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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렉트로닉 댄스 신에는 독특한 연례행사가 하나 있다. 바로 ‘톱100 디제이’ 랭킹 투표다. 1993년부터 영국의 <디제이 매거진>(DJ Magazine)이 주최해온 투표로, 독자들에 의해 매해 최고의 인기 디제이 100명이 선정된다. 이곳에 순위가 오르면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때문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 유명한 톱100 투표가 지난 7월6일 시작됐다. EDM이 세계적인 장르로 떠오른 시점이라 벌써부터 열기가 뜨겁다. 디제이들의 투표 독려 광고도 치열해지고 있다. 이즈음 <디제이 매거진>의 광고 지면은 디제이들의 자기 홍보로 넘친다. 캠페인 비용으로 엄청난 액수를 쏟아붓기도 한다.
지켜보는 마음은 씁쓸하다. 아티스트에 랭킹을 매기는 것도 이상한데(올림픽도 아니고!), 서로 뽑아달라고 광고전까지 벌이다니, 얼마나 황당한가. 최근엔 이 투표를 없애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신의 독설가들은 이 투표가 쓰레기라며 강도 높은 직언을 날리기도 한다
[마감인간의 music] 랭킹의 의미는? - 디미트리 베가스 앤드 라이크 마이크, 마틴 개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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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새 한 마리가 뽀르르 손안에 날아들었다. 살짝 입김을 불어주었는데 손 위에 똥을 찍 싸더니 그만 죽고 말았다. 좋아할 틈도, 똥을 쌌다 나무랄 틈도 없이 죽은 것이었다. 곁에 있던 여자친구가 새를 죽이면 어떡하냐며 발을 동동 구르며 나무랐다. 나는 새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새를 죽였다는 사실은 더욱 믿을 수 없었다. 녀석을 손에 안은 채 귀로 가져갔다. 행여 심장 소리가 들리지는 않을까. 나의 숨을 멈추고, 너의 박동을 들으려 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따뜻했다(곧 식겠지). 아직은 부드러웠다(곧 굳겠지).
내가 죽인 걸까. 단지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 입김은 죽으라는 것도 열심히 살라는 지시나 명령도 아닌 그저 인사였을 뿐인데.
나를 원망했다. 일단 죽었으니, 내 손에서 죽었으니 나를 원망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새를 원망하고 있었다. 하필 내 손에 날아와 까무룩 죽어버리다니.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것은 아
[노순택의 사진의 털] 새야, 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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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입을 모아 망했다 말하지만, M. 나이트 샤말란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감독이다. 사실 나는 영화라는 매체를 다소 가늘게 눈을 뜨고 의심하며 보는 편인데, 때로 영화가 자신이 영화임을 숨기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라고, 이곳에 굉장한 것이, 진실이 있다고 말하는 듯한 영화들, 어떤 진실을 포착해내는 기적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믿는 듯한 영화를 볼 때, 나는 불편함을 느끼고야마는 것이다. 정말? 진짜? 그게 진짜야? 진실이 거기에 있어? 자꾸 그렇게 묻고 싶어져서.
내가 샤말란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샤말란의 영화는 언제나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그의 영화는 이야기 속에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전개되지만 마지막에 와서는 그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어, 사실 이건 그냥 이야기야, 환상이야, 허구일 뿐이야, 그리고 너는 너의 삶=현실을 살아가야 해, 라며 갑자기 발을 빼고 영화를 끝내버린다. 세
[내 인생의 영화] 황인찬의 <레이디 인 더 워터> ‘이야기’를 돌려보내는 작은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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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는 아재다. 아무리 옷가게에서 허리 사이즈가 29인치라고 우겨도 육체의 주름은 속일 수 없다. 아무리 최신 영화 정보를 꿰고 인디 음악을 덕질해도 트로트 한 가락에 곧장 시대적 감수성이 눈물샘처럼 봉인 해제되는 나는 아재다. 자본주의 청춘신화에 결박된 채 새벽 조깅과 양파 다이어트로 뱃살과 전쟁을 벌인들 물기 머금은 청춘의 시간이 복원될 리 있겠나. 사라진 시간을 질투하는 순간, 누구나 아재가 된다.
