수없이 많은 시간여행 이야기들이 태어났다. 시간여행 이야기가 주는 재미의 팔할은 과거로 돌아가 무언가를 바꿨을 때 그 결과가 시간여행자의 현재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과연 그럴까. 마티가 과거의 아버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비프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게 했을 때, 현재시점의 아버지 또한 변모해 더이상 루저가 아닌 성공적인 작가로 거듭나는 게 가능한 걸까(<백 투 더 퓨처>). 날짜가 바뀌지 않고 하루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을 때 그 하루의 양상은 기본적으로 똑같이 반복되는 걸까(<사랑의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모두가 원하는, 그러나 아무도 할 수 없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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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의 이번호 특집은 ‘중드’다. 지난해 말부터 화제였던 <랑야방: 권력의 기록>을 시작으로 <씨네21>의 알파고 윤혜지 기자가 쓴 친절한 입문기를 따라가보시길. 단순히 ‘무협 드라마’일 것이라 예상하는 이들에게, 스타일도 물량도 우리가 생각했던 수준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게 단 하나의 중드를 꼽으라면, 엄밀하게 말해 TVB 방송국의 ‘홍드’라고 할 수 있는 추억의 <의천도룡기>(1986)다. 장무기로 출연한 양조위, 그의 아버지 장취산으로 출연한 임달화 모두 이 드라마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몇회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성인이 된 장무기 역의 양조위가 물속에서 어푸어푸하며 섹시하게 일어나 화면을 자신의 얼굴로 꽉 채우던 그 회의 마지막 정지화면이 잊히지 않는다. 양조위라는 대스타가 탄생하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중경삼림>에서 경찰관 양조위가 모자를 벗으며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의 왕정문 앞
[에디토리얼] <의천도룡기>를 추억하며, 알파고의 승리를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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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온, 피타입, 넋업샨, 라임어택, 키비, 마이노스 등이 소속된 한국의 힙합 크루 불한당의 신곡이다. 누군가는 불한당을 가리켜 국민의당처럼 새로 나온 당이 아니냐는 재미없는 농담을 던졌지만, 사실 재미있어서 이렇게 글에 담는다. 아무튼 따져보니 거의 3년 만의 신곡이다. 힙합 팬 입장에서 이 노래는 아무래도 얼마 전 발표된 가리온의 신곡 <Heritage>와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가리온이 두 노래에 모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두 노래가 공통적으로 지닌 ‘옛것의 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Heritage>는 1990년대 중반의 뉴욕 힙합을 연상시킨다. 한편 <We Back>은 2000년대 초반,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이 노래는 나도 모르게 쥬라식 파이브를 떠올리게 한다. <Jayou> 같은 노래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노래를 듣는 와중에 가사에 쥬라식 파이브가 언급되는 경험은 오묘한 기분을 안긴다. 두
[마감인간의 music] 제대로 일을 벌이려는 중이지 맘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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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없는 순응사회를 풍자하는 양식으로 꼭두각시 인형극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존 말코비치를 퍼펫처럼 조종하고 <시넥도키 뉴욕>에서 도시를 모형으로 축소한 찰리 카우프먼 작가/감독이라면 더 설명이 필요 없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 <아노말리사>의 인물은 정말 인형이다. 신드롬 애호가인 카우프먼이 선택한 <아노말리사>의 모티브는 프레골리 망상(Fregoli delusion)이다. 자기 외의 모든 타인을 위장한 동일 인물로 인식하는 이 증후군은 주인공 마이클(데이비드 튤리스)이 묵는 극중 호텔의 이름으로 인용됐다. “남들은 다 똑같다”는 마이클의 인지장애는, 사랑에 빠지는 두 주인공을 제외한 남녀노소 전원의 목소리를 한 배우(톰 누난)가 연기함으로써 표현된다. 라디오극 버전의 <아노말리사>가 무척 궁금하다. 얼마나 혼란스럽고 오묘할지.
02/19
지난해 10월 아홉명의 관객과 조를 이루어 영화를 관람하는 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인형, 인간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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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이기도 했던 소설가 보르헤스는 “천국이 있다면 도서관 같은 곳일 것”이라 말했다. 그의 단편 중에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작품이 있다. 그가 상상한 도서관은 육각형 모양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열실로 구성되고, 그곳에 비치된 책들은 모두 410쪽의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책의 글자들은 쉼표, 마침표, 여백을 포함한 알파벳으로 조합되어 있는데, 이 책들은 가능한 모든 알파벳의 조합을 망라하고 있다. 결국 세상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책은 물론이고 장차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책이 이 도서관에 있게 된다. 이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들의 수는 아마 지금까지 알려진 우주의 모든 원자의 수효보다 많으리라. 이러한 보르헤스의 발상을 확장해보면, 세상의 모든 음악, 세상의 모든 미술, 세상의 모든 영화를 소장한 아카이브를 상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물론 그 엄청난 쓰레기 더미에서 쓸 만한 작품들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이러한
[조광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바벨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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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마루코는 아홉살>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됐던 <치비마루코짱>은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20여년에 걸쳐 방송되고 있는 일본의 국민 애니메이션이다. 초등학교 3학년인 마루코와 언니, 부모님, 할아버지 등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부딪히며 일어나는 이야기인데, 아홉살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과 가족의 모습이 꾸밈없이 그려진다.
KBS와 투니버스에서 방송되고 있는 <파파독>은 이 <마루코는 아홉살>을 떠올리게 한다. 한 소녀를 중심으로 캐릭터가 파생된다. 초등학생 유별이가 겪는 학교생활의 다양한 모습- 반장 선거, 왕따, 소풍 등- 을 그리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세 아이의 아빠이자 3인조 걸그룹 ‘큐티스’를 좋아하는 철없는 어른, 유봉구가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그가 우연한 계기로 개(진짜 ‘멍멍개’다)가 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이 프로그램의 제목이 <파파독>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림체가 어딘가 익숙하다면 캐릭터 디
[김호상의 TVIEW] 가족 시트콤식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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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거의 모든 일간지가 보도했던 기사의 한 토막. “올해 일곱살 난 어린이 중 65%는 현재 없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제목은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다소 윤색한 것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전세계 일자리의 65%를 차지하고 있는 상위 15개국에서 향후 5년 안에 71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대신에 20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탄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약 500만개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인공지능(A.I.) 기술의 급속한 발전 때문이다. 초기 산업혁명에서 인간의 생산직을 빼앗았던 기계가 2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인간의 사무직 노동마저 빼앗게 된 것이다.
인공지능이 자아를 인식한다면
다 떠나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해봤다. 사람들에게 음악을 공급해주는 디제이의 일을 컴퓨터가 대신해주는 것은 이미 익숙하다. 음원 사이트, 인터넷-디지털 방송국 모두가 소비자가 설정해놓은 범주 안에
[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그들은 우리 밖에 있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