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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TOPIA>는 클레이메이션이다. 팀원 중 한명이 시나리오를 쓰고 이를 각색회의를 통해 함께 다듬은 <GODOG>팀과 달리, <BABYTOPIA>팀은 학교 안에서 시나리오 공모를 해서 채택된 이야기를 취했다. 영상원 무대미술과에 진학한 졸업생 방주연의 작품으로, 처음 원작의 제목은 이었다고. ‘베이비토피아’라는 아기공장에서 한 부부가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아기를 고른 뒤 역시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베이비시터를 고용해 아기를 기르게 한다는 이야기로, 위트와 현실비판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GODOG>이 장편을 압축한 듯한 깊이와 서사를 보여준다면, <BABYTOPIA>는 단편애니메이션다운 단단한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다. 작업은 1년에 걸쳐, 클레이로 만든 인물상을 ‘레진’이라는 소재로 주물을 떠서 입모양 등 움직임이 있는 부분의 다양한 표현기법을 이용해 만들고, 6mm 디지털카메라로 스톱모션을 촬영해 편집하는 방식으
선화예고 애니메이션 프로젝트팀 `또기로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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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OG> 팀김원기만고 끝에 또기로딱 6번째 작업 이 탄생했다. 또기로딱 최초의 수작업 작품이고, 그만큼 모두 만고의 땀을 흘렸다. 테이블에 모여 앉아 라이트박스의 불빛을 눈깔 상하도록 꼴아보며, 은비가 가져온 컴포넌트로 같은 노래 수없이 돌려들으며, 윤진이의 애용식 새콤달콤 잘근잘근 씹어가며, 성환의 짜증개그 들어가며, 나를 1분1초라도 더 자리에 앉게 해준 요시카도 함께. 잉크 쏟아가며, 똥물() 발라대며, 작업 중 똥도 수없이 싸고, 찌뿌드드한 몸 풀어준 축구공 등등. 원화, 동화작업과 펜선 찍찍 긋던 중반작업, 왕창 폭발한 각자의 불만 속에 제각각 컴퓨터 앞으로 떨어져 각자 많은 고민, 피해망상, 방황, 우리를 성장케 했던 것들을 감당하며 포토숍으로 색입히기, 명암처리, 배경과 합성해서 컴퓨터로의 마지막 동작이 나오기까지의 후반작업. 그리고 또기로딱 사상 최악으로 일컬어지는 수정작업, 음성, 음향 녹음 등의 마무리 작업. 어쨌든 작품은 완성됐고, 이젠 다시 고교
또기로딱 아이들의 제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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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늦여름여름의 남해가 너무 싫다고 생각하며 8월을 보냈다. 전경린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고 아마도 원작의 배경이 되었을 경상남도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나는 끔찍하게 습하고 더운 날씨에게 이미 흰 기를 날리기 시작했고, 내가 근처도 가기 싫어하는 굴 양식장은 경남의 바닷가 마을 이곳저곳에 깔려 있다. 심지어 돌담 대신 굴껍질을 이용해 담을 쌓은 곳도 있다. 늦가을로 크랭크인이 잡혀 있는 게 왜 이리도 기쁜지 모르겠다. 기민이 형이 기민하게(!) 움직인 대로 남해군에서 영화에 관심을 갖는다. 명계남 선배의 도움이 컸다. 정말 발도 넓지…. 군청에서 소개해준 분과 함께 영화의 배경이 될 ‘나비마을’의 후보지를 찾아나섰다. 몇번의 헌팅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조그만 마을들이 속속 발견된다. 그리고 한 마을을 보았다.2001년 가을이근아 미술감독은 영화의 공간들과 캐릭터의 의상 컨셉에 대해 이것저것 스케치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권혁준 촬영감독과의 1차 콘티작업이 진행 중이다. 헌팅에 참여
변영주 감독의 <밀애> 제작일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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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일지 어이. 그거 쓸 시간 있으면 연출을 더 잘했어야지.”변영주 감독은 낯간지러운 짓은 좀처럼 안 한다. 아니, 못한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흔한 일 부탁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잘못했다간 욕만 드립다 얻어먹기 일쑤다. 연출의 변도 그렇다. 부탁한 지가 수개월 전. <밀애>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음알음 건넨 것인데, 개봉이 임박해서야 ‘거머리 같은 놈. 귀찮아서 해준다’는 식이다. 하긴, 밀고 당기는 데는 그가 ‘선수’ 아닌가.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시작으로 <낮은 목소리1, 2> <숨결>까지, 역사의 망령에 짓눌린 할머니들의 봉해진 입을 저절로 트이게 할 정도였으니.어쨌든 그가 이번엔 <밀애>를 내놓는다. 극영화로의 첫 진입은 변신이라기보단 연장이다. 절연이라기보다 확장이다. 그의 다큐멘터리가 여성의 몸에 각인된 역사의 폭력성에 대한 진술이었다면, <밀애>는 여성의 몸이 욕망하는