그런 점에서 ‘아재파탈’이란 최신 유행어, 그거 되게 남우세스럽다. 염치없는 말이다. 중년 남성의 지갑을 열게 하려는 상품미학의 일환이라면 그저 자본의 관성이려니 하겠지만, 아재감성, 아재개그, 아재파탈로 이어지는 매스미디어의 요란한 자화자찬 북새통을 보고 있자면 모골이 다 송연할 지경이다.
애초에 ‘아재’는 ‘아저씨’를 희화화하기 위해 소환된 표현이었다. 그 저변에는 개저씨, K-저씨 같은 속어들이 매섭게 중년 남성에 대한 반감을 표상하고 있었다. 일자리 없는 청년들의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 염치없기도 하지, 아재파탈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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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은 장래에 예술이란 개념은 중2병의 하위 장르가 될지 모르겠다. 1% 귀족들 외에 모두 개돼지일 뿐인 야만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 어쩌고 하며 고민하는 걸 들켰다간 현실 인식이 매우 떨어진다는 진단을 받는다. 완전무결한 예술이란, 일기는 일기장에 쓰고 그 일기장을 불에 태운 다음 내가 뭔가를 썼다는 사실을 깨끗이 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자신은 지킬 수 있다. 무엇으로부터? 창밖의 미친 세계와 매정한 타인으로부터. 그러나 야망을 가진 인간은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계로 나가고야 만다. 겨우 글을 쓸 줄 안다는 한줌의 재능만을 가지고서, 인간은 과연 세계의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이 재능에 문학적 감성과 회화적 감각이 더해지고, 게다가 그 성격에 완벽함에 대한 강박까지 있다면? 영화를 택해 감독을 꿈꾸어볼 것. 그것은 능히 한 기업을, 한 사업을 망하게 할 수 있다. 내 일기장이 아니라 남의 돈을 불태울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 예수가 되는 일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혼자서 치른 마이클 치미노 추모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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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른 안드레센을 다시 ‘만난 건’, 그러니까 그의 생사를 확인한 건 올 초 열린 스웨덴 예테보리국제영화제에서였다. ‘호텔 페티시’임을 자처하는 크리스티안 페트리 감독은 다큐멘터리 <더 호텔>(2016)을 통해 무려 10년간 전세계의 오래된 호텔을 다니며 호텔이 가진 의미를 되짚어보는 투어를 한다. 몇 백년 된 일본의 온천장이나 <전망 좋은 방>(1985)의 배경이 된 이탈리아 피렌체의 호텔 같은 곳이 등장하니 참으로 고상한 투어가 아닐 수 없다.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서 쇠약해진 작곡가 구스타브 아센바흐(더크 보가드)의 심장을 뛰게 만든 타지오를 연기한 비에른 안드레센은 페트리 감독이 10년간 만난 다큐멘터리의 인물 중 한명이었다. 캄캄한 극장 안에서 나는 타지오를 향해 ‘사랑한다’, ‘누구한테도 그렇게 미소를 짓지 말라’고 절규하던 구스타브 교수마냥 탄식을 보냈다.
차기작 소식보다 비행기 사고, 약물중독으로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는 루
[이화정의 다른 나라에서] 탐미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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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운동화 중 어느 것이 낳나요?” 웹사이트 게시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질문이다. 철자법이 틀린 건 그렇다 치고 의미 전달 자체도 애매하게 변질되어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간혹 바로잡아주는 댓글에는, ‘빡빡하게 굴지 말라’ 등의 답들이 수두룩하게 달린다. 그렇다고 우리말을 곱게 쓰고, 철자법을 맞춰 쓰자는 운동을 시작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나친 줄임말과 신조어 속에 세대간의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 2016년 한국에서는, 소통을 위한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조금은 더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KBS1의 <안녕 우리말>은 공중파 방송에서 만들어야 할 적합한 콘텐츠 중 하나로 보인다.
