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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여성들만이 등장했던 조지 쿠커의 1939년작 <여인들>의 부제는 ‘남성들에 대한 모든 것’이었다. 원래 이 영화의 리메이크를 고려하기도 했었던 프랑수아 오종이 “나의 여성영화 프로젝트”로 만든 영화 의 부제를 붙인다면 그와 비슷하게 ‘한 남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성들의) 모든 것’쯤 될 것 같다.
영화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 각자에게 사위, 남편, 아버지, 오빠, 내밀한 연인, 고용인인 한 남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바로 그 남자가 성탄절 아침에 그만 칼에 찔린 채 죽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된 것이다. 이제 범인을 찾아야만 하는데 영화 속 여성들 가운데 용의자 리스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은 이야기의 가장 중심되는 경로로 보아 이를테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쥐덫>을 참조한 미스터리영화임에 분명하지만 오종의 욕심은 추리극을 만드는 데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는 뮤지컬적인 요소를 간간이 삽입하는가 하
프랑스 영화계의 디바들이 한자리에 모이다, <8명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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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의 사춘기>(국내 방영제목)는 평범한 중학생 리지 맥과이어의 일상을 그린 인기 청소년 드라마다. 늘 ‘죽은 사람들’(다른 말로는 위인이나 성현)을 인용하는 아빠와 다정한 엄마, 언제나 리지를 괴롭히려 애쓰는 남동생 맷과 함께 사는 리지 맥과이어(힐러리 더프). 이거 저거 관심도 많고, 다사다난한 소동도 많은 리지의 학교생활을 담은 <리지의 사춘기>는 리지의 속마음을 표현한 익살스러운 애니메이션과 솔직한 감성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 덕에 ‘리지 맥과이어’란 의류 브랜드도 생겼고, 힐러리 더프는 가수로도 데뷔하며 아이돌 스타가 되었다. 이후 <에이전트 코디 뱅크> 에 출연했고, 극장판 <리지 맥과이어>가 개봉 첫주에 2위를 차지하며 1700만달러를 벌어들여 10대의 아이돌로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일상에 지치면, 가끔 여행을 떠난다. TV시리즈도 그렇다. <리지 맥과이어>는 드디어 리지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떠나는 로마여행 이야기
꿈 많은 소녀의 백일몽 같은 청춘영화, <리지 맥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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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라로크성 유적에서 발굴 작업에 한창이던 일단의 젊은 고고학자들이 600년 이상 숨겨져 있던 지하유적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발견된 것은 며칠 전에 뉴멕시코로 떠난 존스턴 교수의 600년 동안 봉인되어온 친필 구조요청과 안경알이었다. 이 앞뒤가 맞지 않는 기이한 사건의 진위를 알아내기 위해 유적 발굴의 후원자였던 ITC에 연락을 취한 그들이 알아낸 것은, 사물의 전송이 가능한 양자 원격 이동 장치가 존재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1357년의 프랑스로 떠났던 존스턴 교수가 행방불명됐다는 사실이었다. 4명의 젊은이들은 이제 ‘6시간’ 안에 교수를 구출하여 현재로 돌아와야 한다.
야심으로 가득 찬 자본가가 만들어낸 상상을 초월하는 테크놀로지, 그것이 야기한 부작용을 바로잡기 위해 예측 불가능한 위험이 혼재하는 ‘테마 파크’ 속으로 뛰어드는 젊은 전문가 무리들. 이쯤 되면 여기서 <쥬라기 공원>과의 묘한 데자뷔 현상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좋은 의미에서든 그 반대의 의미에서든
텅 빈 스펙터클에서 길을 잃다,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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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g down the house. 만장을 떠들썩하게 하다. 대갈채를 받다. 영화 <브링 다운 더 하우스>의 타이틀이 갖는 사전적 의미다. 우리가 ‘지붕이 떠나가라’ 박수치는 동안 아마 그네들은 ‘집이 내려앉도록’ 하는 꼴인데 대략 이 차이가 스티브 마틴의 영화를 우리가 ‘웃기는 영화’로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다. 그러나 스티브 마틴이 정말 포복절도하게 웃기지 않는 이유는,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허전함(<신부의 아버지>)이나 대가족을 이끄는 가장의 애환(<열두명의 웬수들>)에서처럼, 그의 코미디가 실은 ‘웃지 못할 일’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 일들은 그의 영화에서 항상 떠들썩한 ‘소동극’으로 변모되어 코미디가 된다. 물론 이 좌충우돌의 여정 끝엔 늘 행복한 가족애로의 회복과 격려, 잔잔한 공감이 있다. 좀 뻔한 듯하면서도 사려 깊은 스티브 마틴표 브랜드 코미디의 변치 않는 공식이다.