변영주 감독의 <밀애> 제작일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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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17일남해에서의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윤진씨에겐 미흔의 귀신이 붙은 것 같다. 미흔이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만성적인 두통을 느끼고 삶의 의지를 찾지 못하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 날엔 어김없이 윤진씨 자체의 몸 상태가 나빠진다. 심지어 장염까지 앓아 얼굴이 정말 아픈 상태로 보인다. 낮의 야외신에서도 우린 조명을 했는데, 때아닌 초여름 더위와 조명에 윤진씨는 거의 쓰러질 듯 보인다. 촬영을 시작한 첫날부터 난 모든 배우들을 일상에서도 극중 배역 이름으로 부른다. 어느 순간 배우와 캐릭터가 나에겐 그냥 하나로 보인다. 아픈 윤진씨는 걱정되지만 아픈 미흔은 당연한 상황이다. 그냥 쭉 촬영을 계속해나갔다.2002년 6월22일드디어 미흔과 인규가 처음 조우하는 장면.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부희집 앞 십자로는 그늘이 하나도 없다. 제작부들은 통제하랴 아이스박스에 얼음과 음료수 채워넣으랴 차가운 물수건 만들어 대랴 정신이 없다. 흡사 태양은 가만히 있다가 슛만 들어가
변영주 감독의 <밀애> 제작일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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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7월8일태풍으로 인한 휴식. 내일부턴 다시 촬영이다. 오랜만에 스탭들과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60여명이나 되는 스탭들. 다큐멘터리를 찍을 땐 함께 일하는 모든 스탭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데 여기선 불가능하다. 최대한 소통하려 애쓰지만 쉽지는 않다. 동시녹음을 하는 이영길 기사님을 제외하면 내가 나이가 제일 많다. 동년배를 찾아보니 촬영버스를 운전하는 원상씨와 프로듀서 혜은이뿐이다. 스탭들은 모니터쪽이 아니라 카메라 바로 뒤쪽에 항상 있는 내가 처음엔 좀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난 모니터를 신뢰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니터 화질도 나빠서 배우들의 연기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카메라 바로 뒤에서 배우들을 보다보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함께 호흡을 하는 느낌, 촬영을 하는 느낌이 든다.2002년 7월15일남편인 효경에게 미흔이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폭발시키는 장면을 찍는 날이다. 이곳 남해 오픈 세트장은 동물원 같다. 낮에는 수만 마리의 파리가 서식하고 밤에
변영주 감독의 <밀애> 제작일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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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82년 대만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혁명이란 이후 세계영화계의 판도를 바꿔놓은 대만 뉴웨이브영화의 출현이었다. 82년작 <광음적고사>를 필두로, 83년 <샌드위치 맨> <해탄적일천> <펑쿠이에서 온 소년> <샤오피 이야기>가 잇따라 발표됐고, 서구의 영화평론가들은 이 새로운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와 동시에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차이밍량, 리안 등의 이름은 ‘아시아의 낯선 감독’에서 ‘새로운 영화미학의 창조자’라는 수식어 뒤에 놓이게 됐다.
