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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박찬욱 감독의 단편 <심판>(1999)을 다시 보았다.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굳이 지금의 박찬욱을 설명할 수 있는 진정한 출발이라고 부른다면, 직전에 만든 <심판>에서 지금의 박찬욱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요소가 엿보여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그는 <아가씨>에 대해 신년호인 1036호(박찬욱, 김지운, 최동훈, 류승완, 나홍진 표지 촬영 및 좌담)와 창간 21주년 기념 1051호(박찬욱, 김상범, 류성희, 정서경, 오달수, 류승완 좌담)를 통해 거듭 ‘믿음’에 관한 영화라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심판> 또한 그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특히 <심판>의 배우 기주봉, 고인배는 죽은 여자의 시신에 얼굴까지 나란히 맞대어 제각각 자신의 딸이라고 주장하며 대립하는데, 그들은 <공동경비구역 JSA>에 각각 대립하는 남한군과 북한군으로 나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믿거나 말거나, 아가씨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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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스크린 도어가 열리자 백색 마스크 군단이 쏟아져나온다. 행여나 서로의 몸이 닿을세라 미묘하게 움찔거리면서. 누군가 밭은기침을 내면 그 주변인들의 미간에 주름살이 간다. 주의와 경계를 넘어선 어떤 적개. 옆칸에 탈 걸, 다음 기차를 기다릴 걸, 괜스레 집을 나와 이 난리를…. 수많은 가정형의 후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자책한다. 그리고 두렵다. 어느새 자책은 화가 돼 분출된다. 불특정한 다수의 타인이 잠정적인 적이 돼버리는 건 순식간이다. 지하철, 공원, 식당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서, 비일상적인 적개의 감정이 일상의 감정이 된다.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지난해 늦봄부터 한여름까지 메르스가 몰고 온 일시적인 상황 속 감정만은 아니었을 거다. 부정확한 정보와 불확실한 조치는 불신과 불안으로 이어진다. 급기야 무작위적인 불행의 전의에 끝모를 적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02
그때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를 읽게 된 건 우연치고는
[정지혜의 숨은그림찾기] ‘인간적인’ 가능성은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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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접했을 때 미셸 공드리라는 감독이 누구인지 몰랐다. 어떻게 보게 되었나 기억나지 않지만, 짐 캐리가 그저 표정으로 웃기는 코미디 배우가 아니란 건 <트루먼 쇼>(1998)로 알고 있었다. 영화는 2004년에 개봉했고, 한국 개봉이 1년 정도 늦었으니 내가 본 건 2005년이었다. 당시 일기를 뒤적이니 ‘그해 본 최고의 영화 중 세 손가락에 든다’고 적혀 있었다. 지금보다 문화생활에 활발했던 시절이었다. 당시 <이터널 선샤인>을 본 젊은이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이후 미셸 공드리의 팬이 되었다. 후속작 <수면의 과학>(2006)도 극장에서 무척 재미있게 봤는데, 이 영화 이후 미셸 공드리 자체에 주위 사람들의 호불호가 갈리기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이 원고를 쓰기 전, 다른 글을 하나 정리하다가 그야말로 문득 《이터널 선샤인》 사운드트랙이 생각났다.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가 부른 O.S.T 두 번째 곡 &
[마감인간의 music] 이런 영화도 있구나 -《이터널 선샤인》 사운드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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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가 고향이다. 충주는 사과가 유명하다. 사과는 피부 미용에 좋다. 피부 미용엔 온천도 좋은데, 온천 하면 수안보다. 수안보는 충주에 있다. 충주는 피부 미용에 좋은 도시다. 그래서, 지금 내 인생의 영화가 <겟잇뷰티>라도 되는 거냐고?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유명 여자 연예인이 나와서 자신의 파우치를 개봉하는 순간 ㄴr는 ㄱr끔 눙무를 흘ㄹL다. 그리고, ㄱr끔 ㅇㅣ렇ㄱㅔ ㄱH소리를 하눈 ㄴHㄱr 별루ㄷr.