무엇보다 주요 타깃층인 청소년을 위해 주인공을 아이돌 걸그룹 걸스데이의 민아로 설정했다. 3분 남짓한 시간에 풀어내는 이야기와 언어들이 요즘 10대, 20대들이 살아가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도 콘텐츠의 접근성을 높인다. 바른말의 상징과
[김호상의 TVIEW] <안녕 우리말> 착한 프로그램의 존재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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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비가 쏟아지던 1990년대의 어느 여름, 선배 한명이 초췌한 몰골로 나타났다. “나 익사할 뻔했어.” 뭐야, 돈 없다고 술값 걷을 때만 되면 취한 척하고 도망가더니(집안 3대가 말술) 혼자 물놀이하고 온 거야? 그것도 장마철에? 선배는 울먹였다, 공짜 밥으로 토실했던 뺨이 홀쭉했다. “자다가 숨이 막혀서 눈을 떴더니 내가 물속에 잠겨 있더라고.” 장마로 동네 하수도가 넘쳐서 선배가 살던 반지하 방에 물이 찼던 거였다. 접싯물에 코 박고 죽는다더니, 당황한 선배는 20cm도 안 되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다 간신히 뭍으로 탈출, 젖은 세간살이를 포기하고 본인 몸이라도 말리고자 학교에 왔다는 사연이었다.
에어컨 나오는 도서관을 찾아 표표히 떠나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그럴 수밖에, 우리도 대부분 반지하나 옥탑방에 사는 가난한 지방 출신 유학생들이었으니까(그렇다면 그 많은 1층과 2층엔 도대체 누가 살았던 걸까, 하긴 이회창은 60년 넘게 서울 살면서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가난뱅이의 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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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 안에 본 있다, 라는 말이 딱히 낯설진 않다. 각각 첩보액션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대표하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와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이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제임스 본드가 지금도 현재형이기 때문에 그런 동시대적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최근 두 시리즈의 전반적인 액션 설계를 책임진 스턴트 코디네이터 혹은 세컨 유닛 디렉터가 바로 댄 브래들리라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두 역할을 모두 맡거나 한 가지 역할만 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액션 설계에 관한 한 그가 가장 큰 실권자라 보면 된다). 가령 마크 포스터의 <007 퀀텀 오브 솔러스>(2008)와 폴 그린그래스의 <본 얼티메이텀>(2007)을 비교하면 보다 확실해진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 초반부 이탈리아에서의 추격 신, 그러니까 카 체이스가 시작되고 스파이를 쫓아 관광객을 헤치고 옥상까지 추격이 이어지다가 건물을 오가며 마지막으로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제이슨 본과 제임스 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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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예찬이다. 한낮을 관통하며 보풀처럼 붙어온 온갖 잡념을 떨치기엔 산책만 한 게 없다. 고작 잡생각 따위를 지우겠다고 부러 돈을 들여 뭔가를 하기엔 돈도 없고 기운도 없다. 그렇다고 선뜻 누군가를 불러내 같이 뭘 하자고 하기에도 다들 하나같이 잡념 때문에 힘든데 뭘 더 보태나 싶다. 그럴 땐 그저 휘적휘적 홀로 동네 골목길로 나서는 게 제일이다. 생각을 하지 말자는 단 하나의 일념으로.
