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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낮에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생동감으로 들뜬, 그러나 밤이 되면 모든 곳이 정적에 파묻히는 곳. 갑자기 쇳소리 섞인 웃음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곳. ‘왠지 학교는 밤이 되면 무서워’, 당직을 돌던 선생의 말처럼 <하나코>는 학교라는 공간의 태생적 공포감을 자극한다. 귀신 하나코도 원혼이 아니라 그냥 ‘학교’에 깃든 악령이고.한국이나 일본이나 학교마다 귀신 이야기는 하나씩 있다. 20여년간 학생들 사이에 전해오던 하나코 이야기는 책으로 엮어져 베스트셀러가 됐고, 다음엔 영화로 만들어졌다. 학교 화장실에 하나코라는 귀신이 있고, 그녀를 보면 죽는다는 소문이 돌자 아이들은 공포에 떤다. 왜 하필 화장실일까? 화장실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1인의 공간이자 밀실이다. <하나코>에서는 현실과 영계의 경계선이자 통로이기도 하다. 게다가 중학생, 사춘기의 입구에 선 해맑은 소년소녀들은 작은 일에도 금세 깔깔거리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다. 그렇기에 다
하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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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쿨리지가 부인과 함께 시골 농가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암탉과 수탉이 교미하는 장면을 보던 쿨리지 부인은 남편이 들으라는 듯 “저 수탉은 하루에 몇번이나 하죠?”라고 농장주에게 물었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이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번엔 쿨리지가 물었다. “항상 똑같은 암탉은 아니겠죠?” 쿨리지 효과(Coolidge effect), 즉 심리적 피로에 의해 대상에 흥미를 잃었을 경우 성행위의 대상을 달리함으로써 새로운 성욕이 생성된다는 이 이론은 이미 사랑의 불씨가 사그라든 권태로운 부부들에게는 다소 솔깃할 이야기다. <클럽버터플라이>가 말하는 스와핑도 처음에는 이런 고민에서 시작하는 듯 보인다. 혁의 대사처럼 “간통이 범죄”인 우리나라에서 “죄도 아니고. 딱히 집어넣을 법도 없는 스와핑”을 통해 무너져가는 관계와 가정을 다시 추스르자는 것이다. 그러나 초반에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들이밀며 부부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척하던 영화는 갈수록 섹스와 스와핑, 그
클럽 버터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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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밋빛 환희로 양볼을 물들인 사내아이가 공중으로 솟구친다. 천국에라도 닿을 듯이, 두번 세번, 높게 더 높게. 하지만 황홀한 비상의 순간이 끝나면 우리는 소년의 머리 위에 드리운 지저분한 천장과 발 밑에 깔린 낡은 침대 매트리스를 본다. ‘분홍신’의 포로가 된 광산촌 소년의 동화 <빌리 엘리어트>는 그렇게, 팍팍해서 목이 메는 현실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꿈과 환상에 대해서는 침착함을 잃지 않는 의젓한 영화다.주인공의 이름이 제목인 영화가 흔히 그렇듯 <빌리 엘리어트>를 짊어지는 것은 열한살 빌리의 채 여물지 않은 어깨다. 남루한 현실과 예술의 희열을 깨지지 않게 한 바구니에 담고자 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처럼, 빌리는 뮤즈의 속삭임과 가난에 지친 가족의 요구를 화해시키려고 애쓴다. 불우한 천재 예술가의 출세기라는 별 수 없이 진부한 드라마에 대한 구원 역시 빌리의 입체적 캐릭터에서 나온다. 엄마를 잃고 무력한 아버지, 무뚝뚝한 형,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부축하며 살
빌리 엘리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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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의 리듬은 삶의 리듬을 보여주죠.” 어둠 속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주너에게 수호천사처럼 다가온 베가 번스는 그렇게 말한다. 골프채를 잡는 법(그립)에서 삶의 태도를, 골프경기에서 삶의 리듬을 볼 수 있다고. 자신과의 싸움, 승부와 반전이 뒤얽힌 스포츠가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것은 익히 들어온 비유. “골프는 경기를 할 순 있지만 이길 수는 없는 게임”이라는 <베가 번스의 전설>은, 그린에서 승부를 펼치는 골퍼의 모습에 인생사의 리듬을 겹쳐놓고자 한 낯익은 비유법의 영화다.빛바랜 흑백 신문기사 속의 주너가 색채와 함께 숨결을 얻어 살아나면서 플래시백한 이야기의 무대는 공황기의 사바나. 주너를 우상시하던 소년 하디의 후일담 내레이션으로 운을 뗀 드라마가 전모를 드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피상적인 전투 장면, 망가진 주너의 모습을 짧게 훑고 지난 뒤부터는 고지식하게 골프 영웅의 재기담을 들려준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골프채와 함께 삶의 의지를 놓아버렸던 주너
베가 번스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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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영화는 죽었는가? <신투차세대>는 아니라고 답한다. <신투첩영> <퍼플 스톰> 등 최근의 홍콩영화들은 할리우드 첩보영화에 흔히 나오는 고도의 테크놀로지에 고유의 수공업적인 액션을 섞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신투차세대>도 그런 흐름의 연장선에 서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러나, 그저 존재한다는 것과 다르다. <신투차세대>는 홍콩영화의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아직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했음을 방증한다.<신투차세대>는 단순하다. 초반부는 첨단 테크놀로지의 전시장이다.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들어가는 맥과 동료들의 테크놀로지는 <종횡사해>와 비교하면 대단한 발전이다. 모든 시청각 정보를 전달하는 반딧불 정탐갑충, 해킹으로 만들어내는 가짜 지문과 동공, 위급할 때 스케이트보드로 쓸 수 있는 배낭 등 기기묘묘한 소도구들이 연이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소도구들은 단지 소도구일 뿐,