<브링 다운 더 하우스>는
분노와 통쾌함이 엇갈리는 공감의 대갈채, <브링 다운 더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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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유형의 직업여성이 등장한다. 스티비 닉스의 <에지 오브 세븐틴>이 울려퍼지면 교장 로잘리 멀린스(조앤 쿠색)는 ‘두 얼굴의 여인’처럼 신체변형을 시작한다. 완고하고 단정하던 로잘리의 동그란 두눈이 좀더 커지며 두손과 입술이 어쩔 줄 모르고 움찔거리더니 스티비 닉스의 섹시한 멜로디와 리듬에 기꺼이 어울린다. 눌러둔 ‘끼’가 제대로 발동되면 자신이 직접 근엄한 훈육자로 양성시킨 교사들 앞에서 온몸에 식탁보를 휘감고 마돈나처럼 열창한다, 고 한다. 반면 철없던 시절을 접어버린 친구의 애인은 조신하기 이를 데 없는 시장의 비서다. 그녀는 너무나 도덕주의적 속물이어서 절대로 록의 세계를 이해 못한다. 그녀는 회개시킬 수 없는 훼방꾼이자 문제아다. 세 유형의 초등학생이 있다. 백인, 황색인, 흑인. 모두 부잣집 자식들이고 최고의 사립학교를 다니지만 유독 동양계와 아프리카계 아이는 열등감에 시달리거나 왕따다. 다행히도 이들은 백인 아이 못지않게 음악에 천부적 재질을 가졌다. 아직
잭 블랙의 개인기가 만발하는 유쾌한 축제, <스쿨 오브 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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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나 장르로 봐선 한 사람의 필모그래피란 게 믿기 힘든 감독들이 있다. <스플래쉬>에서 <분노의 역류> <아폴로 13>을 거쳐 <뷰티풀 마인드>로 이어진 론 하워드도 그중 하나. ‘작가’는 못 돼도 그는 분명 코미디부터 SFX스펙터클까지 어떤 과목이든 평균 이상의 성적을 거두는 ‘장인’이다. 그렇다고 일관성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그의 무난한 정공법과 보수적 가족주의는 할리우드 하면 떠오르는 전형성을 벗어난 적이 없다.
<실종>은 그의 작품 중 <파 앤드 어웨이>와 <랜섬>의 설정을 뒤섞고 변주한 듯한 영화다. 개척시대가 배경이지만 이번에 대립하는 건 소작농과 지주가 아니라 인디언과 백인이며, 유괴되는 건 재벌의 외아들이 아니라 여의사의 딸이다. 두딸과 살던 여의사, 매기(케이트 블란쳇)는 어느 날 20년 만에 아버지(토미 리 존스)의 방문을 받는다. 하지만 가족을 버리고 인디언이 돼버린 아버지는 도저히 용
로드스릴러를 표방하는 지루한 드라마,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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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들은 나뒹구는 마약 주사기를 장난감 삼아 놀고, 소년들이 공을 차는 주택가에는 마약 딜러에게 고문당하는 자의 비명이 무상하게 울려퍼진다. 좀더 자라면 이 아이들은 조직에 고용돼 마약 행상에 나설 것이다. 마약이 오염시킨 1994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빈민가 풍경 앞에서는, 분노의 감정이 마땅하다.
어떤 경우에나 싸움은, 성토나 한탄과는 다른 문제다. 상대가 “네 아들을 유괴해 성폭행한 다음, 네 년을 쏘아 죽여주지”라고 협박하는 무뢰한일 때는 더욱. 그러나 <선데이 인디펜던트>의 열혈 기자 베로니카 게린은, 기사나 쓰고 수사는 경찰에 맡기라는 현명한 충고를 묵살한 채 마약 트래픽의 진원지를 캔다. 의욕과 사명감이 마치 방탄조끼라도 되는 양 암흑가를 들쑤시는 그녀의 행보를 지켜보는 관객의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움직이는가?