20년 전부터 현재까지 세계영화제와 평단에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대만 뉴웨이브영화 13편이 제7회 부산영화제를 찾는다. 특별기획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열리는 ‘대만 신전영(新電影) 탄생 20주년 특별전’이 그것. <광음적고사>와 <샌드위치 맨>을 비롯, 에드워드 양의 <청매죽마>, 리
대만 뉴웨이브 20년의 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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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982년, 에드워드 양을 비롯한 4명의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광음적고사>의 등장은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시아 한 귀퉁이의 작은 섬나라에서 만들어진 이 저예산 ‘모듬영화’가 곧 세계영화계를 흔들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만의 ‘신랑차오’(新浪潮), 즉 대만 뉴웨이브영화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평가되는 그 영화는 그렇게 조용히 꼬리치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1982년 <광음적고사>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영화라는, 실로 대만이라는 나라를 꿰어내는 것은 무망한 짓이었다. 대륙에서 권력을 잃은 장개석 장군이 49년 대만에 자신의 깃발을 꽂은 이후 대만의 영화는 체제를 홍보하거나 반공정신을 고양하는 나팔수 역할을 해왔다. 60년대 이후 대중작가인 경요(瓊瑤)의 애정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이나 홍콩 무협영화의 모사작 등 상업영화가 대거 생산돼 인기를 얻은 것은,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프로파간다영화
대만 뉴웨이브 20년의 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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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정책 또한 자국영화의 진흥과는 관계없이 변죽만 울리고 있었다. 이때 50여명의 대만 영화인들은 ‘대만 신영화 선언’을 발표했다. “우리는 영화가 의식적인 창작활동이고 예술활동이며 반성과 역사인식을 가진 민족의 문화활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선언은 정부의 영화정책, 언론의 무책임한 태도, 평론의 왜곡 등을 차례로 꼬집었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불행히도 초기 뉴웨이브 세대 중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을 제외한 대부분의 감독들은 영화시장에서 차례로 밀려나 TV와 CF, 학교 등으로 후퇴하게 됐다. 89년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가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곧 대만영화의 상황은 다시 암울해졌다.
이른바 뉴웨이브 2세대라고 불리는 젊은 감독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이때였다. 90년에는 황밍추안 감독이 중앙전영 등 기존 영화사의 힘을 빌리지 않은 채 ‘첫 순수 대만 독립영화’ <서쪽
대만 뉴웨이브 20년의 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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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성시> <희몽인생> <호남호녀>는 기억과 대만 역사에 관한 영화들이다. 나는 이들 시대를 포착하려 했는데, 그것은 당시가 대만이란 나라를 형성하는 기초가 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관해 알려고 하지 않거나 왜곡된 이해를 하고 있다. 나와 비슷한 세대의 영화 제작자들은 항상 그런 점에 상당한 책임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들 문제에 맞서는 것이 우리 세대의 임무라고 의식하고 있다."당신의 영화는 대만의 역사와 생활상을 다뤄왔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나는 대만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비로소 대만의 역사에 관해 알게 된 것은 <비정성시>를 만들 때부터였다. 당시 나는 대만의 역사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었다. 영화제작이란 역사, 사람, 인생 그 자체에 관해 알아나가는 과정이다. <희몽인생>은 내가 공부해온 과정의 성적표인 셈이다.처음 영화를 만들던 1980년대 초반부터 당신의 영
