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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 선인장>을 끝낸 직후 그는 봉준호, 김종훈 감독과 함께 <유령>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다. 차승재 대표가 던져준 “잠수함이 나오는 영화다. 일본이 나와야 한다”는 정도의 앙상한 ‘화두’를 놓고 각각 시나리오를 썼고, 이중 장준환의 버전이 채택됐다. 영화의 기본 설정뿐 아니라 자기파괴적인 성격의 캐릭터나 비극적인 결말부까지의 골격은 이때 만들어졌다. “시나리오 초고는 한달 만에 가뿐하게 썼다. 그런데 각색이 힘들었다. 나 혼자 괜히 무거워지면서 한국으로 미사일을 날리는 장면을 생각하고, 그러면서 혼자 감동하고….” <2001 이매진>에서 얼핏 엿보였던 장준환 특유의 비관주의가 스스로를 지배한 탓이었다. 워낙 작업이 더뎌지다보니 두달 동안 달랑 석줄만을 고친 적도 있었다.
어렵사리 <유령> 시나리오를 마친 뒤, 99년 장준환은 몇개의 다리를 건너 캐나다로부터 시나리오 작업 제의를 받는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한국인 제작자가 시나리오 손볼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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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디카프리오가 영화의 영감을 주다
2000년 어느 봄날 , 감독의 자취방
오늘도 감독은 12시쯤 눈을 떠 졸린 눈을 비비며 늦은 아침을 먹고 멍하게 누워 시체놀이를 즐기고 있다. 1년쯤 공들인 시나리오를 데뷔작으로는 너무 거대한 이야기라는 둥, 엄청난 특수효과와 CG를 소화하기 힘들다는 둥, 갖가지 핑계를 대가며 스스로 엎어버린 뒤 감독은 별반 즐거울 일이 없다. 감독은 거창한 얘기보다는 신인감독에게 맞는 적당한 규모의 이야기를 찾고 있다. ‘영화를 보면 색다른 영감이 떠오를까? 그래 오늘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은 감이 들어!’ 감독은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영화 보러 나간다. 그의 뒷모습이 경쾌하다.
몇 시간 뒤, 돌아오는 버스 안
햇살 따가운 구석자리에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감독. 별 소득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착잡한 표정의 감독은 가판대에서 산 <씨네21>을 펼친다. 이리저리 기사를 뒤적이던 감독의 눈이 한 페이지에 꽂힌다.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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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당신은 외계인을 믿으십니까?
강사장/ 지구를 처음 발견한 건 칠십오 대조 선왕님이셨어
강사장/ 선왕께서는 이 아름다운 행성을 푸른 행성이라고 불렀지.당시 푸른 행성은 멍청한 파충류들이 지배하고 있었어.(중략)실험대 위에서 아기 공룡을 해부하는 외계인들. (시나리오 중)
2000년 가을, 수서 작업실
다시 찾아온 슬럼프. 시나리오의 진도도 잘 나가지도 않고 컨디션도 좋지 않은 감독은 멍하게 누워 시체놀이를 즐기고 있다. 곧이어 굼벵이놀이로 전환, 뒹굴뒹굴 몸을 굴리던 감독의 눈에 며칠 전 길거리에서 받아서 바닥에 던져놓았던 전단 하나가 눈에 띈다. ‘외계로부터의 xx… 라엘리언 어쩌고저쩌고….’‘음… 저기에 가면 뭔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몇 시간 뒤, 종로 탑골공원 근처
전단지를 든 감독, 종로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다. 한참을 헤매다 허름한 콘크리트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감독은 얼마 전 자료조사차 마네킹 공장을 방문해 눈치없이 이것저것 물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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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에필로그
2003년 초 편집실
감독은 적이 당황하고 있다. “이 장면은 너무 어두워. 빼는 게 좋겠어.” 제작진들이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2002년 5월부터 11월까지 힘겨운 촬영을 끝낸 가뿐한 상황임에도 감독의 표정은 어두워진다. 모든 스탭과 배우가 고생했지만, 그중에서도 누구보다 힘들어했던 주연 신하균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장면을 뺀다고 생각하니 감독은 하균 앞에 면목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구? 다음을 봐라.