신투차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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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여성 학습시간. 최첨단 홀로그램으로 여성의 신체 모형이 뜬다. “성감대는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구두와 향수를 칭찬하고, 얘기를 들을 때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이, 여성을 유혹하는 키포인트. 지구를 정복하려면 먼저 종족을 번식시켜야 한다고 결론지은 외계인들은 열심히 ‘지구 여자 공략법’을 배운다. 물론 실전이 이론 같지는 않다. <너 어느 별에서 왔니?>는 이렇게 외계 남자가 좌충우돌 ‘왓 위민 원트’의 허와 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린 SF코미디다.<너 어느 별에서 왔니?>는 기존 SF의 ‘폼’을 조롱하며 웃음을 자아낸다. 지구보다 1000년이나 앞선 문명을 자랑하는 행성의 지도자가 비행기 화장실로 출몰하고, 앤더슨에게 “에 나오면 곤란하다”고 이르며 보안 유지를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복제로 번식하느라 퇴화한 성기 대신 강력한 인공 성기를 장착한 앤더슨은 중요한 순간마다 ‘매미 소리’ 같은 기계음을 내는 물건 때문에 곤혹스러워한다. 재미있
너 어느 별에서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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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마의 단도가 항상 부정한 여인에게 향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체리폴스>에선 순결서약을 지키려는 10대 여학생들이 주검으로 변하니까. 영화에서 체리폴스라는 지명이 은근한 속뜻을 드러낼 때, 급기야 10대들이 벌이는 광란의 섹스파티는 목숨부지를 위한 필사의 구원식이 된다. <체리폴스>는 “살기 위해선 끝까지 처녀로 남을 것”을 신신당부하는 공포영화의 고전적인 계율들을 일단 뒤집는 설정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참신한 맛이 있다.하지만 그뿐이다. <체리폴스>의 설정은 당의정에 불과하다. 영화의 전반부는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을 철저하게 모사한다. 할리우드의 호러영화 도식들을 깔끔하게 요약정리한 <스크림>의 위력을 무시할 순 없는지라, 신선한 공포의 발원지를 개척한 것처럼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체리폴스>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살인마까지 모셔온다. 빠른 속도로 시신들이 뒹굴지만 남는 혈흔만큼 공포감이 흥
체리 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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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엔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 대신 말라빠진 개들이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저마다 두툼한 시가를 물고 다니며, 방조제에 부서지는 파도가 만들어내는 물보라가 아스라한 도시 아바나. 그곳에 더불어사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노연주자들은 언뜻 그 배경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궁핍하고 앙상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음반녹음실,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모습과 각자의 삶, 음악 경력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담아냈을 뿐인 빔 벤더스의 이 디지털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리듬에 맞춰 발목을 끄덕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벤더스 스스로 음악과 다큐멘터리가 만났다는 의미에서 ‘뮤지큐멘터리’라 부른 이 영화에서 음악은 음악가의 삶과 완전히 동일한 차원의 것이다. 어깨에 힘을 뺀 채 악기를 설렁설렁 매만지는 것 같은데도 이 ‘영감님’들의 음악에선 아직도 못다 피운 로맨스에 대한 열정, 흘러가버린 세월을 그리는 깊은 탄식, 오랜 역정을 이겨낸 환희 같은 것이 두루 섞인 진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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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의 거실에서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베티의 남편이 마약을 빼돌렸고 청부 살인자들이 그를 응징하러 찾아왔다. 이건 현실이다. 베티의 방은 사뭇 다른 분위기다. 베티는 지금, 달콤한 휴식이자 짜릿한 하이라이트인 일과를 수행중이다. 병원을 무대로 한 연속극 <사랑하는 이유>를 보는 시간. 이건 환상이다. 거실에서 남편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순간, 베티는 현실에서 빠져나와 환상세계로 발을 들여놓는다. 어이없게도 연속극이 현실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베티의 환상은 이렇게 그녀의 현실에 침투해 인생을 뒤바꿔놓는다. <너스 베티>는 백일몽을,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꿋꿋이 좇는 이들에게 바치는 힘찬 응원가 같은 영화다.<너스 베티>의 환상은 도피라기보다 자각이고 실현이다. 포복절도할 상황 속에서도 폭소를 터뜨릴 수 없고, 웃음 뒤에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 것은, 모든 일탈 행위가 결핍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베티는 즐겨보던 연속극이 진짜 현실이라고 믿게
너스 베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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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살에 만든 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가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을 때, 사람들은 스티븐 소더버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그러나 운명은 가혹했다. 소더버그는 <리틀 킹> <카프카> 등 야심작이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몰락하면서 급전직하, <조지 클루니의 표적>으로 재기하기까지 오랜 터널을 거쳐야만 했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2000년 <에린 브로코비치>와 <트래픽> 두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로 올리면서 ‘천재’라는 칭호를 회복했다. 다시 그를 천재라 부르는 이유는, 두편의 영화가 주제나 형식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영화를 서로 다른 스타일로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에린 브로코비치>가 줄리아 로버츠라는 배우를 중심에 놓은 평이하고도 아기자기한 드라마라면, <트래픽>은 소더버그의 영화적 테크닉이 모든 것을 끌어가