2001년 어느 여름, 반복되는 수안보 온천욕에 더이상 뽀송해질 곳도 없던 나는 강원도 인제로 피서지를 틀었다. 부자 친구가 있었는데 자기 아버지가 인제에 별장이 있다고 했다. 친구들끼리만 아주 재밌게 놀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들뜬 마음으로 도착한 별장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별안간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아저씨 네댓명이 이미 얼큰해져 있었다. 부자 친구를 쳐다봤다. 부자 친구는 먼 산을 바라보며 경치가 좋다는 애먼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애초에 부자 말은
[내 인생의 영화] 박정민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헐 저 아저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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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들은 흔히 먹잇감을 찾아 눈을 번뜩이는 승냥이로 치부되곤 한다. 그들은 어슬렁댄다. 누군가의 주검이나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장면은 외면하기 힘든 훌륭한 사냥감이다. 으르렁 찰칵, 크르렁 찰칵. 카메라를 든 승냥이들은 찰칵거림으로 으르렁댄다. 허나 그것이 맛있다!는 감탄사일까.
1993년 아프리카 수단에서 굶주려 엎드린 아이와 아이가 죽기를 기다리는 듯한 검은 독수리를 찍었던 케빈 카터는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찬사와 동시에 비난이 쏟아졌다. 카터는 자살했다.
2015년 터키 해안에서 엎드려 죽은 채 발견된 3살배기 시리아 난민 쿠르디를 찍었던 닐루페르 데미르에게 쏟아진 것 또한 ‘용기 있는 찰칵’에 대한 찬사와 ‘타인의 죽음을 볼거리로 전락시킨 찰칵’에 대한 비난이었다. 데미르는 어땠을까. 카터를 떠올린 적은 없을까.
‘인간이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 고통이라는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관심사임을, 고통의 장면이야말로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만다는
[노순택의 사진의 털] 찍히는 모욕 찍는 모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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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이 없어진 걸 안 것은 택시에 탄 뒤였다. 순간 택시비 생각에 막막했지만 친절한 택시 기사는 냉큼 찾으러 가보라며 요금 따윈 운운하지 않고 바로 세워주었다. 지나온 궤적을 따라 걸으며 지갑을 찾았지만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고 너무 어두웠다. 검은색 지갑이 눈에 띌 리 없었다. 지갑을 포기하고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장소로 갔다. 후배를 택시 내리는 곳까지 오게 해서 계산을 시키고 지갑 잃은 상실감을 핑계로 술을 퍼마셨다. 어차피 지갑이 없어 술값도 내 몫이 아니니 맘 놓고 술이 잘 들어갈 수밖에. 우연히 만난 배우 일행과 합석을 했다. 그날따라 왜 그랬을까. 평소라면 무례한 발언에 허허실실 넘어가는데 예민한 상태여서 그랬는지 내쪽에서 걸고넘어졌다. 일행 중 섞여 있던 초면의 남자가 날 얼마나 안다고 본인의 여자 후배들에게 하듯 꼰대짓을 하기에 노골적으로 욕지거리를 해주자 그제야 당황한 주변인들에 의해 자리가 정리됐다.
속도 아프고, 지갑 생각에 하루 종일 우울했다. 현금
[노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돌아온 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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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히치콕의 감독 데뷔작은 <쾌락의 정원>(1925)이다. 영화의 주 배경은 런던이지만, 데뷔작부터 히치콕은 이국정서를 자극하는 지리적 호기심을 숨기지 않는다. 알다시피 낯선 곳에 대한 열망은 히치콕 영화의 중요한 서사적 동기다. 데뷔작에서 강조된 장소가 이탈리아 북부의 코모 호수(Lago di Como)다.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다. 영화는 ‘쾌락의 정원’이라는 카바레에서 일하는 두 여성 댄서 각자의 사랑 이야기다. 둘 가운데 상대적으로 선한 여성이 영악한 남자의 꾐에 빠져 신혼여행을 가는 곳이 바로 코모 호수다. 남성은 식민지 아프리카로의 전출을 앞두고 결혼을 서두르고, 여성은 그 계획을 사랑으로만 해석한다. 여성은 아름다운 꿈을 꾸듯 남자를 따라 호수로 향한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히치콕은 데뷔 때부터 스릴러를 잘 만들었다는 점이다.