같은 거리도 밤과 낮에 따라 천양지차다. 계절에 따라 거리의 냄새도 다르다. 주인도 손님도 모두 사라진 밤의 거리를 지날 때면 대낮의 열기는 다 무엇이었나 싶어진다. 불 꺼진 상점들 너머를 들여다보는 건 생경하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잇는 통로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도 생긴다.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세계에서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포개져 또 다른 지평이 만들어질지 누가 아는가. 그 좋은 예가 <미드나잇 인 파리>(2011)의 작가 길(오언 윌슨)의 밤 산책이 아
[정지혜의 숨은그림찾기] 길을 걷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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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어두컴컴하다. 적막이 흐르는 와중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이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간략하게 설명하고는 옆사람에게 패스. 그중 딱 한 사람의 외모가 지금도 내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헤비메탈을 좋아한다고 어둠 속에서 고백했던 남자다. 이 남자를 포함한 4명이 평소에 즐겨 입는 의상을 걸치고 테스트에 참여한 상황이었다. 고해성사가 끝나고 드디어 라이트 온. 이럴 수가. 메탈 마니아라고 했던 이 남자, 끝내주는 슈트발은 기본이고, 어디에서도 꿀리지 않을 댄디함을 풀풀 풍기는 게 아닌가. 우리의 ‘선입견’에 관해 말해주는 이 재미있는 실험은 마치 기분 좋은 카운터펀치 한방을 맞은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이 밴드도 마찬가지다. 때는 2011년. 해외 언론에서 극찬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리뷰도 찾아보지 않은 채 그들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강렬한 타격감을 지닌 록 음악이 내 귓전을 때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섬세하기 그지없는 보컬과
[마감인간의 music] 이토록 기분 좋은 반전이라니 - 디스트로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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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버지와 통화를 하다 이런 말을 들었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단 한 마리만 데려오는 건 너무 힘들다. 모든 개들을 다 데려올 수 있다면 몰라도.” 전화를 끊고 이 말을 곱씹다가 조지 프라이스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는 물리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였고, 이타적인 행위 역시 이기적 유전자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에 반대했다. 생물체의 이타성을 수학적, 생물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던 그는 진화생물학에 게임 이론을 선구적으로 도입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고안한 방정식이 그림처럼 보일 뿐인 나로서는 그의 논리를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죽음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프라이스는 갑상선암에 걸려 투병하는 와중에 1967년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 후 어떤 종교적인 경험을 하고 기독교도가 된 그는 런던의 노숙자와 빈자들을 돕는 일에 나섰다. 그는 열성적으로, 어쩌면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빈자들을 도왔는데, 가진 것은 물론 집까지 노숙자들에게 내주었다. 연구소의 실험실이 그의
[한유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선택은 배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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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읽지 마십시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효신과 시은에게 학교 옥상과 교환일기가 있었다면, <비밀은 없다>의 민진(신지훈)과 미옥(김소희)에게는 아지트와 2인조 밴드가 있다. 이경미 감독과 홍주희 미술감독이 꾸민 두 소녀의 공간에는 잡동사니와 사금파리들이 모여 발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빈방을 즐겨 찍는 사진가 베르나르 포콩의 작품 같기도 하다. 이곳을 민진과 미옥의 진짜 ‘집’으로 간주한 이경미 감독은, 편집으로 잘려나갔지만 냉장고와 밥솥도 들여놓았다고 한다. “냉장고를 열면 만화책과 굽 높은 구두, 색조 화장품이 들어 있고, 밥솥 안에는 술병과 담배와 초콜릿이 있었어요.” 어른들의 서사 속에서도 아이들의 조촐한 세계를 안전히 지켜주고 싶은 작가와 감독의 의지가 공간으로 형상을 갖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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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들이 EU 탈퇴를 국민투표로 결정한 오늘, 공교롭게도 같은 나라의 여성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행복이 가득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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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구치 지로의 <아랑전>
한 젊은 사내가 60층 높이의 도쿄 선샤인 빌딩을 마주하고 서 있다. 가라테 도복을 입은 그는 짧게 자른 머리에 매서운 눈매를 하고 약간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겨루어볼 테다”라고 중얼거리고는 성큼 빌딩 앞에 바짝 다가서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기를 모아 풀스윙으로 주먹을 빌딩 벽에 날린다. 쾅!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당연히 빌딩은 꼼짝도 안 한다. 오히려 젊은 사내의 주먹이 얼마나 깨졌을지 걱정될 정도. 그러나 젊은 사내는 최소한 경보기 정도는 울릴 줄 알았다며 아쉬운 표정으로 벗어던졌던 도복 상의를 입는다.
다음 페이지. 선샤인 빌딩 59층에 있는 레스토랑의 식탁 위 샴페인 잔이 파르르 흔들린다. 하하하! <격투왕 바키>로 유명한 이타가키 게이스케가 소설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장편소설 <아랑전> (餓狼伝)을 원작으로 그린 만화 <아랑전>의 첫 장면이다. 근육을 키워 갑옷처럼 만들고 주먹을 해머보다 단단하
[오승욱의 뒷골목 만화방] 백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