조엘 슈마허 감독은 계몽적 의도가 아니라 베로니카 게린이라는 여성의 ‘캐릭터’가
굽힐 줄 모르는 어느 기자의 마약 전쟁, <베로니카 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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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 먹은 샴쌍둥이 테너 형제(이들은 ‘결합된 형제’라는 표현을 선호한다고 점잖게 밝힌 바 있다)는 마을의 명사다. 어떤 까다로운 주문이라도 3분 내에 해결하는 ‘번개 버거’의 공동 요리사이자 야구면 야구, 권투면 권투, 미식 축구면 미식 축구를 하는 족족 우승으로 이끄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게다가 형인 월트(그렉 키니어)는 직접 희곡을 쓰고 출연을 겸하는 만능 재주꾼이기도 하다. 내성적인 동생 밥(맷 데이먼)은 무대 공포증 때문에 땀을 한 바가지씩 흘리면서도 기꺼이 형을 위해 검은 옷을 뒤집어쓰고 무대에 함께 오른다. 그들이 함께라면 겁날 게 없다. 섹스문제만 해도 서로 조금씩만 양해하고 자세를 바꾸어준다면(!) 별 문제될 건 없다. 한명이 샤워할 때도 나머지 한명이 비옷만 입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 안온한 일상의 다사로운 행복이 월트의 폭탄 선언으로 산산조각나버린다.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프로 배우로 성공하고 싶다는 것! 대경실색할 노릇이지 않겠는가.
바로 그 순간,
따로 또 같이 - 가슴이 훈훈해지는 형제애, <붙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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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를 비롯한 일본 문화가 비단 할리우드만 탐내는 소재는 아니다. <사무라이>는 프랑스에서 홍콩과 일본의 스탭 및 배우를 끌어들여 제작하고 국제언어인 영어로 더빙한 영화다. 이런 다국적성 탓인지는 몰라도 <사무라이>는 정체가 없다. 결정적으로 제목이 되는 ‘사무라이’의 존재가 이 영화 속엔 없다. 뼈대있는 사무라이 가문의 후손조차 ‘철권’ 같은 비디오게임용 액션에 더 정통하다. <패트레이버> <공각기동대> <아바론>을 작업했던 가와이 겐지의 음악은 시작부터 친숙한 록 사운드와 랩 비트를 만들어 <사무라이>의 초국적성에 일익을 담당한다.
<사무라이>는 코데니라고 하는 고대 악마의 부활을 막으려는 인간들의 분투를 담은 액션스릴러다. 500년 전 후지와라 가문의 주문을 통해 부활한 이 악마는 그뒤로도 죽지 않고 처녀의 몸을 빌려 목숨을 부지해왔다. 초인간적인 존재에 툭하면 갖다붙이는 기독교적인 설정은 제쳐놓더
정체가 없는 초국적 사무라이들의 활극, <사무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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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 오브 비스트>는 <천녀유혼>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콩 감독 정소동이,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액션영웅, 스티븐 시걸과 함께 만든 할리우드 데뷔작이다. 그러나 정소동 감독은 홍콩에서도 웬만한 대표작을 내놓지 못한 지 오래이고, 늙은 영웅 역시 유일한 무기였던 몸이 예전같지 않아 고전 중이다. 결국 이 둘의 결합은 그나마 각자가 유지해온 팬들을 실망시키는 시너지 효과로 작용할 듯하다.
은퇴한 CIA 요원 제이크(스티븐 시걸)는 아내도 없이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친구들과의 타이 배낭여행 중 테러집단에 잡히자 사건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타이로 떠난다. 아버지가 구하러 와줄 것이라는 딸의 믿음은 절대로 어긋날 리 없으니 안심해도 좋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뻔한 내용을 전개시키기 위해 맨몸으로 부딪히는 액션을 펼쳐야 할 스티븐 시걸이 너무 늙어버렸다. 액션연기가 힘에 부치게 되자 손끝만으로 적을 제압하는 무술을 개발했고, 부득이하게 온몸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에
노쇠한 액션스타의 몰락, <벨리 오브 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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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투명하고 그 자체로 외설적이다. 여기 한 부부와 어린 청년 사이에 벌어지는 욕망이라는 게임의 규칙이 벌어질 것임을, <욕망>은 더도 덜도 아닌 그 게임의 흐름을 따라갈 것임을 예시한다. 로사는 남편 규민의 외도 상대가 뜻밖에도 청년 레오임을 알게 된다. 그녀는 레오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규민에게 버림받은 레오 역시 기묘한 질투심에 로사와의 격렬한 섹스에 빠져든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규민은 상류층의 우아한 권위 밑에 감춰져 있던 야비하고 차가운 본능을 드러낸다. 그는 로사와 레오 양쪽 모두를 비참하게 모욕하기 시작한다. 레오를 훔쳐보던 옆집 소녀 소연 역시 자신이 이용당했음을 깨닫고 분노한다.