히치콕, 코모 호수에서 데뷔작을 찍다
<쾌락의 정원>의 ‘코모 시퀀스’는 호수 주변에 있는
[한창호의 트립 투 이탈리아] 히치콕의 스릴러에서 코먼의 호러까지 <쾌락의 정원> <007 카지노 로얄> <로코와 그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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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살의 번역가 박완(고현정)은 엄마 난희(고두심)의 초등학교 동문들을 이모라고 부른다. 구두쇠 남편(신구)이 약속했던 세계일주를 기다리는 정아 이모(나문희). 자식들에게 ‘아빠보다 엄마가 먼저 가셨어야 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희자 이모(김혜자). 유부남과 연하남 스캔들에 휘말렸던 연예인 영원 이모(박원숙)는 화통하고 다감하며, 카페를 하는 충남 이모(윤여정)는 가난한 예술가와 어울리는 재미에 취해 있지만 그들에게 물주 취급 받는 것을 모른다.
노희경 작가의 tvN <디어 마이 프렌즈>에는 누구 하나 쉬운 인생이 없다. 개성이 강한 60, 70대 여성들을 ‘이모’라는 호칭으로 묶어 서술한 것은 나이 든 이를 꼰대 같다며 귀찮아했던 완이 그들의 회고를 전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그들의 인생에 주석을 붙이는 내레이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주석이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불편할 때가 있다.
안개 자욱한 시골 도로에서 정아와 희자가
[유선주의 TVIEW] <디어 마이 프렌즈> 분명히 말해야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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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핑거스미스>에서 석스비 부인이 보여주는 이야기 말미의 변화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해왔다. <핑거스미스>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사람은 이모부도 아니고 젠틀맨도 아니다. 석스비 부인이다. 그는 무언가를 그토록 오랫동안 계획하고 치밀하게 조종해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키운 딸과 낳은 딸 앞에서 어떻게 그리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단 말인가.
단지 키운 딸을 향한 모성애나 양심의 가책이 작동한 모양이라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재미있게 잘 읽고 있던 이야기에 없던 틈이 큼지막하게 벌어진 것 같아 아무래도 개운치 않았다. 그 틈을 매워줄 다른 반전이 있을 줄 알았으나 남아 있는 페이지는 속절없이 동이 났다.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한 박찬욱의 <아가씨>가 이 부분을 어떻게 바꾸고 개연성을 통제했을지 궁금했다. 영화를 보고 궁금증이 풀렸다.
애초에 그런 설정 다 날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아가씨>가 원작의 설정을 버리면서 취한 몇 가지 영화적 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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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AFI 유학 중이던 류성희 미술감독을 한국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바로 왕가위 감독이다. 무슨 얘기인가 하니, 유학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 그녀 앞에 등장한 영화가 바로 왕가위의 <동사서독>(1994)이었다. 임청하가 아무 말 없이 칼을 차아아악 가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때 류성희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한 웨스턴영화의 바를 작업하던 중이었다. 건맨들이 뒤엉키는 웨스턴 바를 만들고 있던 그때 봤던 한편의 아시아 무협영화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심지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동사서독> 상영회를 열기도 했다. “서양 애들한테 지지 않으려고 밤새 연구해서 웨스턴 바를 멋지게 만들었지만 사실 그건 다 공부해서 하는 거고, 그냥 어느 순간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리병을 들고서 1인2역을 하며 어딘가 미친 것 같은 임청하의 행동도 심금을 울렸고, 그저 기억을 희미하게 없애준다는 취생몽사라는 술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류성희 미술감독의 벌컨상 수상을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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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의 슈퍼히어로 ‘블랙 팬서’가 단독 주연인 영화는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연출을 맡는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간다고 했던가. 아마도 마블은 그의 두 번째 연출작이자 <록키> 시리즈를 잇는 속편 <크리드>의 완성도를 보고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1976년, 부둣가에서 고리대금업자 수금이나 하며 소일하던 서른살 ‘록키’가 세계 챔피언과의 일생일대의 대전 기회를 얻었던 것처럼, 1986년생의 젊은 할리우드 신인감독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물론 <크리드>는 그만한 기회와 대우를 받아 마땅한 영화다.