허우샤오시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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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뉴웨이브를 끈 동력은 무엇인가→ 내가 영화 만들 기회를 얻었을 무렵, 대만의 정치적 상황은 최악이었다. 1979년 카터 행정부는 중국 본토를 중국의 공식적인 정부로 인정했다. 중국은 자족과 자부심에 들떴지만, 대만은 정반대였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세대에게 하나의 정점을 의미하게 됐다. 우리는 자부할 만한 무언가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찾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던 나는 대만으로 돌아가 친구가 찍는 영화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운명적이었던 것 같다. 그때 우리 세대는 갑자기 성숙해졌다. 오래된 관습은 모두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기 때문에, 창조적인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최고의 기회였다. 대만 뉴웨이브영화는 바로 그런 자각에서부터 시작됐다.뉴웨이브의 감독들이 출발부터 어떤 유대를 갖고 있었다는 얘긴가.→ 나는 대만 뉴웨이브의 리더였다. 허우샤오시엔 같은 감독들이 모두 우리 집에 모여 이야기하고 웃고 술을 마셨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것을, 하지만 허락되지 못한
에드워드 양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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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부산영화제의 ‘대만 신전영(新電影) 탄생 20주년 특별전’에선 모두 13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대만 뉴웨이브의 도래를 알렸던 <광음적고사>(1982)를 비롯해 뉴웨이브 1기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작품인 <샌드위치 맨>(1983), <청매죽마>(1985) 등에서부터 2기 뉴웨이브 감독인 리안, 차이밍량, 린청셩 등의 영화가 포함돼 있다. 특히 대만 뉴웨이브 2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 <우리의 시대, 우리의 이야기 - 신 대만 전영 20년>은 현재 대만영화계의 시선에서 지나온 20년을 바라보는 독특한 작품이 될 것이다.편집자<광음적고사> 光陰的故事1982년 ┃ 106분 ┃ 감독 에드워드 양, 커이쳉, 타오더쳉, 장이대만 뉴웨이브의 탄생을 알린 작품. 4개의 에피소드를 엮어놓은 옴니버스영화다. 이 4개의 에피소드는 각각 초등학생, 중학생, 대학생, 젊은 부부를 주인공을 내세우며 시대 또한 60년대, 70년대, 80년대로 바뀌어 나
대만 뉴웨이브 총결산. 부산영화제 상영작 13편 미리보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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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나타 靑少年 na咤 1992년 ┃ 106분 ┃ 감독 차이밍량비가 내리는 타이베이의 밤거리, 십대 소년 아체는 공중전화 동전을 털어 오락실로 향한다. 같은 밤 무기력한 소년 강은 방에서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맨손으로 유리창을 깨뜨린다. 차이밍량의 장편데뷔작 <청소년 나타>는 우연히 거리에서 조우한 이 두 아이의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다. 둘이 처음 만난 곳은 혼잡한 횡단보도 앞. 아체는 택시기사인 강의 아버지가 잔소리하는 데 화가 나 사이드미러를 박살내고, 옆자리에 있던 강은 오토바이를 탄 아체의 돌발적인 행동을 유심히 지켜본다. 그리고 강의 은밀한 동경과 복수가 시작된다. 차이밍량은 <하류> <구멍> 등을 함께한 배우 이강생이 강처럼 재수생이었던 시절, 거리에서 만난 이강생과 이 영화를 찍었다. 그만큼 <청소년 나타>는 배우와 감독이 느끼고 체험한 그대로의 타이베이를 반영하고 있다. 부모 세대에게 속했다는 든든한 의지도 없고, 몇년 뒤를
대만 뉴웨이브 총결산. 부산영화제 상영작 13편 미리보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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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제주도 사람들의 베스트 원제주 민예총이 주관하는 영화행사였다. 일주일 동안 강의하면서 7편의 고전영화를 상영한 뒤 수강생들에게 어떤 영화가 제일 좋은가라는 설문을 돌렸다. 무협영화 같은 대중적인 장르영화도 끼어 있었지만, 최고의 영화로 꼽힌 것은 의외로 대만의 <동년왕사>였다. 전혀 영화 같지 않고, 일상을 담담히 기록한 것 같은데도 너무나 감동적이었다는 것이다. 대만영화 운운하면 골치아픈 예술영화 대접을 주로 받던 때이니만큼, 제주도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나 신선했다. 하지만 난 그들이 핵심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그 점이 대만영화의 진짜 힘이니까.난 80년대에 영화공부를 시작했고, 지금도 다행히 영화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그런 세대에 속한다. 같은 세대라도 성장과정은 조금씩 다른데, 힘든 시간 속에서도 내게 영화를 계속하도록 힘을 준 에너지원이 있다면 바로 폴란드영화와 대만영화이다. 특히 대만영화를 보기 위해 타이베이를 오간 돈을 저금했다면 지금쯤 비행기를
어느 대만영화 마니아의 대만영화 14년 편력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