1997년 데뷔작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를 통해 사적인 기억에마저 공적인 기억이 함께 뒤엉킬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 특유의 단면을 거칠게나마 투영시켰던 김응수 감독은 이제 ‘온전히’ 사적인 감정의 파고에 몸을 맡긴 두
욕망에 대한 낯설고도 차가운 시선,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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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진출하지 않는 이유가 ‘내 고향이 제일로 좋다’는 백성기(차인표)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목포는 항구다>는 목포라는 항구도시의 화사한 속살을 진득하게 보여준다. 능청스러운 전라도 사투리가 귀를 간질이고, 정겨운 목포 시가지 곳곳과 함께 대나무밭과 녹차밭 등 관광지들도 화면에 담아 보여준다. 그 풍경도 그렇고, 살가운 사람들도 그렇고, 목포의 운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목포는 항구다>가 관광홍보영화가 될 수는 없다. <목포는 항구다>는 서울 형사가 목포의 폭력조직에 잠입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경찰 혹은 조폭코미디다.
<목포는 항구다>의 주인공 이수철과 백성기는 형사답지 않은 형사, 조폭답지 않은 조폭이다. 이수철은 마약에 잔뜩 취한 현행범에게 인질로 잡혀 울먹이는 무력한 인간이고, 백성기는 <엽기적인 그녀>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주말의 명화를 보기 위해 술자리도 마다하는 성실한 인간이다.
전라도 버전의 조폭코미디, <목포는 항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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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윤리학의 과제는 모든 것을 ‘선택’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채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로 기대값을 구해 ‘죄와 벌’이라는 유구한 심연을 넘어보겠다는 근대적 일환이다. 하지만 선택을 하는 개인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미학적 기획은 개념을 구원하려는 이같은 안전망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영화라면, 고대 그리스 비극의 무대가 프레임 안으로 밀려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로제타>로 칸을 석권했던 다르덴 형제의 <아들>은 요컨대 그런 영화다.
재활교육센터에서 목공 일을 가르치는 목수 올리비에. 5년 전 아들이 살해되는 끔찍한 비극을 겪은 뒤, 아내와도 이별하고 홀로 미니멀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일상만큼이나 건조한 표정과 말들은 그가 사람들과 나누는 관계의 방식이다. 그런 그를 카메라는 시종 편집증적으로 쫓아다니는데 게다가 오직 클로즈업으로 그의 머리만을 겨냥한다. 때문에 그가 뛰기라도 하면 이리저리 솟구치며 흔들리는 불편함을 참아야 하고, 그저 평범
선택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종교적 윤리극,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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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일 감독의 <헤이세이 무책임일가: 동경디럭스>를 보면 일가족 사기단이 나온다. “속기보다는 속여라”는 가훈으로 똘똘 뭉친 이 가족은 천부적인 연기력과 비상한 잔머리, 단체라는 장점을 무기로 기발한 사기를 치고 다닌다. 그러나 이 가족의 엽기적인 사기행각이 밉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이들이 주류사회로부터 소외받은 마이너리티의 비애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식사시간, “행복은 우리 것이 아냐, 저 강 너머 사람들의 것이야”라며 쓸쓸히 젓가락질을 하던 둘째아들 미노루의 대사는 그 왁자지껄한 소동극을 소요시키는 애잔한 울림을 준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도 사기꾼 여자가 등장한다. 가녀린 몸매와 순진한 얼굴로 사람 속이기를 밥 먹듯이 하고 다니는 이 여자, 주영주(김하늘)는 “슬픈 듯 슬픔을 억제하는” 연기력을 동원해 형무소 안에서도 사기를 친다. 결국 가석방 허가를 받아낸 여자는 같은 방 죄수들을 앉혀놓고 “이 불신의 시대에 사람을 믿게
전복적 기운이 묻어나는 로맨틱코미디, <그녀를 믿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