그의 곁에는 연인 애드리안도 친구 폴리도 스승 미키도 떠나고 없다. 당대 최고의 인기 복서 록키 발보아는 아직 세상에 남아 있다. 여전히 필라델피아를 벗어나지 않은 채 그가 살던 동네에서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다. ‘이탈리아 종마’ 록키는 그가 살아가는 영화 속 세상 안에서 존경받는 전설적 스포츠 영웅이다. 생각해보니 그를 연기한 실베스터 스탤론이
[김현수의 야간재생] “내 인생? 나쁘지 않았어” <크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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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트로피컬 하우스라는 장르가 인기다. 처음엔 비주류였지만 이젠 저스틴 비버의 1위 싱글 <What Do You Mean?>에 차용될 정도로 친근한 장르가 됐다. 음악적 특징은 ‘트로피컬’이란 이름처럼 열대나 여름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는 것이다. 익살맞은 마림바 퍼커션을 쓰거나 부드러운 플루트와 피아노 선율을 애용한다. 그게 뭐 특별하냐 싶겠지만 테마 멜로디를 장대한 신스로 채우는 최근의 일렉트로닉 경향을 생각하면 독특하다 못해 역행에 가까운 시도다. 카이고는 이 트로피컬 하우스를 대중화한 뮤지션이다. 지중해와 카리브해 느낌의 하우스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카이고 이전엔 주류의 러브콜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Firestone>이 히트한 이후로 상황이 달라졌다. ‘뭐 신선한 거 없을까?’ 찾던 뮤지션들이 너도나도 이 장르에 뛰어들었다. 일렉트로닉 대세를 따르고 싶지만 부드러운 걸 원했던 쪽에서 특히 선호했다. 트로피컬 하우스는 EDM답지 않은 일렉트로닉
[마감인간의 music] 스타일을 만들고 넘어서기 - 카이고 《Cloud 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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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밀가루성애자의 일용할 양식, 라면과 어묵. 보름 동안 먹지 못하고 있다. 내가 과민한 건가. 국내 유일의 소맥제분 기업에서 썩은 밀가루를 납품했고, 대부분의 라면, 어묵, 맥주, 맛살, 햄, 과자 등이 바로 이 소맥전분으로 제조됐다는 내부자 고발이 있었는데도 너무들 조용하다. 후속 보도도 없고, 조사하겠다던 경찰의 결과 발표도 없다. 대형 식품기업들은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었다. 그런데도, 1년에 1인당 평균 74개로 세계에서 라면을 가장 많이 먹는 나라의 시민들 반응이 몹시 차분하다. 다들 썩은 쥐와 곰팡이와 방부제 정도는 이제 참고 먹을 만한 것인가.
하기는 썩은 쥐와 밀가루의 콜라보보다 이 둔중한 체념이 더 괴이쩍다. 사회적 부패가 일상화되어서 웬만한 위험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정도로 내성이 생긴 걸까. 가습기 살균제처럼 피해자 규모와 치명적인 위험 요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야 그제야 소독약 바르듯 한철 반짝 분노하고 마는 걸까.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삶의 감각이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말해져야 할 것들 - ‘썩은 밀가루’ 논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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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의미로 무서운 데뷔작이자 그해의 영화였던 나홍진의 <추격자>(2008)를 심야에 보고 홀로 돌아가던 길을 기억한다. 서사의 내부 논리와 작동에 무리가 없는, 제목 그대로 시종일관 내달리는 영화였지만 영화가 끝나자 남겨진 감정은 ‘모호함’이었다. 놀랍게도 이 잘빠진 스릴러는 악(惡)이 끝내 처벌받아 나름대로 세상의 정의가 지켜졌다고 착각하게 하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다. 관객이 영화에서 영민(하정우)의 악과 그 원인, 이유를 이해할 방도는 없다. 그가 조카의 머리에 남겨놓은 상처와 거처했던 반지하의 벽에 그려놓은 그림 정도가 결코 설명되지 않는 악의 내면에 대해 영화가 묘사한 전부다. 희생자의 딸을 바라보는 중호(김윤석)의 모습과 창문 너머 서울의 밤하늘을 배치한 엔딩 컷이 결국 전해준 건, 이유 없는 악에게서 누구 하나 온전히 지켜내지 못하는 이 세계의 절망과 돌아가거나 나아갈 곳 없는 모호한 감정이었다.
관객이 길을 잃게 하는 일
이 ‘모호함’은 최근 한국영화에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엑소시스트>, <소서러>, <곡성> 악(惡)의 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