플래시백- 2002년 여름 강원도의 어느 국도
감독은 병구가 친구인 태식으로부터 무시당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찍고 있다. 태식이 자신의 상처를 건드려 괴로운 병구의 내면이 드러나야 하는 장면이다. 병구가 자신의 뺨을 세게 때리며 트럭을 운전한다는 설정은 이렇게 그의 아픔과 이상심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감독은 생각한다. 근데 왠지 불안하다. 병구 역의 신하균이 수동기어를 어색하게 조작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드디어 감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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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촉구! <임소요>에서 <아들>까지, 반드시 ‘극장에서’ 만나고 싶은 걸작 10편 지지선언
수입은 해놓고 개봉을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때로는 걸 만한 극장을 찾을 수 없어서, 때로는 수입사 스스로 흥행 가능성에 자신이 없어서, 때로는 심의문제가 걸려서. 영화사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이런 영화 가운데 상당수가 외국의 각종 매체에서 그해 베스트 10에 꼽힌 작품들이다.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경탄을 자아내고 열렬한 지지를 받은 영화들을 하루빨리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씨네21>의 이번 특집은 그 방법 가운데 하나로 기획된 것이다. <임소요> <큐어> <해피니스> <팜므파탈>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아들> <막달렌 시스터즈> <볼링 포 콜럼바인> <노 맨스 랜드>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1] - 임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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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어>(Cure)
내 안에 악마가 숨어 있어
나카다 히데오의 <링>과 이토 준지 원작의 공포영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도 우리는 일본 공포영화의 입구에서 서성이는 중이다. 고전인 고바야시 마사키의 <괴담>은 1964년 작품이고, 고어영화인 이케다 도시하루의 <이블 데드 트랩>은 너무 잔혹해서 수입할 수 없다면 마지못해 수긍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1997년 작 <큐어>는 왜? 이미 수입까지 된 상황에서 <큐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83년 <간다천 음란전쟁>으로 데뷔한 구로사와 기요시는 누벨바그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장르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바쳐온 감독이다. <인간합격> <카리스마>처럼 장르에서 벗어난 걸작들과 함께 <지옥의 경비원>에서 시작하여 <큐어>를 거쳐 <카이로>에 이르는 구로사와 기요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2] - 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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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니스>(Happiness)
신경쇠약직전의 미국으로 오세요
토드 솔론즈의 <해피니스>의 국내 배급사가 있다는 소식은 뜻밖이다. 한국의 영화시장에 대한 내 상상력은 이처럼 배짱이 없다. <해피니스>에는 소아성욕자인 정신분석가, 사정을 못해 안달난 열한살 먹은 남자아이, 폰섹스에 열중하는 비루한 사내가 화면을 들락거린다. 그들의 삶은 어딘가 덧나 있지만, 그걸 알 길이 없다. 고로 이 악몽 같은 영화를 사랑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를 일단 보고 난 뒤라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이 뒤숭숭한 영화를 잠시 기억에 가둬놓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기억의 휴지통에서 비워줄 ‘삭제’ 키는 어디에도 없다. 당장 내가 그렇다. 이 퍽퍽하고 짜증난 영화를 당분간 잊었다 싶은데, 이 영화는 수시로 악의적인 미소를 띠며 귀환한다.
<해피니스>가 돌아오는 기억의 궤도는 따로 있다. 그것은 외상의 흔적을 타고 흘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3] - 해피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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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파탈>(Femme Fatale)
히치콕, 누아르에 입맞추다
유럽영화에서 할리우드영화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너의 징후를 즐기라며 핏대를 세우고 의자를 옮겨다니던 슬라보예 지젝은, 여전히 현대 영화이론을 매혹시키고 있는 두 가지 소재를 선언하며 마지막 장의 첫 문단을 시작한다. ‘히치콕의 영화와 필름누아르.’ 이 둘은 한 등에 붙어 있지만, 한 몸통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히치콕은 히치콕이며, 누아르는 누아르이다. 그러므로 세상 어느 영화이론가보다도 히치콕을 잘 알고 있는 히치콕 문하생 브라이언 드 팔마가 필름누아르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히치콕적 누아르’는 그 어디에서도 손쉽게 탄생할 수 없다. 이 희박한 창조적 결합의 순간만으로도 <팜므파탈>의 존재는 희귀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묻어둔다면 언제 다시 히치콕과 누아르의 대면을 목도하게 될지는 정말 자신할 수 없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매혹적 요부, ‘팜므파탈’. 때로는 순수함으로, 때로는 요염함으로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4] - 팜므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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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赤い橋の下のぬるい水)
오늘, 그는 다시 일어선다
한숨을 돌리려 멍하니 하늘을 보다 어떤 영화가 떠올라 혼자 키득거려본 적이 있으신지? 침울하고 피곤해서 만사가 귀찮아질 때 어떤 영화에 대해 떠들다가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껴본 적 있으신지? 아마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영화가 <오스틴 파워>인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인지는 달라도. 내겐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 그렇다. 2년 전에 본, 흐릿한 기억이지만 이 영화를 생각하면 언제나 미소짓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차마 거울을 보며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혹시 음흉한 미소일까 겁이 난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지워지지 않는 잔상은 섹스를 하면서 물을 뿜어내는 신비한 여인이다. <우나기>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하겠지만, 출옥한 뒤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야쿠쇼 고지에게 따뜻한 도시락을 전해주려 다리 위에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5] -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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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슈슈의 모든 것> (リリイ·シュシュのすべて)
14살 봄, 우리들은 썩기 시작했다
“그녀가 태어난 것은 1980년 12월8일 22시50분 이 날짜는 존 레넌이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에게 살해당한 일시와 완전히 똑같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 우연의 일치는 의미가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날, 그 시각에 그녀가 태어났다는 사실뿐이다. 그녀의 이름, 릴리 슈슈….”