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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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올빼미의 성>의 결말은 얼핏 이해되질 않는다. 어느 시골농가에서 젊은 남녀가 땀흘려 일한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고, 이 한쌍의 부부는 한폭의 그림처럼 불변의 사랑을 나눌 것만 같다. 언젠가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은 인터뷰중에 “난 해피엔딩으로 마감되는 영화가 싫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인물들이 과연 행복할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 적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건대 <올빼미의 성>의 평온한 결말은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답지 않다. 1960년대 일본의 누벨바그 세대로서, 줄곧 처절한 운명론과 자기파괴의 미학을 스크린에 펼쳐보였던 노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올빼미의 성>은 시바 료타로의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를 가로지르는 정치사가 작품 배경이 되고 있다. 가족을 몰살당한 닌자는 복수를 계획하고, 통치자에게 칼날을 들이대지만 그의 목을 베지는 못한다. 그저 “복수로 세월을 보내게 해줘서 고맙다”라
올빼미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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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천국>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말레나>에서 자신이 역시 성장영화쪽에 강점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네마 천국>의 토토가 영화를 통해 세상과 사랑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것처럼 <말레나>의 레나토는 한 여인의 존재로 인해 부쩍 자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말레나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 왕성하게 피어나는 레나토의 육체와 정신에 햇빛과 물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여신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그녀의 옷을 입히고 벗기기를 반복하며 침대 스프링이 떨어져나가라 수음을 하기도 하고, 결국 부치지도 못할 연서를 수없이 쓰고 구겨가며 감성의 푸른 잎을 피우게 된다. 세상을 좀더 빨리, 넓게 볼 수 있게 하는 자전거나 성인 세계에 입장할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긴 바지처럼, 말레나는 레나토에겐 어른들의 세계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인 셈이다. 토르나토레는 <시네마 천국> 때와 마찬가지로 이같은 이야기를 질펀하고 왁자지껄한 이탈리아 시칠리아
말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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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노래한다. 프레스 기계의 시퍼런 칼날이 하얀 손목 근처를 배회할 때 쿵쾅거리는 톱니바퀴와 나사의 소음에 맞춰 춤을 추며 노래부른다. 그녀는 다시 노래한다. 공장에서 쫓겨나 빛도 희망도 볼 수 없을 때 “과거도 보았고 미래도 안답니다. 난 다 보았어요. 더이상 볼 것은 없답니다”라고 체념의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또 노래한다. 돈을 훔친 남자가 자신을 도둑으로 몰며 시커먼 절망의 절벽 아래로 밀칠 때 “바보 같은 셀마, 다 너 때문이야”라는 자책의 노래를 들려준다. <어둠 속의 댄서>는 사형대를 향해, 비극을 향해 경쾌한 탭댄스를 추며 나아가는 영화다. 오직 노래와 춤과 뮤지컬이 맘껏 숨쉴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던 눈먼 여인은 아들에게 자기 운명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녀는 장님이 되지 않을 수도, 가난하지 않을 수도, 아껴주는 남편을 얻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가련한 여인은 그 모든 걸 포기한다. 세상의 어떤
어둠 속의 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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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눈치챘겠지만, <더 댄서>는 춤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영화다. 이야기보다 춤이 강하고, 배우보다 댄서가 전면에 있다. 17살 때 뤽 베송에게 발탁돼 그가 제작하는 영화의 안무를 했던 미아 프레에게 뤽 베송은 언어장애가 있는 댄서 인디아 역을 주었다. 캐릭터에 신비를 더하는 한편으로 연기보다는 춤에 능한 그녀를 배려한 설정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미아 프레는 이 영화에서 놀라운 춤솜씨를 보이는데 대사가 없는 역을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라기보다는 아직 댄서로만 보인다. 이러한 ‘춤의 우위’는 영화 전반을 규정한다. 뇌쇄적인 미아 프레의 춤추는 모습을 담는 카메라는 뮤직비디오가 대상을 보여주는 방식을 따르며, 영화는 종종 드라마에서 뮤직비디오로 전환됐다 돌아오곤 한다.보이는 그대로 <더 댄서>의 개성은 바로 그 담백한 ‘전시’에 있다. 애초에 댄서 미아 프레의 매력에 중점을 둬 기획된 영화인 만큼 <더 댄서>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기꺼이 춤을
더 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