분노의 계절을 잊었던가. 푸른 꿈보다는 살의(殺意)가 더욱 치밀어올랐던 그 시간들을. ‘데미안’마저 부재했던 그 완벽한 고립의 시간들을. 이와이 순지의 최근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14살의 봄, 유충의 시대를 끝내고 음울한 누에고치에 갇힌 번데기의 계절로 접어든 ‘소년, 소녀들의 모든 것’이며, 의 영상적 화사함과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의 주제적 어두움을 한 작품 속에서 완벽하게 조율하게 된 감독 ‘이와의 순지의 모든 것’이다.
눈이 시린 초록빛 논 한가운데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6]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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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링 포 콜럼바인>(Bowling For Colombine)
멍청한 백인들!
<볼링 포 콜럼바인>을 뜻이 통할 만한 제목으로 옮기자면 ‘총질하는 고딩의 볼링’쯤 되지 않을까 싶다. 콜럼바인은 1999년 4월20일 에릭과 딜란이라는 이름의 미국 아이들이 교내에서 총을 마구 쏘아 12명의 학생과 교사 한명을 죽게 했던 그 고등학교 이름이다.
볼링과 총질하는 아이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까? 감독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특기 사항은 두 소년이 체육 수업으로 볼링반에 들었고 사건 당일 아침에도 볼링을 했다는 것 정도다. 그런데 볼링을 하면 폭력적이 되나? 물론 이건 마이클 무어 감독의 엉뚱한 유머감각의 소산일 뿐이다. 그가 진정으로 궁금해 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왜 그토록 많은 총을 가져야 할 만큼 두려움에 휩싸여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총질을 하고 급기야 어린아이들까지 학살의 주범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건 나도 궁금하다. 총기 소유에 관한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7] - 볼링 포 콜럼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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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렌 시스터즈>(The Magdalene Sisters)
주여,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사람들은 괴담을 하나쯤 간직하고 있다. 제도화된 사디즘의 포로가 되어 고생한 기억이 있다. 그것은 많은 경우 학교나 군대와 관계되고, 더러는 가족과 관련되기도 한다. 선택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이 피학의 경험들은 각별히 끔찍하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마녀집이 있는 숲을 되돌아보는 듯한 말투로 진저리치게 만든다.
피터 멀랜 감독의 <막달렌 시스터즈>는 그처럼 널리 퍼져 있는 악몽의 선정적인 원형을 관객의 면전에 똑바로 내던진다. <막달렌 시스터즈>가 고발하는 ‘감옥’은 가톨릭 교회다. 그래서 지난해 가톨릭 국가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화제와 후유증을 낳았다. 1960년대 아일랜드에는 ‘막달렌 세탁소’라고 불리는, 교회가 후원하는 수용시설이 있었다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8] - 막달렌 시스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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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Le Fils)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소년이 묻는다. “올리비에라고 불러도 돼요?” 흠칫 놀란 남자가 되받아친다. “왜지?” “다른 애들도 모두 그렇게 부르니까요.” 이 아이 프랜시스, 재목 하나 가뿐히 들지 못하는 이 왜소한 열여섯 소년은 아직 모른다. 그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프랜시스는 5년 전 올리비에의 다섯살 난 아들을 살해했다. 사람을 잊는 일은 사람을 기억하는 일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어서, 아내마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올리비에는 아직도 단 한번 웃지를 못한다. 그런 올리비에에게, 아들의 살인자는 이름을 불러도 괜찮은지, 보호자가 돼줄 수 있는지, 천진하게 부탁한다. 얼마나 참혹한 심정일까. 그러나 올리비에는 무심히 대답한다. “네가 원한다면….” 하얀 빛으로 가득 찬 두꺼운 안경 렌즈에 가려, 올리비에의 눈동자는 어떤 표정을 띠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 <아들>은 실화를 단서 삼아 시작됐다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9] -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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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맨스 랜드> (No Man’s Land)
누구나 본성의 포로라네
“쯔즛, 르완다는 정말 끔찍한 난장판이군.” <노 맨스 랜드>에서 신문을 보던 한 보스니아 군인이 이렇게 말한다. 세르비아와 전쟁 중인 그가 아프리카 르완다의 내전을 개탄하는 이 장면은 보는 이의 혀를 차게 만든다. 외부의 시각으로 보면 르완다나 보스니아나 오십배 백보일 텐데 전쟁에 참가하는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용기를 주는 것은 자신이 참가한 전쟁이 성전이요 정당방위라는 믿음이다. 지금 부시가 획책하는 전쟁에서도 다르지 않다.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을 동일한 악마로 규정하는 이 선동은 제3자의 눈에 너무 뻔한 거짓말인데 미국인의 전쟁지지율은 반전의 목소리보다 높다. 이성을 믿는 근대의 정신도 이런 사태 앞에 속수무책이다. 전쟁과 홀로코스트의 역사에서 인류는 이성적으로는 화해와 평화의 교훈을 배웠지만 감정적으로는 반목과 적대감만을 키웠는지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10] - 노 맨스 랜드